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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격 외 혈통 천재-430화 (430/488)

외전 21. 사시사철 한결같은 남자

“꼭 수석으로 졸업을 해야 하는 건가? 조건이 과하다고 생각하는데.”

이세계였다. 붉은 비가 내리고 붉은 흙이 가득한 땅.

적토 또는 레드 소일이라 불리는 곳이었다.

노란 피를 뿌리는 크리쳐가 가득한 땅이기도 했으며 위험도가 높은 이계였다.

크리쳐 등급은 녹색, 파랑, 노랑, 빨강, 주황 급으로 위험한데, 이쪽 세계의 주 크리쳐는 노랑이고 빨강 레벨까지 나오는 곳이니까.

그런 곳에 학생 신분으로 왔다는 것 자체가 이후의 실력을 방증하기도 했다.

그리고 정미랑의 실력도.

이 둘은 이미 100개의 팀 중 하나에 자리를 약속받았다.

그만한 재능과 실력을 보인 대가였다.

특수종 사관 학교에는 대대로 각 학년에 탑을 뽑는데, 이 둘은 능히 그럴 만한 레벨이었다.

덕분에 붉은 땅 시설 설비 호위 임무에 차출된 거였고.

비가 그치며 빨갛게 물든 하늘을 보며 막 후가 입을 연 참이었다.

쿵, 위잉.

그들의 뒤쪽으로 기계와 사람이 오가며 시끄러운 소리를 토해 냈다.

이쪽 적토는 이번에 시설 설비를 갖추기 시작한 땅이다.

이 땅의 소유는 공식적으로 올드 포스였고 입구는 독도에 열렸다.

한국 입장에서 보자면 꽤 오랜만에 열린 이계의 입구라 할 수 있겠다.

그러니 공을 들이는 중이었고.

훅하고 먼지가 둘 사이를 날아왔다.

둘은 각자 고개를 돌렸다. 헬멧에 달린 공기 정화 장치가 윙 소리를 내며 돌아갔다.

곧 본래대로 고개를 돌린 둘은 시선을 마주치는 대신 버릇처럼 주변을 경계했다.

혹시 소음에 크리쳐가 반응하면 곧바로 움직여야 했으니까.

그런 둘의 태도를 보자면 도저히 소문과 매치가 되지 않았다.

사관 학교 내에 떠도는 소문만 보자면 더 친근해야 하지 않나?

둘 사이를 오해하는 사람이 많았지만, 실상은 전혀 아니었다.

정미랑이 이후를 따라다녀?

정작 둘은 서로에 관해 이성적 관심이 조금도 없었다.

“온신을 말하는 거야?”

“그래, 왜 그런 거냐.”

후는 드물게 화가 나 보였다.

“그 정도는 해야 가질 수 있으니까.”

“널?”

“그래.”

“왜 그렇게까지 해야 하지?”

미랑은 덤덤한 눈으로 변신족 선배를 바라봤다.

이 빠돌이 변신족 같으니라고.

그녀는 속으로 욕하고 답했다.

“일반인 수준으로 나한테 도움이 되려면 최소한 그 정도는 해 줘야 하니까.”

“오롯이 필요 때문에 그런 거냐?”

“그렇다면?”

“메말랐다. 너.”

“하고 싶은 걸 다 하면서 내가 원한 걸 취할 수 있을 만큼 이 세상이 녹록한가?”

괜히 겨울 여왕이란 별명이 붙은 게 아니었다.

정미랑은 냉정했다.

“그래서 싫어도 필요하니 그렇게 하겠다는 거냐?”

이후는 물러서지 않았다. 그에게는 중요한 문제였다. 남녀 문제는 감정이 먼저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싫은 건 아니지만.”

미랑은 말을 아꼈다. 그러고 싶었다. 여기서 더 뭐라고 말하면 그대로 될 것만 같아서.

가끔 불멸자의 직감은 예리한 걸 넘어 미래를 넘보기도 한다.

그녀의 감각은 현존하는 불멸자 중 수위를 다투는 수준이었다.

그러하기에 입 밖에 말을 내지 않았고.

이후는 그런 정미랑이 답답했다.

“그러다 뺏긴다.”

답답함에 오지랖을 부려 끼어든다. 이후에게 이건 남 얘기가 아니었다.

“온신이 쉽게 넘어갈 것 같아? 아닐걸.”

“4대 계절 미녀가 전부 온신에게 관심이 있다고 들었는데도?”

“온신은 안 변해, 그런 애야.”

미랑은 자신만만했다. 물론 겉으로는 그런 낌새를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속내를 보이지 않는 건, 그녀의 버릇이었다.

* * *

“그거 오해의 소지가 많은 말인데?”

“오해? 여기에 오해가 필요해?”

필요할 것 같은데. 무척 많이.

로니는 생긋 웃었다. 그리 웃으며 다리를 다소곳이 모은다. 무릎 위에 올린 손등이 무척 새하얗다.

피부도 깨끗하고 외모도 탁월하다.

이런 애가 이렇게 말하니까, 미랑을 향해서만 뛰어야 할 심장이 제멋대로 두근거렸다.

“수석 졸업이 목표라면 도와줄게.”

그 말에 난 멀뚱히 선 채로 발목이 삐끗하는 기분이 들었다.

어이, 방금 나보고 관심 있다고 하지 않았나?

내 목표가 수석 졸업이 전부가 아니라는 건, 알 사람은 다 알 텐데?

여자에 미쳐서 아버지 뒷배를 이용해 사관 학교에 입학한 미친놈.

그 와중에 싸움은 잘해서 상대하기 껄끄러운 놈.

그 싸우는 능력 또한 집안 덕분에 얻은 특혜라는 소문이 파다한 놈.

중간부터 말도 안 되는 소문이 섞이긴 하지만, 어쨌든 이 안에 진실도 섞여 있었다.

이 모든 게 오롯이 정미랑을 위한 것이라는 것.

“도와?”

“응. 돕고 싶어.”

“왜?”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냥.”

분명 무슨 이유가 있는 건데, 말하지 않는 거였다.

그런 낌새가 보였다.

불멸자치고는 로니는 제 감정을 얼굴에 드러내는 편이었다.

아니, 본래 이게 정상이려나?

미랑이는 워낙에 표정이 한결같으니까.

그리 오래 알고 지냈으면서도 정미랑의 속내를 알아채는 건 어렵다.

아는 건 하나뿐이다.

걔도 날 좋아하는 것 같다는 것.

물론 100% 확신은 아니고.

사람 마음을 어떻게 퍼센티지로 확신하겠나.

“그러니까 그냥.”

로니가 웃으며 그냥이란 말을 반복했었다.

번쩍.

빛이 눈앞을 채운다.

훈련 중이었다.

그 와중에 로니와 나눈 대화를 되새긴 거고.

그런데 너무 깊게 몰입해서 로니를 떠올렸나 보다.

난 집중력이 깨지며 능력 통제에 실패했다.

파지지직.

뇌전력을 다루는 훈련 중에 사방팔방으로 번개가 뻗어 나갔다.

통제를 잃은 능력이 훈련장 전체를 짜릿하게 달궜다.

꽈릉! 쩡!

번개가 내리친 곳곳이 까맣게 그을리기도 했다.

“실패 요인 분석 중.”

번개가 관통했는지 홀로그램 레베카의 가슴에 구멍이 뚫렸다.

홀로그램이니 복구하면 되는 일인데, 디테일하게 탄 자국을 만들어서 보여 준다. 악취미다.

“여자 문제군요.”

AI 주제에 왜 이렇게 쓸데없이 날카롭지?

“오호, 그것도 다른 여자 문제군요.”

이 정도면 내 머릿속을 오가는 건 아닐까 싶은데.

“만약 지금이 전장 한복판이었다면 재밌었겠어요! 능력 통제 실패로 폭주해서 아군 뒤통수 번개 다발을 꽂은 셈이니까요!”

활기찬 목소리였다.

“딴 여자 생각하는 건 어떻게 알았냐?”

“훈련하면서 로니, 로니, 이렇게 중얼거리면 다 알죠.”

내가 그랬구나.

아니, 근데 정말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지 않나.

날 향한 소문 따위야 알 바 아니지만.

음, 로니라.

난 머릿속에서 미랑이 아닌 로니를 옆에 앉혀 보았다.

면사포를 쓰고 모두의 축복을 받는 결혼식.

한가로이 카페에 앉아 입술에 거품을 묻히고 서로를 바라보는 장면.

넓은 마당에서 큰 개를 키우며 서로 뒹굴뒹굴하다 눈이 맞아서 야릇한 표정을 짓는…….

“온신, 표정이 볼 만하네요. 사진을 찍고 소장해도 될까요?”

레베카의 말에 현실로 정신이 돌아왔다.

“아니, 절대 안 돼.”

보지 않아도 아까의 내 표정이 어떨지 뻔했다.

그나저나 나 이렇게 줏대가 없는 놈이었나.

고백 한 방에 이렇게 무너진다고?

아니다. 난 그런 사람이 아니다.

소나무 같은 남자, 유온신.

그게 바로 나다.

사시사철 한결같은 남자, 유온신.

그게 바로 나다.

거듭 되뇌며 미랑을 향한 마음을 다잡았다.

미안하다. 미랑아. 나 잠깐 한눈팔았다.

하지만 본심이 아닌 건 알지?

“온신은 참 여자한테 약하군요.”

레베카가 허공에서 다리를 꼰 채로 앉아 한심한 눈빛을 보냈다.

어째 쟤는 홀로그램 활용을 나 놀리는 데만 쓰는 것 같냐.

“그래 보여?”

“네, 그래 보여요.”

“인기남의 숙명이 이런 거겠지.”

내 입으로 말하기 뭐하지만, 내 외모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그리 닮지 않았다.

외모만큼은 제대로 격세 유전했다.

할아버지를 닮은 편이라는 거다.

불멸자 중에서도 빼어난 미모를 소유했다는 그 할아버지의 미모 말이다.

그러니 내 얼굴은 그야말로 국보급이 아니겠나.

국보 유온신.

어감이 꽤 좋다.

세상 모든 여자의 국보 유온신.

이건 더 좋은 것 같다.

“고마워요. 온신, 전 방금 혐오란 단어를 새로 배웠답니다. 매일 새로운 가르침 감사합니다.”

업데이트 한번 잘도 되네.

“훈련이나 하자고.”

“제가 할 말을 먼저 하는군요.”

AI를 반납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허락되지 않겠지.

당장 없으면 엄청 불편하긴 할 것이다.

그리고 말만 그렇지, 레베카는 최고의 AI 시스템이 맞으니까.

너무 최고라 문제지만.

축제가 끝나고 수업을 듣고 훈련하는 시간이었다.

뭐라고 할까나.

참으로 소박하고 평화로운 그런 시간이었다.

그저 우직하게 매일 모든 걸 반복할 뿐이었으니까.

날 향한 소문은 금세 사그라들 것 같더니, 요새는 그냥 양아치 유온신으로 굳어진 것 같았다.

“요새 좀 바빠. 수석 졸업, 노릴 거지?”

“조기 졸업까지 할 생각이야.”

“……포기하라고 하면 포기할 거야? 이후 선배가 걱정하던데.”

포기? 이후 그 자식 때문인가, 그런 건가?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채웠다.

질투심이 차올랐다.

“아니, 안 해. 나 몰라?”

“알아.”

“그럼 됐어.”

“로니는?”

“친구야.”

대화는 짧았다. 미랑이 머문 시간은 더 짧았고.

요즘 아주 바쁘다고 한다.

이게 평균이긴 했다. 1학년이야 수업이 많긴 하지만, 2학년 때부터는 실전이 반이다.

그중에서도 미랑은 인정받은 특수종이고.

무려 그 이후란 새끼란 페어를 이루지 않았나.

까득.

그걸 생각하니 절로 어금니가 갈렸다.

미랑이 두 번째 찾아온 날에는 소소하게 이야기만 나눴다.

미랑의 아버지, 그러니까 장인어른인 기남이 삼촌이 순혈 정가에서 새로운 팀을 꾸리는데 거기에 들어가는 건 어떠냐고 물었단다.

“어떻게 할 생각인데?”

“아직 잘 모르겠어.”

한 10분 얘기를 나눴나, 미랑은 수업이 있다고 하고 갔다.

떠나는 그녀의 뒤에서 찰랑거리는 머리칼을 보자니,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다시금 깨달았다.

보기만 해도 심장이 뛰고 확신이 들었다.

저 여자는 내 여자라고.

누난 내 여자라고.

너는 내 여자니까.

“이상한 노래 흥얼거리지 마.”

떠나는 미랑의 말에 난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레베카랑 놀다 보니 혼잣말하는 버릇이 생겼다.

미랑이 오지 않는 시간에는 로니가 찾아왔다.

“오다 주웠는데, 가져.”

오다 주웠다고 주기에는 좀 과하지 않나?

최신형 홀로그램 시계였다.

AI 대화 기능까지 탑재한 최신형.

최신 개발된 거라고 하던데.

그러니까 레베카가 이제 내 손목에도 있다는 거다.

그것도 한정판이었다.

“밥 먹으러 갈래?”

“오늘 밥은 내가 대접하마.”

이런 걸 받고 입을 닦을 순 없다.

난 내가 아는 최고의 식당으로 로니를 데려갔다.

“……뭐냐?”

유신의 개인 주방이다. 이 자식은 오랜만에 친구를 보고서 반가워하지는 못하고 로니를 보고 고개를 갸웃했다.

“봄의 꽃을 담당하신 미녀 동기 되시겠다. 새끼야.”

“응? 공주님?”

구스타프도 안에 있었다. 이 자식은 요즘 틈만 나면 여기서 죽치고 앉아 있다.

구스타프 새끼 뱃살이 조금 늘어난 것 같은데?

“밥 먹으러.”

구스타프의 질문에 담담히 답하니.

“여기가 식당이냐.”

유신이 코웃음을 치며 주방으로 향했다.

말만 저러지, 누가 제 음식 먹어 주면 그게 더없이 기쁜 자식이다.

“여기가 최고의 식당이야?”

로니가 옆에서 속삭이며 물었다.

불멸자, 그것도 순혈이란 타이틀을 단 불멸자는 전부 미식가다.

나도 그걸 잘 안다.

아버지 덕분에 어릴 때부터 단련된 내 혀도 불멸자만큼 예민하고.

그래서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사관 학교 내에 있는 어떤 식당보다도 더.”

참고로 학교 내에는 전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쉐프가 차린 레스토랑도 있다.

하지만 난 진짜 여기가 낫다고 본다니까.

본래 불멸자는 미식가.

순혈 불멸자는 더없이 까탈스러운 미식가다.

그런데 강유신도 겉으로는 저래 보여도 순혈 타이틀을 달 만한 능력자란 거다.

재능만큼은 그렇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모든 재능을 요리에 쏟아부었다.

그러니 믿을 만하지.

“먹어 보고 판단해.”

불멸자답게 청각이 예민한 유신은 우리 둘의 대화를 들었다.

그리고 덧붙인 한마디에는 음식에 관한 자부심이 돋보였다.

결론만 말하자면, 로니는 흡족해했다.

“뭐야, 너.”

딱 첫술을 뜨며 터진 말이다.

실제로 엄청나게 놀란 얼굴이었다.

얘는 미랑이랑 다르게 표정에 생동감이 넘쳤다.

“음, 정말 맛있어.”

극찬이었다. 유신의 콧대가 높아졌다.

양송이 수프와 얇게 저민 양고기 구이, 그리고 샐러드 파스타가 전부였다.

그리 대단한 요리가 아니라고 할 수 있지만, 맛은 아니었다.

“조심해야 할 거다.”

신나게 먹고 마시고 있자니, 옆에서 구스타프가 경고했다.

“뭘?”

로니가 물었고, 구스타프는 진지한 얼굴로 답했다.

“너무 맛있어서 살찐다.”

이 새끼 캐릭터가 원래 이랬나? 애가 왜 반쯤 나사가 빠져 버렸지?

“넌 원래 이렇게 웃겼니?”

로니가 깔깔 웃었다. 구스타프도 웃었다.

나도 덩달아 웃었고 유신은 디저트를 준비했다.

같이 먹고 마시고 웃었다.

솔직히 말하건대, 더없이 즐거운 시간이었다.

로니와는 이후로도 돈독하게 지내긴 했으나, 고백에 관한 답은 명확하게 했다.

관두라고, 난 좋아하는 사람 있다고.

로니는 그에 관해 시원하게 답했다.

“관심 있다고 했지, 너랑 자자고 한 건 아니야. 난 발정 난 변신족이 아니야. 그냥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다는 거지.”

“그러니까 음, 난 정미랑이라는 애인이 있어.”

“상대가 인정하지 않은 애인이라면 스토커 아닐까?”

“아니다.”

로니는 깔깔 웃으며 날 놀렸다.

그게 음, 썩 기분이 나쁘진 않았다.

어쨌든 우리 사이가 좋았다는 거다.

그리 시간을 보내는 사이, 기말고사를 보는 날이 다가왔다.

“어이, 후배.”

복도를 지나는데, 3학년 변신족, 여름 햇살 선배가 다가왔다.

그러고 보면 나 선배 이름도 모르는구나.

“잘 지냈나?”

말하며 어깨에 손을 올린다. 대체로 그렇지만, 변신족은 호쾌한 편이었다.

이 선배도 그랬다.

웃는 것도 시원시원하고 스킨십에 관대하다.

일전에 내 이마에 뽀뽀한 것만 봐도 알 수 있지 않나.

이번에도 비슷했다.

쓱 하며 내 어깨를 잡고 당기려 했다.

그리고 난 한 번은 당해도 두 번은 당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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