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4. 난 그런 거 안 믿는다.
“납치할 거냐?”
이게 무슨 일인지.
강릉으로 가면 된다길래, KTX를 예매하고 기차에 올랐다.
운전해도 되고 변신해서 달려도 되지만.
“오랜만에 가는 건데 기차나 탈까?”
어머니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인 참이었다.
그렇게 도착한 강릉역이다.
내리자마자 아는 사람이 나와 어머니를 반겼다.
그리고 마주치자마자 인사도 없이 대뜸 저렇게 물은 거고.
“그 일본 여자애 말이다.”
납치? 납치를 왜 해?
“제가 여자애나 납치하는 놈으로 보이세요?”
“좋아. 납치는 안 하는 거고, 그럼 죽이거나 위해를 가할 생각은 없단 거지?”
“없는데요.”
얘가 진짜든, 가짜든.
내가 범죄자나 테러 단체를 이끄는 대가리도 아니고 왜 그런단 말인가.
“나도 아니라고 하긴 했는데, 윗선에서는 몹시 불안한가 보더구나. 올드포스 수뇌진 쪽이 난리를 쳐서 국내 경호로 내가 왔다.”
그제야 아버지가 사정을 술술 말했다.
“네, 그렇군요.”
그럴 만도 했다. 그 일본 여자애는 공식적으로 올드포스의 자산이요, 인력이니까.
“약속했으니까, 얘기만 하고 잘 돌려보내 주렴.”
경호 팀장이라면서요?
“오랜만이네요, 강릉은. 그럼 갈까요?”
“시장에 가서 닭강정 사 먹을까?”
그런 날 두고 어머니와 아버지가 눈을 마주치더니 데이트 모드로 변했다.
어쩐지, 왜 따라오시나 했더니, 아버지를 만나러 온 거였구나.
“자리 비워도 돼요?”
“내가 막는다고 쟤가 안 할 놈도 아니고. 제 입으로 안 한다고 했으니 믿어야지.”
“핑계 같은데요?”
“맞아. 가끔 이렇게 땡땡이도 피워야 일도 할 만하니까. 신경 안 써도 돼. 나머지 팀원은 남겨 둘 거야.”
“팀장은 여기서 놀고?”
“싫어?”
“아니요.”
하하 호호, 정다운 한 쌍이 되신 두 분이 정답게 대화를 나누며 돌아서셨다.
“저기요? 아버지? 어머니?”
멀어지는 두 분을 불렀다. 아버지는 분명히 들었겠지만, 깔끔하게 무시하고 갈 길 가셨다.
멀어지는 두 분의 대화가 계속 들렸다.
닭강정을 먹고 시장 구경을 하자는 말이 오갔다.
그리고 저녁에는 대게를 먹자는 말도.
저기, 저는요?
그렇게 목소리가 들릴락 말락 한 거리까지 멀어진 뒤에야 아버지가 슬쩍 돌아보고 말했다.
“넌 일해야지. 일하러 왔으니까.”
그건 그런데.
나도 닭강정 좋아하고, 대게도 좋아하는데.
하지만 두 분은 이미 데이트 모드.
다 큰 아들이 끼어들 틈은 없어 보였다.
좋다. 난 혼자서라도 맛있게 먹을 수 있으니까.
두 분을 떠나보내고 걸음을 옮기니, 검은 방검방탄복을 입은 여자가 아는 척을 하며 다가왔다.
“만나서 영광입니다. 가시죠.”
“제가 올 걸 알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 제 착각인가요?”
조직물이 잔뜩 들은 타입의 직원이었다.
안내를 굳이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아버지가 먼저 와서 사정을 설명한 것도 있으니.
말썽을 피우면 아버지 탓이라고 하겠지?
그러니까 아버지 얼굴을 보고 얌전히 있으라는 권유다.
이 정도 인과쯤은 아버지도 알고 나도 안다.
알면서도 당해 주는 거다.
하도 위에서 불안해하니, 그 불안감을 해소하기 위해 아버지가 나선 거고.
난 거기에 따라 주는 형태였다.
뭐, 나쁘진 않았다. 딱히 불쾌할 일도 아니었고.
이 여자부터 시작해서 극진한 대우도 해 주니까.
밖으로 조금 걷자, 검은 밴이 보였다.
VIP용으로 개조한 밴이었다. 가운데에 의자가 달랑 하나, 맞은 편에 의자가 둘이었다.
가운데 놓인 의자에 앉으니.
“이쪽은 NS 대표님입니다. 모시겠습니다.”
날 인도한 여자가 말했고 그 옆에 앉은 남자가 자기소개를 시작했다.
아이엠 그라운드, 자기소개하기.
“행안부 호위전담팀, 백강입니다.”
아직 내 얼굴 모르는 한국 사람도 있던가.
대화를 길게 이어 갈 건 없었다.
인사만 하고 끝이었으니까.
그런데 나 여기에 오는 건 즉흥적이었던 것 같은데.
뭐 이렇게 준비가 철저할까.
그리 움직인 차는 경포대 쪽으로 향했다.
탁 트인 해변이 보였다.
하늘은 높고 날은 맑았다.
파란 하늘에 뭉게구름 따위만 보이는 그런 날.
소금기가 섞인 묵직한 바닷바람이 볼을 스쳤다.
차에서 내려 앞으로 툭툭 걸으니, 사방에 숨은 인기척이 느껴졌다.
대부분 불멸자.
하나같이 프로다.
올드포스에서 보낸 병력일 것이다.
이들이 온 이유는.
“바다다!”
저기 앞에서 모래사장 위를 뛰는 여자애 때문일 것이고.
새하얀 원피스에 파란 샌들.
머리에 꽃만 달면 더없이 잘 어울릴 것 같았다.
“아, 왔다. 기다렸어요오오오!”
꽃이 퍽 잘 어울릴 것 같은 외국 여자애가 내 쪽을 향해 손을 번쩍 들고 흔들었다.
내 뒤에 누가 있나?
뒤를 돌아볼 필요도 없었다.
감각에 걸리는 사람도 없을뿐더러.
이 일대를 통제했는지, 오가는 사람도 없었으니까.
교통부터 시작해서 사람이 오가는 길을 전부 틀어막았다.
그러니까 생전 처음 보는, 머리에 꽃을 달면 어울릴 것 같은 일본인 여자애가 날 보고 인사를 하는 거다.
……내가 이해한 상황이 맞나?
누군가한테 이런 얘기를 전해주면 당장 머리에 열을 재보겠는걸.
내 머릿속 생각과 별개로 여자애는 꿋꿋했다.
“이리 와요!”
손을 둥글게 말아 확성기 대신 쓰고 외친다.
천진난만함이 물씬 풍겼다.
어떤 면에서 보자면 매력이 흘러넘치는 타입이었다.
백치미가 물씬 풍겼으니까.
얼굴도 못난 편은 아닌 것 같고.
홀로그램으로 볼 때보다 지금이 훨씬 예쁘게 생겼다.
실물이 낫네.
그런 생각을 하며 발을 떼다 말고 뒤를 향해 한마디를 던졌다.
“혹시 꽃 있습니까?”
아까 자기소개를 했지만, 벌써 이름도 잊은 남자와 여자가 고개를 갸웃했다.
“꽃은 왜?”
“쟤 머리에 꽂으면 너무 잘 어울릴 것 같아서.”
농담인데, 이 양반들 웃음기가 없다.
둘 다 무표정이었다.
꽃을 구해 달라고 하면 구해 주긴 하겠지만.
그래, 내가 참는다.
몸을 돌려 걸었다.
저 멀리서 여자애가 날 부르는 곳으로.
“아야세. 광익.”
카페에 마주 앉자. 자기를 가리키고 또 나를 가리키며 말한다.
너 나 아니?
마주한 여자애가 어찌나 친한 척을 하던지. 이거 영 어색하기 짝이 없다.
“우리 처음 본 사이 맞죠?”
정중하게 물었다.
이후, 대화는 통역기를 통했고.
난 이게 꽤 신선한 이야기임을 부정할 수 없었다.
그야말로 현재 존재하는 미래는 변한다는 법칙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말이었으니까.
“이미 만나는 걸 여러 번 봐서 아는 사람 같아요.”
이 말이 시작이었다.
난 호응과 간단한 질문으로 이야기를 이었다.
“내가 사기꾼인지 보러 온 거잖아요?”
이 말을 할 때는 회사에 스파이를 심어 놓은 줄 알았다.
그것도 간부 회의를 훔쳐볼 레벨의.
“전 미래를 봐요. 집에서 나온 다음에야 알았어요. 다른 예지자들은 그거, 앞날 보는 거, 그걸 나누지 못해요.”
그게 무슨 소리냐 묻자.
“그림은 두 가지.”
얘는 미래를 장면으로 보는 데 그걸 그림이라고 말한단다.
손가락으로 브이 자를 그리며 말하는 걸 보니 귀엽긴 하네.
“하나는 고정, 움직이지 않아요. 다른 하나는 막 움직여요. 변해요. 매번 달라요.”
눈까지 반짝이며 제 능력을 떠든다.
카페 안과 밖에 세워 둔 호위만 대략 열여섯.
전부 프로 수준의 불멸자.
그런데 내 앞에 앉아서 미주알고주알 떠드는 여자애는 정말로 이제 막 시골에서 상경한 사람 같았다.
순진무구하다.
이대로 사탕 사 줄 테니 같이 가자고 하면 따라올 것 같은, 그런 이미지.
물론 그럴 생각은 없다.
올드포스 상부는 내가 왜 얘를 납치할 거로 생각하는 걸까?
깊은 통찰력까지도 필요 없었다.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내 전적.
전뇌공주가 FA 시장에 나왔을 때, 냅다 쓱싹 한 전력이 있다.
협회장이 달라고 하든 말든.
지랄 염병을 하든 말든.
일단 내 손에 들어오면 안 내준다는 이미지가 생겼다는 것.
두 번째 이유는.
“안 믿어요? 괜찮아요. 나 믿게 할 수 있어요.”
이 여자애가 진짜 예지자라 믿는다는 것.
적어도 올드포스는 어떤 확신을 갖고 있다는 것.
곧 꽃만 안 단 미친 여자가 내 이마에 손을 얹었다.
굳이 말리지 않았다.
주변 불멸자 호위가 긴장하는 게 느껴졌지만, 그들도 뭐라 참견하지 않았고.
“마음 편히.”
통역기를 통해 들려온 소리를 끝으로 눈을 감지도 않았는데, 붕 하고 놀이기구 타는 것처럼 몸이 뜨는 느낌이 들었다.
정신 간섭.
초능 중에 이런 능력도 있었다.
“보여 줄게요.”
자신만만한 목소리가 들렸다.
난 육감적으로 위험이 없다고 느끼고 긴장을 풀었다.
곧 떠오른 롤러코스터가 밑으로 훅 떨어지는 감각과 동시에.
눈앞의 세상이 변했다.
“여기서는 통역기가 필요 없어요. 내가 보는 그림을 전해 주는 거라.”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리더니, 흰 원피스를 나풀거리며 공중에 뜬 예언자가 보였다.
그 말인즉슨, 얘도 최소한 듀얼 능력자란 거다.
주변 풍경을 둘러봤다.
타오르는 불길, 그 옆으로 스파크가 튀는 전봇대가 넘어져 있다.
부서진 콘크리트 조각, 깨진 유리, 크레이터처럼 바닥이 파인 아스팔트.
여기저기 박살 난 차들.
눈앞의 풍경은 멈춘 화면처럼 고정된 채였다.
반파된 고층 건물의 윗부분만 바닥에 비스듬히 선 게 보였다.
부서지고 찌그러진 콘크리트와 외벽 사이, 고개를 빠끔 내민 고양이가 보였고.
그 위에서 권총을 겨눈 인간이 보였다.
시신이 보인다. 부서진 건물이 보인다.
부러진 가로수는 까맣게 변색된 채다.
그리고 머리 위.
까맣고 큰 구멍이 열렸다.
하, 저건 뭐라고 불러야 하나?
이게 규모가 무슨, 어지간한 운동장은 그대로 씹어 삼키겠는걸?
휴즈 게이트 시절에도 저런 크기의 홀은 없었던 것 같은데.
어스 블랙홀이라 부를 수준을 훌쩍 넘어섰다.
아주 크고 넓은 구멍, 태양과 구름을 가리는 대형 게이트다.
“이곳은 변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고정된 미래!”
팔랑, 놀이터라도 된 듯 생긋 웃으며 다가온 예언가가 말한다.
난 순수한 호기심을 담아 물었다.
“내 미래도 보여요?”
“원하는 거 다 보이지 않아요. 그냥 이미지가 보일 뿐, 변하지 않는 건 자주 보여요. 당신이랑 만난 것도 그런 종류였어요.”
“변하는 건?”
“그건 한 번 보고 다시 안 보이거나, 다른 게 보여요.”
거참, 불편한 능력이네.
미래는 보이는데 원하는 미래가 보이진 않는다라…….
이게 말이 되는 걸까?
절대 변하지 않는 운명 따위를 보는 예언자.
거짓은 아니다. 육감이 확신을 부른다. 물론 저 여자가 약에 취해 자신이 하는 말이 전부 진실이라 단단히 믿고 있을 수도 있다.
그럼 육감에도 걸리지 않을 수도 있지.
아니다. 이건 진실이다.
이런 능력을 약에 취한 채로 하는 건 어렵지.
고로 이 여자는 미래를 본다.
그리고 고정된 미래는 존재한다.
미래는 변한다는 법칙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아마도 이제까지의 예언자도 이와 비슷한 걸 봤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미래는 변한다는 논리가 박혀 있었으니.
말한다고 해도 의미는 없었겠지.
그런 면에서 이 여자는 특별하다.
능력을 확실히 구분해서 쓰는 거니까.
하나는 고정된 미래를 보는 것.
다른 하나는 가변하는 미래를 보는 것.
그러므로 가치가 뛰어나다.
괜히 올드포스가 호위 병력을 이렇게 딸려 보낸 게 아니었다.
하물며 한국에서는 피닉스 팀장도 움직였을 정도니.
이번 일에는 내 아버지라는 간판이 더 중요했겠지만.
“나 이거 오래 못 해요. 너무 힘들어.”
예언가의 말이 멀어지며 곧 눈앞이 까맣게 변했다.
눈을 깜빡이지 않았음에도 곧 망막에 본래 세계가 잡혔다.
카페다.
힘들다고 칭얼거리는 예언가.
주변을 에워싼 경호 인력 무리.
난 아무렇지 않게 대화를 이어 나갔다.
“멸망의 이유는? 다른 단서는 본 거 없고요?”
“있어요.”
물으니, 예언가가 활짝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녹은 뒤에 열렸어요.”
짧고 단출한 말이지만, 의미는 명확했다.
나도 그럴 것 같긴 했으니까.
인베이더가 병신들 모임도 아니고.
이제껏 꾸준히 침략한 애들이 왜 갑자기 스스로 몸을 녹인단 말인가.
사실 단서는 많았다.
이계에서 본 인베이더만 봐도 그렇고.
“근데 넌 왜 자꾸 웃어요?”
이 또한 호기심이다. 인류멸망을 말한 여자애가 자꾸 쪼개니까 미친년 같잖아.
“현재를 즐기는 건데요?”
맹랑하네.
지금에서야 이 여자가 제대로 보였다.
순진하고 순수하지만, 머저리는 아니었다.
예언가는 미래를 본다. 그리고 그 미래는 불변임을 안다.
그러니, 일찌감치 포기하고 현실을 즐기는 거다.
순전히 추측이지만, 시골 마을에서 지낼 때도 여왕 취급을 받았을 거다.
대우를 받는 거에 익숙한 여자였다.
즉, 지금 자신이 가진 정보를 팔아서 남은 삶을 부유하게 향유하는 게 전부인 쭉정이다.
뭐, 내가 알 바는 아니고.
“변하지 않는 미래는 없어요.”
얘가 진짜라고 해도.
내가 믿지 않으면 그만이니까.
인류멸망이라니.
난 그런 거 안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