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5. 이게 내 데뷔 무대였다.
번개 덩어리.
단연코 말하건대, 뇌전력의 힘을 깨닫고 처음 보는 광경이었다.
살기를 뿜어내니 내 주변이 전부 새파란 번개로 뒤덮였고.
그 주체가 되는 놈의 전신에는 번개 덩어리가 뭉쳐 있었다.
아.
난 몸이 덜덜 떨리는 걸 느꼈다.
살기가 내 몸을 잠식했다.
그런데도 머리는 잘만 돌아갔다.
“살기에 노출되면 몸이 굳거든, 그럴 때 정신을 바로 세우는 걸 연습하면 좋단다.”
어릴 때 했던 훈련 덕분이었다.
감사합니다. 할머니.
오크, 인베이더 시절에나 나타나던 크리쳐가 긴 팔을 늘어뜨린 채 서 있다.
놈의 등 뒤로 반짝반짝 해님이 빛났기에 앞으로 길게 그림자가 늘어나 보였다.
그 그림자 길이가 아군 변신족 무리에 닿을 정도였고 그 길이만큼이나 압도적인 존재감이 사위를 짓눌렀다.
“이 너머에 본래 오페라 갈대가 없던가?”
오크의 살기 따윈 옛 저녁에 엿이랑 바꿔 먹은 레드 울프의 팀장이 말했다.
그러자 모히칸 스타일로 대가리 털을 깎은 늑대 하나가 좌우로 고개를 갸웃했다.
“아뇨, 원래는 오페라 갈대가 있어야 하는데요.”
“그럼 이건 뭐야?”
그래, 본래 이 지역은 오페라 갈대 외에는 너른 들판이 전부인 곳이잖아.
그런데 저건 뭐냐고.
오크는 작은 동산에 올라 있었다. 어떻게 보면 흙더미라고도 볼 수 있을 만한 그런 동산이다.
동산이 달랑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니고 옆으로 길게 펼쳐져 있었다.
어떻게 보면 누군가 의도적으로 만든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 위에 우뚝 선 오크의 가슴팍이 위아래로 움직였다.
“그리고 저건 또 뭐고.”
“그, 오크 같은데요.”
“그러니까 저게 여기서 왜 튀어나오는데?”
“그건 저도 모르죠.”
모히칸 늑대가 총신으로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어, 뭐. 음.”
레드 울프 팀장은 입맛을 다시며 오크를 바라봤고.
갑자기 툭 튀어나온 오크는 처음 괴성을 지른 걸 제외하고는 가슴팍만 들썩이며 제 탄탄한 생명력을 보일 뿐 아무 짓도 하지 않았다.
기묘한 대치 상태가 이어졌다.
그렇게 십여 초, 팀장과 오크의 눈싸움이 이어졌다.
당장이라도 달려들 것 같은 녹색의 근육 덩어리 생명체는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레드 울프 팀장이 먼저 귀를 후볐다.
옆으로 자란 늑대 귀 안으로 날카로운 손톱을 넣어 후비다가 빼더니 후 바람을 불어 귀지를 날리고 묻는다.
“너 혼자니?”
당연하게도 답은 없었다.
인베이더 시절 오크는 얼마나 위험한 놈이었나.
그냥 넘버링만 붙었을 때는 그리 위험도가 높진 않았을 것이다.
만약 어느 정도 위협적이었다고 해도.
그때의 인류와 지금의 인류는 레벨 차이가 꽤 나므로 그리 무리하며 상대할 놈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변이종이라면?
그럼 문제가 조금 다르다.
보이는 것만으로는 전투력 측정 불가니까.
그리고 눈앞의 오크는 누가 봐도 변이종으로 보였다.
보기만 해도 키가 2m는 훌쩍 넘어 보였고.
늘어뜨린 양팔에 꿈틀거리는 근육이 놈의 위험함을 증명했다.
무엇보단 내 눈에는 번개의 덩어리로 놈이 보였다.
특수종 레벨로 치자면 최소 40? 50?
가공할 수준의 괴물이다.
제자리에 가만히 있는데도 수치가 저렇다.
물론 레벨이 높다고 해서 전부는 아니다.
본래 이 레벨이란 건 특수종 사관학교에서 만든 개념이었다.
생도들의 수준과 재능을 알아보는 용도지, 전투에 나선 프로의 수준을 나누는 용도가 아니다.
일정 수준을 넘어서면 레벨이란 건 말장난이 되어 버린다는 거다.
그렇다고 해서 기본도 안되는 특수종이 최소 40레벨대의 크리쳐를 죽일 수 있다는 말은 아니다.
“거, 별일이 다 있네.”
고요한 가운데 팀장의 목소리가 울린다. 그녀가 카리스마를 발휘했다.
말 몇 마디로 본능에 휩싸인 변신족 팀원의 정신을 환기하게 시켰다.
오크가 나타나서 놀랐지만, 어쩌란 거냐.
특이종으로 보인다지만, 그것 또한 어쩌란 거냐.
그래 봤자 한 놈.
죽이면 그만이다.
본래 지우개 팀이 맡을 임무는 아니겠지만.
그 또한 상관할 바가 아니다.
“저 오만한 새끼 혼자서, 앙? 혼자, 어? 혼자, 어? 응? 뭐냐? 저거, ……혼자가 아니네?”
팀장의 혀가 꼬였다.
투둑, 투둑.
좌우, 길게 늘어진 동산의 담벼락 너머.
흙 부스러기가 밑으로 떨어진다.
흙 동산이 만든 경계선 너머 녹색 대가리가 하나둘씩 더 올라온다.
보는 나도 심장이 쿵쿵 뛸 만큼 장관이었다.
올라오는 오크의 무리다.
한두 마리가 아니었다.
일견해도 최소 서른 마리가 넘는다. 반사적으로 좌우를 돌아보며 숫자를 셌다.
서른 마리는 무슨.
쉰 마리도 넘네.
계속 나오기에 예순다섯까지 세고는 관뒀다.
얼추 칠십 마리가 넘는다고 보면 되는 거였다.
“크르.”
도끼의 주인, 살기를 뿌린 변이종이 작게 울음을 토해 냈다.
“야이씨, 이런 치사한 개자식 같으니라고.”
팀장이 우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의 카리스마가 사라졌다.
난 멀뚱히 오크 놈을 바라봤다.
인베이더란 개념이 사라진 게 몇 년 전인가.
아버지가 유니온이란 인베이더를 족족 쳐 죽이고 나니, 넘버링으로 숫자를 매겨 둔 인베이더는 더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지금.
그 인베이더 중 하나가 이십 년 만에 모습을 드러냈으며.
양손에 든 도끼로 살의를 보였고, 한 번의 고함으로 적의를 불태우는 중이었다.
“너 굳었지?”
날 호위하던 변신족이었다.
난 그 말에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고개는 돌아가는 거냐? 너 정신력 탄탄하구나.”
그 정도로 놀라면 되겠냐.
할머니는 나에게 야생의 살기에서 정신을 온전히 차리는 법을 가르쳤고.
“몸도 잘 움직인다.”
이후 살기에서 멀쩡히 움직이게 해 주었다.
난 손가락을 까닥여 줬다.
본래 야생의 살기란 인간의 본능을 건드려 자극해 붙드는 것.
그렇다면 축적된 경험을 통해 극복하는 것도 가능했다.
물론 일반인의 몸으로 이렇게 살기에 자유로워지려면 마이크로 단위로 살기를 뿌리는 괴물 같은 존재가 필요하다.
그런 괴물이 훈련 시켜 줘야 가능하거든.
그리고 현 세상에서 그런 특수종은 단 하나뿐이고.
누구겠나, 내 아버지다.
세최특, 세계 최강의 특수종 유광익.
그 아버지가 직접 살기를 뿌려 주셨다.
감사합니다. 아버지.
“……진짜 요새 인턴은 다 이런가. 어쨌든 물러나. 위험하다.”
그렇지, 위험했다.
수십의 오크 무리가 이들을 노리고 있고.
이쪽 전력은 날 포함해서 열하나.
그중 열은 무식하게 돌진만 할 줄 아는 변신족 무리다.
“야, 저거 덤빌 것 같지?”
“네.”
“씹, 오늘 여기서 묘비 세우겠네.”
팀장과 부하가 저리 말하고 있는 걸 보니 확실히 다른 대책은 없어 보였다.
호위 친구가 내 어깨를 쥐고 뒤로 민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튀어라. 지금 이 자리에서 가장 도움이 안 되는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하는 거냐?”
뒤로 밀려나며 난 생각하라 하기에 생각했다.
여기서 도움이 가장 안 되는 사람.
슬쩍 좌측 끝으로 왼손 검지를 들었다.
“쟤?”
아까부터 눈 여겨봐 둔 팀원 중 하나였다.
열 명 중에 제일 흥분해서 허벅지를 다쳤다.
그러니까 도움이 안 될 것이다. 봐라, 지금도 다리를 절뚝이지 않나.
“……뭐?”
호위가 황당해했다.
뭐, 뭐긴 뭐냐.
데뷔 장소 잘못 잡은 비운의 힘순찐 되시겠다.
아까부터 변신족 무리가 싸우는 걸 봤고.
이들을 기준으로 내 나름대로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아군의 전력, 그리고 내 전력.
둘의 비교.
크리쳐를 상대했을 때의 효율성 같은 것.
“최소 옐로우 급이라고 봐야겠죠? 대장 놈은 번외로 치고?”
저 앞에 선 팀원 중 하나가 읊조렸다.
크리쳐의 등급은 그린, 블루, 옐로우, 레드, 오렌지.
그 너머로는 엘리트 급이라는 블랙 & 화이트가 있다.
검정과 하얀 너머의 등급도 있는데 그거야 뭐, 나중 일이고.
일단 눈앞의 무리는 최소 노란 등급이란 거다.
노란 딱지를 머리통에 붙이고 나온 건 아니지만, 최소 그 정도 급은 된다는 것.
노란 딱지 무리라, 상대로 나쁘지 않다.
난 좌우로 목을 꺾었다.
우득우득.
기왕이면 보는 사람 많은 곳에서 데뷔하려고 했지만.
관객은 열 명뿐인가.
뭐 어쩔 수 없는 노릇이지.
나중에 미랑이가 전해 듣기만 하면 그만이다.
그러려면 이쪽에 있는 사람 중 하나라도 더 살려야 할 것이다.
아, 이렇게 된 거 열 명 다 살면 소문도 더 빨리 퍼질 테니, 열 명 다 살리면 더 좋겠네.
“야, 얌마, 인턴, 유온신이, 너 죽으면 난리 난다. 튀어, 시간은 벌 수 있다. 그리고 우리도 다 안 죽어. 최소 반은 살 수 있다.”
호위가 말한다.
그의 말이 맞을 것이다.
팀장은 죽음을 각오했으나, 팀원 중 일부는 살려 보낼 생각으로 보였다.
그중에서도 인턴이자 체험단으로 참여한 난 일 순위 생환 대상이고.
작정하고 튀면, 글쎄 도망가는 건 가능할 것 같았다.
꽤 깊게 들어왔다고 하지만, 그래도 돌아가면 아군의 기지가 있으니까.
거기까지 도달하면 저 오크 무리가 노란 등급이라는 것 따위는 문제가 되지 않을 테니.
변이종은 뭐 별개로 치더라도 말이다.
“괜찮아. 자식아. 그리고 너 몇 살이냐?”
변신족은 열여덟에 각성을 겪고.
그중 일부는 사관학교를 거치지 않고 이렇게 팀에 합류하기도 한다.
사관학교가 꼭 내가 다니는 곳만 있는 것도 아니고.
변신족 중에서는 가정에서 속성 교육만 받고 나오는 이들도 드물지 않으니까.
“나? 스물.”
“형이라고 불러라.”
내가 한 살 많다. 자식아.
어디서 초면에 반말이냐.
“크우어어어어어!”
날 호위하던 친구와 유교식으로 인간관계를 다지는 순간, 오크 대장의 함성이 터졌다.
워 크라이, 전장의 함성.
살기가 다시 뇌전의 형태로 눈에 보인다.
몸을 짓누르려는 걸, 아랫배에 힘을 주고 눈을 부릅뜬 채 집중해서 버텼다.
아무리 익숙해졌다고 해도 여전히 살기를 견디는 건 꽤 지랄 맞은 일이었다.
그 이후, 오크 무리가 달려들기 시작했다.
“명조야!”
팀장이 외쳤다.
팀원의 이름 중 하나인 것 같았다.
그 외침에 명조라 불린 변신족이 두 명의 변신족을 데리고 뒤로 빠졌다.
“이런 씹.”
“팀장 누나 좋아했어요!”
그중 한 명은 이 와중에 고백도 했다.
그래, 사랑은 고백하라고 하는 거다.
그대의 용기에 찬사를.
“인턴 데리고 튀어!”
뒤로 빠진 명조란 변신족 아저씨가 말했다.
변신하기 전에 얼굴을 봐서 대강 짐작하는 데 나이가 마흔은 된 것 같더라고.
겉늙었다면 한 서른다섯?
“에, 에, 네!”
호위이자, 동생이 답하고.
난 그 모든 걸 무시한 채, 양 손가락을 펼쳤다.
여기서 질문 하나, 과연 저 오크 무리의 몸뚱이는 총탄을 얼마나 견딜 수 있을까?
그게 무척 궁금해졌다.
투두두둥!
내 질문의 답이 눈으로 먼저 보였다.
남은 레드 울프 팀원이 레일건 형태의 산탄총을 갈겼으므로.
그건 본래 유효한 타격을 줘야 했으나.
오크 무리는 총구를 보고 피했다.
겨우 몇 놈의 피륙에 상처만 남겼을 뿐이다.
뻔히 보이는 걸 피하는 건 본래 변신족의 특기이나.
그만한 운동 능력이 있다면 크리쳐도 곧잘 하는 짓거리였다.
옐로 등급 정도가 되니까 가능한 짓거리이기도 하고.
“미친 크리쳐 새끼들!”
자주 생각하는 건데, 크리쳐의 세계도 심오하다니까.
무슨 옐로 등급쯤 되면 총탄이 안 먹혀 버리니.
그래서 옐로 등급 정도를 상대할 때부터는 장거리 저격수를 항상 대동한다.
현시대에서 변신족 팀으로만 상대할 수 있는 등급이 그린이나 옐로 등급까지인 이유다.
“전원 근접전으로!”
팀장이 외친다.
곧 오크 무리와 마주치고 살과 뼈를 부딪칠 것이다.
남은 시간은 고작 몇 초.
동산을 넘어온 오크 무리가 내달리자, 흙먼지가 피어올랐다.
길게 늘어진 그림자가 지옥의 단면처럼 순식간에 늘어졌다가 줄어들며 오크의 돌진을 시시각각 알렸다.
먼지, 그림자, 돌진.
그 모든 걸 인지하고 머릿속에 집어넣는다. 그걸 토대로 오크 무리의 움직임을 예측한다. 어렵진 않았다.
놈들은 단순했다.
보이는 총구만 주시한 채 내달렸으니까.
“저 새끼 뭐하냐!”
뒤에서 명조 아저씨가 외쳤고.
난 조용히 숨을 내뱉었다.
“후우.”
내뱉은 숨결에 내 눈에만 보이는 뇌전이 흐른다.
둥.
내 머릿속에서만 들리는 진동음과 함께 난 열 손가락을 들어 허공을 겨눈 채, 속으로 읊조렸다.
염동력을 쓰기 위한 이미지 메이킹이다.
‘염동탄, 파열.’
두두두두두두둥!
염동력의 탄환이 허공에서 생성된다. 오롯이 나에게만 느껴지고 보이는 무형의 힘이다.
초능은 본래 쓰는 술자의 초능력 용량과 체력에 의해 위력과 힘이 결정된다.
내 체력이야 뭐 말할 것도 없고.
초능력 용량은.이제까지 주변 놈들을 기준으로 봤을 때, 레벨 40.
그게 내 초능 용량이었다.
그러므로 이미지로 형상화한 내 초능력은 오크 무리가 지닌 가죽의 두께 따위를 무시할 만했다.
퍼버버버벅!
첫 번째 전투.
이변 상황이 발생했고.
난 초능을 발동했으며.
이게 내 데뷔 무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