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1. 녹은 뒤에 시작해요
특수종이 인베이더와 싸우기 위해 만든 도구 중 가장 강력한 것은 무엇인가?
재생력? 변신? 비약? 초능? 마법?
다 틀렸다.
기어다.
무기야말로 인류가 가진 힘의 총화.
그 무기가 진화한 것이 기어다.
강푸름은 내 몸에 딱 맞는 전투 슈트를 만들었다.
기초 재료는 청기사의 그것이요.
아이디어는 사이오닉 아머에서 얻은 것이었다.
가볍게 내딛는 걸음을 따라 촤라라라락 하고 푸른 비늘 조각이 맞물리며 일어났다가 가라앉았다.
외장을 만들 때, 변신족 비기 강체를 본떠 따고 했던가.
기본적으로 강체는 악어 변신족의 비기다.
그걸 훈련과 단련으로 얼추 비슷하게 만드는 거지.
본래는 그들의 것이 맞다.
비늘 하나하나에 기운을 담아 몸을 단단하게 만드는 것, 강체.
강푸름이 만든 외장에 그 묘미가 담겼다.
전신을 감싼 갑주다.
그러면서도 무척 유연하다.
중간중간 인베이더 바운스의 가죽을 가져다가 이어 붙였고.
기초적인 에너지 수급은 패러사이티움에 맞췄으며.
중간중간 형상기억합금 기술을 넣었다.
여기에 아다만티움 합금 기술도 넣었다.
그렇다고 이게 끝도 아니다.
축능석과 퓨어 골드를 혼합해 만든 새로운 에너지 차징 금속체를 넣었으니.
이 전투 슈트는 청기사의 에테르 에너지와 내 전신에 충만한 힘이 맞물리는 전도체가 된다.
시험 삼아 핑거 스냅을 튕기니.
짧은 소음과 함께 에너지 파문이 동심원을 그리며 퍼지는 게 눈으로 보였다.
고작 핑거 스냅 한 방에 에너지가 파문을 일으켜?
잘하면 핑거 스냅만으로 인베이더 절반쯤은 죽일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어림도 없는 소리다.
세상에 그런 기적은 존재하지 않으니까.
뭔가 엄청 편의주의적인 능력 아닌가.
손가락 한 번 튕기면 반이 죽다니.
“난 그런 게 없으니, 열심히 노력해야지.”
혼잣말을 뱉고 몸을 힘껏 폈다.
근육이 쫙 늘어나며 곧 기어로 전달된다.
티리링.
맞물린 비늘이 절로 늘어나고 줄어든다. 마치 내 근육 위에 덧씌운 또 다른 근육, 몸의 일부 같다.
이거 이름이 뭐라고 했더라.
청기사 이름을 그대로 따올 순 없다고 했다.
그래서 강푸름이 붙인 이름은 블루 스케일이다.
더럽게 단순한 이름이지만, 또 나름대로 의미는 있다.
청기사의 것을 가져와 만든 것이므로.
오늘 이 자리에 있는 네임드가 전부 이렇게 ‘기어화’ 될 수 있다는 의미를 남기니.
이 모든 걸 종합해 내린 결론.
현시점에서 내 몸에 두른 이 무기야말로.
세계 최강의 기어였다.
“아, 강푸름 이 새끼.”
절로 혼잣말이 나온다.
감탄이 안 나올 수가 없잖아.
자, 그럼.
전신 골격이 늘어나며 몸통이 커진다. 팔다리가 두꺼워지며 시야 높이가 달라진다. 변신이다.
체적의 변화에 따라 블루 스케일의 모습도 변한다.
티리리리리링.
전신에 두른 푸른 비늘이 파직하고 에너지를 방전한다.
전류와는 다른 순수한 생체 에너지가 전신을 타고 돈다.
이런 비유를 하면 맞는지 모르겠는데.
어릴 때 무척 갖고 싶었던 장난감 총을 손에 쥔 기분이었다.
마침 사방을 향해 쏘고 싶은데 맞출 표적도 널렸으니, 더 없이 신나고.
창틀에 발을 걸쳐 앞으로 몸을 숙이니, 훙 하고 중력의 영향으로 몸이 떨어진다.
떨어지는 몸보다 빠르게 무릎을 굽혔다가 펴며 빌딩 벽을 찼다.
적당히 무너져 있던 빌딩이 내 발 구름에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무너졌다.
그사이 내 몸은 푸른 빛에 휩싸였고.
첫 번째 목표를 향해 달려가다가 그만 지나쳤다.
아니, 정확히는 뚫고 지나쳤다.
아, 죽이네.
몸으로 뚫고 나가도 되네?
인베이더를 몸으로 들이받았는데 멈출 새도 없이 관통했다.
피 따위가 전신에 묻을 틈도 없었다. 에너지가 타오르며 인베이더의 피를 그대로 태워 기화시킨다.
묘하게 불쾌한 탄 내가 코끝에 남았다.
그대로 난 달렸다.
펑! 펑! 펑! 걸리는 건 몽땅 몸으로 뚫고.
단단해 보이는 건 팔꿈치를 세워 달리고.
멈추지 않고 내달리는 것만으로 눈에 보이는 모든 곳이 손 앞에 닿는다.
전능이란 말은 이럴 때 써야 하는 거 아닐까.
말 그대로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심장이 뛰며 전신에 피를 공급한다.
근육과 신경이 의지를 따라 움직인다.
몇 번 내달리다 보니 속도감이 익숙해진다. 뻥 하고 공기층을 뚫어 내며 달리자, 중력 가속도가 가해지지만.
이 정도는 평소 훈련 축에도 못 끼는 압력이니.
갑옷의 내장 쪽에 두껍게 두른 바운스의 천이 외장에서 일어나는 충격을 반사했다.
고로 블루 스케일 안에 있는 내 몸은 참으로 멀쩡하다.
이렇게 무식하게 돌진하는데도 그렇다.
기왕지사 이렇게 된 거, 난 달리며 기능 점검에 들어갔다.
일단 손날로 제너럴의 목을 쳐보고.
뭐, 느낌도 제대로 안 난다.
그래도 목은 자른 것 같은데.
땅을 찍고 뒤로 몸을 돌려 내가 죽인 놈을 확인했는데, 이놈 자식 머리통이 어디 갔지?
아, 목을 자른다고 갈랐는데, 충격 에너지가 목 위를 싹 날렸나 보다.
좋아. 요령이 생긴다고, 점점.
그대로 내달린다.
팔을 쭉 뻗어 손톱을 세우니, 스케일 앞쪽에서 내 손톱이 불쑥 튀어나와 인베이더의 몸통을 갈랐다.
파-앙!
운동 에너지가 남아 손톱에 어린 에너지를 폭발시킨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소닉붐?
공중에 뜬 윙 나이트 몇 마리가 보인다.
본래라면 한참 멀리 있을 놈들이 몇 번 땅을 차는 것만으로 타격 범위 안에 들어온다.
저건 어떻게 잡지?
위로 솟아도 되지만, 사출 무기로 쏘는 것도 가능하지 않나?
블루 스케일은 기본적으로 웨어러블 아머니까.
이 안에 내장된 무기도 쓸 수 있다.
달리면서 왼손을 들어 의지를 전한다.
내 의지에 따라 살아 있는 금속 패러사이티움이 반응했고.
잘 훈련된 군견처럼 내 부름에 응하니.
곧 내 손에 라이플이 쥐어졌다.
스코프는 필요 없다. 대신 불멸자의 감각을 북돋는다.
달리면서 쏴야 하니까, 이걸 러닝 샷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리 나라도 집중이 필요한 시점이다.
집중하고, 쏜다.
펑펑!
두 발의 탄이 공중에 뜬 윙 나이트를 떨구고.
내 몸은 그대로 아이언 쏜즈 한복판을 가로질렀다.
여기서는 숄더 차징으로.
퍼버버버버버버버벙!
속도와 에너지가 모여 뭐든 뚫는 창이 되나니.
내 몸이 곧 창이요, 칼이요, 탄환이다.
발로 차고 멈췄다가 다시금 내달리고.
블루 스케일이 머금은 에너지가 뭐든 가능케 한다.
윙 나이트가 또 보이길래, 이번에는 와이어를 바닥에 꽂고 도약했다.
아니, 날았다.
도약이지만, 내 몸은 순식간에 공중에 도달했고 놈의 몸을 반달차기로 갈랐다.
갑옷 조각이 터지며 비산하고.
난 놈을 차고 와이어를 힘껏 당겨, 올라간 만큼 빨리 지상에 당도했다.
무서운 속도로 내려오는 걸 무릎과 허리를 굽히며 충격을 해소.
떨어지는 순간에 고양이처럼 살포시 땅에 내려앉은 뒤, 다시 질주했다.
아, 끝내주네, 이거.
중독될 것 같은데.
괴력의 변신족, 불멸자의 감각.
모든 것이 블루 스케일 안에서 일원화된다.
지금의 난 무적이다.
그러므로 뛰어오르나니.
막 홀에서 나온 용 대가리가 보였다.
진홍의 악몽, 파괴자 따위의 이름이 붙은 최후의 네임드.
뭐, 다른 나라에서 열린 홀에 또 다른 놈들이 있을 수 있겠지만.
어쨌든 지금은 최후의 네임드가 맞다.
날 지켜보는 이들은 내가 이놈과 그럴싸하게 맞붙어서 힘겨운 싸움을 예상했을까?
용은 나오자마자 날개를 펴고 입을 벌렸다.
화르르르륵!
주문도 아니고 초능도 아니다.
종이 다르기에 보일 수 있는 특수 능력이라 하겠다.
불길이 온몸을 태우려 덮친다.
난 피하지 않았다. 대신 오른손에 의지를 발현, 집중해 창을 만들었다.
블루혼이다.
푸른 뿔과 같은 창이 오른손에 잡히고, 그 무게감을 느끼며 불길을 견딘다.
블루 스케일은 충분히 열기를 견뎠고.
그 안에 있는 나는 적당히 익었지만, 난 불멸자.
뇌가 전부 타 버리지 않는 이상, 이 정도 불길로 날 어쩔 수는 없다.
위로 솟은 그대로 밑으로 떨어진다.
불길 때문에 시야가 막히지만, 그게 무슨 상관이라고.
불멸자의 감각은 주변 모든 것을 보는 것처럼 느끼게 한다.
그렇게 난 용의 머리를 향해 블루혼을 내질렀다.
또 한 번의 경쾌한 소리.
그리고 허무한 결론이 났다.
머리통에 구멍을 내고 한 손으로 놈의 콧구멍을 쥐고 당겨 밑으로 내치니.
날개 한 번 홰치지 못한 불행한 파충류가 사체가 되었음이 보인다.
“끝.”
단순 명료한 싸움.
뒤를 돌아보니 어찌나 놀랐는지, 어머니도 입을 쩍 벌린 게 보였다.
어머니의 부름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당신의 아들 유광익 대령했습니다.”
“아무리 내 아들이지만, 이건 진짜.”
어느새 아버지도 다가왔다.
그래요. 아버지.
제가 좀 하죠.
네임드는 인류의 악몽이었다.
과연 그렇다.
하지만 악몽이 언제까지 악몽일까.
소년은 자라 청년이 되고 어른이 되므로, 어릴 적의 악몽쯤은 이겨 내기 마련이다.
네임드가 악몽이었던 시절은 지났다.
아, 이제 환호를 들을 차례인가.
한 손을 귀 쪽에 대고 즐겨 볼까나 싶지만.
용을 죽인 것과 별개로 불길함은 전혀 가시지 않았다.
“안 끝났어. 뒤.”
무전을 통해 들어온 우미호의 목소리.
“광익아, 이건, 이건.”
또 놀란 팬더 형의 목소리.
네, 압니다. 알아요.
안 끝난 거.
용 새끼가 뒤지기 전에 의념을 미친 듯이 쏘아 내더라고.
“신께서 오시니, 너희는 계절을 맞이하라.”
그래, 딱 저렇게.
살아남은 인베이더 중 말을 할 줄 아는 놈이 전부 입을 모아 그리 말했다.
음성이 중첩되면 주문을 외는 것 같기도 했고.
또 달리 보자면 아주 음산한 읊조림 같았다.
인간의 음성은 아니지만, 그와 비슷한 발음을 선보이며 말한다.
뜨거운 아이스크림 같다. 위화감이 잔뜩이다. 인베이더의 합창은 그런 느낌이었다.
그리고 돌아선 내 눈앞에 아주 기묘한 광경이 보이기 시작했다.
“당신은 대단하군요.”
예언자는 흰 눈을 뜬 채로 말했다.
그걸 지켜보던 호위가 인상을 썼다.
“뭐가 보이는 겁니까?”
“제가 말하지 않았던가요?”
예언가는 그대로 말을 이었다.
그 말의 의미를 이 자리에서 알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불길함.
그것은 예지 또는 예언과도 같다.
이런 종류의 불길함은 틀리는 법이 없으니까.
시작은 홀에서 내려온 검은 계단이었다.
계단처럼 보였던 그것이 흐물흐물해지더니 곧 말랑해졌고, 바닥에 똑- 하고 빗물 떨어지듯 떨어졌다.
그것은 그대로 서서히 녹았다.
햇볕에 녹는 아이스크림 같았다.
그다음은 홀 그 자체가 녹아내리기 시작했다.
녹고 또 녹는다.
블랙홀에 얽매였던 모든 것이 녹는다.
아직 살아남은 인베이더가 꺽 하고 외마디 비명을 지르더니 그대로 바닥에 널브러져 죽는다.
그리 단말마를 토해 내며 모든 인베이더가 바닥에 쓰러지더니, 이들 또한 녹기 시작했다.
아득바득 버텨, 마지막 숨통만 남은 워 로드도 마찬가지다.
“바르카안- 라, 투.”
놈이 중얼거리며 검고 진득한 액체로 화하기 시작한다.
제너럴을 비롯해 인간의 말을 흉내 내 읊조리던 몇 놈이 단말마를 내기 전 섬뜩한 말을 다시 내뱉었다.
“이제 신이 오시나니, 너희는 계절을 맞이하라.”
뜨거운 열기 속에서 도로 공사라도 하는 듯, 블랙홀 겉면이 타르처럼 부글부글 끓기 시작한다.
타오르며 끓고 녹는다.
나는 그걸 물끄러미 지켜봤다.
딱히 할 수 있는 게 없다.
물론 그렇게 생각하지 않은 사람도 있다.
그중 누군가가 곡사포를 쏴 갈겼다.
아마도 내 생각에는 유일부대장이 아닐까 싶다.
선제공격이야말로 최선의 방어라는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양반이니까.
하늘에 솟아다가 제대로 떨어진 포탄은 홀에 맞았고 터졌으나.
영향은 없다. 폭연과 폭발의 열기마저 녹아 없어지는 것처럼 보였으니.
“아무것도 안 통하겠구나. 저건.”
유무인, 할아버지의 음성이었다.
이 양반은 어디서 놀다 왔는지, 멀쩡하네. 몸에 피 한 방울 안 묻었다.
“그래 보이죠?”
대수롭지 않게 답하고 다시금 시선을 고정했다.
“전 세계 동시다발적으로 모든 홀이 녹아 없어지는 현상 발생. 멜팅이다.”
무전기를 통해 동훈이 형이 말한다.
다급함과 불안함이 느껴지기에.
“결혼식은 언제 하실 겁니까?”
괜히 농담을 건네 보니.
“5월에 강남, 기왕이면 호텔에서.”
뭐 이렇게 구체적이야?
알겠다고 대강 답하고 다시금 홀을 주시했다.
아까 한 말을 되새겨 보면 이게 한국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라는 거네.
곧 블랙홀이 녹고 또 녹아 고약한 냄새가 난 고약처럼 뭉치기 시작했다.
대형 홀 자체가 녹아내리면서 하늘에는 검은 그을음만 남았다.
아, 저 그을음.
예언가가 보여 줬다.
그때는 저게 홀로 보였는데.
지금 보니, 그을음이다.
홀의 흔적만 남은 잔재.
모든 것이 녹아서 뭉치기 시작한 고약은 작아지고 작아졌다.
너무도 독특한 광경이기에 모든 입을 다물지 못하고 쳐다보기만 했다.
홀이 녹아 없어져 검은 슬라임 같은 것만 남기는 모양새라니.
물론 슬라임은 아니었다.
그 검은 덩어리는 곧 형태를 이뤘다.
팔이 뻗고 손이 생겼으며, 다리로 대지를 밟고 머리가 생겼다.
밀도가 높아진 검고 진득한 액체는 고체 그 이상의 강도로 보였는데, 그 외견은 인간의 모습과 흡사했다.
머리와 양팔과 다리.
눈은 뜨지 않았지만, 비슷한 게 얼굴 위에 있다.
콧대가 세워졌고, 입가에 가는 선이 생겼다.
놈의 몸 위로 검은 아지랑이 따위가 피어올랐다.
상황만 보자면 하나는 명확했다.
지금 세상에 열렸던 모든 홀이 사라졌다는 것.
그동안 인류가 그토록 바랐던 소원 하나가 이뤄졌다는 소리다.
인베이더 없는 세상이 되었다.
지금 전 세계의 인베이더는 사라졌다.
오직 저 하나만을 남긴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