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1. 멜팅 블랙홀
긴 고민은 언제나 악수를 불러온다.
적어도 혜민은 그렇게 생각했다.
‘마법사의 직감.’
뭐, 자신의 직감보다 앞선 건 예비 신랑의 육감이긴 했다.
“불길해. 제 몸 하나 정도는 지켜 줬으면 좋겠는데?”
광익 오빠는 꽃밭에서 나오자마자 저런 말을 했다. 처음에는 코웃음을 쳤다.
자신은 이미 일정 수준을 벗어난 스펠 유저니까.
꽃밭에서 업그레이드되어서 돌아온 특수종을 상대하는 일에도 부족함 따위 느끼지 않는다.
그녀의 재능은 그만한 가치가 있으므로.
하물며 그러면서도 훈련을 쉬지 않았다.
제 몸이 강철이라도 된 듯, 담금질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도 광익은 자신이 더 나아가길 바란다.
그 길은 여기에서 이룰 수 없었다.
한국은 마법의 불모지나 다름없는 곳이었으니까.
그래서 엄마도 여기에 숨은 거고.
단순한 결론이다.
‘더 빠른 길.’
더 빨리 달리려면, 과외 선생이 필요했다.
예전 학교 공부에서 광익을 선생으로 초빙했듯, 비슷한 방식으로 사람을 구하려고 했으나.
‘부족해.’
이미 어느 정도는 재능빨로 퉁 친 판이다.
초빙하는 마법사로 채워질 갈증이 아니었다.
그래서 러시아행을 선택했다.
아니, 엉겁결에 가는 것도 있었다.
본래 요청하려고 했지만, 싸우는 시인의 마스터가 겨루자고 하지 않았던가.
‘나 강혜민, 싸움은 피하지 않지.’
그렇게 길을 나선 거다.
겉보기에는 순간 욱해서 움직인 것 같지만, 여러 정황이 섞인 일이었다.
물론 그러면서도 첫날 바로 상대를 놀라게 할 줄 알았다.
자신의 재능을 믿었다.
“내가 말했지. 아직 안 된다고.”
싸우는 시인의 맹주, 흔히 부르길 마스터.
마리아는 머리 위, 수직으로 세운 발끝을 털며 말했다.
혜민도 답했다.
스펠 싸움 중에 육탄전이 섞였다.
이길 줄 알았다.
그런데 육탄전에 돌입한 순간, 말도 안 되는 전법에 당했다.
주먹과 발을 쓰며 스펠을 섞어?
자신의 특기가 아닌가.
하지만 상대가 더 세련됐다.
“육탄 살법. 여기서는 열에 다섯은 이걸 쓰지. 계속 못 하면 세최특을 차지할 경쟁자 하나 죽는 거지 뭐.”
마리아가 드물게 생긋 웃었다. 해맑게 웃는 얼굴을 보며 혜민은 생각했다.
당장이라도 저년의 얼굴에 발등을 꽂아 버리고 싶다고.
유학 간 혜민이는 생각보다 잘 지내는 듯싶다.
마리아랑도 사이가 나쁘지 않은 것 같았고.
“아니, 이 미친년이 더럽게 치사한 수법을 쓴다니까?”
연락 와서 한창 마리아 얘기만 하는 거 보니 틀림없다.
호위로 붙인 할아버지도 딱히 큰 이상은 없다고 했고.
이미 떠난 지도 석 달이 넘었는데도 이러는 거 보면.
마리아도 딱히 얘를 해코지할 생각이 없단 거겠지?
걱정은 반쯤 접어 둬도 되겠다.
최근 정세와 주변 상황을 보자면 평화 그 자체였다.
“프로메테우스의 잔당이 기승을 부린단 소식입니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입니다.”
뉴스에서 대놓고 이렇게 말할 정도라니까?
일단 테러 단체가 전부 대가리 박은 타조가 됐다.
제 몸통을 다 숨길 순 없지만, 머리만은 확실히 감췄다.
어찌어찌 목덜미를 잡아채면 다른 테러 단체도 공중분해를 시킬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건 뭐, 쉬운 일은 아닌 듯싶고.
그래서 반쯤 포기다.
전뇌공주가 숨을 헐떡이며 능력을 십분 발휘해 열심히 찾아봤지만, 더 정보도 안 나왔고.
“전 만능이 아니에요.”
찾던 걸 못 찾더니, 전뇌공주가 삐져서 이렇게 말하긴 했다.
그나저나 얘도 멀쩡한 이름을 하나 붙여 주긴 해야 하는데.
전 씨의 뇌공주라니, 한국에서 용납될 수 없는 이름 아닌가.
하지만 본인이 좋다고 하니 어찌할 수가 없는 노릇이긴 하다.
아, 최근에 김근육이 비약적인 성장을 이룩해 냈다.
그야말로 피와 땀으로 이룩해 낸 일이다.
총 세 개의 초능을 가진 것만으로도 훌륭한 인재라 할 수 있지만.
능력이 있으면 뭐 하나, 제대로 활용해야 쓸모가 있는 것이다.
그녀는 그런 면에서 훌륭한 한 사람 몫을 해냈다. 해내고 있었는데.
최근에는 더 나아갔다.
변신 전 마리와 쌍벽을 이루며 싸우는 걸 봤거든.
이후 김근육이 전한 말이 인상에 깊게 남았다.
“따로 초능을 훈련하진 않았어요. 하지만 이거로 확실한 것 같아요. 체력이 늘면 사이오닉 에너지도 늘어요.”
이로써 체력 만능설이 증명됐다.
불멸자의 재생력을 늘리는 거? 체력이면 된다.
변신족의 본능을 부여잡게 해 주는 것?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마법사가 주문을 외울 때 과연 마나만 쓸까.
공부함에도 체력이 필요한 건 당연할진대.
마법 또한 쓰는 건 인간이다.
초능 특수종도 마찬가지.
초능력은 쓰면 쓸수록 늘어난다.
하지만 어쨌든 능력이란 걸 쓰는 주체는 내 몸뚱이 아닌가.
체력은 곧 모든 것이다.
그러므로.
“넌 이게 된다고 보냐?”
“과연 사람 몇을 갈아서 죽여 버릴 만한 커리큘럼이군요.”
난 팬더 형과 우미호에게 훈련 강도를 조금, 정말 아주 조금 더 늘릴 것을 지시했다.
“그래. 이 정도는 해야겠지. 괜히 죽는 놈이 안 나오려면.”
훈련 강도를 본 이중봉 팀장은 내심 기쁜 것처럼 보였다.
NS는 테러 단체를 전담 마크했고 이세계에도 진입했으며 블랙홀의 인베이더도 처리한다.
사망자는 극소수다. 중상자는 회사 차원에서 모든 걸 지원해 준다.
사망자도 이세계에 있었던 이들 아니면 없는 수준이니까.
이러니까 다들 꿈의 직장, 꿈의 직장 이러지.
물론 그중 일부는.
“꿈? 아 꿈이었지? 그래, 그런 훈련을 하라는 게 말이 안 되지. 전부 꿈인 거잖아. 맞아. 꿈이야.”
어지간한 특수부대보다 몇 배는 과한 훈련 강도에.
“맞아. 꿈은 꿈인데, 악몽이었을 뿐이야.”
꿈을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는 이들도 있었다.
“야! 이 미친 새끼야, 나 퇴사할래!”
“친구라며, 나 사무직이야. 전투 요원 아니라고.”
일반인 포함 훈련이다 보니.
중고 형이나, 스티븐 최 같은 이들이 와서 징징거리기는 하지만.
“내 비서도 다 하는 건데?”
어금니 꽉 깨물고 버티는 이들도 있다.
내 비서 아저씨가 그랬다.
정말 깡다구 하나만큼은 일반인 최고가 아닐까?
팔이 부러지고 광대뼈가 함몰되는 과정에서도 싫은 소리 한 번 안 하더라.
“버틸 만합니다. 그게 연봉의 조건이니까요.”
이 아저씨는 그러며 말을 덧붙이기도 했다.
“그리고 저보다 더하시지 않습니까.”
내 훈련을 근거리에서 지켜본 사람 중 하나니, 이런 반응도 당연한가?
인듀어, 잇헬에 이어.
최근에 미친 훈련 도구 세 번째 시리즈를 개발했다.
이번에는 당당히 NS 자체 개발이다.
엑스큐라시의 도움 따윈 없었다.
이름하여 관짝.
작명은 당연히 내가 했다.
내 전용 훈련 기어니까.
“훈련 기어에 이만한 자본을 투자하는 것도 처음 일 거예요.”
강푸름 밑에 있는 부소장이 이런 말을 했었다.
개발하는 데만 수십억이 들어갔다고 했던가?
이거 회사를 굴리다 보니 금전 감각이 무뎌진다.
그렇다고 내가 차나 시계 욕심이 있어서 뭘 사는 것도 아니고.
그저 훈련 기어에 조금 욕심낸 것뿐.
내 전용 커스터마이징 기어야 강푸름이 작정하고 만드는 중이니까.
원래 과학자가 붙인 명칭은 ‘한 사람을 위한 관’이었던가.
관짝이나, 그거나.
효과는 전과 비슷했다.
전신에 두르는 아머 형태고.
다른 점이라면 내 몸을 강제로 다운그레이드시켜 주는 효과라고나 할까?
끊임없이 출혈을 일으키게 몸에 작은 바늘 수십 개 꽂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지 중 일부가 고정된다.
하하, 이게 관짝이 아니고 뭐람.
실제로 이걸 입고 싸우면 정기남한테도 질 것이다.
부상과 압박, 모든 걸 감안해서 최악의 상황에서 몸을 굴리는 걸 전제로 만든 물건이었다.
그러니까 부상에, 정신이 혼미해지는 순간까지 몸을 컨트롤 해서 싸우는 거다.
억지로 몸의 한계를 끌어내고 나면.
전보다 생각의 가동 범위가 늘어나는 효과가 있었다.
물론 체력도 더 붙는 건 당연하고.
이걸 벗으면 잇헬을 차고 기본 체력 단련도 한다.
그렇게 하루에 6시간의 훈련.
매일 했다. 지금도 하는 중이고.
그걸 지켜본 비서 아저씨다.
“그걸 보고서야 툴툴댈 수가 있어야지요.”
관짝을 만들고 나니, 정기남이 자신도 같은 걸 입겠다고 난리를 치기도 했으나.
그건 기각.
아무리 기남이라도 이런 거 입으면 뒈진다.
경찰에서 이직해 온 지혜 누나의 말을 따르자면 이건 자살 기어였다.
아니, 꼭 그런 건 아닌데 말이야.
도안결은 말없이 내 장치를 살피더니, 이와 비슷하지만 다른 기어 제작을 요청했다.
다들 날 보더니 개인 훈련 기어를 만들더라고.
하물며 마리도 그랬다.
기남이도 그걸 보더니 정신 차렸는지, 이 새끼도 당당히 다른 기어를 만들어 달라고 했고.
훈련 기어 제작은 사원 복지 중 하나다.
덕분에 회삿돈을 흥청망청 쓰긴 했지만.
“올해도 흑자 오브 더 흑자다.”
중고 형 말에 따르면 우리 회사는 돈을 복사하는 수준으로 벌고 있단다.
알 새끼가 터 준 무역 하나로 먹고산 게 엊그제 같은데.
지금은 얘기가 달라졌다.
“퓨어 골드가 아다만티움보다 열 배는 비싸거든.”
독과점이란 게 이렇게 무섭다.
퓨어 골드, 진금은 마나도 받아들이고 초능도 받아들인다.
축능성 광산보다 몇 배는 더 높은 가치의 황금 광산.
그게 내 손 안에 있었다.
몰래 이세계, 꽃밭에 잠입하려는 이들이 꽤 많았지만.
아니, 내가 그렇게 허술해 보이나?
이미 입구부터 시작해서 로스트 노쓰에 기지 건설이 끝났다.
뭐, 운 좋게 들어가면 끝인 것도 아니고.
이세계 건너편에도 검문소와 기지 설비가 끝났다니까?
나 몰래 안쪽 화이트 홀을 통과한 사람이 없던 건 아니었다.
피닉스팀 잠입 전문 팀원이 몰래 들어갔더라고.
물론 안에 들어서자마자 걸렸다.
애초에 이세계 적응 기간이 필요한 시점에서 몰래 홀을 넘어간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거지.
하물며 우린 그 앞에 적외선 탐지와 마나 탐지, 사이오닉 에너지 탐지 등, 할 수 있는 건 다 해 놨다.
퓨어 골드 때문이냐고?
그것도 그건데.
그쪽 세계가 좀 위험해야지.
회사가 뚫어 놓은 루트가 아닌 곳으로 다니면 골로 가기 딱 좋은 곳이다.
말이 꽃밭이지.
거기 독밭이나 다름없다고.
플랜트를 다 때려 부쉈는데도 어디선가 인베이더가 계속 튀어나왔다.
이래서 다들 이세계 정복은 불가능하다고 하는 거였나.
하물며 땅덩이는 얼마나 또 넓은지.
“올해 인베이더 사건 사상자 수가 역대 최저치를 기록 중입니다.”
뉴스에서 떠드는 말은 곧 또 다른 평화의 증명이다.
최저 수치라.
이유 중 하나는 테러 단체를 잡은 것도 있을 것이고.
의외로 마법 연맹이 제대로 일을 하기 시작한 것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큰 이유는.
“일이 쉬워졌어.”
정아 누나의 말이다. 최근 NS에 파견 팀장으로서 역할을 다하던 사람이다.
“얼마나요?”
“말이 안 되는 수준이다.”
프로메테우스를 조지고 그 잔당을 쫓던 정아 누나는 어느 날 쿨하게 돌아서서 회사에 복귀했다.
왜 왔냐고 했더니.
이 정도면 충분히 숨통을 끊은 것 같다고 했던가?
그래서 이제는 비약으로 몸을 축낼 일도 없이 은퇴나 하라고 했더니.
“할 줄 아는 게 이것뿐이다. 이게 내 밥벌이야.”
그렇게 말하고 회사에 남았다.
아니, 관둔다고 누가 밥을 굶기겠다고 했나.
다 먹고 살 건 챙겨 주려고 했다.
뭐, 일하지 않은 자 먹지도 말라고 했으니.
그래서 일반인을 동반한 부대를 운용하라고 시켜 두니, 일을 참 잘했다.
이중봉 팀장 밑에서 일을 배웠으면서 어떻게 이렇게 훌륭한 리더쉽을 발휘하는 건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나오는 수도 적고, 나오다 말기도 해.”
정아 누나가 말한다.
이상 현상.
이전에는 언제나 더 어려운 쪽으로 흘러갔었다.
겹문이라든지, 판독기 신호를 방해한다든지.
또는 근거리에 있던 문 두 개가 합쳐져 두 배로 커진다든지.
“그리고 나오는 숫자가 하나야.”
무엇보다 최근 인베이더 출현이 너무 특이했다.
‘넘버링 1’만 나오거나.
‘넘버링 10’만 나오거나.
섞여 나오는 경우가 매우 드물었다.
“일단 지켜보죠.”
이게 과연 평화로운 일상의 전조일까.
아니면 새로운 변화의 징조일까.
알 수 없다.
이후 몇 달간, 더 극적인 변화가 나왔다.
가을이 지나 겨울을 다시 맞이할 때쯤.
반쯤 구경 삼아 출장을 나왔다.
“자, 봐.”
겨울용 전투 복장을 갖춘 NS 일원 사이, 정아 누나가 말했다.
난 묵묵히 구경했다.
블랙홀 균열이 허공에 생긴다.
곧 균열이 깨지며 문이 열린다.
하지만 총을 쏠 일은 없었다.
그렇다고 칼을 쓸 일이 있었다는 것도 아니었다.
열병기도, 냉병기도 필요치 않았다.
광화문 한복판 대형 홀이 열렸다기에 구경 왔더니.
“이건 뭐지.”
최근 일어난 이상 현상 중 하나.
멜팅 블랙홀이다.
나오다 말고 인베이더가 녹아내리는 현상이었다.
그러니까 싸울 필요조차 없이, 나오는 인베이더가 녹아내리며 바닥에 알록달록한 점액만 남겼다.
점액이 딱히 독성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말 그대로 어떤 위협도 없었다.
개중에는 간간이 제 모습을 드러내는 인베이더도 있지만.
아주 드물었다.
이제는 멜팅 현상이 대세가 된 거다.
겹문이 대세가 된 것처럼.
난 머리를 긁었다.
좋은 일이다. 좋은 일인데.
그런데 왜 난 저걸 보면서 꽃밭에서만큼 불안감이 들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