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2. 동생이 이상하다
“광익이 놈이랑 대련하는 건 관둬라.”
NS의 훈련장은 넓다. 그중에서도 주요 전력이라 할 수 있는 이들에게는 개별 훈련장이 별도로 있다.
기남은 개별 훈련장 한쪽, 벽에 기대어 선 이중봉을 바라봤다.
“어차피 질 거니까 시도도 하지 말라는 겁니까?”
따지는 말투는 아니었다.
입 밖으로 낸 적은 없지만, 중봉은 자신에게 기술을 가르쳤다.
경험을 전수했고 마음가짐을 비롯한 모든 걸 알려줬다.
“그런 건 아니고.”
말하다 말고, 중봉은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칙 하는 라이터 소리와 함께 하얀 연기가 그의 입가에서 뿜어져 나왔다.
“얻는 것보다 잃는 게 많으니까.”
기남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의 요구였다.
“죽일 순 있어도 이길 순 없다.”
기남이 홀로 중얼거렸다. 불멸자답게 모깃소리 같은 중얼거림을 들은 중봉도 고개를 끄덕였다.
최근 광익과의 대련이 너무 잦았다.
기남은 툭하면 팔다리가 부러졌고.
코가 내려앉았고, 치아가 허공에 흩날리곤 했다.
중봉은 그걸 모두 보았다.
‘하.’
기남은 고개를 들었다.
‘테러의 날’, 광익이 건물을 무너뜨린 이후, 그 자리에 그대로 새로운 건물을 올리는 중이었다.
그 일로 주변 건물에 임시 훈련장을 여러 개 만들었다.
그리고 기남의 개인 훈련장은 천장이 아주 높았다.
체육관에 벽을 덧대고 여러 가지 장치를 가져와 보강한 방식의 훈련장이었다.
천장에 달린 조명에서 빛이 쏘아진다.
기남은 눈을 감았다가 뜨며 중봉을 바라봤다.
“그게 제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닙니다.”
중봉의 반응을 이해한다.
항상 먼저 덤비는 건 자신이었으므로.
대련으로 몸이 부대끼는 것도 인정한다.
하지만, 그걸 알면서도.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는 일도 있으니까요.”
중봉은 미간을 찌푸렸다가 폈다.
기남은 그게 자신의 정신력을 탓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래, 이중봉은 요리조리 잘 피하곤 하지.
하지만 다른 이들은?
최근 NS에는 유광익 경보령이 울린 수준이었다.
이 새끼가 뭘 잘못 처먹었는지.
NS 주요 전력을 돌아가며 괴롭히는 중이었다.
그중에서도 기남은 광익이 새끼가 가장 선호하는 상대였고.
“오라버니?”
훈련장에 마리가 들어왔다.
요즘같이 훈련하는 일이 잦은 상대다.
그녀의 손에 식사 도시락이 들려 있었다.
십단찬합.
“직접 만들었는데, 맛은 모르겠어요. 마리 입에는 잘 맞는데.”
“그럼 내 입에도 맞아.”
기남은 퉁명스럽게 답했다. 마리는 신경 쓰지도 않고 도시락을 하나하나 분리했다.
그걸 지켜보던 중봉은 조용히 걸음을 옮겼다.
“같이 안 드시고요?”
테이블에 자리 잡은 마리가 묻는다.
“둘이 먹기도 부족해 보인다.”
중봉은 내심 고개를 젓고 밖으로 나섰다.
저걸 먹느니, 차라리 인베이더 살덩이를 씹으리라.
‘피하라니까.’
중봉은 씁쓸함에 고개를 저었다.
기남의 예민한 감각은 중봉의 고갯짓을 느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다.
“마리가 만든 거 맛이 없나요?”
마리가 순진하게 물어오니까.
“아니, 맛있다.”
기남은 답하고 젓가락을 들었다. 광익이 자신을 찾아오는 이유가 어디에 있나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이 아이 때문일 테니.
마리가 수줍게 웃는다. 기남은 마리를 차마 내칠 수 없었다.
무료하다.
일이 없다. 세상에 이렇게 할 일이 없던가.
게임이나 소설 따위로 충족되지 않는 갈증.
무료함이 전신을 잠식한다.
“괴로워.”
혼잣말이 절로 나온다. 난 그 상태 그대로 몸을 뒤틀었다.
새벽 나절부터 시작한 훈련이 끝나고 식사가 끝난 시간.
오후 3시경이다.
이때쯤부터 난 할 일이 없었다.
침대에 누워 낮잠이라도 자려고 해도 눈만 말똥말똥했다.
뭘 해야 하지?
처음에는 당황했다. 몸에 이상이라도 온 것 같았다.
곧 난 문제점을 찾았다.
나 자신의 문제를 직관하는 건 어릴 때부터 받은 교육의 영향일까.
아니면 내가 이쪽으로 타고난 걸까.
찌뿌둥했다.
답답하고 갑갑했다.
아무리 훈련으로 대체한다고 하더라도 몸을 쓸 일이 너무 없는 탓이다.
그럴 법도 했다.
테러 단체는 전부 대가리를 숙였고.
멜팅 현상 때문에 인베이더의 숫자도 현저히 줄었다.
인베이더 처리 의뢰가 달에 한 건도 안 들어오는 수준이었다.
이게 또 전 세계에서 동시에 일어난 일인지라.
외국 쪽 의뢰도 없다.
테러도 없고 인베이더도 없다.
평화가 내려앉았다.
그 덕분에 난 몸이 찌뿌둥했다.
이러다 우울증이 올 것 같았기에 난 몸을 움직였다.
처음에는 마리 실력이나 한번 체크해 줄 셈이었다.
대낮에 집에 있다기에 찾아가니.
어머니와 마리가 함께였다.
“애가 요새 요리를 배우잖니? 오빠가 돼서 관심 좀 두지, 그러니?”
그랬었나.
어머니가 마리와 함께 칼질 중이었다.
누가 변신족 아니랄까 봐, 정확한 간격으로 당근을 채 썬다. 그 솜씨가 어지간한 명인 저리가라였다.
“마리가 만든 음식 맛보실래요?”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바짝 졸여서 만든 갈비찜.
새콤달콤하게 무친 마늘종.
달짝지근한 양념으로 만든 달걀 장조림.
깻잎 김치와 총각김치, 양파 절임에 지금 한창 굽고 있는 항정살.
그 옆에 고슬고슬하게 갓 지은 쌀밥.
제대로 된 한 상이었다.
아무리 회사 밥이 잘 나와도 집에서 갓 지은 밥과 어머니 손맛이 깃든 음식과는 차이가 있는 법이었다.
물론 이번에는 동생 손맛이긴 하지만.
맛있었다.
먹는 순간 감동이 연속으로 몰아쳐 올 정도로.
“감동이 웨이브로 몰려옵니다.”
내 회사와 내 명예, 내 미래의 아내를 걸고 말하는데, 불멸자고 뭐고 간에 다 반할 맛이었다.
“마리는 안심했어요. 불멸자는 혀가 예민하니까요.”
마리가 옆에서 미소와 함께 말했다.
그런데 얘는 왜 갑자기 요리를 배운다는 거지?
훈련에만 매진하더니.
“그래, 내 아들 입맛에 맞으면 어지간한 불멸자의 입맛에도 맞을 거다.”
어째, 이 음식이 날 위한 게 아닌 것 같았다.
난 실험 대상이 된 그런 기분.
마리가 어머니의 말에 볼을 발그레 붉혔다.
으으음?
“이거 누구 주게?”
내 동생이 만든 음식인데, 나 말고 누가 먹는다는 거지?
“아니에요. 마리는 그럴 마음이 없어요.”
수줍게 웃으며 말하는 걸 보니, 분명 누구한테 주려고 한 거였다.
어머니도 미소만 보이고 더 말씀하시지 않으셨다.
“너는 혜민이 걱정이나 해라. 미래의 며느리가 살인 병기가 되어서 돌아오는 건 반대니까.”
“누가 며느리인 겁니까?”
어머니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아니, 이러다가 진짜 혜민이랑 결혼하면 어쩌려고 이러지.
“제 이상형 알면서.”
“그래, 아들 이상형 알지. 그래 놓고 정작 만나지는 않는다면서?”
어머니가 식탁에 팔꿈치를 올리곤 턱을 괸다.
누구냐.
팬더 형인가. 우미호인가.
어머니한테 별말을 다 하네.
여기저기서 팬레터 비슷한 게 오긴 했다.
아예 대놓고 소개를 원하는 사람도 있고.
궁금해서 한번 만나고픈 사람도 있고.
세계 최강을 논하는 특수종.
궁금하기도 하고 만나 보고 싶기도 하고 그런 것 같다.
그중에는 외면적으로 내 이상형에 가까운 사람도 몇 있었다.
아니, 근데 그런 프로필은 왜 보내는 건데?
자기 가슴 사이즈를 왜 보내냐고.
그동안 내가 내 이상형에 관해 여기저기 좀 떠들고 다녔더니. 그게 좀 퍼졌다고 들었다.
“회사 일이 좀 바빠야죠.”
사람을 앞에 두고 그렇게 웃으시는 건 아니시지 않나요, 어머니?
“아, 그래, 바쁘지.”
어머니와 말을 나누다 보면 묘하게 꼬인다.
죽을 때까지 어머니를 이겨 먹을 일은 없으려나.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는 말은 누가 먼저 한 걸까.
그 말을 한 놈을 잡아서 멱살을 쥐고 묻고 싶다.
여기에 자식을 번번이 이기는 부모를 보라고.
여기에 있다고, 네가 없다고 한 자식 이기는 부모가.
“처음 할 때는 부드럽게 하는 거다. 아들. 넌 변신족이야. 너무 흥분하면 상대가 다쳐.”
“애 앞에서 뭔 소리를 하는 겁니까?”
난 후다닥 일어나서 집 밖으로 나왔다.
근데 진짜 마리는 저걸 누구 주려고 저러는 건가.
그건 하루 뒤에 알았다.
몸이 근질거려서 정직이 좀 괴롭히고 도안결을 불러 대련하자고 살살 꼬드긴 뒤, 기남이를 보러 갔을 때였다.
훈련장에 들어서자마자 느껴지는 건 익숙한 향.
마리의 체취였다.
조금 전까지 이곳에 있다가 떠났다.
그리고 여긴 정기남의 개인 훈련실이었다.
무엇보다 내 눈에 익숙한 도시락이 보였다.
집에 있던 대형 도시락.
그 안에 내가 먹었던 요리의 흔적들.
마리랑 정기남이?
“들어 왔으면 용건을 밝혀라. 멀뚱히 서서 뭐 하는 거지?”
정기남은 평소와 같았다.
난 놈을 빤히 바라봤다.
이거, 도저히 용납이 안 될 것 같은데.
하필이면 이 새끼를?
믿는 건 얼굴하고 거지발싸개 같은 성격뿐인 놈을?
“……뭐냐?”
내 눈빛에서 뭘 봤는지는 모르겠지만, 정기남이 두 손을 들어 올리며, 가드 자세를 취했다.
“대련하자.”
대뜸 말하니.
“꺼져라. 그럴 시간 없다.”
대련을 피하네?
불길함을 느낀 거니? 불멸자의 육감으로?
그게 아니면 요새 슬슬 피하더니, 이제 날 상대하기 싫어진 거야?
다른 남자가 생긴 거야?
아니지. 여자가 생겼지.
내 동생이랑 눈이 맞은 거니? 그런 거니?
눈으로만 물었다.
“거북하다. 좀 꺼져라.”
놈이 애원했다. 하지만 들어줄 생각이 요만큼도 없었다.
“네 목표는 뭐지?”
“그저 잘 나가는 불멸자가 되고 싶었던 거냐?”
“무슨 헛소리를…….”
“닥치고 들어. 네 목표가 고작 그 정도에 머무르는 거였냐? 그게 전부야? 아, 아니면 여자 후리는 불멸자? 그게 목표였던 거냐?”
정기남 때문에 가슴앓이하는 직원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게 다 저 새끼가 여지를 줘서 그런 거다.
나 때문에 가슴앓이하는 직원은 한 번도 본 적 없는데.
이 새끼는 툭하면 메일이나 편지 따위를 받는다지?
그 와중에 내 동생을 꼬셔?
“호오, 바람둥이 불멸자라. 그래, 퍽 잘 어울리긴 하네. 하긴 네가 뭘 하겠냐.”
“이 미친 새끼가.”
“꼬우면 대련.”
“망나니 같은 새끼, 올라와라.”
응. 좋고.
도발은 이런 맛에 하는 거지.
불멸자답게 겉으로 감정을 쉽게 내비치진 않지만.
조금 전보다 호흡이 아주 조금 빨라졌다.
“덤벼라. 정기남.”
몇 번의 타격 끝에 난 기남의 콧대를 부러뜨렸다.
“끅.”
“노오오오오력해라. 정기남.”
그 말을 끝으로 훌쩍 돌아서고.
다음 날에도 기남을 찾았다.
하도 찾아가니까 중간에 이중봉 팀장이 찾아오기도 했다.
왜 자꾸 그러냐고.
“다 잘되라고 그러는 거 아닙니까. 아니면 팀장님이 대신하시든가.”
“……기남이도 배우는 게 있겠지.”
일과가 끝나면 기남이 개인 훈련실을 찾아가다 보니.
여기로 도안결이나, 다른 이들이 찾아오기도 했다.
“나랑도 한번 붙어요.”
중간에 김근육이 덤비기도 했다.
그래도 이쪽은 여자 아닌가, 적도 아니고.
적당히 때려서 기절시켰다.
그 뒤에는 장가희 선생이 오랜만에 실력 좀 보자고 했고.
다음으로는 주일호 선생.
도안결도 계속 덤볐다.
정직이는 하기 싫어하는 걸 억지로 데려와서 시켰고.
어머니 빼고는 거의 한 번씩 다 덤볐다.
로즈도 나한테 메두사의 눈을 쓰면서 능력의 한계를 늘리려고 했다.
“널 멈추게 하면 다른 특수종도 잡을 수 있으니까.”
근데 이제 프로메테우스란 존재가 없어지다시피 했는데 얘는 왜 남아 있는 거지?
한번 물었더니.
“네 알 바 아니다.”
라고 사납게 답했다.
얘는 성격이 참 정기남스럽다.
테러 단체도 없고 인베이더도 없다.
하지만 나에게는 그동안 모은 동료가 있었다.
스트레스도 풀리고 실전 훈련도 되는 훌륭한 샌드백이…… 아니라, 맷집 좋은 훌륭한 동료가.
요한 형이랑 귀태형한테도 몸이나 풀라고 했더니.
끝내 거부하긴 했다.
뭐, 난 거부를 거부했다.
“시이발!”
기남이 신나게 얻어터지다가 결국 폭발해서 크게 외쳤다.
그걸 보던 마리가 수차례 덤비기도 했다.
“오라버니, 마리는 만만하지 않아요.”
그래, 만만하진 않더라.
근데 이 오라비는 더 만만하지 않지.
그렇게 한 달을 신나게 달달 볶다 보니, 기남이를 매일 찾아오던 이유를 까먹었다.
그동안 유의미한 성과는 있었다.
이중봉 팀장은 이런 대련은 기남에게 도움이 안 된다고 했지만.
그건 당신 생각이지.
한계를 멋대로 정하진 말란 말이지.
기남은 성장했다.
특히나 정신력이.
“덤벼라.”
이제는 날 보고 물러서지 않는다. 대신 새로운 전략과 전술을 가져왔다.
훌륭하다. 정기남.
평화로웠다.
NS도, 세상도, 나도, 내 동료 무리도.
전부.
물론 내 생각이고.
나 외에는 전부 날 향해 어금니를 박박 갈긴 했다.
“오늘은 쉽지 않을 거다.”
항상 차가운 태도로 일관하던 도안결조차도 불꽃처럼 타오른다.
그걸 보며 난 생긋 웃었다.
튼튼한 샌드백은 언제나 환영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