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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격 외 혈통 천재-385화 (385/488)

385. 녹은 뒤에 시작해요

“내 말 안 믿어요? 너 이상해요. 광익.”

네 말투가 더 이상하다. 이 조그만 여자애야.

그리고 아무리 미래를 안다고 해도 뭐? 현재를 즐겨? 벌써 포기하고 GG를 쳐?

맹랑한 꼬맹이다.

포기도 빠른 꼬맹이고.

어릴 때부터의 가르침, 이제까지 삶아온 내 삶.

아버지와 어머니, 내가 만난 사람들.

무엇보다 나에게 등을 보이며 날 살려 준 아저씨.

그중 한 사람이라도 포기하는 법을 말해 주었던가?

아니다.

하물며 내 과외 선생 둘도 악바리 저리 가라 할 정도로 어금니 까득까득 갈면서 무사 수행을 떠났다.

둘의 목적은 하나였다.

다중 능력자 두들겨 패기.

그들은 목적을 이뤘다.

그걸 알게 된 난 가슴이 뿌듯했다.

그렇지, 이 정도는 해 줘야지, 그래야 내 전직 과외 선생이라 할 수 있지.

이중봉 팀장은 어떤가.

청기사가 복수의 대상이라고 술로 허송세월하였던가?

그럼 내 사수였던 정아 누나는 어땠나.

프로메테우스를 죽이겠다는 말이 그저 허세였던가?

정기남은? 도안결은?

기남의 형제, 정호남의 목표 또한 비슷하다.

그리 좋아하진 않지만, 불멸특수대 화림의 남명진 사장도 마찬가지다.

다들 뜻이 있고 의지가 있으며, 그 길을 걷기 위해 삶을 태운다.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

내 주변에 그런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이 여자애는 완전 반대였다.

새삼 불멸특수대 입사 시절이 떠올랐다.

이장모 인사본부장.

오리엔테이션에서 라떼 교관이 됐었지.

‘나 때는 말이야’란 말을 입에 달고 살았는데.

그 기분이 갑자기 이해되는 것 같았다.

난 설교를 시작했다. 어른으로서 이건 당연한 거다.

“너 시작도 하기 전에 포기하는 건 나쁜 버릇이다.”

“광익은 정말 이상하군요. 전 포기한 게 아니라 시작조차 안 한 건데요.”

“그게 그 말이잖아.”

“아니요. 달라요.”

“달라?”

“전 미래를 본다니까요? 이미 결정된 미래는 내가 어떻게 한다고 해도 안 변해요. 모르겠어요? 광익?”

응. 전혀 모르겠는데.

이거 좀 얄미운데.

너무 당연한 말인데 왜 못 알아듣냐는 표정이 특히 얄밉다.

“네가 본 미래를 바꾼 적이 없다고 해서 변하지 않는 건 아니지.”

“아니요. 안 변해요. 광익은 바보군요.”

요게 진짜.

“바보는 너지.”

“아니요. 광익이 바보입니다. 미래는 고정입니다. 고. 정. 낫 체인지. 안 변해.”

말을 뱉으며 어깨를 으쓱하곤,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다음 풉 하고 비웃음까지 가미했다.

나도 모르게 손이 나갔다.

여자애 이마에 톡 하고 꿀밤을 먹인 거다.

“아야!”

예언가가 이마를 부여잡았다.

“그만, 위해를 가하시면 안 됩니다.”

“움직이시면 공격하겠습니다.”

“올드포스와 척지기로 마음먹은 게 아니라면 자중을 부탁드립니다.”

“요청이자 요구입니다.”

아니, 버르장머리 없는 여자애 이마에 꿀밤 하나 먹인 건데, 이 난리라고?

순식간에 호위 담당 불멸자 무리가 우리 둘을 감쌌다.

“그녀는 현시대의 유일한 예언가입니다. 올드 포스의 자산입니다.”

마지막이다. 출구 쪽에 있던 날 데려온 남자 불멸자가 말했다.

이쪽이 책임자 같기는 한데.

그렇다고 나랑 싸울 건 아니지 않나?

그런 생각과 함께 슬쩍 기세를 올렸다.

본능적이자,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내 안의 변신족 피에는 강압과 압박에 자동으로 반항하는 사춘기의 피가 흐른다고.

“하지 마십시오. 마지막 경고입니다.”

“경고?”

그 말에 한층 더 기세를 올려봤다.

얘들이 진짜 나랑 해보자는 건가?

예언가 여자애를 이 기세로 찍어 누르면 거품 물고 기절할 것 같으니.

얘만 빼고 날 둘러싼 모든 이들을 범주에 둔다.

야생의 살기가 사방에 줄기줄기 뻗어 나간다. 보이지 않는 무형의 압력이 내 주변의 모두를 내리 짓누른다.

마음만 먹으면 이들을 전부 죽이고 예언가를 납치할 수 있었다.

할 마음이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라.

그러니까 내가 올드포스, 엑스큐라시, 협회의 경계 대상이겠지.

그 세 집단, 아니 이제는 마법 연맹까지 포함해서 네 개의 기득권 집단이 날 어떻게 생각하는지.

때로는 그저 존재하는 것만으로 주변 모두를 불안에 빠트릴 수 있는 무기.

그게 바로 나다.

“해보자고?”

앉은 채로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하지만 주변 불멸자 중 함부로 입을 여는 사람이 없다.

내 존재감이 고작 예언가 하나와 비교되는 거였던가?

“부탁, 부탁입니다. 대표님.”

출입구를 지키던 남자다.

그나마 생각이 있는 타입으로 보였다.

부탁이래잖나.

입술을 파르르 떨며 말하는 모습을 보니 진정성에 점수를 주고 싶었다.

기세를 풀자, 예언가 뒤에 불멸자 둘이 선다.

그러니까 너희가 아무리 용을 쓰고 막아도 아무 소용 없다니까?

진짜 얘들이 걱정하는 그림을 한번 실현해 줘야 하는 건가?

난 순정으로 너희를 대했는데, 자꾸 이렇게 사람을 매몰차게 대하면 내가 깡패가 되는 거라고.

“그만 해요. 이마는 아프지만, 괜찮아요.”

예언가가 그들을 말렸다.

그러자 불멸자 호위대가 슬금슬금 다시 거리를 벌렸다.

너희 운 좋았다. 진짜.

예언가가 빨갛게 부푼 이마를 손바닥으로 몇 번 문지르더니 입을 열었다.

“왜 때려요?”

당돌하기는.

“포기하는 꼬락서니가 마음에 안 들어서.”

“시작도 안 한 거라니까.”

“그래. 시작도 안 한 게 꼴 보기 싫어서.”

“왜 시작해야 해요? 이미 정해진 건데?”

“그건 누가 정했는데? 네 초능이 정답이라고 누가 그랬지?”

그런 말을 해 준 사람이 있을 턱이 있나.

없을 것이다.

“음, 경험?”

“경험?”

“제가 말한 건 전부 맞았으니까.”

참 당당하기도 하지.

그 경험이 무슨 오륙십 년 동안 특수종 세상을 구르며 쌓은 것도 아니면서.

“그래서 네가 본 미래에 내가 나온 건 이게 처음이겠지?”

“음, 맞아요.”

“그럼 이제 바뀔 거다. 이전에는 날 본 적이 없었잖아?”

내 존재로 인해 미래는 변한다.

그럴 수 있지 않나? 이제까지 내가 보여 준 행적으로 입증은 충분한 것 같은데?

감동했는지, 예언가가 눈을 크게 뜨더니 천천히 입술을 달싹였다.

“……와, 자기 입으로 이렇게 말하는 거 처음 봐요.”

아니, 그렇게 반응하니까 조금 부끄러운 것 같잖아.

“당신이 미래를 바꿔요?”

“……그럴 수도 있다는 거지.”

“응원할게요.”

“저 뒤에서?”

도울 생각은 없다는 거네.

그렇다고 납치할 마음도 없다.

능력 효율이 너무 개판이긴 하니까.

두 개의 미래를 본다. 하지만 원하는 미래를 볼 수는 없다.

타이밍 좋게 내가 원하는 장면을 볼 수 있다는 보장이 없지 않나.

그러므로 빛 좋은 개살구, 계륵 같은 능력이라 하겠다.

더 쉽게 말하면 쓸모가 하나도 없다.

하지만 이미 본 미래라면.

지금 한 말이 진짜라면.

건질 건 하나 있었다.

그 시기가 언제인지 알아내는 거다.

장면만으로 그 시기를 알아낼 수 있나?

고민할 것도 없었다.

알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날 만나러 온 게 그 방증이니까.

이 시기에 굳이 한국, 그것도 강릉에?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우미호가 날 여기로 보내고?

그래, 고정된 미래라면 이 꼬마 아가씨는 그 시기조차도 아는 거다.

“그래서 멸망은 언제냐?”

“어떻게, 몰라요. 하지만 언제는 추측할 수 있죠. 전 머리가 좋거든요.”

머리가 좋은 게 아니라 나사가 열두 개쯤 빠진 것 같다만.

“장면에 보이는 것들, 그걸 보고 맞출 수 있어요.”

“그래서 언제?”

장면을 본다고 그 시기를 정확히 알 순 없다는 거다.

하지만 추측은 가능하다는 말이었다.

아까 그 장면에서 계절을 알 수 있었던가?

그저 한순간이었지만, 머릿속에 그 이미지가 뚜렷했다.

고양이를 겨눈 사람의 복장, 얇았다.

그 외에도 알 수 있는 것들.

머릿속에 남은 이미지를 떠올린 뒤, 샅샅이 뒤졌다.

짧은 순간이지만, 눈에 담을 건 다 담았다.

괜히 내가 전국에서 손꼽던 수재가 아니란 말이다.

고양이도 고양이지만, 부패한 시신이 있었고.

끈적한 땀방울이 권총의 쥔 남자의 이마에 맺혔었다.

그러므로 난 그 시기를 알 수 있었다.

‘여름.’

반사적으로 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오늘 날씨는?

더럽게 화창했다.

햇살은 뜨거웠고 공기는 무거웠으며, 습도가 높아 푹푹 쪘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땀이 주룩주룩 흐르고 음식 따위를 밖에 놔두면 몇 시간도 되지 않아 부패할 그런 날씨.

마침 내가 본 그 미래와 얼추 비슷하지 않나.

“미래는 고정.”

“너.”

“맞아요. 언제는 ‘지-금’이에요.”

입을 좌우로 벌리며 말한다.

알면서 지금 말한 거군.

그리고 여기에 온 이유도 알겠다.

바다가 보이는 곳, 해변이 있는 곳을 짚은 거다.

이 여자애가 본 인류 멸망씬이 그 장면 하나만은 아닐 테니까.

하지만 바다와 해변이 있는 곳은 못 봤겠지.

거기에 날 만나는 장면을 본 것도 한몫했을 거고.

이 여자애는 미래를 따라 걷는 길잡이.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녹은 뒤에 시작해요.”

예언가가 다시 말한다.

그 목소리에 언령처럼 힘이 담긴 것 같았다.

일어날 일은 일어난다.

그리 말하는 것 같았다.

멜팅 현상이 일어난 게 얼마나 됐지?

1년은 안 됐고, 6개월은 넘었다.

어느새 계절은 훅훅 지나, 여름이 됐으니까.

불멸자에게 이런 끈끈하고 꿉꿉한 날씨는 최악이었다.

모든 것에 예민한 순혈 불멸자에게는 더더욱.

이중봉은 날씨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다고 할 일을 내팽개치진 않았다.

“수치는?”

블랙홀은 특유의 에너지 파장을 뿜는다.

누군가는 그걸 변이 에너지로 부르고.

또 다른 이는 그걸 차원 에너지 따위로 부른다.

명칭이야 알 바 아니었다.

그저 멜팅 현상 자체에 문제가 있다는 거지.

“만을 넘었습니다.”

판독기를 주시하던 직원이 말했다.

어깨 뒤로 비스듬히 매달아 둔 레일 건 총구가 그의 엉덩이에 걸린 게 보였다.

필요한 순간 언제라도 총을 갈길 준비가 된 직원이다.

NS의 훈련 강도는 세계 최고니까.

잡생각을 했다가 날리며 중봉은 홀을 바라봤다.

‘판독기는 최신형이고.’

오류는 아니다. 여기가 처음이 아니었으니까.

이미 곳곳에서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변이인지, 차원인지, 개똥인지 하는 에너지 수치가 치솟은 것.

‘웨이브 형태 에너지 수치가 몇이었지? 삼천이었나?’

특이종이 튀어나올 때의 홀에서 에너지 급증은 순간 만 단위가 되기도 했다.

네임드가 나올 때의 에너지 수치는 이것보다 조금 더 높다.

만오천에서 이만.

‘만약 고위 넘버링에 웨이브 형태면 에너지 수치가 한 오천쯤 하려나?’

이중봉은 머리를 굴렸다.

그럼 평균 만 단위가 넘는 게이트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모른다. 언제나 블랙홀은 미지의 무엇이었으니까.

화이트홀 너머를 탐험하자는 말도 있었고.

실제로 정부와 엑스큐라시, 협회, 연맹은 힘을 합쳐 탐험팀을 꾸리기도 했다.

이계 탐험 프로젝트다.

이미 수없이 많은 특수종이 이계 너머에서 실종됐고.

살아남은 이들도 건진 게 별로 없었다.

그만큼 그 세계는 험하고 살벌했으니까.

젊은 시절 이중봉도 비슷한 경험을 했었다.

그놈의 실적 때문에 탐사팀에 지원을 나간 적이 있었다.

‘그게 썩 기분 좋은 일은 아니었지.’

근 이십 일을 환상과 환영에 갇혀 있었다.

정신을 차려 보니, 돌아가는 게이트 앞이었고.

함께 왔던 사람 중 살아남은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폭풍을 만났고, 버티려고 말뚝을 땅에 박은 게 마지막 기억이었다.

이후에는 과거의 망령이 튀어나오는 등 환각 파티였다.

그 일이 있은 뒤로 팬텀이란 별명이 붙는 특기를 발현했지만.

‘이계는 위험하지.’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기에.

‘미지’는 기회를 뜻하기도 하지만, 위험을 동반한다.

이중봉은 그 사실을 뚜렷하게 알았다.

“수치가 오릅니다.”

직원이 판독기를 보다가 말했다.

삐비비비비.

곧 판독기에서 경고음이 터졌다.

수치가 만 오천을 넘었을 때 터지는 신호였다.

그러니까 네임드가 나올 확률이 높다는 경고.

짧은 경고와 함께 중봉이 뒤로 물러났다.

함께 온 팀원이 전부 거리를 물렸다.

판독기를 든 직원이 미간을 찌푸리다가 페이스 가드를 내렸다.

“팀장님?”

지침을 묻는 거다.

중봉은 이대로 경계 태세로 지켜보자고 하려 했다

그런 그의 감각에 묘한 게 걸렸다.

팀원 중 하나가 물러나지 않고 오히려 게이트 앞으로 나가는 게 보였다.

“물러서!”

중봉은 답지 않게 외쳤다.

하지만 팀원은 듣지 않았다. 그저 앞으로 한 걸음 더 나설 뿐이었다.

중봉은 순식간에 판단했고 입을 열었다.

“아무도 나서지 마라. 전원 경계 태세.”

부그르르르르.

마침 홀 앞이 끓기 시작했다. 곧 질퍽한 검은 액체를 쏟아붓는다.

멜팅 현상이다.

본래라면 이거로 홀이 무너지고 닫혔다.

최근에 수없이 일어난 현상이다.

삐비비빅!

판독기가 경고음을 더 세차게 토해냈다.

“팀장님, 수치가 이만을 넘었습니다!”

중봉은 무시하고 게이트 앞으로 다가갔다.

그가 가진 불멸자의 육감이 위험을 경고했다.

판독기의 신호가 아니더라도 알 수 있는 선명한 위험.

곧 게이트 앞에서 검은 손이 나왔다.

하얗고 창백한 손이었다. 손톱은 길었고 빨간색이었다.

괴담에서나 나올 법한 일이었다.

뭐, 이미 어스 블랙홀이 터진 시점부터 이 세계는 괴담 그 자체였으니.

호흡을 조절한 중봉은 허리춤에 찬 검을 뽑아서 내리그었다.

창백한 손이 막 팀원에게 닿기 직전, 손가락을 벴다.

삭.

손가락은 잘렸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중봉이 휘두른 건, 인류가 만들어 낸 기적이었으니.

지이이이이잉.

레이저 블레이드, 광선검이 특유의 소음을 흘렸다.

잘린 손가락 부근에서 팟 하고 피가 튀었다.

피는 붉었고, 상처를 입은 손은 쏙 홀 안으로 들어갔다.

그제야 멍청하게 앞으로 걷던 팀원이 고개를 좌우로 흔들더니, 중봉을 바라봤다.

“네, 넵!”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하자 팀원이 당황하며 물러났다.

홀이 녹으며 닫힌다.

닫히기 직전.

- 너.

중봉은 그런 의념을 들은 것 같았다.

너무 희미해서 진짜인지 아닌지 모르겠지만.

그의 육감은 무언가를 들었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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