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9. 구멍이 없는 세계 (4) - 완
평화? 좋지.
하지만 그 평화라는 게 가만히 있는다고 오는 건 아니지 않나.
가장 좋은 방어는 공격이란 말이 있다.
선제 방어.
난 그런 개념으로 이 프로젝트를 실행했다.
모두가 합류한 프로젝트.
미션 역관광이다.
당하기만 하고 살라는 법은 없으니까.
“과연 세최특이라고 해야 하나. 발상이 참.”
전초기지, 꽃밭 앞에 모인 화림 사장이 말한다.
화림 사장은 이제 남명진이 아니다.
호남이 형이었다.
남명진 사장은 이전 사건을 끝으로 은퇴했다.
그만두면서 나한테도 전화를 걸더라고.
“그때는 미안했다.”
퇴사했을 때의 일을 아직도 마음에 두고 있었나 보다.
거, 다 지난 일인 것을.
“네, 잊지 않겠습니다. 영원히 기억할 겁니다.”
물론 지난 일이라고 해서 다 용서하고 봐준다는 건 아니다.
내 모친을 미끼로 삼았다.
그걸 용서하는 건 호구다. 후레자식이다.
그나마 안 때려죽인 걸 다행으로 알아야지.
“……그래.”
한동안 남 사장이 물러난 게 나 때문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반쯤은 맞았다.
남 사장이 은퇴하고 은둔 생활을 시작한 이후, 화림과 NS의 관계는 돈독해졌으니까.
호남이 형이 생긋 웃는다. 이쪽도 정말 눈이 부신 미남이다. 웃는 것만으로 주변이 밝아지는 것 같았다.
“취임하고 나서는 정신이 하나도 없다.”
“그래도 좋죠?”
호남이 형은 자신의 계획을 착실히 진행 중이었다.
화림을 먹고 순혈 정가를 새로 단장한다는 계획.
그 계획을 기남이가 알음알음 돕는다고 들었다.
겸사겸사 나도 돕는 중이다.
혼자서 무소불위의 권력을 쥐겠다는 것도 아니고 시스템을 만들어 이 사회에 이바지하겠다는데, 좀 도우면 어떤가.
“앞으로 많은 게 변할 거다. 이제 불멸이고 변신이고 편 가르기 하던 시절은 지났어.”
호남이 형은 예언가도 아니면서 자신했다. 팔짱을 끼며 말하는 자세가 그럴듯했다.
회사 대표가 되더니 관록이 붙었다.
난 호남이 형의 말을 곱씹어봤다.
그래, 그럴 수도 있지.
미래를 누가 아나.
내가 아는 건 하나다.
지금 당장 이계 너머의 ‘유니온’이란 놈을 때려잡겠다는 것.
아, 그 예언가란 여자가 NS에 합류했다.
뻔뻔한 친구였지.
“제가 봤던 모든 사람을 통틀어, 당신만이 미래를 바꿨어요. 곁에 있고 싶습니다.”
정중한 요청이었다.
“이력서부터 가져오지?”
그래서 나도 정중히 반려했다.
몹시 당황한 예언가는 말을 더듬었다.
“에, 나, 예언가인데요?”
“그래서? 여기 NS야, 청탁 안 받아.”
사실 받는다. 내 마음에 들면 곧바로 채용이다.
괜히 내가 사장이 아니라고.
하지만 이 여자는 아니지.
예언? 미래?
난 그딴 거 안 믿는다니까.
실제로 그걸 증명하지도 않았나.
인류는 멸망하지 않았다.
대신 지금 새로운 시대를 개척 중이지.
그렇게 화이트홀을 넘어, 적응 기간까지 전부 보낸 뒤였다.
“준비 끝났습니다.”
지부장이 말했다. 눈썹이 진하고 얼굴에 진한 흉터가 있는 중년 남자다.
NS의 이계 지부장은 특수종이 아니었다.
일반인 용병 출신이다.
이 사람을 뽑은 이유?
기가 막히게 잘 싸우더라고.
어지간한 특수종은 씹어먹더라.
함정을 파고, 상대의 사각을 이용하고.
무엇보다 병력을 운용할 줄 안다.
말이 지부장이지, 이쪽은 군대 비슷한 형태로 돌아가니까.
이쪽에서는 사령관이나 다름없었다.
“상황은?”
“유니온이 셋입니다.”
최근 밝혀진 사실이다.
인베이더가 사라진 사이, 인류는 이계 개척에 전력을 다했다.
이후 올드 포스와 엑스큐라시에도 꽤 멀리까지 이계를 탐험한 개척팀이 몇 나왔으나.
그들은 전부 실패했다.
이유는 하나다.
경계를 넘어설 때면 어디선가 규격 외의 인베이더가 나타난다고.
네임드 그 이상의 괴물이란다.
사이오닉 필드로 모든 공격을 막고, 손톱으로 다가오는 모든 걸 찢어발긴다고 했던가.
어딘가 익숙하지 않나.
내가 죽인 놈이랑 무척 비슷했다.
특수종 세상에서는 그런 인베이더를 유니온이라 부르기로 했다.
인베이더의 집합체란 의미다.
그 유니온은 꽃밭에도 있었다.
막 출발하려는 참에 누군가가 말을 툭 걸어 왔다.
“특수종의 연원이 정말 이쪽 세계라고 생각하나?”
이 양반은 은퇴 안 하나.
남 사장은 퇴직했는데.
유일부대장이 여기까지 쫓아왔다.
“그럼요?”
오래된 얘기다. 특수종은 그냥 돌연변이인가?
혹시 아주 먼 옛날 이쪽 세계에 살던 일부 지성체가 넘어온 건 아닌가 하는.
단군 할아버지와 호랑이가 맞담배 피우던 시절까지 거슬러가 봐야 알 수 있는 문제다.
그러므로 알 수 없다.
남은 사료도, 자료도, 어떤 것도 없으니까.
“그게 중요합니까?”
알 바 아니잖아.
어쨌든 난 지금 인간이고 특수종이며 혼혈이다.
그리고 내 눈앞의 유니온이라 부르는 저 인베이더는 적이다. 죽여야 할 대상이다. 나한테는 그거면 충분했다.
“좋은 인베이더는 뒈진 인베이더뿐.”
어디서 들은 말을 적절하게 섞어 뱉은 난 그대로 발을 뗐다.
어느새 유니온이 버티고 선 곳에 도착했으니까.
꽃밭을 넘어 향한 곳이다.
이 세계에선 어디서든 인베이더가 튀어나왔다.
그렇게 일주일가량 오롯이 한 방향만 보고 움직이자, 유니온이 있는 곳에 도착했다.
개척 탐사의 경계선이다.
기척을 감추고.
변신족의 괴력을 담은 일격을 목 뒤에 꽂는다.
콰직.
빛의 피가 뿌려진다.
그거로 한 놈을 죽이고.
다시 전진.
이번에는 이틀 뒤에 유니온을 만났다.
혹 말을 할 줄 아나 지켜봤지만, 의념을 날리는 놈도 없었다.
하긴, 서로 이해도 할 수 없는 존재 아닌가.
말을 할 줄 안다고, 의념을 전한다고 해서 상대를 이해할 수 있다는 건 아니다.
인베이더는 언제나 침략자였을 뿐.
그리고 인류는 언제나 그들을 맞이해 싸웠을 뿐.
오롯이 서로 죽이기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그렇게 싸운 우리다.
두 번째 유니온을 죽이고.
다시 하루 거리에 있는 세 번째 유니온을 죽인 뒤, 주변을 살폈다.
반은 척박한 땅이었고, 반은 꽃과 풀이 드문드문 핀 언덕이었다.
언덕과 구릉 몇 개가 시야를 막는 걸 제외하면 트인 땅이다.
“안 나오네요.”
플랜트 형태의 인베이더도 없다.
유니온도 없다.
넘버링에 속한 인베이더도 안 보인다.
꽃, 풀, 돌, 땅뿐.
고로 자원만 남았다.
“와아아아!”
누군가 함성을 내질렀다.
말이야 쉽지, 근 한 달을 고생한 여정이다.
제대로 씻지도 못하고 자는 것도 간이 텐트를 썼으며, 밤에 돌아가며 경계 근무까지 섰다.
“돌아갑시다.”
곧 1차 원정의 끝이다.
언덕 너머로 새로운 땅이 드문드문 보였다.
안개가 낀 곳도 있고.
절벽 따위가 있는 것도 보인다.
저 너머에는 또 다른 게 있겠지.
하지만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였다.
일단은 여기까지 인프라를 구축하고 더 정비한 뒤.
시간 날 때마다 이 안쪽을 살펴보면 될 일이었다.
재밌을 것이다.
그것도 무척이나.
인베이더가 나올 때마다 반가울 것이고.
그들이 숨겨 둔 무언가를 발견해 깨부술 때마다 희열을 느낄 것이다.
침략을 받을 때와는 다른 기분이다.
바이킹의 영웅이라도 된 듯.
난 손을 높이 들었다.
“우어!”
별 의미도 없는 괴성에 사람들이 환호를 울렸다.
직감과 육감의 영역 너머.
나 또한 미래를 엿봤다.
아마 앞으로도 난 인베이더와 싸울 것이다.
다만, 이제는 선택의 문제가 될 것이다.
지구에 더 홀이 열리지 않는다면.
평화는 유지될 것이므로.
의미가 남다른 평화다.
직접 제 손으로 이룩해 쟁취한 안식 아닌가.
“다들 고생했어요.”
1차 원정이 끝나고.
우리는 반년 뒤에 2차 원정을 나섰다.
반년 동안 탐험한 곳을 교두보로 삼기 위해 이런저런 설비를 들였고.
2차 원정도 비슷하게 끝났다.
아, 이번에는 넘버링 인베이더가 좀 많이 쏟아졌다.
유니온은 하나만 봤고.
네임드가 둘 나왔다.
청기사를 닮은 전신이 타오르는 갑주를 입은 놈이었고.
그건 협회 쪽에서 잡았다.
이전 전투로 쌓인 경험을 토대로 사이오닉 기어가 많이 발달했더라고.
나머지 하나는 어머니가 때려잡았다.
뿔이 난 오거였다.
뿔 끝으로 뇌전을 모아서 번개를 내리치는 놈이라, 썬더 오거 따위로 불렀는데.
오거의 품 안에 안기듯 바짝 붙은 어머니가 힘을 잔뜩 그러모아 오금을 깨고.
자세가 무너지는 놈의 턱을 부쉈다.
“엄마도 그동안 놀기만 한 건 아니거든.”
의기양양하시더라.
난 그걸 보며 손뼉을 쳤다. 인베이더 패는 솜씨가 아주 일품이시라고.
NS, 그러니까 내 회사의 원정 일정이 가장 빨랐지만.
그동안 다른 단체라고 놀진 않았다.
각 단체도 그동안 개척팀이 해 둔 일이 있더라고.
아, 그리고 정부는 예전부터 개척 전문팀을 운영했다고 한다.
이게 사실 지원도 별로 안 해 주고 반쯤은 놀고먹는 부서로 오해받기도 했는데.
정작 그 안에 들어간 이들은 정말 최선을 다했다.
올드 포스 소속 개척탐사팀.
프론티어 뱅가드라고 했던가.
그쪽에서 오랜만에 아는 얼굴도 봤다.
서로 노하우를 나누는 자리였는데.
어디서 봤는데, 딱 떠오르진 않았다.
그러자 상대가 배시시 웃으며 말했다.
“기효민, 오티 때 3등, 동기. 화림 입사 후 곧바로 퇴사, 이쪽으로 스카웃됐고 순혈 무명가, 아 시험 때 지각. 맞아. 동기.”
스스럼없이 자신의 이력을 밝히는 친구였다.
“어디 갔나 했더니.”
기남이도 아는 척을 했다.
독특한 친구였다.
보통 순혈 무명가의 불멸자는 이쪽 개척팀으로 많이들 지원한다고 한다.
두 가지 이유라고 하는데.
마음만 먹으면 일정 시간 근무를 제외하고 최고의 조건으로 놀고먹을 수 있다는 거고.
다른 하나는.
고속 재생 능력을 필두로 위험에 몸을 던질 수 있으니, 그들보다 개척에 적합한 이들이 없다는 거다.
내가 하나하나 힘으로 부숴서 원정을 이어 나갔다면.
이쪽은 몸으로 때운 거라고 보면 되겠다.
“유니온이 해결이 안 돼.”
기효민은 넉살이 좋았다. 말 몇 번 나누더니, 금세 다가와 저리 투덜거리곤 했다.
아버지를 통한 정부의 요청으로 그쪽 유니온도 내가 해결해 줬다.
이계에 들어갈 때마다 느끼는 건데.
모든 이계가 다 연결되어 있다고 말하는 새끼는 내가 볼 때 똥 멍청이다.
중력과 기상 환경이 달라도 너무 다르다.
그리고 정부의 땅에서 우리는 처음으로 ‘끝’에 도달했다.
계속 걷다 보니, 앞쪽에 구조물을 발견한 거다.
정부 지원으로 나선 14차 원정 때였다.
그리고 그 구조물은.
“에?”
아군의 것이었다.
그리 넓지 않은 작은 땅.
정부 소속 이계 중 하나, 원정 280일 만에 이뤄진 일이었다.
완전 정복이었다.
이후, 다른 땅도 비슷하지 않나 살폈지만.
전부 제각각이었다.
넓지만 인베이더가 적은 곳.
들어만 가면 인베이더가 무더기로 쏟아져 나오는 곳.
원정은 이어졌고.
그사이 여러 가지 변화가 있었다.
각 특수종을 가리지 않고 교육하는 사관 학교가 생겼고.
올드 포스, 엑스큐라시, 협회, 연맹의 각 단체는 토벌군이라는 하나의 통합 부대로 화합했다.
후대는 정말 하나가 되길 바라며 그렇게 만든 거다.
테러 단체 몇 개가 다시 고개를 들이밀기도 했지만.
“내 눈에 띄면 다 뒈지는 거다.”
그럴 때마다 나서서 분쇄했다.
테러범 머리 깨는 건, NS의 공익 사업 중 하나였다.
그리고 시간이 흐름에 변하는 게 꼭 이런 것들만은 아니었다.
“음, 오빠?”
어느 날 혜민이가 막대 하나를 들고 와선 날 불렀고.
아침 준비를 하던 난 고개를 들어 그 막대를 유심히 보게 됐다.
흰 막대 가운데에 있는 선명한 두 줄.
“4주래.”
“……먹고 싶은 거 하고, 하고 싶은 거 다 먹어.”
당황해서 말이 헛나왔다. 그만큼 기뻤다.
나도 애가 생겼다는 거다.
뭐든 해 주고 싶은 마음이 벌컥 들었다.
울컥하는 것도 좀 있었고.
그렇다고 울진 않았지만.
곧바로 부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셨습니다.”
드물게 어머니가 진심 놀라셨다.
아, 나 빼고도 다들 잘 사는 중이기도 했다.
일단 정기남과 마리가 식을 올렸고.
방귀태의 영향인지, 요한이 형은 끝내 최미남을 밖으로 빼냈다.
둘이 알콩달콩 잘 살았으면 하는데 말이 쉽지.
범죄자를 데리고 사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뭐, 알아서 잘할 거다.
우미호는 당연하게도 귀태랑 이미 둘째까지 낳았다.
하나는 쿼터였고, 하나는 하프 혼혈이었는데.
쿼터는 엄마를, 하프는 아빠를 닮아서 꽤 재밌는 남매가 됐다.
누나가 쿼터, 남동생이 하프였다.
김근육은 공주로 복귀했다.
의미심장한 말을 남기고 떠났는데.
꽤 섬뜩했다.
“이혼하면 연락해요.”
거, 혜민이가 듣고 있는데.
“응? 머리통에 구멍이 나고 싶다고?”
당장 공주의 머리통을 정말 쪼갤까 봐, 급히 혜민을 안아야 했었지.
아찔했었다.
로즈는 모국으로 돌아갔다.
돌아가서 부모와 형제를 잃은 아이들을 돌볼 거라던가.
팬더 형이 변신족 고아를 돌보는 걸 보더니, 생각이 많았단다.
“고마웠다.”
애가 울먹거리며 말하는데, 차마 모질게 대할 수 없더라고.
“고마우면 전부 돈으로 갚아라.”
그래서 농담 한마디와 함께 덤덤하게 배웅해 줬다.
“혜민이가 아니었다면 나도 반했을 거야.”
로즈도 그렇게 말하고 가는 바람에 한동안 혜민이한테 들볶였다.
“오빠는 만나는 여자마다 다 유혹하니?”
아니다. 내가 유혹한 거.
내가 무슨 죄냐.
난 항상 거절하고 거부하고 부인했는데.
로즈와 썸 비슷한 걸 타던 정직이는 소주를 퍼붓더니, 어느 날 갑자기 퇴사하고 선생이 됐다.
특수종 사관 학교의 선생이 됐다.
정직이가 누굴 가르치다니, 세상 참 많이 변했다.
그 학교의 학장이 누군지 알면 더 기가 막힐 노릇이리라.
팬텀 이중봉 씨가 학장이다.
학생들한테 쌍욕을 가르치려나?
특수종 사관 학교가 아니라 욕쟁이 사관 학교가 되는 건가.
강푸름은 NS의 자회사를 설립, 기어 제조 회사 대표가 됐다.
연구원장이자 대표다.
잘 나간다는 소리다. 밤마다 클럽에서 서울의 별이 된다는 소식이 간간이 들렸다.
잘살고 있었다.
스티븐 최가 거기로 이직했다.
더는 나와 엮이고 싶지 않다는 소문이 떠돌았는데.
실제로도 그랬다.
“가끔 봅시다. 가끔. 자주 보진 말고.”
진짜 이렇게 말하고 가더라고.
중고 형은 끝까지 남았다.
나이를 먹어도 꼰대는 안 되더라.
하긴 그럴 수가 있나.
제 밑에 눈 돌아가면 감당 안 되는 변신족이 몇인데.
요즘 가족이 돌아와서 잘살고 있다더라고.
특파라치 신주호 씨는 은퇴했고.
의외지만, 이 양반이 전뇌공주를 입양했다.
그동안 일로 자주 마주쳤다고 했던가.
그렇다고 왜 굳이 입양까지 하느냐고 물으니.
“다 큰 애라고 해서 부모가 필요 없는 건 아니니까요.”
사람들이 참 대단해.
난 엄지를 들어주고, 은퇴 선물로 돈다발도 안겨 줬다.
팬더 형과 정아 누나는 결혼했다.
둘 사이에 애는 정말 안 생기더라고.
입양도 생각이 없다고 했다.
정아 누나는 변신족 보육원장이 됐는데.
그 보육원 애들이 원장님만 보면 껌뻑 죽는다고 하더라.
겉을 아무리 얼음으로 에워싸도 그 안에 담긴 따뜻함을 숨길 순 없는 법이니, 당연한 걸지도 모른다.
정아 누나는 내가 아는 사람 중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따뜻한 사람이니까.
외할아버지는 회사를 이원화해서 물려줬다.
호응이 삼촌 반, 긍낙이 삼촌 반.
그러더니 몇 년도 지나지 않아 노환으로 가셨다.
그날 어머니가 우셨다. 그렇게 펑펑 우시는 건 처음이었다.
“아버지는 오래 사세요.”
“걱정하지 마라. 너보다 오래 살 테니.”
그게 아들한테 할 소리인가요?
아버지는 가끔 할아버지의 빈소를 찾았다.
그리고 나도 가끔 날 구했던 등판 아저씨가 머무는 곳에 들렀다.
오늘도 그랬다.
품에 아이를 안은 채로 아저씨를 향해 말했다.
“이제 세상에 구멍이 안 열리네요. 그것도 벌써 몇 년이 지났는지.”
“아, 인베이더는 거의 다 패 죽였는데, 그래도 이계 너머에서는 계속 나와요. 토벌군을 조직해서 나선다고 해서 요새는 저도 일을 거의 안 하긴 하네요.”
“할 수 있어서, 할 수 있으니까 했는데, 어때요? 이제 세상 살 만한 것 같지 않아요? 아, 이시스는 망했어요.”
테러 단체를 남겨 둬서야 쓰겠나.
“우으응.”
품에 안은 아이가 꿈이라도 꾸는지 웅얼댔다.
몸을 꿈틀대나 싶더니, 다시 고요히 잠이 든다.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얘는 나중에 커서 뭐가 되려나.
불멸자? 변신족? 혼혈?
그럼 열여덟 생일에 말을 해 줘야 하나.
그 각성 더럽게 아플 거라고.
이런저런 생각의 끝, 난 등판 아저씨의 사진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그럼 전 갑니다.”
에필로그
“아들, 너 왜 그대로냐?”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열여덟 생일에 내 몸이 변할 거라고.
하지만 아니었다.
그대로였다.
좀 힘들 거라고. 꽤 아플 거라고도 하셨다.
아니다. 잠만 푹 잤다. 꿀잠이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지.
“그걸 제가 어떻게 아나요.”
“묘하네.”
아버지는 별 상관하지 않으셨으나.
나한테는 큰 문제였다.
왜 피가 이어지지 않는 거냐고.
“큰일이네. 너 주문도 잘 안 받잖아.”
기회다 싶어 날 놀리는 어머니다.
스펠 유저의 재능, 그래 난 주문을 쓰는 재주도 딱히 뛰어나지 않다.
아, 눈물이 날 것 같다.
왜 어머니의 재능조차 나한테는 없는 걸까.
왜, 대체 왜!
왜 나는 아무것도 없는 거냐고!
억울하다.
왜 나에게는 두 분의 피가 이어지지 않는 것인지.
“불멸자 피만 각성하나 보다.”
아버지가 말씀하셨고.
이후, 스무 살 생일 때도 아무 일도 없었다.
“불멸자도 아니야? 야, 얼굴만 보면 불멸자는 될 줄 알았는데.”
아버지가 어깨를 두드렸다.
그렇다. 난 불멸도 변신도 아니었다.
내 아버지는 세상을 구한 영웅이며 규격 외의 혈통을 이은 특수종.
그리고 어머니는 세계 최강의 스펠 유저.
난 무능력자다.
그래도 원하는 바가 있기에 특수종 사관 학교에 입학했다.
한동안 주변에서 무능력자라고 무시하기 일쑤였다.
버티고 버텼다.
“아니 왜?”
더 황당한 일이 벌어졌다.
저 멀리 떨어진 물건이 내 의지에 이끌려 손에 탁하고 날아온 거다.
기숙사 한쪽에서 난 황당함에 말을 잇지 못했다.
아버지의 피와 어머니의 피를 다 무시한 난 초능 특수종, 초능력자가 됐다.
불멸의 피도, 변신의 피도 잇지 못한 초능 특수종 유온신.
그렇다. 이건 나의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