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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격 외 혈통 천재-407화 (407/488)

407. 구멍이 없는 세계 (2)

범죄의 길로 빠지는 놈들이 전부 멍청한 건 아니었다.

내가 손수 잡은 놈들이야, 정말 대가리가 나쁜 놈들이었지만.

“에, 제가 왜 그랬을까요?”

붙잡아 놓고 쥐어패면 이런 말이 나온다는 거다.

이게 처음도 아니다.

벌써 몇 번째 같은 일이 있었다.

건망증 때문이 아니다.

기억 삭제, 그러니까 누군가 얘들을 물건으로 취급해서 뿌렸다는 거다.

고로, 안 그래도 한국 사회의 대격변 업데이트 때문에 사람들 정신이 산만한데 개수작을 부리는 놈이 있다는 결론이다.

거참, 할 일도 없지. 이 와중에 제 잇속 한번 챙기겠다고 개수작일세.

기억을 더듬어도, 자백을 위해 별짓을 다 해도 알 수 있는 건 없었다.

그야말로 일회용으로 쓰기 위해 만든 소모품이란 거다.

범죄자 대부분이 이랬다.

“고생하네, 경찰이 할 일인데.”

“겸사겸사라.”

“데이트 중?”

버스 건을 해결하자마자 전화가 울렸다. 이지혜 팀장 누나다. 이제는 청장이 됐다.

그러니까 청장 누나다.

혜민이랑 공식적으로 만나자마자 곧바로 회사를 나가 버리더라고.

거, 사람 참 무정하게 말이야.

“시간 좀 내요. 상황 좀 나아졌으니까 송별회 해야지.”

“송별회는 무슨, 바빠.”

매몰차다. 원래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요새 이런 범죄가 심심찮게 일어나서 바쁘다고 한다.

이해는 한다.

덕분에 아버지도 바쁘다고 하고.

석 달, 그동안 인베이더의 피해는 줄었으며 사람들은 더욱 살 만해졌다.

그러나 범죄는 기승을 부린다.

난 여전히 일말의 불만이 남은 혜민이의 머리를 헝클며 말했다.

“가자, 호텔 조식 먹으러.”

“어디로 가는데?”

“괌.”

“……어디?”

“비행기 타러 가자고.”

“신혼여행?”

“출장 겸 호텔 조식 먹으러 가는 거다.”

진짜 출장 스케줄이 있었다.

NS 분석팀이 자세히 살핀 결과, 한국에서만 범죄 빈도 수가 확연히 늘었다고 한다.

도심이 파괴될 정도의 전투 여파 때문이라고?

아니지, 꼭 그것 때문은 아니다.

분석팀은 어디선가 부추기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했다.

기억을 삭제당하고 최면에 걸려서 나타나는 범죄자가 어디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건 아니잖아?

얌전히 경찰에 놈들을 인도한 난 전용기를 타고 곧장 괌으로 날아갔다.

가는 동안 기내식을 먹으며 혜민이와 시시덕거렸다.

이게 바로 연애지.

“우리 엄마가 식 언제 올리냐는데?”

“무슨 식? 종례식?”

“그걸 농담이라고 하냐? 왜 아재가 됐어?”

“이게 재미없다고?”

“완전.”

자식이, 위트를 모르네.

“아, 진짜 결혼 안 할 거냐고.”

“언젠간 하겠지.”

“그게 언제냐고.”

여자가 이렇게 적극적이기도 힘들 텐데.

“야, 넌 지금 회사 대표랑 출장 가면서 그게 중요하냐?”

“응. 중요해.”

그렇지. 이게 강혜민이지.

하여간 성격만 급해서는.

“일부터 하고.”

공항에서 내려 곧바로 움직였다.

“어디 가는데?”

“할아버지 유산 찾으러.”

“유산?”

유산이면 유산이라고 할 수 있을 터였다.

할아버지는 불멸교의 모든 비밀을 남겼고.

아버지는 그 유산을 나에게 주셨으니.

“일밖에 모르냐. 넌.”

혜민이 툴툴거렸다.

적당히 무시한 채, 목적지를 찾았다.

수영장까지 딸린 개인 리조트 한쪽, 선베드에 누운 허여멀건한 남자가 보였다.

타박타박 걸어가 앞에 서니, 남자가 선글라스를 슬쩍 내린다.

“……!”

한동안 내 얼굴을 보던 꽃미남의 얼굴이 굳었다.

“우리 처음이죠? 불멸교주님?”

이곳은 불멸교의 안전 가옥 중 하나였다.

“어, 너.”

말이 필요할까. 그렇지 않을 것이다.

“꺽!”

주먹이 배를 관통할 듯 때린다. 우직- 하며 선베드가 부러지고, 바닥에 널브러진 불멸교주의 입에서 피가 솟았다.

술병을 트레이에 들고 오던 비키니 미녀가 그걸 보고 비명을 지르려 했다.

혜민이 그 여자를 재웠다.

비키니 미녀는 특수종도 아니고 일반인이었다.

모서리부터 떨어진 술병은 깨지는 대신 쩡 하는 소리와 함께 바닥을 굴렀다.

잠든 여자는 옆으로 툭 하고 쓰러졌다.

머리가 바닥에 살짝 부딪힌 것 같은데, 괜찮으려나?

그리 잠시 관찰하고 있자니.

“눈 떼라.”

혜민의 경고가 들어왔다.

비키니 미녀는 몸의 밸런스가 참 훌륭했다.

덕분에 눈길이 좀 갔다.

눈을 돌려 다시 교주를 바라봤다.

불멸교가 숨는 법 중 하나다.

일반인 코스프레를 하는 것.

불멸교주도 그렇게 했다.

다만 운이 나쁜 건, 이미 돌아가신 할아버지가 이 모든 상황을 염두에 두셨다는 것.

“도망갈 생각 마요. 죽습니다.”

대화에 앞서 친절함은 필수다.

난 그를 친절하게 대했다.

“안 가, 안 간다고.”

머리끄덩이를 잡힌 채로 불멸교주가 말한다. 눈에 눈물도 맺힌 것 같은데?

남자가 한 대 맞았다고 우는 건가.

물론 그 한 방에 내장 일부가 조각났겠지만.

그래도 그렇지, 이렇게 눈물을 흘려서야 쓰나.

한 방에 패 죽이지 않은 게 어디인가.

“그만 하세요.”

대뜸 입을 여는 거로 새로이 대화를 시작한다.

황당한 불멸교주의 되물음이 돌아왔다.

이 양반 참.

하라고.

상대의 눈빛을 읽을 필요는 없다.

기억을 삭제해서 속칭 말하길 ‘플라스틱’을 던지는 수법은 테러범의 오래된 수작이다.

“플라스틱 그만 던지시라고.”

“나 아니야.”

교주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난 그 가로젓는 턱을 손으로 쥐었다.

악력으로 턱뼈가 흔들린다.

그러자 어디선가 마나의 향기가 나기 시작했다.

쯧쯧, 안 된다니까.

마나가 뭉쳐 현실에 무언가를 만들기도 전에 흩어진다.

옆에서 혜민이가 손에 짧은 막대 같은 걸 쥐고 흔들었다.

“디스펠 스틱이란 건데, 귀한 유물이죠.”

그 말에 교주의 눈빛이 까맣게 죽는다.

“내가 그랬다는 증거라도 있는 거요?”

증거라니, 그런 게 어디 있나.

“하지 마요.”

대신 우직함이 있다.

“아니, 증거도 없이 이러는 게…….”

손바닥으로 머리통을 때린다. 세반고리관이 흔들리며 사람이 두셋으로 보일 것이다. 동시에 뇌가 흔들리며 지독한 현기증이 올 거고.

“욱.”

구역질은 덤이다.

“나, 나 아니라니까.”

한 대 더.

아니라는 교주와 하지 말라는 나만이 남은 세상이다.

홀이 없어진 세상, 테러범이 판을 치게 놔둘 생각은 정말 요만큼도 없다.

그리고 증거라니.

테러범이 무슨 증거를 찾아.

그냥 때리면 때리는 대로 처맞는 거지.

이 불멸교주란 양반이 그토록 오랫동안 우리 할아버지를 괴롭혔다고 한다.

유언장에는 그런 게 안 적혀 있지만, 할아버지가 지독하게 모은 불멸교의 정보를 보면 느껴지는 건 있다.

가만히 두고 싶지 않았구나.

할아버지는 본인의 오점이라 생각하기에 불멸교를 지우고 싶기도 했지만.

이 새끼 하는 짓을 보고 조져 버리고 싶은 것도 있었다.

할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할아버지의 명예를 걸고 말하는데, 하지 마세요.”

교주가 눈을 깜빡였다. 몇 대 맞아서 눈에도 피눈물 비슷한 게 흘렀다.

그의 눈빛이 말한다.

여기서 할아버지 명예가 왜 나오냐고.

그렇게 80분쯤 같은 짓 반복하자.

“죽여, 차라리 죽여.”

교주가 자살 기도를 시작했다.

“하지 않는다고 약속하면 갑니다.”

때리는 대신 말하니, 교주가 그게 무슨 개소리냐는 눈빛으로 날 봤다.

이 양반 왜 자꾸 눈으로 말하나.

“약속 안 하면 계속하고.”

“약속, 약속! 약속해!”

“좋아요. 혜민아, 추적 주문 하나 걸어 놔.”

“드세요. 드시면 평생 위치 추적되는 주문고(蠱)예요. 토하거나 배를 갈라서 꺼내도 상관없긴 한데, 제 어머니가 만든 버그는 그대로 녹아서 몸에 흡수되거든요. 없애고 싶으시면 뼈와 살과 피를 갈아 없애시면 됩니다. 사용 설명서는 여기 둘게요.”

주문고 또는 스펠 버그라고 부르는 생물형 기어다.

먹으면 몸에 흡수돼 평생 흔적을 추적당한다. 그런데 이런 물건에 사용 설명서는 왜 만든 거냐.

“……죽기 전에는 안 없어진다는 거네.”

교주가 주춤거렸다.

“제가 회사 대표인데 시간이 남아요. 한 이틀은 남아 있을 수 있는데, 같이 계실래요?”

내 말에, 교주가 몹시 찝찝한 얼굴로 스펠 버그를 삼켰다.

이거로 일은 끝이었다.

자리에서 일어나며 혜민이에게 물었다.

“저녁 뭐 먹을래?”

“스테이크?”

사뿐하게 떠나는 내 뒤쪽, 교주가 허망한 눈으로 날 바라봤다.

“또 봐요.”

난 생긋 웃으며 교주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불멸교주가 했을까? 모른다.

내 알 바가 아니다.

그저 여기를 족치면 알아서 하리란 건 알지.

이시스의 우두머리를 알았으면 거기도 들렀을 텐데, 거긴 잘 숨어 있더라고.

“시발 새끼가.”

교주는 광익의 기척이 저 멀리 사라질 때까지 기다렸다가 욕설을 뱉었다.

아직도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어찌나 잘 패던지, 사람 정신이 쏙 빠지게 만드는 손길이었다.

불멸교주는 앉은 채로 흔들린 뇌가 안정되길 기다리면 생각했다.

그리고 생각할수록 억울했다.

‘진짜 나 아닌데.’

진심이다. 자신은 뭘 할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인베이더의 신과 광익의 전투.

그건 그야말로 규격 외의 싸움이었다.

정보를 들은 교주는 세최특과 척 질 생각을 접었다.

아예 평생 이렇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신념 지키겠다고 목숨을 거는 것도 어느 정도 당간이 나와야 해 볼 것 아닌가.

이건 뭐 길고 짧은 걸 대보는 수준도 아니었다.

건드리면 죽는다. 눈에 띄어도 죽는다.

평생 안 마주치고 살면 다행이었다.

어차피 그동안 모아 둔 돈도 많겠다.

그렇게 은둔 잠적 생활에 만족하던 중이었는데.

‘유무인, 씹.’

그 양반이 마지막에 영화처럼 갔단다.

저 세최특을 살리고 갔단다.

거기에 불멸교에 관한 정보를 전부 남겨 놨고.

‘그냥 곱게 갈 것이지.’

분통이 터지는 마음을 다잡은 교주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떤 새끼가 하는 짓인지는 모르지만, 당장 멈추게 해야 했다.

아니면 자신이 곱게 못 죽게 생겼으니.

‘산다. 반드시 살아남고야 만다.’

좋은 태도였다.

이호준은 스위퍼 출신이었다.

스위퍼는 4대 연맹에 끼지 못한 어둠의 마법연맹이다.

그는 인베이더가 사라진 세상이 평화롭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평화는 곧 기회가 된다고 생각했고.

프로메테우스가 망했고 이쪽 세계에 힘의 공백이 생겼다.

‘어차피 누군가 차지할 거라면.’

자신이 할 수도 있지 않겠나.

그렇게 움직였다.

사람을 쓰고 ‘플라스틱’을 만들어 여기저기 뿌리고.

기왕지사 출사표를 뿌린다면 한국에 뿌리자고 마음먹었다.

세최특 때문에 아무도 고개를 들지 못하는 곳에서 시작하는 거다.

호준이 가장 신경 쓴 건 보안이었다.

걸리지 않으면 된다.

NS에는 무서운 인간들이 많다.

사이버 첩보로 치자면 전뇌공주가 있고.

주문으로 대적하자면 세최특의 약혼녀가 있다.

그렇다고 초능으로는 될까.

안 된다.

한국 초능 협회가 그의 수족과도 같았다.

때문에 그는 철저하게 점조직을 운영했고.

자신을 숨겼다.

정체를 아는 자가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그렇게 외줄 타듯 한국에서 수작을 부리던 중이다.

그도 이렇게 될 줄은 몰랐으나.

불멸교에서 접촉을 해 왔다.

‘이건.’

좋은 기회다.

불멸교는 테러 집단.

이들의 힘을 빌리면 지금보다 더 큰 일을 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근데 조금 위험한데.’

교주가 직접 온다고 하는 걸 보면, 그들도 이 일을 가볍게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대신 자신도 직접 나서야 한다.

‘가, 말아?’

인생은 한 방. 이호준은 결심했다.

애초에 세최특이 있는 한국에 출사표를 낼 정도로 미친놈이었다.

구 서울 시가지의 지하 벙커, 그의 은신처였다.

누구도 그가 이곳에 숨어 있다고 생각하지 못할 것이다.

그곳에 교주를 초대하니.

“시발, 너냐?”

대뜸 욕부터 날아온다.

“초면에 무슨?”

“너냐고, 플라스틱 던진 거.”

이건 뭐지?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불멸교주는 화가 나 있었다.

그것도 아주 많이.

“잡아. 저 씹쌔.”

호준은 순간적으로 이제까지 자신을 구해 준 기어를 발동시켰다.

성모의 자장가.

반경 100m에 있는 모든 사람을 재우는 주문이 발동했고.

“이, 씨이입.”

교주조차도 눈을 감는다.

이런저런 안전장치를 통해 이자가 진짜 교주라는 확신에 나섰다.

‘그런데, 왜?’

출사표는 됐고 이제는 슬그머니 발을 뺄 때다.

그리고 그의 바람과는 별개로, 어디선가 날아온 총알이 그의 몸 위에 꽂혔다.

몸에 숨겨 둔 부적이 발동하며 트라이앵글 필드가 펼쳐져 총알을 막는다.

불행이라면 그게 시작이었다.

“끄으으, 씨입, 넌 주우우우거어어.”

교주가 실신하기 직전 중얼거린 소리다.

‘염병할!’

호준은 지독하게 걸렸다는 걸 알았다.

수십의 저격수와 암살자가 자신을 노렸다.

결국, 그는 잡혔다.

이후 이호준의 소식을 아는 사람은 없다.

불멸교주는 일을 깔끔하게 끝낼 줄 알았다.

그리고 같은 일, 이호준과 같은 놈이 몇 명 더 출현했고.

곧 이건 하나의 도시 괴담이 된다.

“서울에서 개수작 부리면 쥐도 새도 모르게 천국 간다.”

라는 괴담이.

물론 불멸교주의 작품이었다.

“저렇게 조져 놓는다고 말 듣겠어?”

“안 들으면, 뭐.”

죽도록 맞고 또 맞고 또 맞고 감옥에 가서도 맞고 또 맞아야지.

난 그런 뉘앙스를 충분히 풍겼다.

교주에게 그 뜻이 충분히 전해졌을 거로 믿는다.

이왕 괌까지 온 거 호텔을 잡았고.

수영을 즐기며 스낵바에서 피자와 칵테일을 시켜 먹는 중이었다.

혜민이는 물에 젖은 머리칼을 손으로 쥐어짜며 고개를 끄덕였다.

“으응.”

어떻게 보면 참 이상한 아이다.

아니, 얘는 원래 이상했지.

특히나 이상한 점.

뭘 보고 날 계속 좋아한다고 달라붙었을까.

난 첫눈에 반한다는 말을 믿지 않는다.

성격상 그게 불가능하다.

그렇기에 긴 시간 곁에 둔 사람만이 눈에 들어온다.

“이상형을 못 만나서 어떻게 하시나? 아저씨?”

빤히 쳐다보다 혜민이 피식거리며 말한다.

음, 몰랐나 보네.

이제까지 내가 이상형을 말한 건 다 널 말한 건데.

첫눈에 반할 순 없다.

하지만 몇 번이고 만난 강혜민은 내가 봤던 어떤 여자보다 강렬했다.

그 강렬함은 변신족의 본능을 자극하고.

불멸자의 감각을 건드린다.

무엇보다 나라는 인간이 매료되게 만드는 매력이 있다.

그 매력이 뭐냐고 물어본다면.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그저 어느 순간부터 얘가 여자로 보였고.

그래서 밀어내고 싶었다.

일반인인 줄 알았거든.

마법사인 걸 알게 된 이후로는 오히려 속이 편했고.

아니, 미안하지만 진짜 반가웠다.

아무래도 일반인하고 사귈 수는 없으니까.

“대답도 안 하고 무슨 생각해?”

뚝뚝 떨어지는 물방울.

뒤쪽으로 지는 해가 역광으로 혜민의 등에서부터 비치고.

휴양지 특유의 냄새가 코를 찌른다.

칵테일의 맛이 입안에 감돌고.

향긋한 허브의 향이 거기에 섞인다.

스낵바에 올린 손끝에서부터 느껴지는 나무의 촉감.

슬쩍 기댄 등으로부터 느껴지는 단단한 나무의 질감.

난 아마도 오늘을 평생 잊지 못할 것 같다.

그만한 향취다.

감정과 낭만이 이끄는 대로 입을 열었다.

“우리 결혼하자.”

내 말에 혜민이 1초쯤 날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무슨 당연한 소리를 해.”

이 무슨 확고한 마음인가.

그 어떤 순간에도 나와 자신이 갈라진다는 건 상상조차 하지 않는다.

난 왜 이 아이의 이 과격함을 좋아하는 건가.

모른다. 그저 호르몬의 문제라고 하기에는.

내 안의 이 꼬맹이는 어느새 여자가 됐고, 무척 커졌으므로.

“서울은 내일 가자.”

말은 이렇게 하고 난 혜민이와 이틀 뒤에 서울로 돌아갔다.

이틀 동안 전화를 꺼 두니, 호텔 전화로 전뇌공주가 날 찾았다.

무시하고 즐겼다.

인생에서 도저히 그냥 지나치지 못할 그런 순간은 있는 법이고.

지금이 나에게는 그런 순간 중 하나였다.

“변신족은 다 이래?”

혜민이가 아침에 볼을 붉히며 묻는 모습에.

난 이틀 내내 침대에서 나오질 않았다.

그리고 감히 단언하건대, 얘도 무척 만족했다.

진짜다.

새삼 내 감각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난 그동안 섭렵한 많은 영상 정보를 통해 처음이지만, 능숙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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