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9. 승자의 퍼포먼스
“뭐?”
“테스트 결과 새끼야. 어디서 족보라도 얻었냐?”
뭐라는 걸까.
뚱하니 바라보자 유신의 단출하고 명쾌한 설명이 이어졌다.
“너, 중간 테스트 수석.”
테스트 결과 1등.
1학년에 들어와 처음 본 지식 테스트에서 당당히 수석을 차지했다.
누가?
내가.
“이야, 하루 만에 슈퍼스타가 됐네.”
아, 시험.
그거 내가 1등이구나.
입을 몇 번 뻐끔거리다 주변을 둘러봤다.
날 향한 시선의 의미가 평소와는 조금 다르게 다가왔다.
그 안에는 시기와 질투, 악의가 있었고.
선망과 동경과 부러움의 시선이 있었다.
“하물며 사관 학교 4대 미녀 중 셋이나 찾아와서 말을 걸다니.”
“4대 미녀는 또 뭐냐?”
“넌 그것도 모르냐?”
유신이 눈으로 날 나무랐다.
아니, 그런 걸 알아야 해?
나한테는 정미랑뿐인데.
그리 생각하면서도 로니와 맞잡은 손의 감촉이 떠올랐고.
이마에 닿은 여자 선배의 입술 감촉이 생생했다.
“이 우리 아빠보다 더한 놈.”
유신은 그런 날 비난했다.
그리고 4대 미녀에 관한 얘기는 나중에야 들었다.
식당에 계속 있자니, 이거 원 시선이 워낙 따가워야지.
덕분에 유신의 방으로 가야 했다.
4대 미녀란 사관 학교를 대표하는 네 명의 여자 특수종을 말하는 거였다.
일단 봄의 꽃 로니.
초능국의 공주로 혈통 탄탄하고 불멸자이기에 그 외모 또한 탁월하며 항상 웃는 얼굴로 사람을 마주하니.
보는 모든 사람이 즐겁다고 하여 붙은 별명이 봄의 꽃.
그리고 내 이마에 입을 맞춘 여자 선배도 4대 미녀 중 하나였다.
예상했다시피 변신족이고.
통 크고 화끈한 여자란다. 쾌활함을 넘어 과격한 성격이라고도 하고.
2학년 때부터 능력을 인정받아 이런저런 임무에도 투입되는 능력자이자 매력이 흘러넘치는 여자.
그리하여 붙은 별명이 여름 햇살.
누구냐, 이렇게 별명을 붙인 놈은.
그야말로 기가 막히게 잘 어울리지 않나.
봄의 꽃, 여름 햇살.
크, 죽인다.
이렇게 둘과 항상 찬 바람 부는 표정으로 다녀서 겨울 여왕이란 별명이 붙은 정미랑.
4학년에 있는 마법사 여자를 포함해서 4대 계절 미녀라 부른단다.
마지막 마법사의 별명은 가을 단풍.
그중 세 명의 미녀가 오늘 나한테 관심을 보인 거고.
“그러니까 애들이 전부 널 노려보는 거지.”
막 설명이 끝난 시점에서 난 유신의 방에 있는 의자에 앉은 채 후하고 한숨을 내쉬었다.
꽤 재밌는 얘기잖아.
- 공부, 훈련도 아니고 오늘도 또 요리입니까?
레베카와 다른 AI다. 굵고 단단한 남성의 목소리가 유신을 꾸짖었다.
“상관하지 마.”
이쪽 AI 시스템은 유신의 아버지가 강요와 압박으로 넣어 둔 감시 체제다.
“마스터에게 보고하겠습니다.”
“하든지.”
유신은 뒷일을 생각하지 않았다. 자신을 감시하는 AI와 기꺼이 투쟁을 감수했다.
그럼으로써 얻어 낸 것이 그의 방이요, 자유이니.
난 유신에게 투사란 이름이 아깝지 않다고 생각했다.
꼭 주먹 쥐고 싸우는 것만이 싸움이 아닐 테니까.
그 투쟁으로 얻어 낸 공간이 바로 이 방 아닌가.
특수종 사관 학교의 방은 원한다면 어느 정도 개조가 가능하다.
유신은 원했고, 개조했다.
한쪽에는 인덕션 레인지와 환풍구를 달고 주방 시스템을 구축했다.
요리에 진심인 남자이기에 가능한 짓이다.
덕분에 얻어먹는 나도 기쁘고.
“초콜릿이다. 먹어 봐.”
후식으로 먹으라며 유신이 움푹 파인 유리그릇을 내줬다.
그 안에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운 반고체 상태의 초콜릿이 담겼다.
숟가락으로 퍼서 입 안에 담으니, 뭐라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오묘한 단맛이 뇌를 자극했다.
“흠.”
진짜 맛 좋은데.
“내 비장의 무기지.”
유신이 내 표정만 보고서 콧대를 높였다.
그래, 네가 요리 하나만큼은 진심이지.
“여자 셋이 나한테 관심 좀 보인다고 날 향해 살기를 뿌린다는 거냐?”
“그래.”
아까 하던 얘기를 마저 꺼내니, 유신이 고개를 끄덕였다.
무려 4대 계절 미녀 중 셋이 나에게 관심을 보인 덕분에.
수컷 또는 그들을 추종하는 일부 무리가 날 향해 송곳니를 보인다는 거다.
할 일 더럽게 없는 놈들이네.
어차피 자기들이랑 뭘 할 것도 아닌데 질투는.
“조심하라고.”
당연하게도 사관 학교는 실기 시험도 동반된다.
그중 입학한 뒤 처음 보는 실기 시험은 이 학교의 명물이자, 전통이다.
대련.
말이 대련이지, 반쯤 목숨 내놓고 싸워 보자는 거다.
그래서 1학년 중에 누가 더 강한지, 길고 짧은 걸 가늠해 보자는 그런 자리.
구경하는 이들에게는 축제요.
1학년에게는 매년 한 번 있는 자신의 능력을 선보이는 자리다.
여기서 잘하면 여기저기 후원도 받고 용돈도 받고 그러는 거다.
돈 없이 재능만으로 들어온 특수종에게는 기회의 장이기도 했다.
“작정하고 널 노릴 거다.”
유신은 바싹 구운 비스킷, 이것도 수제다.
수제 비스킷 위에 초콜릿을 입히며 말했다.
아삭.
깨물어 먹어 보니 이 맛 또한 명품이로다.
“나중에 넌 꼭 디저트 맛집 차려라.”
“아버지 돌아가시면.”
유신의 아버지는 현존하는 군수 산업체 중 하나인 블루 코퍼레이션의 주인.
불멸자이자, 최고의 바람둥이 중 하나다.
일찍 죽을 일이 없는 사람이기도 하다.
“그래.”
난 말 없이 어깨를 토닥여 줬다.
“당장 네 걱정이나 해라.”
유신은 반대로 그런 날 염려했다.
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당장 내일모레 단체 대련의 장이 열리고.
미녀의 관심 덕분에 개념 없는 수컷을 비롯한 추종자 무리가 날 노린다.
그래서 뭐 어쩌란 건지.
“참고로 말하지만 난 1차 때 바로 기권 탈락 예정이다.”
유신이 가슴을 펴고 말했다.
나도 나지만, 얘도 얘다.
사관 학교의 관점에서 보자면 나만큼이나 얘도 꼴통이 아닐까 싶었다.
“너도 어지간하면 기권하든지.”
“글쎄다.”
그럴 필요가 있을까.
이후를 상대해 보고 깨달은 게 몇 개 있고 뇌전력을 얻은 덕분에 암페어로 수준이 보여서 아는 게 있다.
미랑이가 8암페어.
정미랑의 특기가 불멸 기예임을 고려했을 때, 육체 능력이 8암페어 이상이라는 거, 그거 진짜 대단한 거다.
여름 햇살 선배는 13암페어 이상.
눈으로 보이는 뇌전력의 양만으로 보자면 이후 이상의 괴물이었다.
로니도 만만찮았다.
맞잡은 손에 붙은 굳은살이 증명하듯 그녀의 암페어는 9암페어.
정미랑보다 높다.
그럼 나머지 1학년, 동기들의 수준은 어떠한가.
그게 이 대련의 핵심 아니겠나.
날 상대할 놈들의 수준, 그래서 하는 말인데.
“재밌을 것 같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유신은 그런 날 보더니 물었다.
“너 맞는 거 좋아했냐? 그런 취향이야?”
아니다. 이 새끼야.
* * *
쟝이 외인부대에 들어간 건 열다섯 때였다.
미성년자라는 건 문제가 될 수 없었다.
쟝의 세상에서는 나이가 어리거나 많은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열다섯, 쟝의 세상은 전장과 싸움이었다.
그런 쟝이 특수종 사관 학교에 입학하게 된 건 행운이 잇따라 따라온 결과였다.
불멸자로의 각성.
각성 다음 날 바로 전쟁 포화에 휩쓸렸음에도 살아남았으며.
이후 사관 학교 조교의 손에 구해진 것까지.
태생은 프랑스지만, 제3국을 떠돌며 전장의 포화에 살던 소년 쟝이 자라서 특수종 사관 학교의 생도가 된 거다.
‘애들 장난도 아니고.’
전장을 떠돌던 쟝에게 필기시험은 가치를 느끼기 힘든 행위였다.
그래도 상위권 성적은 자신 있었지만, 결과는 어떠한가.
참패다.
하물며 수석이 그 세최특의 아들이란다.
‘미리 시험지라도 구했겠지.’
어릴 때부터 불법의 세계에 살던 쟝이다.
사람은 아는 것만큼 보는 법.
그에게 온신은 온실 속의 화초이자, 배경만 믿고 설치는 머저리였다.
그러니.
‘팔 하나만 가져가마.’
1학년 전체 대련 시작.
그 첫 번째 상대로 자신을 만난 건 불운이리라.
눈앞에 온신이 보인다.
긴장한 기색조차 엿보이지 않았다.
자신을 만만하게 보는 걸까?
그럴 수도 있었다.
전장을 떠돈 이력을 말한 적은 없다.
그저 혼혈 등급의 불멸자.
딱 그렇게만 자신을 보고 있을 것이다.
그럼 큰 오산이겠지.
자신은 혼혈의 피 때문에 이 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 전장을 떠돈 경험 덕에 이곳에 있는 거니까.
종합 전투 능력 B+.
그게 쟝을 향한 사관 학교 교수의 평가다.
참고로 일부 변신족을 제외하면 대부분 1학년의 종합 전투 능력은 D 등급이다.
쟝은 이곳에 와서야 자신의 전장 경험이 얼마나 특출 난 것인지 알 수 있었다.
그에게 필요한 건 특수종으로서의 적응 기간뿐.
그리고 그 적응도 이제는 끝났다.
이제 쟝은 포탄이 넘나드는 전장에서도 소리에 놀라 까무러치지 않는다.
쟝은 상대를 향해 운이 나쁘다고 말하려다가 관뒀다.
말은 쓸데없다. 행동만이 그 사람을 대변하는 것.
쟝은 자신이 믿는 바대로 했다.
“서로 목숨을 위협하면 제압한다. 시작.”
시큰둥한 조교의 말에 따라 쟝은 땅을 박찼다.
육각형의 주문과 초능 결계로 만든 대련장이다.
그 반대쪽에 선 온신은 움직이지 않았다.
쟝은 승리를 확신하며 팔을 뻗었다.
변신족에 버금간다고 할 수 없지만, 일반인 기준에서 보자면 매서운 돌격이었다.
쩡!
타격음, 그리고 천장이 빙글 돈다.
빙글빙글.
쟝의 세상이 돌기 시작했다. 그리고 곧 까마득한 암흑의 강 안에 빠졌다.
쟝은 정신을 잃었다.
* * *
이 새끼는 뭘까?
눈에 보이는 능력은 3.5 암페어.
신체 능력은 나쁘지 않다.
뛰어난 운동 능력을 갖추고 훈련을 거듭한 수준.
하지만 자신을 노리는 방식이 어설펐다.
내가 만만하니까 그런 건가.
그럴지도.
일반인에 무능력자라 생각하니까 그럴 것이다.
얼굴이 까만 외국인 유학생은 일언반구 말도 없이 달려들었고.
난 놈이 손을 뻗는 타이밍에 슬쩍 발을 뻗어 카운터를 날렸다.
상대는 턱이 들렸고 가드가 없었다.
그러니 나한테는 이게 당연한 결과다.
염력과 뇌전력은 쓸 필요도 없었다.
처음부터 쓸 생각도 별로 없었다.
이후 같이 무식한 변신족 새끼가 상대가 아니라면.
상대의 움직임이 보이고 내 운동 능력으로 따라잡을 수 있다면.
이런 결과가 당연했다.
어릴 때부터 수없이 맞고 구르면서 배운 게 내 몸에 그대로 새겨져 있으니까.
“우리 아들 어디 가서 맞고 다니면 엄마 가슴 찢어진다.”
어머니의 가르침이었다.
아버지가 말하길 그건 그대로 내 친조모의 가르침이었다고 한다.
실제로 할머니가 와서 자세를 봐 줄 때도 있었다.
하여간 그렇게 배우고 익힌 나날들의 결과다.
“끄륵.”
거품을 문 검은 유학생 친구가 바닥을 기었다.
궁둥이를 들어 올린 채로 얼굴을 바닥에 붙이면 다운, 기절이다.
“……유온신 승.”
심판으로 나선 조교가 한 손을 들며 말했다.
“한 방?”
“저거 쟝 아니야?”
“외인부대의 쟝?”
“뭐야. 무능력자라면서.”
“지금 건 순수하게 육체 능력으로 해결한 거다. 바보들. 무능력자라도 훈련으로 이 정도는 할 수 있어.”
다들 떠든다.
난 그 말을 한 귀로 듣고 잘 곱씹고 되새겼다.
칭찬이잖나.
기분이 들뜨잖나.
거, 참 즐겁구나.
“운이 좋았네요.”
난 말하고 돌아섰다.
생도 1학년이 모인 자리, 육각형의 결계 안.
난 날 지켜보는 모두에게 알렸다.
만만하게 덤비면 뒈지는 거라고.
그리고 잠시 쉬었다가 다시 대련이 이어졌다.
예선 2차전이다.
찌잉!
상대는 초능 특수종이었다. 그것도 염동력자.
음, 이게 보이네?
암페어로 형상화되어 보이는 뇌전력이 가느다란 선이 되어 움직인다.
그걸 보고 피하는 거야 일도 아니었다.
힘차게 던진 야구공보다 느린 속도였다.
실제로 160km 강속구라도 피할 수 있는 나다.
펀칭 머신을 보고 회피 훈련도 얼마나 열심히 했는데.
이건 일도 아니었다.
피하고 접근한다.
“바보!”
염동력자가 웃으며 외쳤다.
응, 알아.
놈의 바로 앞, 내 발밑에서 염동력자가 미리 준비해 준 트랩이 발동.
위로 솟는 염동의 발판이다.
아마도 이걸 수없이 이미지 트레이닝해서 연습한 거겠지.
염동력을 쓰는 패턴이 보통 이렇다.
이미지 트레이닝을 반복해서 어떤 형상을 구현하는 것.
지금 상대가 만든 건 덫이었다.
난 땅을 딛는 척하다가 발을 뒤로 뺐다.
훙.
염동력자와 내 사이로 무의미한 무형의 압력이 솟았다.
미안하다. 친구야, 다 보이더라.
슉.
가볍게 뻗은 왼손 잽에 염동력자가 몸을 튼다.
난 잽을 뻗는 척만 하고 오른손 훅으로 불쌍한 염동력자 친구의 턱을 때렸다.
빡.
눈알이 휙 돌아가며 앞으로 훅 쓰러지는 걸 안듯이 받고 얌전히 옆으로 내려놨다.
“……또 한 방?”
누군가 중얼거렸다.
어째 원펀맨이 된 기분에 난 양손을 허공에 들었다.
승자의 퍼포먼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