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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격 외 혈통 천재-417화 (417/488)

외전 8. 여자 셋

“끄으으윽.”

아프다. 그냥 아픈 게 아니라 전신이 찢어질 듯 아팠다.

과장 조금 보태서 피부 위 솜털까지 아팠고.

내장이 제멋대로 비틀리는 기분도 들었다. 아니, 실제로 장이 배배 꼬이는 중인지도 모른다.

그만큼 아팠다.

아랫배를 움켜쥔 채 침대에 웅크리고 있자,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온신, 괜찮나요?”

레베카의 목소리가 머리 위에서 울렸다.

난 괜찮다는 의미로 손짓했다.

침대 한쪽 모서리에 걸쳐 앉은 채로 고개를 밑으로 처박고 있으니.

좀 나아지는 것 같았다.

“온신, 구급 서비스를 호출해야 할 것 같아요.”

AI 레베카는 흐르는 땀의 양, 내 호흡, 체온, 모든 걸 보고 판단을 내렸다.

하지만 괜찮다.

이 정도는 정말 괜찮았다.

“진짜 괜찮아.”

목이 잠겼다. 그만한 고통이었다.

뇌전을 쏴서 뇌를 태우는 건 부작용이 남달랐다.

극렬한 통증이 뒤따랐다.

그 와중에 묵직한 피로가 뇌를 눌러 마치 물에 잠겨 있는 기분도 들었고.

그게 아니라면 꿈인 것 같기도 하고.

사실 초능을 각성한 것부터 지금까지가 전부 꿈인가?

깨어나면 아버지 어머니가 날 내려다보며 ‘얘 웃는데요?’ ‘놔둬, 좋은 꿈 꾸나 보지.’ 같은 말을 하는 건 아닐까?

아니다. 그 정도로 현실 감각이 망가지진 않았다.

“통증이 무서운 수준인데, 어떻게 그걸 참는 거죠?”

레베카가 묻는다. 난 웅크린 채로 입을 열었다.

“변신족 훈련 중에 극기 단련이란 게 있어. 본능 컨트롤을 위한 거지. 그 극기란 참고 견디는 거고, 난 내가 변신족이 될 줄 알고 조기 교육을 좀 열심히 받았어. 그래서 익숙해.”

어머니와 아버지의 가르침이다. 그때 힘들었냐고?

힘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괴롭진 않았다.

그 어떤 순간에도 부모님이 날 사랑한다는 건 여실히 느꼈으니까.

그런데도 반은 오기, 반은 고집으로 버틴 일상이었다.

난 지는 게 싫었다.

그 훈련을 중간에 관두면 내가 지는 것처럼 느꼈었다.

“후, 이제 좀 낫다.”

잡생각을 하고 있자니, 통증이 한결 누그러졌다.

그냥 잘 수 없을 정도로 진득한 땀을 흘렸기에 샤워실로 직행했다.

그야말로 안 올라가는 손을 들어 씻었다. 바들바들 떨며 몸을 닦아 냈다.

전신 근육이 욱신거렸다. 과도한 운동으로 근육통이 생긴 것 같았다.

번개 부스터는 함부로 쓰면 안 되겠는데.

“그건 함부로 쓰면 안 될 것 같습니다. 온신.”

레베카가 내 속마음을 말로 뱉었다.

몽롱한 탓에 순간적으로 정말 내 마음을 읽은 줄 알았다.

“동감해.”

씻고 물기를 대충 말린 뒤, 침대에 몸을 던졌다.

푹하고 매트리스가 부드럽게 몸을 받쳐 준다. 난 그대로 눈을 감았다.

한 조각의 꿈을 꿀 수 없을 정도로 깊은 잠이 찾아왔고.

난 다가온 잠을 반겼다.

잤다. 아주 푹, 누가 흔들어도 안 일어날 만큼.

얼마나 잤는지 모르지만, 깊디깊은 수면의 세계에 빠졌다가 일어나자 눈곱이 가득했다.

손으로 비벼서 떼고 몸을 일으키자, 어째 몸이 찌뿌둥했다.

하지만 잠들기 전처럼 아프진 않았다.

회복 완료, 부활 완료다.

“온신, 회복을 위해 굳이 깨우지 않았어요.”

일어나자마자 들리는 레베카의 목소리.

“얼마나 잤는데?”

“이틀, 정확히는 38시간 28분 21초죠.”

응? 이틀을 잤다고?

어쩐지 깨자마자 배가 고프더라.

냉장고에서 물을 꺼내 마시고 샤워실로 직행.

씻은 뒤 운동복을 입고 가슴에 단, 녹색 선이 들어간 흉장을 손으로 쓸어 내며 밖으로 나갔다.

씻는 내내, 라면 생각이 간절했다.

꼬들꼬들한 면에 달걀을 풀어 보글보글 끓인 라면.

머릿속에 면발의 탱탱함이 떠오르자 씁하고 절로 입맛을 다시게 했다.

테스트가 끝나면 전 생도에게 휴식이 주어진다.

짧으면 이틀에서 사흘, 길면 나흘이 넘는다.

이번 휴식은 사흘.

나에게는 아직 하루 더 쉴 날이 남았다.

식당으로 향하는 사이, 날 본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불멸자라면 모를까, 들릴 만한 거리가 아니었다.

그저 눈빛, 말투를 보니 뭔가 묘한 기분이 들 뿐.

뭐, 뻔한 얘기겠지.

무능력자 주제에 참 바쁘게도 산다는 둥.

부모 믿고 날뛴다는 둥.

그중에는 날 좋아하는 사람들도 가끔 있다.

아니, 좋아한다기보다는 동정이라고 해야 할까?

그저 열심히 하려고 하는 사람 건드리지 말고 놔두라는 사람들이다.

무시했다.

들으면 뭐 할 거고, 알면 뭐 하나.

내 인생에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들인데.

그리고 지금은 그 어떤 것보다도 배를 채우는 게 우선이었다.

“이모님, 라면 하나만.”

식당에 도착해서 일하는 분에게 살갑게 부탁하니.

“온신이 왔구나.”

식당 이모님이 이전보다 배는 반갑게 날 반겼다.

준비된 끓는 물에 수프와 면을 넣으며 금방 기다리라 하신다.

“토핑은?”

“계란 하나만.”

“좋아요.”

일하는 아주머니가 룰루랄라 라면을 끓여 내주며 말했다.

“축하해.”

뭘?

되물을 기력조차 없었다.

번개 부스터 덕분에 끙끙 앓다가 이틀을 내내 자고 나온 길에 만난 라면이다.

지금은 정미랑 만큼이나 먹는 게 중요했다.

라면 그릇을 들고 식당 구석에 앉아 후루룩하고 먹었다.

크, 이 맛이지.

아그작.

반달 모양으로 잘린 단무지를 하나 씹고.

면을 후 불고 입 안에 넣어 씹는다. 꼬들꼬들한 면이 입 안을 휘젓고 잘게 잘려 목구멍으로 쏙.

짭짜름한 국물을 한 모금 마시고 이번에는 김치 한 조각.

적당히 익은 김치의 시큼함이 미각을 자극했다.

먹고 또 먹고.

“밥 줄까?”

“주세요.”

배식구 바로 앞 테이블에 앉아 있으니, 이모가 손수 밥까지 가져다줬다.

푹 말아서 수저로 대강 휘저어 퍼먹었다.

몸에 좋은 음식은 아니지만, 내 뇌에는 훌륭한 한 끼다.

더없이 행복했다.

“끄윽.”

정말 게 눈 감추듯 해치웠다.

꿀맛이었다.

이 맛에 사는 거지.

이 맛에 먹는 거고.

적당한 포만감이 전신을 나른하게 만들었다.

들어가서 더 잘까?

자려고 하면 얼마든지 더 잘 수 있을 것 같았다.

드륵.

그런 내 앞에 누군가 의자를 당겨 앉았다.

“시작은 나쁘지 않았어.”

아, 정미랑이다.

내 미랑이.

상큼한 미랑이, 아름다운 미랑이, 겉은 차갑지만, 속은 따뜻한 미랑이.

“정미랑.”

“연상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버릇은 고쳐. 여기서는 내가 선배이기도 해.”

눈빛은 가라앉은 빙하와 같다.

눈을 마주치니, 맨몸으로 알래스카 빙하 사이를 헤엄치는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도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긍정적이었다.

“믿고 있어.”

차갑다. 하지만 그 안에 온기가 느껴진다.

그 말 한마디는 알래스카 빙하에서 헤엄치다가 나와 쬔 모닥불이었다.

미랑은 그 말만 남기고 일어섰다.

드륵.

의자가 끌리고 일어나 돌아선다. 심장이 두근거렸다.

미랑은 어릴 때부터 할 말만 하는 여자였다.

그런데 지금 나한테 믿고 있단다.

왜 저런 말이 나오는지, 그 이유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들뜰 뿐이다. 심장이 두근거리고 머리에 후끈 열이 올랐다.

이대로 결혼하자고 하고 싶었다.

애는 셋쯤 낳고.

첫째는 내 이름과 미랑의 이름을 섞어서 유미신 또는 유온랑이라고 지으면 어떨까.

“가요.”

돌아선 미랑이 말한다. 그제야 그 뒤에 선 남자의 얼굴이 보였다.

이후였다.

훅하고 고공 상승하던 기분이 저기 땅속 나락으로 추락했다.

들뜬 심장이 금세 원래대로 돌아왔다.

우두커니 선 이후가 날 빤히 바라봤다.

마치 ‘네까짓 게?’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놈이 뭐라 입술을 달싹거렸다.

아직 멀었다고 말하려고?

아니면 미랑이를 넘보지 말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결국, 이후는 소리를 내뱉지 않았다.

대신 입술을 꾹 다문 채, 나만 지긋이 노려보다가 돌아섰다.

저 새끼는 시비를 걸 거면 화끈하게 걸든가.

이제는 염동력과 뇌전력을 갖췄으니 해 볼 만할지도 모르는데.

아니, 아니지.

냉정해져야 한다.

지금 당장 시비를 걸어서 싸우는 건 하수다.

싸우는 건 능력을 조금 더 갈고닦은 뒤에.

그때 보자, 이후 이 고양이 새끼야.

“캬릉.”

마음속으로 어금니를 박박 갈다가 나도 모르게 짐승의 울음소리를 냈다.

돌아서 가던 이후가 주춤하더니 뒤를 슬쩍 본다. 그 눈빛에는 어떤 흔들림도 없다.

그야말로 라이벌을 경계하는 눈빛 그뿐이다.

새끼야, 두고 보자.

“음, 이거 내가 무조건 낫다고 할 순 없겠네.”

음?

미랑과 이후의 등장에 너무 정신을 팔았는지 바로 옆에 붙은 인기척을 못 느꼈다.

고개를 돌려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니, 그럴 만도 했다.

불멸자 로니다.

기척을 감추는 데 재능이 뛰어난 특수종이잖나.

옅은 갈색의 머리칼과 칠흑같이 검은 눈.

오늘은 머리를 땋지 않고 길게 풀어서 늘어뜨렸다.

그 길이가 등을 넘어 허리에 닿을락 말락 했다.

찰랑거리는 머리칼이 바로 눈 옆에 있었다.

샴푸를 뭘 쓰는지 훅하고 좋은 냄새가 코를 간지럽혔다.

“너 눈 높구나. 정미랑이라니, 2학년 퀸이잖아.”

눈으로 웃으며 말한다. 뇌쇄적이란 말은 이럴 때 써야 할 것이다.

부드럽게 휘어진 눈꼬리가 남자의 가슴에 불을 지핀다.

로니가 나한테 말을 거는 것만으로 주변에서 살기가 느껴졌다.

수컷 몇 놈이 그르렁거리며 날 보는 것 같았다.

“어, 그런가.”

눈이 높다니, 미랑이랑은 어릴 때부터 알고 지낸 사이니까.

특별히 내 눈이 높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2학년 퀸이라는 말에는 동감이었다.

“겨울 여왕이라고 불린다던데?”

화사하게 웃는 로니는 활짝 핀 꽃과 같았다.

정미랑과 겨울 여왕이라.

퍽 잘 어울리는 별명이었다.

난 활짝 핀 꽃 로니에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어쨌든 축하해.”

뭘 축하한다고 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로니가 손을 내밀었고 난 그 손을 맞잡았다.

부드럽고 고운 손은 아니었다.

맞잡은 손에 까슬한 굳은살의 감촉이 느껴졌다.

겉으로는 이렇게 화사한 꽃과 같아도, 한 명의 특수종으로서 훈련을 게을리하지 않는 모습이 절로 떠올랐다.

“내 손 잡고 이대로 식장으로 갈 거 아니면 놔줄래?”

나도 모르게 같이 가고 싶다고 할 뻔했다.

내 마음에는 정미랑밖에 없는데.

정말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

요동치는 심장을 속으로 크게 꾸짖고 손을 놨다.

“힘내고.”

로니가 어깨를 털고 돌아선다.

아, 근데 뭘 축하한다는 거지?

“너구나, 유온신이.”

로니에 이어 이번에는 다른 여자가 말을 건다.

오늘 무슨 날인가.

눈썹이 짙고 키가 크고 콧대가 높은 여자였다.

여자에게 이런 말이 어울리는지 모르겠지만, 시원시원한 외모였다.

성큼성큼 다가오는 모습에 자신감이 넘쳤고 주변 시선을 확 끌어당기는 매력이 넘치는 여자였다.

사관 학교의 모든 복장에는 각 학년을 표시하는 흉장이 달려 있다.

1학년은 녹색.

2학년은 파랑.

3학년은 노랑.

4학년은 빨강.

졸업 이후는 주황.

조교부터는 어떤 표식도 없다.

난 녹색, 로니도 녹색이었고.

미랑은 파랑이었고.

지금 내 눈앞에 서서 존재감을 드리우는 여자의 흉장에 달린 색은 노랑이었다.

귀 위까지 짧게 자른 머리칼은 금발, 눈은 파랗다.

행동, 표정 모든 것에서 생기가 느껴진다. 보기만 해도 에너지가 넘치는 선배였다.

“라면으로 때워서 배가 차? 특수종이라면 고기를 먹어야지. 고기 사 줘?”

“아니, 이미 배는 부른데요.”

“겨우 그거 먹고? 하는 짓에 비해서 위장이 작구나!”

목소리 한번 더럽게 우렁차다.

드륵.

3학년 선배가 한 발로 의자를 끌어내더니 옆으로 툭 밀어 찼다.

의자가 쭉 밀렸다.

그 뒤에 테이블에 양손을 올린 채로 날 물끄러미 바라봤다.

너무 빤히 쳐다보니 나도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게 됐다.

곧고 바르다. 눈빛에 그런 기운이 담겼다.

그리 날 빤히 보던 선배는 훅하고 고개를 내밀었다.

방심하는 사이, 그녀의 얼굴이 훅 가까워졌다.

피하고 말고 할 만한 타이밍이 아니었다.

그렇게 그녀의 입술이 내 이마에 닿았다.

쪽 소리가 두개골을 울렸다.

“너 내가 찜. 하하하하!”

그걸 끝으로 돌아서 가 버린다.

……뭔데?

황당해서 말도 안 나온다.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볼 뿐.

떡 벌어진 어깨와 균형 잡힌 몸.

뿜어지는 존재감이 주변 모두의 시선을 빨아들인다.

참으로 독특한 매력의 여자였다. 아마도 변신족이 아닐까 싶다고 생각한 순간.

옆으로 누군가 바짝 다가와 앉았다.

“이 미친 자식.”

유신이었다.

또 다른 여자인가 했네.

“너 무슨 짓을 한 거냐?”

얘는 또 왜 이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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