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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격 외 혈통 천재-379화 (379/488)

379. 유학을 보내는 아버지의 마음 (1)

“진짜 재밌는 얘기네. 그러니까 내가 당신이랑 결혼 같은 걸 해 주면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

“네. 제 모든 걸 걸고 맹세하죠.”

그 짧은 시간에 한국말을 배워서 온 여자다.

노력이 가상하긴 한데.

당신이랑 입장이 같은 여자가 지금 내 뒤로 줄을 서 있다는 걸 알려 주면 어떨까.

그중에 대뜸 머리통을 차 버리는 스펠 유저 천재도 있다는 걸 알면?

내 씨만 노리는 변신족은 어떨까.

이보다 더 나아가면 지금도 내가 말만 하면 불멸자 미녀를 줄을 세워 대기시킬 용의가 있는 불멸 가문의 가주도 있는데.

“그저 저 하나의 지원은 아닐 겁니다. ……당신 알고 있죠?”

마리아란 여자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실제로 마법적인 무언가가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서늘하다.

그건 압도적인 강자만이 갖는 기세 비슷한 거였다.

이걸 비전으로 발전시킨 게 야생의 살기고.

다시 이걸 목소리로 변환해 내뱉게 하는 게 ‘언령’이다.

알고 있냐는 질문에 그 기세가 실렸다.

시치미를 뗐다.

마리아가 다리를 꼬고 앉았다. 짧은 치마 사이로 속옷이 슬쩍 보였다.

털 한 가닥 없는 다리가 매끈했다.

“어떤 뛰어난 독심술사도 사람의 생각 전부를 읽을 순 없죠. 한때 시대를 풍미했다던 1세대의 초능 특수종 마인드 퀸도 그건 불가능하다고 했어요. 하지만 입 밖으로 말이 나온 순간, 그건 곧 들을 수 있는 말이 된답니다.”

한국말 배운 지 얼마 안 됐는데, 청산유수다. 청산유수.

난 다리에서 눈을 떼고 그녀 뒤로 벽을 수놓은 무늬를 감상했다.

기하학적인 무늬가 인상적이었다.

우리가 만난 곳은 서울의 한 카페다.

그렇다고 그냥 카페는 아니긴 했다.

정확히는 한시적 이면 세계였다.

싸우는 시인이란 연맹의 마법사 집단이 만든 가상 세계다.

그리 대단한 건 아니라고 했다.

얘가 그랬다.

세상 일부에 틈을 만들어 잠깐 안으로 들어서는 원리란다.

처음 이세계가 나왔을 때부터 연구되던 주문인데.

최근에 상용화해서 쓴다고 했던가.

들어가는 자의 의지가 있어야 들어갈 수 있고, 뭐 걸리는 게 많은 작업이라고 듣긴 했다.

나도 들어올 때 주문 저항력 따위를 최대치로 낮춰 달라는 부탁을 들었고.

어렵진 않았다.

감각에 걸리는 걸 알면서도 들어가면 그만이었으니까.

육감의 눈으로 보이니, 그 경계를 넘는 것도 할 수 있는 거다.

어쨌든 덕분에 말은 편하게 할 수 있는 공간에 둘이 있게 된 거다.

전에 나한테 시원하게 맞고서도 이리 독대를 청하니.

거기에 이 여자 무슨 생각인지, 연락하고 이틀 만에 여기까지 왔다.

행동력 죽여준다.

오기도 남다른 것 같고.

거기에 제안도 꿀과 같다.

러시아의 싸우는 시인과 더불어 다른 마법 연맹을 전부 설득해 한 편이 되겠단다.

정확히는 내 편에 서겠단다.

현 상황에서 이들이 내 편이 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맞다. 현재만을 본다면 그 의문은 합당하다.

“시답잖은 싸움 못 하게 하려고 쥐어 팬 거잖아요. 괜히 서로 견제하고 그러느니 차라리 한 명의 적을 만들어 그 적을 두고 뭉치라고.”

기가 막히네.

몸은 장가희 선생인데, 머리는 우미호다.

두뇌 회전 속도가 미쳐 날뛰는걸.

“생긴 거 답지 않은데.”

“그건 내가 할 말이네요.”

무뚝뚝한 얼굴로 할 말은 하는 마리아를 보며 난 고개를 끄덕였다.

다 맞는 말이었다.

꽃밭에서 느낀 불길한 예감은 무엇을 뜻하는가.

모른다.

그걸 알면 대비하고 준비하면 그만인데, 모르니까 불길하고 불안한 거다.

그럼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가.

특수종 세상은 뿔뿔이 흩어진 조각 모음 같은 것들의 합산이다.

다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싸우고 움직인다.

그럼 이들을 일시적으로 하나로 모을 수 있다면?

전부가 하나가 될 순 없다.

하지만 각각 알아서 편 가르기를 잘해 놓지 않았나.

그대로 나누면 될 일이었다.

올드 포스, 엑스큐라시, 사이오닉 협회, 연맹.

이 네 개의 집단이 내부 결속을 다지면 된다.

무슨 일이든 우리끼리 싸우고 있지만 않으면 반은 했다고 본다.

이거 근데 누구한테도 말 안 한 건데.

이중봉 팀장하고 팬더 형, 우미호는 눈치채긴 했지만, 이걸 외부에서 보고 알아챈 사람은 처음인걸.

“이번 일에 세최또란 이명이 도움이 됐겠죠.”

맞다. 속내를 숨기고 미친 짓인 척했다.

그러니까 그만 파헤쳐라. 내 속을 다 들여다보는 기분이잖아.

불길한 예감에 맞춰 내부 결속 좀 다지라고 했다.

그래, 그렇게 한 거 맞는데.

“여기서 내 인륜지대사는 왜 나오는지?”

“그건 제가 원하는 거니까요. 모든 거래는 기브 앤 테이크 잖아요?”

주문 중에는 언어를 빠르게 익히는 주문도 있다고 했던가?

근데 그걸 아무나 쓸 수 있다고 했던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럼 이 여자는 대단한 스펠 유저 일 것이다.

인륜지대사란 단어를 알아듣지 않나.

“사랑 없는 결혼 괜찮겠어?”

“문제없어요. 나중에 저 없으면 못 살게 할 자신이 있거든요.”

자신감 보소.

반할 뻔했잖아.

무엇보다 마음이 컸고 키도 적당했으며 놀 줄 아는 여자였고.

싸움도 잘할 것이다.

느낌이 온다.

혜민이만큼이나 몸을 단련하는 걸 취미로 삼는 그런 여자.

뭐, 그렇다고 해도.

“거절.”

“……싫다고요?”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세상을 구하고 싶어서 뭐든 할 작정 아니었어요?”

뭐라는 거야, 얘가.

“아닌데.”

“아니라고?”

“응, 아닌데.”

“결혼 한 번에 당신이 원하는 대로 특수종 세상의 판도가 바뀔 수 있는 건데도?”

“그래도 별로야.”

얘가 선문답을 즐기나, 왜 이래.

일단 이 친구가 갖가진 오류부터 잡아 줬다.

“세상 안 구하고 싶고, 그냥 할 수 있는 거니까 하다 보니까 이렇게 됐을 뿐이고. 그냥 나랑 내 주변 사람 잘 먹고 잘살면 그만인데?”

“세속적이네요.”

역시 한국말을 잘 배웠어. 선생이 누군지 잘 가르쳤다.

세속적이라니.

“그래서 싫어. 처음 본 여자랑 결혼이라니.”

“나 예쁜데?”

“나 불멸자야.”

불멸자의 미모는 세계 최고다.

그 말에 마리아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몹시 분한 듯했다.

그렇다고 표정이 변하진 않았다.

불멸자의 감각으로 내가 선수 쳐서 상대의 의중을 읽은 것뿐이다.

꽃밭에 다녀온 이후로 감각이 더 예민해진 감이 있다.

그런 상황이었다.

난 거절했고 마리아는 말문이 잠시 막힌 상황.

찌지지직.

어디서 쥐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햄스터 키워?”

“누가 억지로 이쪽으로 진입했어요.”

마리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고개를 뒤로 돌리자, 번쩍하고 빛이 솟는다. 그 빛의 한 가운데, 그림자 하나가 나왔다.

툭툭, 걷는 걸음은 가볍고 전신에는 흉측한 주문의 기운이 느껴졌다.

불멸자의 감각이 단숨에 상대를 파악했다.

걷는 걸음걸이, 숨소리, 냄새 등으로 상대를 특정해 내는 건 일도 아니었기에, 난 단숨에 상대를 알아챘다.

“강혜민?”

“뭐 하니? 유광익아? 바람피워?”

바람이라니. 누가 들으면 진짠 줄 알겠다. 이 자식아.

잔뜩 골이 났는지, 내 이름 석 자를 부르며 들어선 혜민이다.

“으흠.”

마리아가 혜민을 보고 짧게 콧김을 내뿜었다.

“그런 거 아니다.”

“아니군요.”

혜민이를 보고 말하는데 마리아가 내 말을 받았다.

말은 동조하는데 표정은 아니다. 마리아의 얼굴에 생동감이 느껴졌다.

“아니라니까.”

“네, 아니군요.”

얘 상당히 재수 없는데?

처음 봤을 때는 이런 이미지가 아니었는데.

근육 마법사란 원래 이런 건가?

혜민은 걸어오더니, 약간 울먹이는 투로 말했다.

“나와, 가자.”

어, 얘 진짜 삐졌네.

안 따라가면 어디 골방에 박혀서 울어 버릴 기세였다.

이건 따라가야겠는데?

“우리 얘기 아직 안 끝났는데?”

마리아가 대신 답했다. 혜민의 윗입술이 툭툭 위로 들리다 말았다.

“미안한데, 나 가 봐야겠다.”

그걸 보던 내가 말했다.

“지금 가면 연맹의 어떤 지원도 없을 것 같은데요.”

음. 마리아는 내 성격을 모른다.

애초에 그런 지원을, 내 뒤에 서길 기대했다면 쫓아가서 후려갈기지도 않았을 텐데.

“어, 그래.”

그래서 단출하게 답했다. 일어나 혜민의 눈을 마주 봤다.

“넌 애가 왜 그러냐? 오빠 일하는데 와서 이럼 되겠냐?”

“데이트라는데?”

“김근육이.”

거, 일국의 공주 출신이라 그런가, 정치질이 어지간한 한국 정치인 뺨을 후려갈기는데?

자신이 상대하기 곤란한 적이 나타났다면, 본래의 적을 친구로 삼아 처리한다.

훌륭한 정치질이다.

물론 그 대상이 나라는 게 문제지만.

“가자. 아포가토 사 줄게.”

기세가 꺾인다. 혜민이가 다른 건 모르는데 그래도 내 말은 좀 듣는 편이다.

혜민의 모친께서 감탄하기도 했었지.

“아포카토랑 영화.”

“그래, 그래.”

“영화랑 호텔.”

“넌 부끄러움이 없냐?”

“없어. 그런 거 가져서 어디다 써?”

김주희 여사의 잘못은 아닐 것이다. 애가 원래 이런 것이다. 그러므로 난 이 아이의 가정 교육을 탓하지 않겠다.

“재밌네요.”

뒤에서 마리아가 일어났다.

혜민이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억지로 찢고 들어온 공간이 쩡 하는 소리와 함께 쪼개지기 시작했다.

가상의 세계가 유리 조각이 되어 흩어진다.

곧 우리는 현실의 한순간에 서게 됐다.

혜민의 옆에 선 나.

내 옆에 선 강혜민.

그리고 한 걸음 거리에 선 마리아.

마리아가 입을 연다.

“첫눈에 반했어요. 전 포기하지 않아요.”

꽤 큰 목소리였다.

다시 말하지만, 여긴 서울 한복판이었다.

마리아가 여기에 온 거다.

이면 세계가 깨진 덕분에 주변에 사람이 많았다.

또랑또랑한 한국말을 알아들을 사람이 대강 스물은 됐다.

“당신의 아이를 가질 거예요. 반드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웃기지 마. 너 개수작 부리면 죽어, 이 남자는 내 거야.”

“과연? 둘이 무슨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구는데, 잠은 잤나요?”

“오늘 잘 거야.”

“과연.”

“너 재수 없어.”

“과연?”

“과연 하지 마, 이 썅…….”

그만.

일단 혜민이 입을 막았다.

주변에 넋을 잃고 바라보는 시선이 수십이다. 이것들아.

“일단 좀 움직일까?”

둘을 억지로 이끌고 걷자니, 한쪽에 선 검은 리무진이 보였다.

주변을 호위하듯 선 검은 정장 차림의 무리도 함께다.

마리아의 호위와 차였다.

“이렇게 하자.”

나가던 마리아가 속삭였다. 나한테 한 말은 아니었다.

“둘 중에 더 나은 쪽이 갖기로.”

“더 나은 쪽?”

“특수종 세상에 걸맞게, 너 스펠 유저지?”

그냥 스펠 유저는 아니지. 무려 천만 분의 하나로 태어나는 천재란다.

“나도 마찬가지거든. 실력으로 겨루자고.”

“풉.”

혜민이 마리아를 비웃었다.

“자신 있으면 따라와.”

“어딜?”

“러시아로.”

어이어이, 일단 하나 짚고 넘어가자.

너희 둘 레이스의 상품이 된 내 의견은?

그리고 가긴 어딜 가?

“넌 아직 미완이야. 지금은 나한테 안 돼. 하지만 그럼 공정한 경쟁이 아니니까. 내 밑에서 배워라. 꼬맹아. 그 뒤에 실력으로 눌러 주겠다.”

이번에는 러시아였다.

신기한 건, 혜민이 그걸 알아들은 거였다.

“진짜? 날 알면서 그걸 자신해?”

“재능이 전부는 아니란다.”

두 여자의 눈에서 시퍼런 광선 따위가 나오는 것 같은데.

아니, 진짜 너희 난 안 보이냐?

“지금 갈까?”

진짜 따라가려고 하네.

얘가 미쳤나.

혜민의 손목을 잡았다.

“놔.”

“어딜 가.”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아니, 왜 상처받은 얼굴이냐. 너.

마리아가 옆에서 부드럽게 내 손목을 밀었다.

“잠깐 얘기 좀 할까요?”

너 이거 선 넘은 것 같은데.

솔직히 조금 짜증이 날 것 같단 말이다.

혜민이 둘을 보더니, 콧방귀를 흥 끼더니 리무진에 몸을 실었다.

이게 뭐 하자는 건지.

“저 아이, 그 아이죠?”

마리아가 묻는다. 그 아이라는 건 얘도 혜민이 정체를 안다는 거겠지?

그러니까 오랫동안 눈독 들여 온 마법 병기로 본다는 거지?

그러니까 너희 이거 곤란하다니까?

난 손가락을 리무진에 얹었다. 방호 주문과 방탄 소재 따위로 만든 리무진 차체 위로 손가락 자국이 꾸드득 남는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손가락을 박았다.

이제부터 이 리무진은 가고 싶어도 못 간다.

“과해. 마리아.”

그 상태로 내가 입을 열었다. 리무진에 손가락으로 구멍을 내는 걸 봤음에도 마리아는 웃었다.

한국에 와서 처음 보인 미소였다.

“구미가 당길 거예요. 세최특.”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진짜 구미가 당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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