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9. 유학을 보내는 아버지의 마음 (1)
“진짜 재밌는 얘기네. 그러니까 내가 당신이랑 결혼 같은 걸 해 주면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
“네. 제 모든 걸 걸고 맹세하죠.”
그 짧은 시간에 한국말을 배워서 온 여자다.
노력이 가상하긴 한데.
당신이랑 입장이 같은 여자가 지금 내 뒤로 줄을 서 있다는 걸 알려 주면 어떨까.
그중에 대뜸 머리통을 차 버리는 스펠 유저 천재도 있다는 걸 알면?
내 씨만 노리는 변신족은 어떨까.
이보다 더 나아가면 지금도 내가 말만 하면 불멸자 미녀를 줄을 세워 대기시킬 용의가 있는 불멸 가문의 가주도 있는데.
“그저 저 하나의 지원은 아닐 겁니다. ……당신 알고 있죠?”
마리아란 여자의 눈이 차갑게 빛났다.
실제로 마법적인 무언가가 일어나지 않았음에도 서늘하다.
그건 압도적인 강자만이 갖는 기세 비슷한 거였다.
이걸 비전으로 발전시킨 게 야생의 살기고.
다시 이걸 목소리로 변환해 내뱉게 하는 게 ‘언령’이다.
알고 있냐는 질문에 그 기세가 실렸다.
시치미를 뗐다.
마리아가 다리를 꼬고 앉았다. 짧은 치마 사이로 속옷이 슬쩍 보였다.
털 한 가닥 없는 다리가 매끈했다.
“어떤 뛰어난 독심술사도 사람의 생각 전부를 읽을 순 없죠. 한때 시대를 풍미했다던 1세대의 초능 특수종 마인드 퀸도 그건 불가능하다고 했어요. 하지만 입 밖으로 말이 나온 순간, 그건 곧 들을 수 있는 말이 된답니다.”
한국말 배운 지 얼마 안 됐는데, 청산유수다. 청산유수.
난 다리에서 눈을 떼고 그녀 뒤로 벽을 수놓은 무늬를 감상했다.
기하학적인 무늬가 인상적이었다.
우리가 만난 곳은 서울의 한 카페다.
그렇다고 그냥 카페는 아니긴 했다.
정확히는 한시적 이면 세계였다.
싸우는 시인이란 연맹의 마법사 집단이 만든 가상 세계다.
그리 대단한 건 아니라고 했다.
얘가 그랬다.
세상 일부에 틈을 만들어 잠깐 안으로 들어서는 원리란다.
처음 이세계가 나왔을 때부터 연구되던 주문인데.
최근에 상용화해서 쓴다고 했던가.
들어가는 자의 의지가 있어야 들어갈 수 있고, 뭐 걸리는 게 많은 작업이라고 듣긴 했다.
나도 들어올 때 주문 저항력 따위를 최대치로 낮춰 달라는 부탁을 들었고.
어렵진 않았다.
감각에 걸리는 걸 알면서도 들어가면 그만이었으니까.
육감의 눈으로 보이니, 그 경계를 넘는 것도 할 수 있는 거다.
어쨌든 덕분에 말은 편하게 할 수 있는 공간에 둘이 있게 된 거다.
전에 나한테 시원하게 맞고서도 이리 독대를 청하니.
거기에 이 여자 무슨 생각인지, 연락하고 이틀 만에 여기까지 왔다.
행동력 죽여준다.
오기도 남다른 것 같고.
거기에 제안도 꿀과 같다.
러시아의 싸우는 시인과 더불어 다른 마법 연맹을 전부 설득해 한 편이 되겠단다.
정확히는 내 편에 서겠단다.
현 상황에서 이들이 내 편이 되는 게 무슨 의미가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 수 있다.
맞다. 현재만을 본다면 그 의문은 합당하다.
“시답잖은 싸움 못 하게 하려고 쥐어 팬 거잖아요. 괜히 서로 견제하고 그러느니 차라리 한 명의 적을 만들어 그 적을 두고 뭉치라고.”
기가 막히네.
몸은 장가희 선생인데, 머리는 우미호다.
두뇌 회전 속도가 미쳐 날뛰는걸.
“생긴 거 답지 않은데.”
“그건 내가 할 말이네요.”
무뚝뚝한 얼굴로 할 말은 하는 마리아를 보며 난 고개를 끄덕였다.
다 맞는 말이었다.
꽃밭에서 느낀 불길한 예감은 무엇을 뜻하는가.
모른다.
그걸 알면 대비하고 준비하면 그만인데, 모르니까 불길하고 불안한 거다.
그럼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가.
특수종 세상은 뿔뿔이 흩어진 조각 모음 같은 것들의 합산이다.
다 자신들의 이득을 위해 싸우고 움직인다.
그럼 이들을 일시적으로 하나로 모을 수 있다면?
전부가 하나가 될 순 없다.
하지만 각각 알아서 편 가르기를 잘해 놓지 않았나.
그대로 나누면 될 일이었다.
올드 포스, 엑스큐라시, 사이오닉 협회, 연맹.
이 네 개의 집단이 내부 결속을 다지면 된다.
무슨 일이든 우리끼리 싸우고 있지만 않으면 반은 했다고 본다.
이거 근데 누구한테도 말 안 한 건데.
이중봉 팀장하고 팬더 형, 우미호는 눈치채긴 했지만, 이걸 외부에서 보고 알아챈 사람은 처음인걸.
“이번 일에 세최또란 이명이 도움이 됐겠죠.”
맞다. 속내를 숨기고 미친 짓인 척했다.
그러니까 그만 파헤쳐라. 내 속을 다 들여다보는 기분이잖아.
불길한 예감에 맞춰 내부 결속 좀 다지라고 했다.
그래, 그렇게 한 거 맞는데.
“여기서 내 인륜지대사는 왜 나오는지?”
“그건 제가 원하는 거니까요. 모든 거래는 기브 앤 테이크 잖아요?”
주문 중에는 언어를 빠르게 익히는 주문도 있다고 했던가?
근데 그걸 아무나 쓸 수 있다고 했던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럼 이 여자는 대단한 스펠 유저 일 것이다.
인륜지대사란 단어를 알아듣지 않나.
“사랑 없는 결혼 괜찮겠어?”
“문제없어요. 나중에 저 없으면 못 살게 할 자신이 있거든요.”
자신감 보소.
반할 뻔했잖아.
무엇보다 마음이 컸고 키도 적당했으며 놀 줄 아는 여자였고.
싸움도 잘할 것이다.
느낌이 온다.
혜민이만큼이나 몸을 단련하는 걸 취미로 삼는 그런 여자.
뭐, 그렇다고 해도.
“거절.”
“……싫다고요?”
고개를 끄덕였다. 마리아가 고개를 갸웃했다.
“세상을 구하고 싶어서 뭐든 할 작정 아니었어요?”
뭐라는 거야, 얘가.
“아닌데.”
“아니라고?”
“응, 아닌데.”
“결혼 한 번에 당신이 원하는 대로 특수종 세상의 판도가 바뀔 수 있는 건데도?”
“그래도 별로야.”
얘가 선문답을 즐기나, 왜 이래.
일단 이 친구가 갖가진 오류부터 잡아 줬다.
“세상 안 구하고 싶고, 그냥 할 수 있는 거니까 하다 보니까 이렇게 됐을 뿐이고. 그냥 나랑 내 주변 사람 잘 먹고 잘살면 그만인데?”
“세속적이네요.”
역시 한국말을 잘 배웠어. 선생이 누군지 잘 가르쳤다.
세속적이라니.
“그래서 싫어. 처음 본 여자랑 결혼이라니.”
“나 예쁜데?”
“나 불멸자야.”
불멸자의 미모는 세계 최고다.
그 말에 마리아가 움찔 어깨를 떨었다.
몹시 분한 듯했다.
그렇다고 표정이 변하진 않았다.
불멸자의 감각으로 내가 선수 쳐서 상대의 의중을 읽은 것뿐이다.
꽃밭에 다녀온 이후로 감각이 더 예민해진 감이 있다.
그런 상황이었다.
난 거절했고 마리아는 말문이 잠시 막힌 상황.
찌지지직.
어디서 쥐가 우는 소리가 들렸다.
“……햄스터 키워?”
“누가 억지로 이쪽으로 진입했어요.”
마리아가 미간을 찌푸렸다.
고개를 뒤로 돌리자, 번쩍하고 빛이 솟는다. 그 빛의 한 가운데, 그림자 하나가 나왔다.
툭툭, 걷는 걸음은 가볍고 전신에는 흉측한 주문의 기운이 느껴졌다.
불멸자의 감각이 단숨에 상대를 파악했다.
걷는 걸음걸이, 숨소리, 냄새 등으로 상대를 특정해 내는 건 일도 아니었기에, 난 단숨에 상대를 알아챘다.
“강혜민?”
“뭐 하니? 유광익아? 바람피워?”
바람이라니. 누가 들으면 진짠 줄 알겠다. 이 자식아.
잔뜩 골이 났는지, 내 이름 석 자를 부르며 들어선 혜민이다.
“으흠.”
마리아가 혜민을 보고 짧게 콧김을 내뿜었다.
“그런 거 아니다.”
“아니군요.”
혜민이를 보고 말하는데 마리아가 내 말을 받았다.
말은 동조하는데 표정은 아니다. 마리아의 얼굴에 생동감이 느껴졌다.
“아니라니까.”
“네, 아니군요.”
얘 상당히 재수 없는데?
처음 봤을 때는 이런 이미지가 아니었는데.
근육 마법사란 원래 이런 건가?
혜민은 걸어오더니, 약간 울먹이는 투로 말했다.
“나와, 가자.”
어, 얘 진짜 삐졌네.
안 따라가면 어디 골방에 박혀서 울어 버릴 기세였다.
이건 따라가야겠는데?
“우리 얘기 아직 안 끝났는데?”
마리아가 대신 답했다. 혜민의 윗입술이 툭툭 위로 들리다 말았다.
“미안한데, 나 가 봐야겠다.”
그걸 보던 내가 말했다.
“지금 가면 연맹의 어떤 지원도 없을 것 같은데요.”
음. 마리아는 내 성격을 모른다.
애초에 그런 지원을, 내 뒤에 서길 기대했다면 쫓아가서 후려갈기지도 않았을 텐데.
“어, 그래.”
그래서 단출하게 답했다. 일어나 혜민의 눈을 마주 봤다.
“넌 애가 왜 그러냐? 오빠 일하는데 와서 이럼 되겠냐?”
“데이트라는데?”
“김근육이.”
거, 일국의 공주 출신이라 그런가, 정치질이 어지간한 한국 정치인 뺨을 후려갈기는데?
자신이 상대하기 곤란한 적이 나타났다면, 본래의 적을 친구로 삼아 처리한다.
훌륭한 정치질이다.
물론 그 대상이 나라는 게 문제지만.
“가자. 아포가토 사 줄게.”
기세가 꺾인다. 혜민이가 다른 건 모르는데 그래도 내 말은 좀 듣는 편이다.
혜민의 모친께서 감탄하기도 했었지.
“아포카토랑 영화.”
“그래, 그래.”
“영화랑 호텔.”
“넌 부끄러움이 없냐?”
“없어. 그런 거 가져서 어디다 써?”
김주희 여사의 잘못은 아닐 것이다. 애가 원래 이런 것이다. 그러므로 난 이 아이의 가정 교육을 탓하지 않겠다.
“재밌네요.”
뒤에서 마리아가 일어났다.
혜민이 무슨 수작을 부렸는지, 억지로 찢고 들어온 공간이 쩡 하는 소리와 함께 쪼개지기 시작했다.
가상의 세계가 유리 조각이 되어 흩어진다.
곧 우리는 현실의 한순간에 서게 됐다.
혜민의 옆에 선 나.
내 옆에 선 강혜민.
그리고 한 걸음 거리에 선 마리아.
마리아가 입을 연다.
“첫눈에 반했어요. 전 포기하지 않아요.”
꽤 큰 목소리였다.
다시 말하지만, 여긴 서울 한복판이었다.
마리아가 여기에 온 거다.
이면 세계가 깨진 덕분에 주변에 사람이 많았다.
또랑또랑한 한국말을 알아들을 사람이 대강 스물은 됐다.
“당신의 아이를 가질 거예요. 반드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웃기지 마. 너 개수작 부리면 죽어, 이 남자는 내 거야.”
“과연? 둘이 무슨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구는데, 잠은 잤나요?”
“오늘 잘 거야.”
“과연.”
“너 재수 없어.”
“과연?”
“과연 하지 마, 이 썅…….”
그만.
일단 혜민이 입을 막았다.
주변에 넋을 잃고 바라보는 시선이 수십이다. 이것들아.
“일단 좀 움직일까?”
둘을 억지로 이끌고 걷자니, 한쪽에 선 검은 리무진이 보였다.
주변을 호위하듯 선 검은 정장 차림의 무리도 함께다.
마리아의 호위와 차였다.
“이렇게 하자.”
나가던 마리아가 속삭였다. 나한테 한 말은 아니었다.
“둘 중에 더 나은 쪽이 갖기로.”
“더 나은 쪽?”
“특수종 세상에 걸맞게, 너 스펠 유저지?”
그냥 스펠 유저는 아니지. 무려 천만 분의 하나로 태어나는 천재란다.
“나도 마찬가지거든. 실력으로 겨루자고.”
“풉.”
혜민이 마리아를 비웃었다.
“자신 있으면 따라와.”
“어딜?”
“러시아로.”
어이어이, 일단 하나 짚고 넘어가자.
너희 둘 레이스의 상품이 된 내 의견은?
그리고 가긴 어딜 가?
“넌 아직 미완이야. 지금은 나한테 안 돼. 하지만 그럼 공정한 경쟁이 아니니까. 내 밑에서 배워라. 꼬맹아. 그 뒤에 실력으로 눌러 주겠다.”
이번에는 러시아였다.
신기한 건, 혜민이 그걸 알아들은 거였다.
“진짜? 날 알면서 그걸 자신해?”
“재능이 전부는 아니란다.”
두 여자의 눈에서 시퍼런 광선 따위가 나오는 것 같은데.
아니, 진짜 너희 난 안 보이냐?
“지금 갈까?”
진짜 따라가려고 하네.
얘가 미쳤나.
혜민의 손목을 잡았다.
“놔.”
“어딜 가.”
“내 일은 내가 알아서 해.”
아니, 왜 상처받은 얼굴이냐. 너.
마리아가 옆에서 부드럽게 내 손목을 밀었다.
“잠깐 얘기 좀 할까요?”
너 이거 선 넘은 것 같은데.
솔직히 조금 짜증이 날 것 같단 말이다.
혜민이 둘을 보더니, 콧방귀를 흥 끼더니 리무진에 몸을 실었다.
이게 뭐 하자는 건지.
“저 아이, 그 아이죠?”
마리아가 묻는다. 그 아이라는 건 얘도 혜민이 정체를 안다는 거겠지?
그러니까 오랫동안 눈독 들여 온 마법 병기로 본다는 거지?
그러니까 너희 이거 곤란하다니까?
난 손가락을 리무진에 얹었다. 방호 주문과 방탄 소재 따위로 만든 리무진 차체 위로 손가락 자국이 꾸드득 남는다.
거기서 그치지 않고 손가락을 박았다.
이제부터 이 리무진은 가고 싶어도 못 간다.
“과해. 마리아.”
그 상태로 내가 입을 열었다. 리무진에 손가락으로 구멍을 내는 걸 봤음에도 마리아는 웃었다.
한국에 와서 처음 보인 미소였다.
“구미가 당길 거예요. 세최특.”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진짜 구미가 당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