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2. 십팔 등
어깨를 당기는 힘에 맞춰 염동력을 발동한다.
무형의 덩어리를 만들어 여름 햇살 선배의 복부를 묵직하게 밀어내며 내 몸은 뒤로 잡아끈다.
보통 염동력자라면 흔히 할 수 없는 양방향 염동력 발동이다.
그동안의 훈련이 헛되진 않았다.
아, 이걸 이렇게 부드럽게 쓰리라는 건 예상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그것도 스킨십을 거절하기 위해서도 이리 능력을 쓸 줄은 몰랐다.
그래도 유효하긴 했다.
덜컥하고 내 몸이 멈췄으니까.
날 끌어당기던 힘이 저항을 느끼고 힘을 뺀다. 그러더니 곧 내 눈앞에 변신족 선배의 얼굴이 확 다가왔다.
“너 뭐야?”
선배가 묻기에 후배 된 도리로 답했다.
“유온신이요. 양아치란 별명으로 유명하죠.”
선배의 큰 눈이 날 주시했다.
그녀는 표정 변화 없이 그리 한 몇 초간 바라보다가 고개를 뒤로 젖히고 깔깔 웃었다.
“역시!”
뭐가 역시일까나.
그리 웃은 선배가 내 어깨를 붙들고 있던 손을 놨다.
“내 눈은 안 틀린다니까.”
“뭐가 안 틀린 겁니까?”
“남자 보는 눈이 완벽하거든, 내가.”
선배가 오해의 소지가 다분한 말을 서슴없이 꺼냈다.
그것도 그리 우렁찬 목소리로 기말고사로 예민한 생도 사이에서 하면 어쩌라는 건가.
다들 듣고 힐끔거리기 바쁘다.
“씨발 새끼.”
그중 일부는 날 향해 서슴없이 욕을 뱉었다.
힐끗 보니 눈에 원망이 가득했다.
눈빛을 보니 1등급 저주술사가 될 자질이 보이는 친구였다.
원망 어린 눈빛이란 바로 저런 거니까.
생긴 게 애매한 걸 보니 초능이 변신, 또는 마법사 계열인 것 같고.
음, 근데 넌 왜 그렇게까지 눈을 흘기고 그러냐?
“왜 저딴 새끼한테.”
뒤에 이어진 말은 입 모양만 보고 알아챘다.
그래, 질투구나.
딱 보니까 여름 햇살 선배 아니면 봄의 꽃이라는 로니를 마음에 품었던 듯싶다.
아서라. 네가 넘볼 레벨이 아니다.
나야, 별 볼 일 없다고 해도 아버지가 있으니까 좀 다른 얘기지 않겠냐?
응? 내 아버지가 바로 그 세최특이라니까?
뭐, 날 싫어하는 것도 같은 이유겠지만.
로니고 선배고 간에, 나한테 다가오는 여자는 전부 내 배경 때문이라고 생각할 테니까.
그리 잠깐 한눈판 사이, 다시금 여름 햇살 선배가 얼굴이 훅 다가왔다.
허리를 굽히며 얼굴을 갖다 댄다.
또 염동력을 발동해야 하나 싶었는데, 내가 반응하기도 전에 선배의 얼굴이 멈췄다.
내 어깨 위, 왼쪽 귀 옆이다.
“초능이었지?”
으으. 소름 돋았다. 귀에 바람이 들어갔다. 순간 짜릿함에 몸이 흔들렸다.
이 선배, 변신족이라며 눈치 하나는 귀신이네.
정면으로 염력에 당해 놓고 그것도 이상하긴 하지만 말이다.
“네.”
답하자, 선배가 생긋 웃는다.
“내 이름 도라엘이다.”
“독특한 이름이네요.”
“응. 도라이라고 놀리지 말고 이제까지 날 놀린 애들은 다 피떡으로 만들어 줬거든. 너도 놀릴 거니?”
세상에 피떡이 되고 싶은 사람은 없다.
주먹을 흔들며 말하는 선배를 바라보며 난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래, 매너도 좋고 흠흠, 좋아, 좋아.”
뭐가 그렇게 좋은 건지 모르겠다.
이국적인 이름이지만, 실제로는 한글 이름이라고 선배가 말하며 걸었다.
나도 당장 시험에 들어가야 할 시간이었다.
그리 복도를 걸으니, 주변에 있는 이들이 알아서 비켰다.
나 같아도 비키겠다.
도라엘 선배의 어깨와 주먹을 보면 절로 길을 비켜 주고 싶은 욕구가 솟구칠 테니까.
“능력 용케 숨겼네?”
선배가 한 번씩 툭툭 던지는 말이 생각보다 날카로웠다.
“숨긴 건 아니고요.”
“흐응, 그래?”
그래 놓고 또 자세히는 물어보지 않는다.
흑발을 휘날리는 거구의 여자와 걷고 있자니, 안 그래도 시선을 끌어모으는 난데, 더 주목을 받는 중이었다.
그렇다고 신경 쓰이는 건 아니었다.
그저 날 향한 원망이 늘어날 뿐이지.
“3학년이면 바쁘지 않습니까?”
“바쁘지.”
그런데 여기서 한가하게 뭐 하는 건가.
“야, 도라엘!”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신경질이 잔뜩 난 남자의 외침이 들렸다.
복도 끝이었다.
콧김을 뿜어내는 변신족 남자가 보였다.
“너, 이 새끼, 오늘 바쁘다고 했냐, 안 했냐?”
가슴팍에 달랑거리는 출입증이 있는 걸 보니, 학생은 아니었다.
아마도 프로, 프론티어 미션을 행하는 팀의 일원이겠지.
3학년이라면 본격적으로 팀 임무 수행에 나서니까.
“아, 지금 가요. 무슨 연애도 못 하게 방해하고 그래, 나한테 관심 있어요?”
“저, 미친.”
프로씬에서 뛰는 변신족 남자는 진심으로 화가 나 보였다.
그 한마디에 이성을 잃은 것만 같았으니까.
그래도 그는 끝내 자신을 다잡았다.
그저 콧김을 훅훅 뿜어 댈 뿐이었으니까.
도라엘은 내 머리를 쓰다듬으며 작별 인사를 건넸다.
“오늘은 여기까지.”
뭐가 여기까지냐.
그리고 성큼성큼 걷더니, 화가 잔뜩 난 프로 변신족 남자와 밖으로 향했다.
아무래도 다음에는 확실히 거절해 줘야 할 것 같은데, 만날 때마다 오해가 깊어지는 것 같다.
시험장에 들어서자, 자리에 앉은 이들이 전부 날 돌아봤다.
그중에는 반쯤 썩은 동태눈이 된 유신도 보였고.
“걷는 걸음마다 소란스러운 생도로군.”
감독관으로 자리한 조교가 말했다.
그 말투에 묘하게 비난이 섞여 있었다.
뭐, 내가 원해서 그렇게 된 건 아닌데 말이야.
“앉아.”
유신이 손을 휘저으며 속삭였고 난 자리를 차지해 앉았다.
필기시험 날이다.
그동안 공부를 열심히 했으니, 이번에도 수석이려나?
조교가 날 쏘아보고 주변 생도의 기운도 그리 좋진 않았지만.
그중에는 나한테 호감을 표하는 이들도 있었다.
대부분 여자이긴 했다. 남자는 드문 편이었다. 자주 있는 일이기에 이 또한 익숙했다.
시험을 끝내고 돌아가서 다시 훈련.
그리고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된 건지는 모르겠는데.
로니와 구스타프, 나와 유신은 일주일에 하루나 이틀 모여서 같이 밥을 먹게 됐다.
“공주라고 해서 전부 같은 대우를 받는 건 아니야. 나 같은 경우에는 정실의 자식이 아니어서 내 살길을 찾아야 하는 타입이었지. 초능국은 은근히 초능 특수종을 우대하거든.”
어느새 로니는 자기 얘기를 떠들게 됐다.
그걸 들으며 우리는 공주도 애환이 있다는 걸 알게 됐다.
“우리 집에서 특수종은 나뿐이었어. 그래서 처음 능력을 깨달았을 때는 좀 난감했지.”
하지만 나라에서 받쳐 주고 밀어줬다고 한다.
구스타프도 자기 이야기를 곧잘 했다.
“식당, 체인점, 요리 기업, 요리 국가!”
유신은 제 꿈을 신나게 떠들었다.
어쩌다가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는데.우리 넷은 퍽 잘 어울려 놀았다.
로니는 생각보다 털털했고.
구스타프는 겉보기보다 성격이 좋았으며.
유신은 내가 함께하지 않은 시간 동안, 그러니까 고등학교 때 살이 한 번 쪘었다고 했다.
“그때 아버지가 얼마나 기겁하던지, 아니 무슨 벌레 보듯 봤다니까? 무슨 불멸자가 제 몸 하나 간수 못 하느냐고.”
어, 음, 푸름이 삼촌이?
그러시면 안 될 텐데?
우리 집에 있는 홀로그램 사진첩에 삼촌의 옛날 사진이 있다.
아버지가 웃으며 그때 그 시절을 얘기해 줬었다.
한때 푸름 삼촌은 비만 그 자체였다고.
특히 불멸특수대 화림 오티에서 만나서 찍은 사진이 가관이었다.
“자, 하여간 오늘은 푸딩을 만들어 봤습니다. 마드모아젤.”
유신의 농담을 시작으로 디저트를 먹고.
어떨 때는 웃으며 농담으로 하루를 보내고.
또 어떨 때는 고민거리를 꺼내기도 하는 나날이었다.
그렇게 친해져 어울리다 보니, 우리는 필기시험 결과도 같이 확인하게 됐다.
마침 모여서 밥 먹는 날, 시험 결과 발표가 있었으니까.
“수석에서 한 걸음 멀어졌네?”
로니가 진지하게 말했다.
놀리는 의도는 아니었다. 걱정이 깃든 말투였다.
이전 시험에서는 당당히 일등이었는데.
이 미친 특수종 새끼들 공부를 얼마나 한 거야?
나 시험 엄청나게 잘 봤다고 생각했단 말이다.
“허.”
2등이나 3등이었으면 말이라도 안 할 텐데.
이건 뭔가, 내 순위가 10위 밖으로 밀려났다.
정확히는 18위.
“내가 십팔, 위라니.”
“끊어서 발음하는 거로 네 기분을 명확히 표현하는구나. 괜찮네.”
구스타프는 눈치 없이 농담을 건넸다.
“황당하네.”
더 웃긴 얘기는 구스타프가 17위라는 거다.
이 새끼가 나보다 한 단계 높아?
유신이야 당연히 심해였고.
로니는 4등이다.
“다들 무슨 짓을 한 거야?”
나 이번에 꽤 열심히 했는데 말이다.
“나 머리 좋아.”
로니가 답한다.
이미 나온 결과를 번복할 순 없는 거였다.
어쩌겠나.
담담히 받아들여야지.
다만, 이 일로 변한 게 있었다.
주변 애들이 날 좀 만만히 보기 시작했다는 것.
중간고사가 요행으로 그리됐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어차피 반짝 스타였지.”
“이제 돌아갈 때 아닌가?”
“집에 가서 아버지한테 이르지 그러냐?”
“실기 시험이 기대되네, 재밌겠다, 그치?”
서슴없이 시비를 걸어오는 애들도 늘었다.
전기 시험에서 내가 보인 수준은 이제 다 넘어섰다 이거다.
후기 실기 시험 때 날 노린다는 놈들도 꽤 늘었다.
“백만 믿고 설치는 새끼.”
그러다 넷이 모인 자리에서 이렇게 시비를 거는 놈이 있었다.
이름도 모르고 생긴 것도 낯선 놈이었는데.
그 한마디를 끝으로 놈은 뒈질 뻔했다.
꾸득.
시작은 구스타프였다.
염동을 발동하더니, 그대로 말한 놈의 목을 틀어쥐었다.
“너, 입조심 해야겠다. 던질 뻔했네.”
그리고 로니는 언제 꺼냈는지, 왼손에 나이프를 들고 팽그르르 돌렸다.
끝이 두 갈래로 갈라져 휘어진 상처를 헤집는 용도의 나이프로 보였다.
여기에 찔리면 불멸자라도 곱게는 못 뽑겠는데?
무엇보다 그 눈에 어린 살기가 가히 변신족의 그것과 비교할 법했다.
그걸 마주한 놈의 동공이 파르르 떨렸다.
저거 겁먹었네.
“놔둬.”
난 둘을 말렸다.
여기서 더 나가면 큰일이다.
안 그래도 구스타프가 능력을 발동한 것 때문에 곧바로 벌점을 먹을 판이었다.
“인마, 왜 그렇게까지 하냐?”
난 오히려 구스타프를 나무랐는데, 구스타프는 제 파란 눈을 깜빡이며 성을 내며 답했다.
“네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아니까. 그리고 난 친구가 욕먹는 걸 보며 넘어갈 정도로 호인이 아니야!”
“그건 나도 마찬가지.”
옆에서 로니가 거들었고.
유신은 물끄러미 날 보더니, 말을 덧붙였다.
“난 호인이야. 잘 넘어가. 넌 욕 좀 먹어도 돼.”
이 새끼는 그래, 기대도 안 했다.
어쨌든 이 일로 구스타프는 벌점을 받았다.
이후 날 향한 욕이 좀 줄긴 했다.
그리고 보통 나 혼자 있을 때 시비를 걸더라.
친구들이랑 있을 때는 안 그러고.
“저도 호인이에요. 온신.”
레베카는 은근히 나한테 그렇게 말함으로 신경을 건드렸다.
“누가 물어봤냐?”
“궁금할까 봐서요.”
얘, 업데이트가 잘못된 것 같은데.
포맷 한 번 해야 하지 않나?
물론 생각만 하고 이런 말을 꺼내진 않았다.
AI에게 포맷이란 물리적 죽음을 뜻한다.
농담으로도 꺼낼 말이 아니다.
이들에게 포맷은 그만한 아픔을 느끼게 하는 말이니까.
필기시험의 결과로 이제 일반인이 설 자리는 없다는 말이 나왔고.
시간이 쏜살같이 흘러, 실기 시험의 날이 다가왔다.
2학년 때부터는 이제 이런 시험도 없다고 하던데.
그때부터는 철저하게 작전에 임해야 뭘 얻을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후기 시험 같은 경우에는 이전과 달리 스폰서를 비롯해서 보러 오는 사람도 적었다.
재능을 확인했으면 이제는 실적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하던가.
지금부터는 이후에 활약을 기대하는 시점이지, 성장 정도를 보는 거야 상관없다는 건가?
아무리 잘 싸워도 전장에 나가서 삽질하는 놈은 있기 마련이다.
긴 세월 사관 학교 생도 중에 그런 놈이 어디 한둘이었을까.
세상은 실전에 능숙한 이들을 원하기에, 따라오지 못하는 이들은 도태되는 게 당연했다.
그리고 스폰서는 그 실전에 투입될 요원을 원하는 거고.
“너, 잘 만났다.”
내 첫 상대는 변신족이었다.
전기 시험 때도 내 상대였다고 하는데 기억은 안 났다.
“그동안 하루에 네 시간씩 미친 듯이 훈련했다. 새끼야. 똥을 지리게 해 주마.”
도발하는 꼬락서니를 보니, 아마추어다.
“응? 뭐라고? 못생긴 변신족이 하는 말이라 잘 안 들리는데?”
난 한쪽 손을 귀에 대며 답해 줬다.
그러자 변신족 친구의 눈이 벌게졌다.
겨우 이 정도로 흥분하고 그러냐.
“뒈져!”
죽이면 실격이야, 이 친구야.
변신족 생도가 달려든다.
뻥!
땅이 차이는 순간 놈이 확대됐다.
이걸 보고 반응할 수 있는 건 변신족뿐이리라.
그만큼 빨랐다.
하루 네 시간 훈련했다는 게 거짓말은 아니었다.
그래도 난 여유가 있었다. 아니, 절로 여유가 생겼다.
생각할 시간도 넉넉하고 원한다면 코를 파도 됐다.
덜컥.
달려오던 변신족이 멈췄으니까.
이런 직선적인 친구를 보았나.
어찌 앞으로 그리 내달리고 그러나.
앞만 보고 내달리던 놈이 무형의 기운에 묶여 멈췄다.
4시간이라.
미안한데 난 4시간만 자고 훈련했단다. 친구야.
“이거, 이거 뭐야?”
변신족 친구가 묻기에 난 순순히 답해 줬다.
“염동력.”
굳이 숨길 것도 없기에.
난 시험에서 당당히 내 능력을 밝혔다.
뒤에서 떠드는 놈들을 위한 내 작은 선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