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9. 최종 병기
불가사리의 빨판이 허공에 쫙 펼쳐진다.
“막아!”
아흔 명의 염동 능력자가 모여 놈을 향해 강제력을 발휘한다.
가까이 가면 염동력을 더 강하게 쓸 수 있을 테지만, 거리를 더 좁힐 수는 없었다.
정신 조종 능력을 보유한 네임드의 범위 안에 들어가는 건 위험했다.
그렇다고 지금이 안전하다는 건 아니었지만, 최소한의 안전은 보장되는 셈이다.
정신 방호 헬멧과 거리.
불가사리를 상대할 때의 핵심이었다.
두두두두두!
화력이 폭발하듯 쏟아졌으나, 무용하다.
본체가 슬라임과 같은 형태였다.
탄환이 몸을 통과하며 운동 에너지를 잃고 바닥으로 후두둑 쏟아진다.
탄환을 먹고 뱉어 내는 것처럼 보였다.
일반 탄은 의미가 없다.
그렇다고 광선총이 효과가 있다고 하기도 어려웠다.
일단 배리어가 문제다. 놈의 배리어는 사이오닉 계열, 그 배리어가 몸통을 맞추는 레이저를 비틀어 쳐 낸다.
집중 포화로 배리어에 구멍이 내서 몸을 맞추면 뭐 하나.
그을리며 구멍이 나긴 하지만, 재생한다. 그것도 고속 재생이다.
배리어도 뚫고 몸통에 겨우 주먹만 한 구멍을 하나 냈는데, 곧바로 재생한다니.
힘이 쪽 빠지는 광경이다.
이런 괴물을 어떻게?
어쨌든 시간은 끌 순 있었다.
원거리에서 탄을 쏴 갈기고.
염동 능력자가 코피를 좔좔 흘리며 붙들면.
그사이 다른 수단을 써야 할 것이다.
대형 화염 방사기를 다발로 가져와서 태우든지, 아니면 핵폭발이라도 감수하든지.
그것도 아니면 세최특을 부르든지.
불가사리의 위용을 보니 자연스레 세최특이 떠오른다. 그 사실에서 검은 도끼 정동찬은 새삼 시간이 흘렀음을 느꼈다.
‘그때는 세최특이 사람 몇 구하고 말았는데.’
정동찬은 한때 유광익과 함께 싸웠다.
불가사리가 겹문 현상을 매개로 이 세계에 처음 나타났을 때다.
그때의 세최특은 제 몸을 안 돌보고 사람을 구하는 미친 친구였다.
지금은 인류의 희망을 건 특수종이 됐고.
“또 보네요.”
불가사리 진압팀으로 배정받은 협회 쪽 일원이 말을 걸었다.
김말원, 발화 능력자다.
여기서 만난 걸 보니.
‘불가사리 경험자를 먼저 모았군.’
네임드를 상대함에 경험자를 먼저 배치한 거다.
“그러게, 협회에도 인재가 참 없나 보네.”
“그러는 엑스큐라시는 보낼 사람이 없어서 다 늙은 변신족을 보냅니까?”
“지금 우리 회장님하고 비서를 욕하는 건가?”
“……너, 너, 당신 얘기잖아.”
알지. 그냥 농담 몇 마디 건넨 거다.
인류의 전력, 특히 준비된 소수의 특수종 전력은 네임드를 이긴다.
그렇게 상정하고 준비한 거다.
실제로 그렇게 됐고.
물론 기대한 방향은 아니었다.
나온 인베이더 중 둘을 NS에서 맡아서 처리했으니.
‘세대교체인가.’
특수종 세상은 멈춘 강과 같았다.
1세대의 영웅과 휴즈 게이트 당시 활약했던 이들이 중심이 된 세계.
한때 자신의 곁에 섰던 특수종이 정체된 세계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었다.
그래도 네임드 하나쯤은 과거의 잔재가 치워 줘야 면이 서지 않을까.
이게 정동찬만의 생각은 아니었다.
검은 도끼의 눈에 얇은 반바지 하나만 입은 노인네 둘이 들어왔다.
이곳이 네임드 앞이 아니었고.
저 둘이 모르는 얼굴이었다면.
그냥 노망 난 늙은이였을 텐데.
물론 그렇게 보기에 저 둘은 몸이 너무 과격했다.
근육을 겹겹이 쌓은 갑옷을 두른 몸뚱이라니.
“자네, 여기서 다 마주하는군.”
그중 상대적으로 덩치가 작은 노인이 말했다.
둘 바로 옆에는 어느새 말끔한 외모의 남자 하나가 다가가 있었다.
“네, 장인어른.”
장인어른?
“그래, 슬혜는 행복하다던가.”
“따님의 행복을 바라신 분이셨군요.”
“어느 정도는.”
말하는 노인이 끌끌 혀를 긁으며 웃는다.
그걸 본 정동찬은 소름이 돋았다.
노인의 이름은 강노석.
현존하는 변신족 중 최강을 논하는 이.
엑스큐라시의 회장이다.
1세대의 영웅이자, 가장 오래된 변신족이란 타이틀을 지닌 괴물이고.
그런 괴물 앞에서 저리 당당한 태도라니.
남자도 만만치 않은 사람이었다.
“피닉스 팀을 다 데려왔나?”
회장 곁에 선 덩치 큰 노인이 묻는다.
“제 팀은 공작이 특기지, 전투가 특기가 아닙니다. 혼자 왔습니다.”
정동찬이 훔쳐 듣고 싶어 훔쳐 듣는 건 아니었다.
저 셋이 주변 시선을 조금도 신경 쓰지 않는 거지.
“지금 저만 들은 거 아니죠?”
옆에서 김말원이 묻는다. 이쪽도 긴장했는지, 표정이 굳었다.
“회장님하고, 피닉스 팀장인 것 같은데.”
“오우, 씨, 스케일.”
“그래, 스케일 허벌나게 커져 버렸네.”
동찬은 그렇게 말하며 제 도끼를 퉁- 하고 튕겼다.
긴장했을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그 소리에도 그를 주목하는 사람은 없다.
주변 모두가 눈앞의 세 남자에게 시선을 뺏기고 귀를 기울였다.
“이제 슬슬 저 문어인지 슬라임인지 하는 놈을 솎아 내야 할 것 같은데, 손이나 한번 맞춰 볼까나.”
회장이 말하고.
“제가 알아서 맞추겠습니다. 아랫사람 된 도리로. 그러니 먼저 가시죠.”
피닉스 팀장이 받아친다.
“……지금 저 괴물 앞에 나보고 나서라 이건가?”
“제가 서포트 전문입니다.”
변신과 불멸이니 맞는 말이지만.
묘한 기류가 흐른다.
“시간 끌 틈이 없는 것 같으니, 나 먼저 가지.”
그런 둘을 보고 있던 제일 덩치 큰 노인네가 움직였다.
트렁크로 아랫도리만 가린 노인이 달린다.
쿵. 쿵.
무거운 걸음에 맞춰 곧 그의 피부가 회백색으로 물들며 퍼졌다.
쿠워어어어어!
곧 그의 몸이 몇 배는 커지며 변신했다.
변신체는 코끼리.
그 또한 1세대의 영웅이다.
곧 피니스 팀장과 엑스큐라시 회장, 회장의 비서 셋이 불가사리를 향해 달려들었다.
“마이-타우니-아!”
틈만 나면 저리 입을 놀리고 외치는 걸 보면 인베이더에게도 언어가 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확실히 있겠지.
언어가 아니더라도 의사소통을 하는 수단이.
그게 아니고서야 인간의 언어를 습득해서 말하는 게 말이 안 된다.
난 눈을 감은 채로 사방에서 울리는 소리를 듣고 냄새를 맡았으며 울림을 느꼈다.
전신 오감을 예민하게 둔 채로 눈을 뜨니, 저 먼 곳에서 싸우는 이들의 모습이 한눈에 담긴다.
어머니의 변신체가 허공을 난다.
워 로드에 도끼를 손으로 후려치고.
옆으로 튕겨 나가는 듯하더니, 공중에서 발판 따위를 찬다.
염동 능력자의 서포트다.
센스 좋은 친구로군.
그 한 번으로 기회를 잡아, 어머니가 위에서 밑으로 손을 크게 휘둘렀다.
그와 동시에 워 로드의 종아리 뒤쪽에서 누군가 움직인다.
전신을 주문으로 두른, 귀엽다고만 할 수 없는 스펠 유저.
그녀의 전신에서 빛이 터져 나오며 묵직한 충격이 워 로드의 발뒤꿈치를 후린다. 무슨 빛을 압축해서 휘두르는 망치 같은 주문이었다.
그걸 양손에 쥐고 풀 스윙이라니.
나중에 기분 좀 거슬리면 저런 걸 맞아야 하는 건가?
그에 맞춰, 어머니의 손날이 위에서 밑으로 꽂힌다.
손발이 이렇게 잘 맞는다고?’
벌써 몇 번이고 치고받은 싸움이었다.
발뒤축이 흔들린 놈의 몸이 옆으로 무너진다.
워 로드도 그냥 당하지만은 않았다. 넘어지며 도끼를 횡으로 휘두른다.
어머니의 손날과 도끼날이 만나며 파카카카카캉! 하고 굉음이 울렸다.
소리가 대기를 달리며 온도를 훌쩍 올리는 것 같았다.
워 로드는 도끼를 휘두르며 발로는 혜민이를 걷어찼다.
혜민이는 손을 위아래로 흔들더니, 방어막을 만들어 충격을 해소하곤 뒤로 훌쩍 물러났다.
워 로드는 이미 팔 하나를 잃었다.
이 정도면 승패가 났다고 봐도 무방하다.
놈이 하도 터프하니까 버티는 거지.
광검사였다면 진즉에 죽었다.
뭐, 그 광검사도 기남이가 죽였다.
새끼, 나한테도 안 보여 준 기술을 썼다.
초인의 감각으로 타이밍을 포착해, 광검을 끄고 켜다니.
끄는 순간, 오롯이 제 몸을 방패로 삼는 건 불멸자의 특기고.
그야말로 정기남다운 공격이다.
솔직히 인상 깊었다.
그래도 마리와 교제를 쉽게 허락해 줄 수는 없지만.
다른 쪽에서는 외할아버지가 변신해 싸우는 중이다.
불가사리가 상대다.
나랑도 인연이 깊은 네임드였다.
처음 출현하던 걸 구경한 게 나다.
근데 인베이더 이 새끼들 진짜, 너무하는 거 아닌가?
왜 알려진 모든 네임드가 전부 한국에 오는 거냐?
미국도 있고 중국도 있고 나라는 많은데.
아니면 네임드를 양산했을까?
그런 건 아닐 것 같은데.
당장 다른 나라 소식이야 사실 알 바가 아니다.
눈앞에 일어난 일이나 처리해야지.
외할아버지는 잘 싸웠다.
기합으로 불가사리의 정신 공격을 무시하고.
주먹으로 방어막을 후린다.
더없이 무식해 보이는 공격이나, 적절한 수단이다.
그 뒤로 코끼리 변신족이 달려들어 묵직한 일격을 때려 넣는다.
배리어가 터지듯 흩어진다.
한창 싸우는 타이밍에 검은 그림자 하나가 변신족 둘 사이를 노닌다.
잔챙이 인베이더 하나가 끼어들었다.
변신족 둘이 주먹과 발을 놀린다.
단숨에 끼어든 인베이더가 피떡이 되려는 순간, 불가사리가 다시 한번 방어막을 발동.
두두둥!
자신을 도우러 온 인베이더를 보호한다.
근데 저건 무슨 종류의 인베이더지?
또 새로운 변이종인가? 인간을 무척 닮은 인베이더다.
그렇게 생각하고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감탄사가 흘러나왔다.
사우전드 페이스.
천의 얼굴을 가졌기에.
세상을 속일 수 있는 불멸자.
아버지의 별명이다.
기척을 속이고 비트는 것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은 아니다.
주문이 섞였다.
자신의 기예에 주문을 섞어?
할아버지의 언령만큼이나 독특하잖아.
불가사리를 속인 아버지의 손에서 사이오닉 기어가 춤을 춘다.
뱀처럼 휘어져 들어가는 백린이 불가사리의 몸을 파고든다.
백열광이 번쩍하며 놈의 몸을 불태운다.
아버지의 커스터마이징 무기인 백린검이다.
아버지는 사이킥 또는 사이오닉 기어라 불리는 무장만을 즐겨 사용했다.
평소에는 주문에 관련된 일은 일절 하지도 않고 아는 척도 안 했고.
대신 사이오닉 쪽에서는 얼추 조언도 해 준다.
기어를 다루는 법이나, 능력자를 상대하는 법도.
다 속임수였다.
아버지는 사이오닉 에너지보다 주문을 다루는 데 더 능숙할 것이다.
지금 보여준 기예가 그걸 증명했다.
거참, 절로 혼잣말이 나왔다.
“아들도 속여?”
어머니도 몰랐을까?
더는 비밀이 없다며?
아니, 어머니는 아시려나?
하여간 다들 뭘 이렇게 비장의 수단을 숨겨 놓는 건지.
외할아버지는 인간 형태로 싸우다가 백린검이 불가사리를 태우자, 그제야 변했다.
저건 또 뭐야.
화르륵.
전신에 불이 붙은 변신체다.
저걸 뭐라고 해야 할까.
외할아버지 또한 평범한 변신족은 아니다.
냄새가 났다. 이쪽은 사이오닉 에너지를 섞은 무언가다.
뭐, 이기면 그만이다.
주변 전장도 유리하다. 마리를 비롯해 김근육, 정직이.
그 외 각 단체에서 난다긴다하는 이들의 활약이 돋보였다.
전장 곳곳에서 영웅이 태어나는 순간이다.
위기란 곧 영웅이 돋보일 기회의 장이 될 테니.
“씁, 고마워요!”
어떤 여자가 정직이에게 말하는 게 보였다.
간신히 살아난 초능 특수종 여성이다.
머리카락이 보라색이었다.
저 머리카락은 능력 때문인가, 아니면 취향일까.
반쯤 부서진 사이오닉 아머를 걸친 채였고, 정직이는 그 여자가 보이는 쪽에서 반쯤 비스듬히 선 채로 읊조렸다.
나조차도 귀를 기울여 간신히 들을 소음이다.
정직이가 뭐라고 하는지 들으려고 순간적으로 집중했다.
“뒤로, 제가 막습니다.”
저 새끼가?
한껏 무게를 잡는다. 툭하면 광변환으로 도망가며 싸우던 놈이 두 다리를 땅에 꽂고 버텨 싸우려 한다.
물론 저래도 쉽게 당하진 않는다.
그동안 배우고 익힌 게 있고 지금 몸에 걸친 장비가 있는데.
그래, 너 좋을 대로 해라.
인베이더 무리 사이에서 가장 눈에 띄는 특수종은 내 동생이었다.
마리는 날뛰었다.
양손에 든 도끼가 춤을 춘다. 곧 태풍의 춤이다.
도끼 두 자루가 인베이더를 해체하고 조각내고 분해한다.
“크아아아!”
제너럴급의 초능 인베이더 다섯이 달려들었지만.
그게 무슨 소용일까.
초능력이 발동하기도 전에 변신한 마리의 몸이 사라졌다.
발밑에 있던 건물의 잔재, 깨진 유리 파편 같은 것들이 분수처럼 솟는다.
강각을 필두로 한 초고속 돌진.
마리의 몸이 선처럼 변하며 나아가 제너럴 다섯의 몸에 도끼질을 한다.
모든 건 일순간에 일어난다. 도끼가 그린 선이 준 네임드 인베이더 다섯을 썰고 벤다.
죽으면서도 일으킨 초능이 마리가 있던 빈 곳을 때렸다.
결빙의 창과 화염의 폭풍 따위가 일어나 허무하게 스러진다.
끝내주게 속 시원한 광경이었다.
초능 발동의 딜레이, 그 틈을 찌른 거다.
캬, 마리 실력 많이 늘었네.
반대쪽에서 다른 이들도 너끈히 활약 중이었다.
김근육의 손에서 불꽃이 터지며 윙 나이트의 머리통이 깨지고.
불닭이라 불린 사이키커가 아머를 입은 채로 사방에 불길을 쏟아낸다.
재생하려던 흡혈 인베이더 수십을 불태운다.
살을 태우고 뼈가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불쾌한 향이다.
승패가 인류 쪽에 기운다.
그리고 기다리고 기다리던 놈이 홀 바깥으로 몸을 내밀기 시작했다.
머리만 해도 내 몸뚱이만 한 괴물.
최강의 네임드.
디스트로이어, 파괴자.
또는 진홍의 악몽, 크림슨 나이트메어.
난 잠시 생각했다.
서로 힘을 가늠하고 견제할 필요가 있는가.
그럼 나도 최선의 수단으로 최강의 칼을 뽑으면 될 일.
비장의 수단이 꼭 아버지나 외할아버지에게만 있는 건 아니므로.
전신에 흐르는 피 중 수십 방울을 웨어러블 기어에 쏟는다.
발목과 손목 밑에 이식해 둔 기어가 반응한다.
트트트트등!
금속음이 연이어 들린다.
아이디어는 사이오닉 아머를 보고 빌렸다.
지금 쓰는 게 바로 내 전용 커스터마이징 최종판이다.
최종 병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