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0. 유학을 보내는 아버지의 마음 (2)
“어디를 가?”
“러시아요.”
그래, 내가 말을 전해야 했다.
결론만 말하자면 리무진을 손가락으로 후벼 파며 막았지만 결국, 난 혜민이를 보냈다.
김주희 여사가 눈을 깜빡였다.
자기가 들은 말이 맞나 확인하는 작업 같았다.
“싸우는 시인에?”
“네, 러시아 쪽 마법 연맹이요.”
“뭘 믿고?”
“혜민이를 믿고?”
이 말은 반만 맞았다.
물론 혜민이가 가길 원한 것도 맞긴 하는데.
“나는 알아. 여기서는 날 더 채울 수 없어. 가르치면서 배운다고 하지? 가르쳐 보니 알겠어. 한계가 명확해.”
리무진 문짝을 뜯어내려고 하니까 창문을 내린 혜민이 한 말이다.
그게 무슨 소리냐고 따지지 않았다.
마법사의 능력은 전승이 기본이다.
스펠을 배우든, 기어를 다루는 걸 배우든 그게 빠르다.
창조가 불가능하다는 게 아니다.
자신한테 맞는 스펠과 효율적인 성장 방식, 그 모든 길을 이미 선대가 뚫었고 걸었다.
그걸 맨땅에서 반복하는 건 비효율의 극치였다.
아쉽게도 혜민의 모친이 해 줄 수 없는 일이고.
4대 연맹 중 하나라면 해 줄 수 있는 일이었다.
하물며 그 상대가 싸우는 시인의 맹주라면 더 그렇고.
그래서 난 혜민의 말을 이해한다.
혜민이 가고자 한 게 첫 번째 이유라면.
두 번째 이유.
불멸자의 직감이다.
마리아란 여자를 본 순간부터 은근히 든 육감인데.
얘가 나쁜 애가 아닌 것 같더라고.
그렇다고 해서.
혜민이가 원한다고, 감이 나쁘지 않다고 해도.
인베이더 무리 한복판에 사람을 던질 순 없다.
그러므로 세 번째 이유가 가장 합당했다.
연맹을 후리러 갈 때.
내가 아무 생각 없이 싸우는 시인을 먼저 때리러 간 게 아니었다.
‘연맹 중에서도 이 친구들은 정신을 많이 차렸단 말이지.’
만났을 때 정략 결혼하자는 제안이 나올 줄은 몰라서 조금 당황하긴 했는데.
그 외에 이 여자의 내력은 샅샅이 훑었다.
전뇌공주가 열심히 인터넷을 뒤지고 중고 형이 러시아 쪽 인맥을 활발하게 썼다.
돈도 썼고 사람도 썼고 능력도 써서.
가장 중요한 건 최근 연맹주가 됐다는 것.
그리고 맹주가 되자마자 그동안 연맹의 핵심 인사 따위를 비롯해 모든 걸 갈아 엎었다는 것.
러시아 정부는 허튼짓을 거듭하고 있지만, 얘들은 정도를 걷기로 했다는 것.
싸우는 시인은 다른 연맹과는 달랐다.
정도를 걷고 세상을 위해 주문을 쓰겠다는 취지를 당당히 밝혔다.
최근에 이 일로 다른 연맹에게 따돌림도 받았고.
거, 어른이란 것들이 모여서 따돌리기나 하고 말이야.
어쨌든 난 이 모든 상황을 염두에 두고 싸우는 시인을 쳤다.
가장 고대의 저주를 안 팔아먹었을 것 같았으니까.
이후 가장 의심 가는 일루미나티로 간 거고.
그래서 잘 먹히지 않았나.
물론 그렇다고 해서 혜민이가 완벽하게 안전하다고 말할 순 없었다.
그러므로 김주희 여사가 눈을 부라리는 말에 할 말이 없긴 했다.
“혜민이가 연맹을 피해서 도망 다녔다는 걸 알면서도?”
차분한 물음에 더 등골이 시렸다.
알긴 알지.
내가 슬며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걸 아는 사람이…….”
김주희 여사가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의 연구실 한쪽에서 서서 난 벌 받는 아이가 된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도 있는 거 아닌가.
앞으로 다가올 일이 뭐가 될진 모르지만.
꽃밭에서 느낀 불길함은 반드시 무슨 일이 일어날 것만 같다.
그걸 무시할 순 없었다.
기실 이 행동의 내재한 이유는 하나다. 내가 전부를 지킬 순 없다.
그러므로 가장 합리적인 방식을 택해야 하는 거다.
각자도생.
제 몸은 제가 지키게 해야 한다.
하물며 강혜민이 위기에 빠져 헐떡거리면 그냥 두고 볼 수 없으니.
최소한 네임드 급이 나오더라도 제 몸을 지켜야 한다.
그게 목표다.
그러기 위한 유학이다.
나도 아찔한 기분이 들긴 하다.
마치 딸을 유학 보낸 아버지의 마음 같았다.
만약에 혹시라도 혜민이한테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인베이더고 뭐고.
불길함이고 뭐고.
꽃밭이고 뭐고.
이 세상에 마법사란 존재는 깡그리 지워 버릴 거다.
뭐, 내가 또 아무 생각 없이 보내기만 한 건 아니었다.
보안 장치를 몇 개 두긴 했다.
매일 연락을 남기는 것과 마리아에게 언제든 혜민이 모습을 홀로그램 전송으로 볼 수 있게 하는 것.
거기에 전뇌공주를 통해 붙인 스파이 웨어도 있고.
덕분에 마리아가 무슨 짓을 하든 몇 초 이내로 알 수 있다.
더해서 호위도 하나 붙여 놨다.
아무리 그래도 그냥 보낼 순 없는 건 아닌가.
무슨 일이 있을 줄 알고.
호위로 가는 사람이 심히 귀찮아하긴 했지만.
“전대 불멸교주이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불멸자.”
할아버지는 내 부탁에 저런 대답을 던졌다.
“네, 아는 걸 왜?”
“그런 사람한테 코흘리개 계집애 호위를?”
“거, 부탁 좀 합시다.”
“연장자에게 말하는 본새는 왜 그런 거냐?”
그래. 내가 예의가 없었다.
“월급 두둑이 드릴게. 보디가드 좀 해 주십쇼. 으르신.”
귀찮아서 어금니 꽉 깨물고 말하니.
할아버지가 나와 눈을 몇 초 동안 마주치더니, 답했다.
“그래. 좋다. 미래의 손주며느리라면, 그래, 그럴 수도 있겠지.”
뭐라는 거야?
하여간 보내는 거에 만족했다.
오해는 내 몫이 아니다. 하는 사람의 몫이지.
놔둔다고 어디 소문내거나 일을 벌일 처지도 아닌 사람이고.
이게 혜민이를 보내고 김주희 여사에게 말을 전하기 위해 온 길에 있었던 일이었다.
김주희 여사가 고개를 팩 돌렸다. 등을 보인 채로 말이 없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1분이 1시간 같은 불편한 침묵 사이.
“잘못되면 책임져야 할 거예요.”
“아, 그쵸, 네.”
걱정하는 게 당연하다. 목소리에 원망이 어린 것도 당연할 것이고.
김주희 여사가 어깨를 떨었다.
딸을 걱정해서 우는 건가?
불멸자의 감각이 그녀의 감정 변화를 포착한다. 극적인 변화, 그 방향은 당연하게도 걱정과 불안, 슬픔…….
풉?
“하하하, 아, 너무 재밌네요.”
찔끔하고 눈물을 흘리긴 했다. 다만, 그 눈물은 슬픔과는 거리가 멀었다.
불멸자의 감각으로 포착한 감정도 슬픔과는 멀었다.
“아우, 장난친 건데.”
김주희 여사가 말했다.
음, 상대가 어머니뻘의 연상만 아니었으면 욕을 뱉을 뻔했다.
“연기력이 전도연이 뺨을 치겠네요.”
“그 정도니?”
내가 속을 정도니, 그 정도다.
세밀하게 살폈으면 알았겠지만, 슬프리라 짐작했기에 착각했다.
하, 이거 참.
“혜민이가 먼저 전화했어.”
“아, 네.”
“그리고 그 아이 신변에 이상이 생기면 곧바로 신호가 오는 부적, 여기.”
말하며 김주희 배우님이 나한테 정사각형의 얇은 천을 건넸다.
“천이 타오르면 위험하다는 신호니까 그렇게 알면 돼.”
묵묵히 부적을 바라보다 주머니에 쏙 넣었다.
“내가 채워 줄 수 없는 부분에 고민이 많더라. 그래서 나도 유학 보낼 곳 몇 군데 알아봤지. 그중에 하나였단다. 러시아.”
그래 놓고 슬픈 척 사기를?
“기분 나쁘니?”
썩 좋지는 않지만, 걱정한다고 징징거리는 것보다야 이게 낫다.
“너무 걱정하지 마렴. 그 아이도 다 컸어. 성인이야.”
그래도 마음은 쓰일 것이다. 그게 부모 아니겠나.
“무슨 일 생기면 곧바로 튀어 갈 거고 혜민이한테 조금이라도 이상한 수작 부려도 그럴 겁니다.”
“그래.”
김주희 여사가 생긋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후 러시아에 도착하자마자 혜민이한테 연락이 왔다.
뭐, 바람 피지 말라느니.
자기 두고 눈 돌리지 말라느니.
그런 소리와 함께 가슴을 모은 사진을 보냈다.
곧바로 삭제하고 어디 함부로 이런 사진을 보내냐고 혼냈다.
부부끼리 이 정도는 괜찮지 않냐는 말에 코웃음을 쳐 줬다.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침대에 누웠다.
창밖으로 맑은 달이 보였다. 보름달이었다.
혜민이 보낸 거 잘한 건가?
작정하고 말렸으면 안 보낼 수 있었다.
그럼 내가 혜민이 앞길을 막는 셈이 되나?
사실 지금도 충분하지 않나?
어지간한 스펠 유저는 씹어 먹는 실력이니까.
하지만 마리아는 말했다.
“목숨 걸고 싸우면 제가 이겨요. 100%.”
그 말에 거짓이 있는 것 같진 않았다.
하물며 혜민이를 도와서 뭐가 남냐고 물으니.
“당신의 호의가 남죠.”
라고 당당히 말하기까지 했다.
참 당돌해.
아니, 나보다 나이가 많은가?
당돌하다는 표현은 뭔가 안 맞는 것 같긴 하다.
어쨌든 그녀는 자신감이 넘쳤다.
한 무리의 수장다웠다.
그에 반해 일루미나티의 맹주는 머저리였는데.
연맹은 고이고 고인 물.
우물 안에서 살아온 이들이었다.
마법이란 특수성 때문에 이제까지 떠받들어 준 것도 좀 있고.
올드 포스나 엑스큐라시가 사정을 많이 봐주기도 했으니까.
이번 일로 상황이 많이 변하긴 했다.
작정하고 보복을 말하는 마법사도 있겠지만.
안 덤빌 것이다.
한 번 당했는데도 또 덤비면 그건 머저리지.
불멸교주는 숨었고 이시스도 활동 반경을 줄였다.
프로메테우스의 잔당이 남았다고 하긴 했는데.
그건 회사 차원에서 타격 작전이 진행 중이다.
정부도, 기업도, 협회도 같이 한다.
그 와중에 군대에서도 숟가락 얹었다고 들었고.
겸사겸사 남은 프로메테우스 사업체 몇 개를 털었는데.
푸름이 그들이 가진 연구 자료 하나에 꽂혔다.
“네 기어의 마지막 열쇠가 될 것 같다.”
그 뒤 저런 말을 남기고 연구실 안으로 잠수했다.
안에서만 열리는 구조에 1인 연구실이고 보존 식량이 가득하니 걱정은 안 되지만.
이 친구 연구에 한 번 빠지면 얼굴 내밀 생각을 안 한단 말이지.
그 연구 자료가 뭐라고 했더라?
[일반인이 특수종을 상대하는 다섯 가지 방법]
이라고 했던가?
나도 조금 읽어 봤는데 다 개소리 같은데, 거기서 뭘 얻었다는 건지.
오늘따라 잠이 안 왔다.
그러다 보니 이런저런 생각이 머릿속을 휘돌았다.
훈련에 관한 것.
아버지, 어머니.
친가와 외가.
이세계, 어스 블랙홀, 인베이더.
꽃밭에서 있었던 일.
“최초의 네임드는 공포였다. 하지만 지금도 그럴까? 인류는 진화했고 발전했으며 준비했다. 네임드는 이제 더는 악몽의 존재가 아니다.”
이중봉 팀장의 말이었다.
“장비 다 착용하고 지금 청기사와 붙으면 어떨 것 같나?”
나한테 이런 물음도 던졌었다.
그 질문에 곰곰이 머리를 굴렸다. 시뮬레이션을 돌려 봤다.
기억에 남은 청기사의 위용.
만만치 않다. 과연 네임드라 부를 만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상대 못 할 정도는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이미 한 번 꺾어 봤으니까.
한 번이 어렵지, 그다음부터는 쉬운 법이니까.
전략을 짜면 된다. 대비하면 된다.
청기사는 어려운 상대지만, 이제는 잡을 만한 적이다.
“그런데도 불길하다면 넌 뭘 본 거냐?”
내가 말한 불길함에 관한 답이었다.
정작 자기도 이상한 느낌을 받았으면서 나한테 보채기는.
이중봉 팀장만 물은 건 아니다.
많은 사람이 비슷한 종류의 질문을 던졌고.
난 그 질문에 모두 같은 답을 했다.
“네임드가 인베이더의 최종 진화형이 맞습니까?”
그건 누가 정했지?
인류가 정한 기준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발전한 건 인류뿐일까?
난 그런 질문을 역으로 던지고 싶었다.
우웅. 쩍!
헬멧의 페이스 가드를 내린 대원 하나가 쪼개지는 균열을 보며 총구를 들었다.
“균열 발생, 판독 확인 중.”
블랙홀은 이제 일상.
이런 일에 당황하거나 긴장하는 건 신입이나 할 짓이었다.
적당히 손에 힘을 주고 대기한다.
그게 베테랑의 자세였다.
남자는 경찰청 소속 초능 특수종이었고.
PWAT 3팀의 베테랑 대원이었다.
곧 판독이 끝났다.
판독기 화면을 확인한 남자는 흠하고 짧은 숨을 내쉬었다.
“이상 있습니까?”
뒤쪽에서 부하가 물었다.
“아니, 오랜만에 너무 만만한 일이라.”
“한 줄에 넘버링 원이야. 겹문도 아니고 웨이브도 아니네.”
겹문도 웨이브도 아닌 홀은 근래 처음이었다.
몇 년 전에나 나올 법한 형태다.
“그럼 좋은 거 아닙니까? 아 판독기가 고장 난 건가?”
“그건 아닌 것 같다.”
남자는 베테랑, 균열이 쪼개지는 속도와 형태만 봐도 대강 감이 왔다.
저러다가 갑자기 확 하고 벌어질 수도 있지만.
그런 일은 없었다.
홀이 열리고 넘버링 원, 눈먼 개만 나왔다.
특이종도 없었고 이상도 없었다.
나온 건 고작 다섯 마리.
나오자마자 총알 세례에 시체가 된 놈들이다.
그거로 끝이었다.
홀이 닫혔고 일이 끝났다.
“……너무 쉬우니까 오히려 찝찝한데요?”
부하가 총기를 점거하며 말했다.
그건 베테랑 대원도 마찬가지였다.
“뭐, 다시 세상이 원래대로 돌아가려나 보지.”
베테랑 대원은 찝찝한 마음을 털어 냈다.
대수롭지 않은 일이었다.
실제로 홀이 열린 일대에 이상 현상이 일어나지도 않았다.
CCTV 특이 사항 감시 조치까지 했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그저 지나가는 일일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