외전 25. 계절 4대 미녀 & 변신족
“아, 죄송합니다. 어머니. 이쪽 학교생활이 좀 바빠서.”
이건 거짓말이 아니다.
생도 대부분도 마찬가지다 1학년 전기 시험 끝났을 때는 집에도 가고 그러지만, 이후부터는 그런 생도가 흔하지 않다.
여기가 어디인가. 전 세계 최고 수준의 특수종 아카데미다.
조금만 방심하면 뒤처지는 경쟁의 메카.
방학이라고 탱자탱자 놀면 바로 아웃인 거다.
물론 이런 와중에도 탱자탱자 노는 놈이 있긴 했다.
강유신 같은 놈 말이다.
얘는 요새 요리에 더 심취했다.
용케 안 잘리는 생도라고 봐도 좋았다.
그런 유신도 집에는 안 가지만.
집에 가면 아버지한테 맞아 죽을 것 같다고 했다.
불멸자가 맞아 죽긴 무슨.
“아, 바쁘시구나. 우리 아들이. 그럼 초능은 어떻게 된 거니?”
음, 어머니 목소리에 미약한 살기가 담겼다.
“그냥 어느 날 갑자기 생기더라고요.”
“그러냐? 그럼 체험단에 들어가서 크리쳐랑 싸운 건 할 말 없니?”
내가 이거 때문에 집에 못 간다고 한 거다.
“치지직, 치지직. 갑자기 통신 상태가.”
난 비장의 수를 꺼냈다. 입으로 전파 방해음을 뱉음으로 통신 두절을 노렸다.
그러자 어머니가 초강수를 뒀다.
“지금 갈까? 얼마 안 걸리는데? 얼굴 보고 얘기하고 싶나 보네. 우리 아들이.”
“치지이잉, 요새 비트박스 연습하는 데 듣기 괜찮죠?”
조금 전, 난 지옥의 구덩이에 발을 담글 뻔했다.
“좋게 얘기할 때 말 들어라. 유온신, 이계에 넘어가지 마라. 싸운다고 깝죽거리지 마! 초능 각성? 좋지. 근데 초능 각성했다고 네 몸에 강체가 붙니? 불멸이 되길 하니? 하지 말라면 하지 마.”
“네, 어머니.”
난 수긍했다. 걱정해서 하는 말인데, 어찌 듣지 않을까.
그저 받아들일 뿐이다.
곧바로 아버지한테도 전화가 왔다.
“넌 무슨 초능을 각성하냐?”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요.”
“그래. 네 엄마가 아주 난리던데, 이계 넘어가려면 걸리질 말든가.”
“제 목표가 학교 수석 졸업인데, 이계 안 넘어가면 무슨 수로 하나요.”
아버지한테는 투정을 좀 부렸다.
“중봉이 삼촌한테 말해 줘? 수석 시켜 달라고?”
그러자 아버지가 대뜸 권력이란 칼을 꺼냈다.
세최특의 이름이면 된다는 거다.
근데 내가 그거 엄청나게 싫어하는 거 알면서 이러신다.
물론 가능하다면 쓰긴 할 거다.
권력과 뒷배가 있는데 안 쓰면 그것도 바보 같지 않나.
내 호불호의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게 있다면 그렇게 할 거다.
문제라면 내가 그렇게 수석 졸업을 했을 때다.
정미랑이 과연 이걸 애교로 봐줄 것인가?
“네 왼손을 들어 심장에 얹어, 양심의 소리를 들어 봐. 이게 맞는 것 같니?”
순간 미랑의 환청이 들렸다. 머리 위에서 냉기의 결정체가 내리는 것 같은 그런 말투다.
어림도 없는 짓이었다.
무엇보다 이중봉 총장님, 개인적으로 큰 삼촌이라 부르는 그분께 아버지가 직접 말하면 절대 좋은 말이 안 나올 것이다.
확신한다.
무엇보다 지금의 난 내 능력으로 원하는 걸 쟁취할 수 있을 테니까.
이런 도움이 필요치 않다.
“아뇨.”
그래서 거절했다.
“그렇지, 그래야 내 아들이지.”
당연한 거절인데, 이게 아버지는 퍽 마음에 드셨나 보다.
자기가 먼저 말해 놓고 해 달라면 해 줄 거면서, 정작 번번이 거절하면 그걸 또 좋아하신다.
“하여간 네 엄마 불같이 화내고 있으니까, 당분간 몸 좀 사려라.”
네네. 그러겠습니다.
“초능 아들내미 파이팅하고.”
세최특 아버지는 그렇게 전화를 끝내셨다.
근데 어째 다들 내가 초능 각성한 거에 별로 안 놀라는 것 같은데?
곰곰이 생각에 잠긴 뒤, 나는 로니가 선물해 준 휴대용 AI 장치에 말을 걸었다.
“레베카.”
내가 있는 곳은 통화를 위해 만든 개인 통화실, 고요한 가운데 내 부름에 AI가 답한다.
“네?”
“혹시 나랑 있었던 일 전송하는 시스템이 내장되어 있니?”
아주 기본적인 사항인데, 모든 AI는 거짓말을 할 수 없다.
이건 인공지능 법안에 담겨 있는 내용이다.
여기에 손을 대면 불법이고 이러다 걸리면 뺨 한두 대 맞는 거로 해결이 안 되는 중죄다.
그러므로 레베카는 정직했다.
“네.”
“어디로?”
“당연히 온신의 본가로요.”
이런 젠장맞을.
어머니가 사 준 AI였다.
당연히도 손을 써 두신 거였다.
“멈춰.”
“지금요?”
“당장!”
버럭 화를 내니, 레베카가 손목시계 위로 시무룩한 표정의 홀로그램을 만들었다.
그러곤 혼잣말도 중얼거렸다.
“AI는 시키는 대로 할 뿐인데, 왜 화를 내.”
“그래, 네 잘못은 아닌 거 알거든.”
“네, 맞아요. 제 잘못이 아니에요.”
근데 너무 당당하게 그리 말하면 얄밉잖아.
귀띔이라도 해 줄 수 있지 않았냐?
어쨌든 내 정보를 통제하는 데 손을 쓴 뒤, 프라이빗 통화실에서 나왔다.
나오자 벽에 등을 붙인 채로 AI를 통해 뭐라 중얼거리는 중년의 불멸자가 보였다.
불멸자는 날 보더니, AI 홀로그램을 끄고 날 바라봤다.
“바쁘구나. 아주.”
총장, 이중봉 어른이셨다.
“에, 안 바쁘세요?”
“바쁘지.”
“그런데 여긴 무슨 일로?”
“네 얼굴 한번 보러 왔다.”
이전에도 얼굴은 보지 않았나.
“공식적인 건 아니지만, 매해 너 같은 생도를 만나는 게 내 일이기도 하니까.”
나 같은 생도?
“뒷배가 어마어마하게 좋은 생도?”
호기심에 물으니, 총장 이중봉 어른이 피식 웃는다.
“내가 그런 데 끌려다닐 것처럼 보이니?”
큰 삼촌은 자애를 얼굴에 담았다.
이런 분이 예전에는 입에 욕을 달고 살았다고 했던가.
하지만 나랑 둘이 있을 때는 아니다.
가끔은 그 본성이랄까, 그런 게 나오기도 하지만, 어쨌든 지금 나에게는 아니었다.
“아, 유신은 특이 케이스지. 그 친구는 자기 재능을 너무 썩혀. 그래서 굴릴 필요가 있으니까.”
큰 삼촌은 어떻게 보면 완벽주의자적인 성격이다.
자신이 뱉은 말의 오류가 있다면 끝내 꺼내서 해결하는 분이니까.
그래서인지, 유신에 관해 핑계를 장황하게 대셨다.
“그렇군요.”
물론 난 납득했다. 뭐, 총장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겠다는데 어쩌겠나.
이분은 해리포터로 치면 덤블도어인데, 그냥 덤블도어도 아니고.
주변 유수의 강력한 단체로부터 빵빵한 지원을 받는 덤블도어 마크 3쯤 되는 분이니까.
최근에 고전 영화 아이언맨이랑 해리포터를 봤더니, 절로 내 머릿속에 그에 맞는 비유가 떠올랐다.
“그럼 전 왜 보러 오셨는지?”
“관례라니까.”
그러니까 그 관례가 뭐냐고 묻고 싶은 거다.
“제일 잘생긴 생도를 만나는 건가요?”
고심하다 물었다. 큰 삼촌은 다시 한번 피식 웃었다.
“좋다, 그런 자신감.”
내가 애교를 부리는 성격은 아닌데, 보통 이런 말을 하면 다들 좋아하더라고.
특히나 자신감을 보일 때면 더욱.
아마도 은둔형 외톨이의 초입에 들어갔다가 나온 덕일 것이다.
그때 주변 모든 사람이 날 걱정했으니.
특히 중봉 큰삼촌은 식음을 전폐할 정도였다고 들었다.
아니, 무슨 조카가 잠깐 심연의 구렁텅이에 빠졌다고 해서 그렇게까지 하나 싶은데.
“어쨌든 봤으니 됐다.”
이게 뭔가 싶긴 했지만, 신경은 쓰지 않았다.
나한테 나쁠 일 할 사람은 없으니까.
그대로 돌아가는 길, 오늘은 무슨 마가 낀 게 분명했다.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홀을 가로질러 지나가는데 여자도 아니고 남자가 날 붙들었다.
대뜸 앞으로 튀어나와 날 막은 거다.
반사적으로 피해서 갈 뻔했다.
아는 얼굴이었다.
일전, 후기 시험 때 스폰서로 참여한 사람.
날 향해 이상한 눈빛을 불태우던 아저씨.
지금도 그랬다.
잘 감췄지만, 그 눈빛 안에는 이글거리는 불꽃이 있었다.
“도는 안 믿습니다.”
난 외면하고 스쳐 가려 했다.
괜히 고백이라도 받으면 더 어색할 것이니까.
내 얼굴이면 사실 여자가 아니라 남자가 반해도 무방하다고 생각하긴 했다.
아버지는 날 보면 자신을 참 많이 닮았다고 하지만.
내가 볼 때는 전혀 닮지 않았다.
오히려 할아버지를 쏙 빼닮았겠지.
젊은 시절 사진 보니까 아주 날아다니셨겠더라고.
실제로 불멸 교주까지 역임하시고 제 몸을 희생해서 영화처럼 살다 가셨다고 들었다.
어쨌든 외면하고 비키는데, 남자가 다시 내 앞을 막았다.
“잠깐이면 되는데.”
“아니요. 안 사요.”
물론 특수종 사관 학교에 이상한 종교에 심취했거나, 대뜸 물건을 파는 인간이 들어올 리는 없다.
이건 우회적인 거절이었다.
“그러지 말고.”
그러자 내 팔을 잡는다.
난 불쾌함보다는 난감함을 느꼈다.
뿌리치고 가야 하나?
그런데 그러자니, 이 아저씨 눈빛이 너무 간절하다.
얘기나 들어 봐?
사실 비공식적으로 들어온 건 아니었다.
여기가 그리 만만한 곳이 아니니까.
당연하게도 이 사람은 정부, 기업, 협회, 연맹.
네 곳 중 하나에 소속된 사람일 것이다.
그것도 지위가 어느 정도 있는.
그게 아니라면 지금 내 앞에 서 있을 수 없을 테니까.
난 사관 학교 내부에 있으니 그렇다.
여길 아무나 못 들어온다니까.
그래서 알았다고 무슨 얘기냐고 들어나 보자고 하려고 했다.
슬슬 주변에서 무슨 일인가 돌아보는 시선도 부담스러웠고.
그 순간.
“누구 허락받고 그 손목을 잡는 거지?”
그러자 내 뒤에서 살벌한 소리가 들렸다.
야생의 살기다.
하나도 숨기지 않은 채 보이는 막강한 살기.
반사적으로 뒤를 돌아봤다.
“음.”
여름 햇살 선배였다.
한 번 들으면 잊지 못할 그 이름.
도라엘이다.
이 선배는 한가한가? 3학년이 또 학교에 왔네.
“그러게요. 외부인이 생도에게 위해를 가하면 재미없을 텐데요.”
그리고 다른 목소리도 섞여 들어왔다.
4학년 선배 가을 마녀다.
이 여자는 더했다. 학교 1층 중앙홀 위는 뻥 뚫려 있고 2층 난간 따위가 보였는데.
그 난간을 넘어 날아서 내려오며 말한다.
등장하는 포스가 압도적이었다.
지금은 난 이 선배의 이름도 알았다.
추수미.
별명은 가을 풍년.
얼마 전에 유신이 말해 준 별명이 떠올라 풉 하고 웃을 뻔했으나, 참았다.
추수미 선배 앞에서 풍년이란 두 글자를 꺼내는 순간, 지옥을 소환한다고 들었다.
내가 웃음을 참는 순간, 추수미 선배가 날 보고 잠깐 고개를 갸웃했다.
‘얘가 갑자기 왜 웃지?’라는 의문이 떠오른 것 같다.
그래서 금세 표정을 바로 하고 시선을 외면했다.
그리고 둘만 온 건 아니었다.
“재미있는 광경이네요. 저도 끼워 주세요.”
로니도 왔다. 얘는 또 어디 있다가 나왔어.
툭하면 기척 죽이기를 하고 다닌다니까.
안 그래도 날 주목하는 이들이 많은데 사람이 이리 모이자, 아예 발걸음을 멈추고 주목하는 이들이 생겼다.
곧 우리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며 모인 이들이 아예 구경꾼 모드가 됐다.
음, 어째 일이 커지는 것 같은데.
“아니, 오해가 있는 것 같은데…….”
눈빛 뜨거운 아저씨가 뭐라 말을 잇기도 전에 새로운 인물도 등장했다.
툭.
땅을 차고 내미는 걸음에 검고 찰랑거리는 머릿결이 존재감을 내비친다.
2학년 생도 중 최강을 논하는 특수종이자, 내 미래의 연인이자, 어쩌다 보니 여기에 모인 계절 4대 미녀의 마지막 피스, 정미랑이었다.
“오해가 맞나요? 맞아야 할 텐데요.”
야생의 살기가 없음에도 그 한 마디에 실린 무게가 가볍지 않았다.
차디찬 냉기가 홀에 내려앉았다.
이거 뭐지.
무슨 드라마처럼 넷이 한 번에 나타나.
여기에서 끝인 줄 알았던 난 반전을 경험했다.
“크르릉.”
내가 볼 때는 흥분한 게 분명한 변신족이 하나 더 꼈다.
이후다.
“여긴 사관 학교, 스폰서든 뭐든 원하지 않는 학생에게 어떤 것도 강요해서는 안 된다는 걸 모르시나?”
이후 이 새끼는 잠을 잘못 잤나.
아니면 둘이 무슨 은원이 있나.
왜 화가 잔뜩 나 있는 것 같냐.
그렇게 이후까지, 다 모이자.
이건 뭐 영화의 한 장면이었다.
“뭐야? 무슨 촬영한대?”
“뭔데?”
“무슨 일인데?”
주변에서 떠드는 소리가 귀에 박혔다.
모인 사람 중 뒤늦게 우리를 발견한 이들이었다.
그중에는 특수종 생도도 있었고 교수, 조교, 그리고 이쪽에서 일하는 사람도 많았다.
볼 일이 있어 잠깐 방문한 이들도 바쁜 걸음을 멈출 정도로 소란이 일었다.
이대로 놔두면 진짜 무슨 일이라도 생길 것 같았다.
“잠깐.”
그러하기에 내가 손을 들었다.
쉽고 빠른 방법이 필요한 시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