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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격 외 혈통 천재-397화 (397/488)

397. 정기남의 잡기

네임드는 언어를 구사할 수 있는가.

일부 학자는 ‘할 수 있지만 하지 않는다’라고 주장한다.

인베이더의 목적은 종속이 아니라 멸절이다.

그러므로 그들은 인류에게 말을 걸 필요가 없다는 거다.

반대 의견 또한 있다.

“인베이더가 말을 할 줄 안다면, 그런 지능이 있었다면 그렇게 멍청하게 싸우진 않았을 거요.”

군사학 전문가의 말이었는데.

이쪽이 더 신뢰가 갔다.

이제까지의 인베이더는 멍청했으니까.

특이종과 이상 현상을 빼면 인류에게 패배한 뒤로 끊임없이 당하고 또 당했으니까.

그런 인베이더가 말을 할 수 있다면 그럴 리 없다고 말한다.

‘묘해.’

중봉은 기분이 묘하다고 생각했다.

“그런가?”

중봉이 입을 연다.

대화가 가능하다면, 어찌 말 한번 걸어 보고 싶지 않았을까.

청기사에게 일가족이 몰살당했을 때도.

가진 모든 걸 복수를 위해 걸었을 때도.

말을 해 보고 싶었다.

“멍청하다. 너희는 질 싸움을 한다.”

목소리는 명료하지만, 확실히 인간의 그것과는 다른 소리였다.

중봉은 흥미를 느꼈다.

“질 싸움? 우리가 이기고 있는 것 같은데?”

“신께서 오시어 너희를 무참히 짓밟으리니, 그 신의 이름을 부르되, 여름이요, 가을이요, 겨울이요, 봄이다.”

오, 헛소리.

개소리를 줄기차게 뱉는 걸 보니, 제대로 된 의사소통을 기대하긴 어려울 것이다.

중봉은 만족한다.

상대가 말을 하고 들을 귀가 있다는 것에.

그 얼마나 바랐던가.

저 개자식들에게 욕 한마디 하는 것을.

부지런한 복수의 시간이었다.

하루하루 단련하고 신입의 뒤를 봐 주고.

실력을 키우고 청기사를 죽이기 위해 무엇이든 했다.

참으로 부지런했었다.

“그래, 그랬구나. 신이 오는구나. 시바 새끼야. 시발, 개자식아.”

거친 말을 뱉었다고 속이 탁 트이진 않았다.

빛을 뿜어 내는 저 면상을 후려갈겨야 속이 시원하리라.

청기사를 상대했을 때의 이중봉과 지금의 이중봉의 실력에는 큰 차이가 없다.

그때는 혼자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혼자가 아니므로.

우우우!

도안결이다. 늑대로 변한 변신족이 내달린다.

상대와 대화가 무슨 필요냐는 그런 몸짓이었다.

허공에 긴 잔상을 남기며 땅을 박차고 선을 긋는다.

긴 선이 허공에 나타나 광검사를 갈랐고.

광검사는 빛의 칼을 들어, 그걸 막았다.

파카캉!

분명 빛으로 이뤄진 칼날일진대, 쇠붙이가 맞물리는 소리 따위가 났다.

허공과 광검사를 동시에 손톱으로 그은 늑대인간 도안결은 무너진 빌딩에 발톱을 박아 멈췄다.

그러곤 무릎을 굽힌다. 허벅지가 부푼다. 재차 내달리려는 준비다.

그걸 맞이한 광검사의 칼이 먼저 움직였다.

넘실.

실처럼 늘어나더니, 뱀이라도 된 듯 칼날이 구불구불 허공에 선을 그으며 안결이 있는 곳을 찔렀다.

빛의 칼은 가로막은 게 무엇이든 손쉽게 뚫었다.

벽도 공기도.

안결은 피했고, 그가 있던 자리에 섬뜩할 정도로 깨끗한 구멍이 생겼다.

그걸 본 중봉도 슬쩍 발을 뗀다.

‘그럼 나도.’

이중봉의 별명은 팬텀.

오랜만에 전력으로 제 능력을 보일 순간이 온 거다.

정기남은 생각했다.

자신에게 유광익 같은 폭발력은 없다.

그 어떤 훈련도 변신족의 괴력을 갖게 할 순 없으니까.

“멍청하게 따라 하려고 하지 마라. 삽질이다. 그거.”

이중봉의 조언이 있었고.

“넌 언령 같은 거 배울 필요가 없겠다. 그래도 요령만 알면 재밌을걸?”

말 많은 노인의 가르침도 있었다.

전직 불멸교주라고 했던가.

“마리가 응원해요.”

응원도 있었고.

“혼자서 안 되면 같이 하면 된다.”

동료도 생겼다. 변신족에서 천재 소리 듣던 놈이, 여기서는 광익에게 밀린다. 그런데도 도안결은 좌절 따위 하지 않았다.

부지런하고 냉정한 성격이다.

변신족답지 않다.

반대로 도안결은 자신한테 불멸자답지 않게 흥분한다고 했었지만.

‘서로 안 닮았군.’

불멸자와 변신족의 표본에서 훌쩍 벗어난 느낌이다.

새삼 고백하지만, 꼭 유광익의 위에 서길 바란 건 아니었다.

그저 한 발자국이라도 따라잡길 바랐다.

“네가 해라. 정기남.”

햇살이 맑던 어느 날.

여지없이 대련 후 쓰러진 자신을 향해 광익이 던진 말이다.

“너는 할 수 있잖아.”

광익은 이어 말했다.

자신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NS를 지키란다.

자신이 할 수 없다면 마리를 지키란다.

곁에 서서 같이 싸우잔다.

그 말이 왜 기뻤는지.

모르겠다. 정기남은 자신의 속을 몇 번이고 후비고 뒤집어 봐도 몰랐다.

경멸, 시기, 질투를 넘어 동경의 대상이 된 친구이자 동료에게 낯부끄러운 말은 절대 할 수 없다.

“야, 친구끼리 원한 같은 거 쌓기 없기다.”

허벅지 뼈를 부러뜨려 놓고 던지는 말이 고작 저런 종류라니.

참, 개자식이지.

그래, 하지만 친구라는 말에 두근거림이 있다.

정기남은 유광익의 친구다.

유광익은 자신의 친구다.

“하지만 친구를 위해 싸우는 건 아니지.”

기남이 미소와 함께 중얼거렸다.

싸움은 오롯이 자신을 위해서다.

인류를 위해 싸우는 것도 아니다.

처음에는 순혈 정가에서 인정받고 싶었고.

이후에는 벗어나고 싶었으며.

광익을 이기고 싶었던 적도 있다.

이후에는 그의 곁에 서길 바랐고.

지금은.

“마리를 위하여.”

여자 친구와의 미래를 꿈꾸는 자신이 있다.

그렇다면 인베이더는 배제해야 할 대상이 맞지 않나.

한계를 시험하고.

인베이더를 배제한다.

그걸 위한 싸움이다.

쭈-웅!

늘어난 빛의 칼이 사방에 가득하다.

팔이 여섯 개로 늘어난 것처럼 잔상을 남기더니 광검사가 사방을 빛의 칼날로 채웠다.

그 칼날에 닿는 모든 게 썰렸다.

건물이든, 아스팔트 조각이든, 부서진 자동차든.

도안결의 눈이 빛난다. 그는 초인적인 집중력으로 빛의 칼을 피했다.

그리고 또 한 명의 불멸자가 나선다.

팬텀 이중봉.

그에게 팬텀이란 별명을 붙여 준 건, 지금 보이는 기술 때문이었다.

사방, 모든 곳에서 이중봉의 ‘기척’이 느껴졌다.

모든 곳에 이중봉이 있었다.

기남은 저걸 배우려 하지 않았다.

저건 배우고 싶다고 배워지지 않는 종류다.

뭐, 유광익이라면 따라 했을 수도 있겠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유려하게 제 기척을 사방에 던질 순 없겠지.

이중봉은 사방에 자신을 흩뿌려 놓곤 유령처럼 사라졌다.

“재밌는 인간.”

사방에 빛의 칼을 뿌리던 광검사가 중얼거렸다.

일단 입을 열기 시작하니, 수다를 참을 수 없나?

그렇다면 참으로 웃기는 일이다. 인베이더가 고작 말하는 욕구를 참을 수 없다는 것에.

핑.

날아온 빛의 칼이 기남의 볼을 갈랐다.

깊게 베였는지, 볼에서 피가 왈칵 흘렀다.

무시하고 걷는다.

빛의 칼이 모든 곳에 존재하는 팬텀의 흔적을 하나하나 꿰뚫고 헤집는다.

기척 중에 진짜를 찾는 게 아니라 모든 기척을 벤다.

사고 과정이 남다르다.

그야말로 제 무기를 완전히 다루고 믿는 자의 마음가짐이다.

광검사는 강하다.

네임드라 불릴 만하다.

‘그만큼 약점도 명확하지.’

광학병기, 레이저 블레이드로 목을 자를 수 있다면 죽일 수 있다.

그 한 방을 노린 이중봉이 광검사의 뒤에서 불쑥 튀어나왔다.

기척을 흩뿌리고 숨긴 뒤, 나타난 유령의 본체다.

광검사의 목에 레이저 블레이드가 꽂힌다.

광검사는 몸을 틀었다. 그의 목에서 빛의 실선 따위가 흘러나오더니, 그대로 중봉의 레이저 블레이드와 맞닿았다.

드드드드드, 티디디디디딩!

빛과 빛이 만나 산란하며 퍼지고 소멸한다.

“무용하다.”

광검사가 말하며 발을 굴렀다. 그러자 그의 무릎에서 빛의 칼날, 아니 송곳처럼 날카롭고 삐죽한 빛의 꼬챙이가 솟아 중봉의 배를 쑤셨다.

중봉은 욕설을 뱉으며 뒤로 굴렀다.

구르는 그를 보며 도안결이 몸의 기어를 올린다.

호흡으로 기합을 대신한다.

그의 몸에서 김이 솟는다. 전신에 있는 모든 힘을 단숨에 개방.

변신족의 괴력을 발휘한다. 강체로 단련한 몸에 강각과 철완을 두른다.

늑대 인간이 눈으로 좇을 수도 없을 만큼 내달린다. 그 속도감이 무서울 정도다.

내달린 중간에 파-앙 하고 충격파가 일어난다.

무서운 속도.

도안결이 내놓은 답이다.

보면 피할 수 있다. 피하고 나면 기회가 생긴다. 속도가 있다면 할 수 있다.

늑대 인간의 몸은 정직하게 돌진한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막을 수 있을까?

최속의 늑대인간이다.

광검사는 반응했다.

동선을 최대한 줄인 채, 발을 빼고 검을 흔든다.

그의 앞에 빛의 검이 흔들리며 산란하고 겹쳐진다.

곧 빛으로 이뤄진 방패 따위가 생겼다.

그냥 방패가 아니었다. 원형의 둥근 형태로 퍼진 칼날의 집합체다.

‘저건 못 피하겠어.’

기남은 당장 덤비는 대신 천천히 거리를 좁히는 데 주력하며 지켜만 봤다.

도안결은 칼날로 이뤄진 막을 보자마자 땅을 차고 광검사를 중심으로 곡선을 그렸다.

휙 하고 휘어진 선의 끝이 결국, 광검사에게 닿는다.

일격을 거뜬히 맞기로 했는지, 광검사는 피하지 않았다.

폭음이 터진다.

안결의 손톱에는 한순간 무엇이든 상대를 가르고 자를 스펠 기어가 달렸다.

그건 분명 유효했다.

“쓸 만했다.”

광검사가 말한다. 놈의 왼쪽 어깨 어림이 터지고 깨졌다. 빛이 피처럼 밑으로 줄줄 흐른다.

터진 어깨 부위는 인간과 같지 않았다. 그저 빛으로 이뤄진 덩어리 같았다.

일격을 당했음에도 놈은 무덤덤했다.

맞는 순간, 어깻죽지에서부터 퍼져 나온 빛의 칼이 갈고리처럼 안결의 배를 쑤셨다.

놈이 왼팔을 위로 치켜든다. 어느새 그의 왼팔에도 빛의 칼이 생기고.

서걱.

종으로 그어진 광검이 가까스로 배를 쑤신 빛의 갈고리를 힘으로 뜯어낸 안결의 팔을 잘랐다.

비명은 없다.

그사이 다시 기척을 뿌리고 접근한 유령의 레이저 블레이드가 머리 위에서 뚝 떨어졌다.

그야말로 신기에 가까운 움직임이나, 광검사는 고개를 까딱이는 것만으로 피한다.

그와 동시에 정수리에서도 칼날이 솟아오른다.

푹!

이번에는 중봉의 허벅지에 구멍이 난다.

‘어깨를 내준 건 살을 주고 뼈를 취한 것이고.’

‘전신에서 나오는 빛은 그대로 칼날이 되는 것이다.’

기남은 관찰했다. 섣불리 싸우지 않았다.

‘머리를 보호하는 걸 보니, 약점은 명확.’

“우습구나. 인간들.”

광검사가 떠든다.

‘말투나 태도에서 어떤 취약점도 얻을 수 없다.’

그럼 보이는 건 거른다. 할 수 있는 것만 되새긴다.

기남은 오감을 집중했다. 육감을 열어 단기 예지에 가까운 예민함을 발휘했다.

미래를 본다.

어떤 방식으로 덤벼도 자신은 저 방어를 뚫을 수 없다.

썰리는 건 자신이다.

기남이 레이저 블레이드의 스위치를 켰다.

그의 오른손에 쥔 막대에서 하얀빛의 레이저가 사출되며 형태를 이룬다.

정확히 쭉 뻗은 광학 블레이드.

레이저 사출검이다.

가르고 찌르고 베고, 무엇이든 할 수 있지만, 상대의 무기와 맞닿으면 소멸한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앞서서 나선 둘이 해답을 알려 줬다.

둘이 몸을 굴려 가며 해답을 전했다.

기남은 속도를 높였다.

탁탁.

불멸자지만, 무식한 훈련을 통해 단련한 근력과 체력이 있다.

지지지지징!

덕분에 반달 형태로 날아오는 빛의 칼날을 피할 정도는 된다.

거리를 좁힌다. 광검사는 마치 자신 있으면 덤비라는 듯, 거리를 허용했다.

“내가 피한 게 아니라. 피해 준 것임을.”

짧은 순간, 주둥이 쪽에서 빛이 일렁이며 말을 전한다. 말이라기보다는 의념에 가깝다.

기남은 듣지 않는다.

그건 지금 전투에 도움이 되지 않으므로.

그는 할 일을 했다.

모든 감각을 집중해, 상대의 칼날과 공격 타이밍을 읽는다.

읽고 또 읽어 한 수 앞을 잡는다.

예민함의 극치다.

지잉! 쭈웅!

빛의 칼과 레이저 블레이드가 서로 허공을 가른다.

서로 수를 읽고 읽힌 결과다.

그리 움직인 뒤, 한순간 기남은 빈틈을 노려 칼날을 위로 높게 그었다.

아무것도 없는 허공이었으나, 완벽하게 속은 광검사가 스스로 목을 갖다 댔다.

목덜미에 레이저 블레이드가 닿기 전, 광검사의 목에서 솟은 칼날이 빛을 뿜어낸다.

기남은 모든 감각을 집중해, 그 찰나를 포착.

레이저 블레이드의 사출을 멈췄다.

광검사의 목에서 솟은 칼은 소리 없이 허공을 가르고.

광검의 보호를 벗은 광검사의 목에 다시금 빛을 뿜어내는 레이저 블레이드가 꽂힌다.

잡기였다.

본래 레이저 블레이드는 계속 유지하면 에너지를 잡아먹는 요물이 되기에.

필요한 순간에만 켜야 한다.

그걸 기남은 예민한 감각으로 1초 내외에서 해냈다.

껐다 켜는 걸 속도를 높이는 것.

언급했듯이, 잡기였다.

그리 쓸모도 없는 기술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아니었다.

광검사가 보기에는 칼날이 없어지고 새로 생겨나는 수준이었으니까.

물론 기남의 감각이 받쳐주지 않았다면 의미 없을 기술이나.

지금은 더없이 치명적인 유효타였다.

스-응!

그렇게 광검사의 목이 허공을 난다.

주둥이 쪽에서 빛이 어물거린다.

말은 들리지 않는다. 의념도 끊긴다. 그대로 몸뚱이를 향해 기남은 검을 내리그었다.

훙 하고 빛의 파동 따위가 일어나며 놈의 몸은 두 동강이 났다.

“정기남.”

중봉이 다가왔다.

“쿨럭.”

기남은 대답하려다 피 먼저 토해야 했다.

광검사의 칼날이 그의 목부터 가슴까지 도려내서 심장을 쪼갰다.

기남은 눈으로 말했다.

‘난 불멸자입니다.’

“안다, 잘했다.”

중봉이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불멸자는 쉬이 죽지 않기에, 뼈를 주고 뼈를 취할 수 있다.

광검사는 그걸 몰랐다.

이제 싸움은 자신의 친구가 맡아야 할 것이다.

이 정도 부상이라면 적어도 한 달은 갈 것이니.

기남은 눈을 감았다. 곧 검은 어둠이 찾아와 그의 정신을 깊은 잠에 빠지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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