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규격 외 혈통 천재-378화 (378/488)

378. 데이트 신청

“여기네.”

혜민이 확정을 짓는다.

“증거 없이 우리를 매도할 생각인가!”

연맹주의 관자놀이를 따라 땀이 흐른다. 불멸자의 감각은 상황이 묘하게 흐르는 걸 감지했다.

나도 그의 이마가 촉촉하게 젖은 걸 보며 반쯤 확신했다.

맞는 것 같은데.

“고대의 저주, 니들이 팔았지?”

혜민이 물었다.

말소리가 방벽을 지나치며 울렸다.

집중하지 않으면 듣기 어려울 정도로 소리가 뭉개졌다.

우리 잘못은 아니었다.

수십 겹의 방호 주문을 유리 벽처럼 쌓아 둔 채로 우리를 맞이한 건 저쪽이었다.

“이건 당연한 조치요. 싸우는 시인에서 일어난 일을 들었으니까.”

아, 일언반구 말도 없이 내가 덤볐다?

에이, 그건 아닌데.

의도라는 게 꼭 말로 하는 건 아니잖아?

그 러시아 미녀께서는 말 대신 행동으로 압박을 넣더라고.

기묘한 주문 몇 개로 대화의 우위를 점하고 시작하려고 했다.

난 그걸 정면으로 깨부순 거다.

싸우는 시인이라는 집단의 특징도 감안한 거고.

그러니까 난 적어도 일루미나티에 면담 요청을 했을 때, 대뜸 얼굴에 주먹을 꽂을 생각은 없었다.

몇 마디는 나누고 꽂을 생각이었지.

“맞아, 아니야?”

“아니오!”

아니긴.

혜민이 손가락을 까닥거렸다.

의심이 확신으로 변하는 건 무엇 때문인가.

합당한 증거가 눈앞에 있거나.

삶의 경험에 비추어 심증이 굳어지거나.

둘 중 하나라고 본다.

지금 우리에게는 심증은 있지만, 증거는 없다.

“증거 있소?”

그러니까 상대가 저리 당당하게 나오는 거겠지?

나 똑똑한 척하는 건 싫지만, 뭐 상대가 저렇게 멍청하게 구니 할 말이 참 많았다.

“내가 바보로 보여요?”

“내가 멍청해서 스위퍼 먼저 후리고 소란 잔뜩 피우고 왔겠냐고.”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말이 있다.

내가 찾아야 할 건 하나였다.

억울한 놈이 뭘 숨기진 않겠지.

아니, 숨기긴 해도 이렇게까진 안 할 거다.

“고대의 저주 급 스펠 기어 기록 소거, 창고에 있는 물건 빼돌렸고,

어라? 이거야 원, 확인할 게 없네? 증거가 완벽하게 없어. 흔적조차 없어.”

내 말에 일루미나티 맹주가 눈을 깜빡인다.

아니, 그래도 머리 좀 쓴다는 마법 연맹의 맹주란 놈이 왜 맹구처럼 구는 건지.

뭐, 그럴 만했다.

애초에 그러기 위해 만든 분위기였으니까.

프로메테우스를 부러뜨리자마자 대통령 전용기까지 빌려서 날아온 이유가 뭐겠나.

뻔히 스위퍼가 하지 않은 걸 알면서 두들겨 팬 이유는 또 뭐고.

‘압박, 압력, 강요.’

말하지 않아도 의도는 전해 줄 수 있다.

내가 그렇게 했다.

수틀리면 다 끝장내 버리겠다는 과격한 태도.

그 태도의 결과가 자신들에게 우울해진다면?

사람은 단순한 태도를 보이기 마련이다.

내 예상보다 상대 멘탈이 더 좋아서 잘 숨긴다면, 그때는 다른 방법을 택하면 되는 거고.

근데 사실 이거 먹힐 것 같더라.

마법사란 놈들의 행태를 보니, 대강 확신이 들더라고.

특수종이 세상에 발을 들인 뒤, 슬쩍 눈치 보더니, 뒤로 빠져.

인베이더의 침략에도 손만 담그는 수준에.

이후에는 아예 모습을 숨겨 버리네?

‘소심한 기회주의자 무리.’

내 눈에 비친 연맹의 모습이다.

그리고 상대 반응도 예상과 같았다.

눈이 휘둥그레졌다.

고대 저주가 담긴 스펠 기어를 줄 때야, 뒤를 깨끗하게 닦으면 된다고 생각했겠지.

산다는 놈이 있으니까 팔았고.

물건을 산 놈이 쓰는 게 문제지, 판 게 문제가 아니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고.

여기에서 문제는 하나뿐이다. 내가 그걸 문제로 삼기로 했다는 것.

생각하며 보호 장벽에 바짝 붙었다.

코앞에 생긴 보호막이 저들이 믿는 바일까.

아니면 뭘 더 숨겨뒀나?

상관없었다. 육감이 파랗게 날을 세운다.

어떤 주문도 내 감을 피할 순 없으니.

난 자신할 수 있었다.

현재의 난 주문쟁이의 천적이라고.

“이렇게 깔끔하게 치워 두면 심증이 굳어지잖습니까.”

“……그게 그건, 그러니까.”

핑계 실종.

옆으로 바짝 붙은 혜민이 장막에 손을 얹는다.

모든 주문은 역방향으로 풀 수 있다.

물론 아무나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재능이 차다 못해 넘쳐흐르는 스펠 유저가 적당한 기어를 갖고 있다면 가능한 일이다.

어라? 마침, 내 옆에 그런 애가 있네?

두-웅.

공기가 울리는 소리 따위가 들리고.

곧 눈앞에 장막이 흐릿해진다. 소리를 막고 시야를 감추던 무형의 막이 안개가 스러지듯 사라졌다.

“그래서 저주 팔아먹고 살림살이는 좀 나아지셨고?”

들어서며 물으니, 일루미나티 맹주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반항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모습이었다.

싸우는 시인.

러시아의 마법 연맹을 부르는 이름이다.

그 연맹주는 얼마 전 인상적인 남자를 만났다.

세최특, 청기사 슬레이어, 테러의 대적자.

하루하루 이명이 늘어 가는 특수종이다.

그 모든 이명 앞에서, 그녀는 그의 몸을 살폈다.

‘근육이 참.’

그냥 쳐다본 수준이 아니라 꼼꼼히 살폈었다.

탐나는 몸이었다.

입이 바짝 말랐다. 재밌는 상상을 한 덕이다. 그녀는 입술을 혀로 훔쳤다.

“연맹 차원에서 항의하겠습니다.”

간부 하나가 나서서 말하고.

다들 동의하는 가운데.

가장 오랜 시간 마리아를 지켜본 보호자 자격의 늙은 마법사가 미소를 그린 마리아를 빤히 봤다.

그녀는 시선을 의식하지도 않았다.

짧은 회의가 끝난 뒤, 늙은 마법사는 넌지시 그녀의 속을 떠봤다.

“마음에 드는 남자라도 본 거냐?”

“눈치는 빨라서.”

“누군지나 말해 봐라. 잡아다 줄 테니.”

“……세최특.”

“오호.”

마리아는 진심이었다. 그 남자, 진짜 탐이 났으니.

“연맹의 남자로 부족함이 없긴 하지.”

늙은 마법사가 말한다. 의자 팔걸이에 팔을 올려 턱을 괸 마리아가 몽롱한 눈빛을 보였다.

“잠자리가 궁금한 남자야.”

“그럼 자빠뜨려라.”

늙은 마법사의 조언은 타당했으며 마리아의 마음에 쏙 드는 말이었다.

“과했다. 연맹 전체가 들고일어났어.”

“그랬군요.”

일을 처리하고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혜민이 이건 신혼여행이냐고 물었었다.

난 그런 혜민이의 이마에 딱밤을 갈겼다.

이마를 잡고서 나보고 때리는 거 좋아하냐고 묻는 말에 할 말을 잃었었지.

자기가 맞는 역할을 한다고 하더라고.

미친 아이 같으니라고.

그거 빼고는 완벽한 출장이었다.

연맹을 들들 볶았고 일루미나티는 맹주를 갈아 치우기로 했다.

다른 연맹도 슬슬 눈치를 보게 되겠지.

함부로 그딴 거 팔면 안 된다는 걸 알려 준 좋은 사례다.

주문쟁이 새끼들, 겉으로는 빛의 연맹이니 뭐니 해도 뒤로는 개수작 부리는 거 다 안다.

이제는 그 수작을 부릴 때 머리를 좀 굴려야 할 것이다.

걸리면 좋게는 안 끝날 테니까.

“아들, 내 말 듣고 있는 거냐.”

돌아온 시간은 새벽이었다. 4시간쯤 자고 일어나 출근하니, 아버지가 피닉스 팀장의 자격으로 와 계셨다.

그게 아버지와 차 한 잔 두고 마주 앉아 있게 된 이유다.

“예, 경청하고 있습니다.”

“아닌 것 같은데?”

“아닙니다. 진짜 잘 듣고 있었는데요.”

아버지가 찻잔을 들어 입술을 적셨다.

“과하긴 한데, 딱히 제재를 가하진 않을 거고, 그냥 이러면 안 된다고 경고 같은 걸 하러 왔다.”

“올드 포스 공식 입장이겠네요?”

“그럼, 네 주의할게요.”

“그래, 말 전했고 깔끔하네.”

아버지와 비슷한 방식으로 엑스큐라시에도 항의 메일 같은 게 왔다.

긍낙이 삼촌이었는데, 내용은 대동소이하고.

대신 마지막에 밥이나 먹자고 쓰여 있더라.

알겠다고 답장을 보냈다.

“덕분에 요새 일이 없다. 아들?”

“그래요?”

“테러고 연맹이고 다들 쉬쉬하니까. 미친 과학자 애들도 조용하고.”

아버지가 멀뚱히 날 보신다. 나도 마주 바라봤다.

“저번에 상부에 보고한 건 뭐냐? 이제 예언도 하니 아들?”

“예언은 무슨, 그냥 불길한 예감 같은 거죠.”

“그런 걸 보통 예언이라고 하지 않니?”

아니다. 예언이랑은 다르다. 난 꽃밭에서 느낀 바를 소상히 정리해 올드 포스와 엑스큐라시 상부에 말했다.

인베이더의 변화, 특이종, 플랜트 등과 그에 따른 불길한 예감 같은 거였다.

“그래, 뭐, 그건 그렇다고 치자. 회사는 잘 돌아가고?”

“저보다 아버지가 더 잘 아시지 않나요?”

아무리 정부의 비호를 받고 있다고 해서 세금 문제에 완전히 벗어날 순 없다.

벌인 사업이 많고 이세계도 하나 확보한 마당이니, 나라에서도 그냥 둘 순 없고.

그러다 보니 국세청장이 아주 미안한 표정으로 회사 전체 회계를 탈탈 털더라고.

물론 어느 정도는 당해 주긴 하지만, 이쪽에서도 회계 군단을 꾸려서 상대했다.

“난 관심 없다. 네가 돈만 잘 벌면. 내 노후는 너다.”

이건 뭐 할 말을 잃게 만드시네.

부부는 닮는다더니, 이런 건 어머니가 잘하시는 건데 말이야.

볼일 다 봤다며 차를 훌쩍 비운 아버지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나가시며 긴 한 마디를 뱉으셨다.

이 또한 딱히 답할 말이 없는 내용이었다.

“뭐든 다 좋지만, 너무 위험한 일에 발을 들이진 마라. 네 엄마도 나도, 마리도 걱정하게 만들 일은 하지 마. 세상일이 전부 마음먹은 대로 되지는 않는다. 특히나 이쪽 세상은 더더욱 그렇고.”

특수종은 미친 자들의 세상.

미치지 않고서야 버티기 힘든 세상.

아버지는 긴 세월 이 세상의 일선에서 사셨다.

나가는 아버지의 등이 평소보다 더 단단해 보였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앞을 지키던 그 등처럼.

“참 할 말 없게 만드셔.”

어릴 때부터 맞는 말을 골라 하시던 분이니.

첫날 출근해서 할 일은 그동안 일어난 일의 경과를 보는 거였다.

바깥으로 늦여름 해가 사방을 뜨겁게 달구지만, 내 사무실은 에어컨이 빵빵하게 잘만 나왔다.

시원한 공간에서 한가롭게 업무를 보는 시간이다.

어디 보자.

고아나 실험실 출신 변신족을 모집해서 굴리는 훈련 학교는 잘 돌아가고.

우미호가 제 동생을 회사에 꽂았네?

뭐, 이해는 한다.

NS 안쪽에 있으면 철저하게 보호할 수 있으니까.

우미호도 호남이 형만큼이나 동생을 애지중지하니, 이해한다.

그런데 의외로 이 친구가 일을 잘한다는 보고가 있었다.

비서 아저씨가 본 바로는 그렇단다.

회계 군단을 꾸린 것도 이 친구라고.

돈에 관해서는 제 누나보다 더한 독종이란 말이었다.

나쁘지 않다. 어쨌든 내 사람이지 않나.

마법 부대 만드는 것도 수월하게 진행 중이고.

당분간 큰일이 터질 건 없고.

불멸교가 잠적했네?

얘들은 뭐 때리지도 않았는데 숨냐.

이시스도 조용해졌다.

시끄러우면 한 번 더 후려칠 용의가 있긴 한데.

딱히 피로감이 있진 않았다.

그저 업무라고 이걸 쳐다보고 있자니, 지루할 뿐.

그 타이밍에 홀로그램 폰이 울었다.

지혜 누나였다.

“단둘이 출장이라고 하고 여행 가면 안 되지 않아요?”

대뜸?

“그냥 해 보고 싶은 말이었어요. 연상이 지닌 압도적인 매력에 관해 알려 드릴까요?”

“아니요. 이것도 그냥 해 본 말이에요.”

이 말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이 양반 왜 이래.

이후에도 비슷한 전화가 몇 통 더 왔다.

김근육은 일국의 공주가 지닌 품격은 침대에서 더 빛을 발한다고 했고.

무슨 연예인 매니저란 사람이 회사 전화로 연락도 했다.

팬 미팅 할 생각 없냐고 하더라.

난 회사의 책임자지, 연예인이 아니라고 답했다.

오랜만에 말 많은 변신족 정소진이 전화해서 씨를 뱉으라는 말도 했지.

아기를 갖고 싶다고 돌직구를 던졌다.

“너무 직구 아닌가?”

그리 되물으니.

“상황이 급해서 그래요.”

무슨 상황이? 하나도 급할 게 없는데?

말없이 전화를 끊었다.

마지막 전화가 압권이었다.

“나예요.”

나가 누굴까.

목소리는 익숙했다. 불멸자의 감각은 한 번 들은 목소리를 기억했다.

“러시아?”

둔탁하고 어색한 한국말 발음이었다.

“맞아요. 나예요. 마리아.”

“우리가 전화할 사이였나?”

“지금부터 그런 사이가 되면 어떨까요?”

싸늘하다. 심장에 에어컨 바람이 쏙 들어온 것 같았다.

온도를 너무 낮춰 놓은 탓이었다.

난 손가락으로 홀로그램 리모컨을 누르며 얘기를 들었다.

꽤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반쯤은 신혼여행에 가까운 출장에 다녀온 뒤 혜민은 확신했다.

‘나한테 마음이 있어.’

다른 여자를 칼같이 내치면서 자신에게는 곁을 잘 내준다.

그러니 마음이 있다.

그렇다고 어떤 진전이 있는 건 아니지만.

‘모든 역사는 하룻밤에 이뤄지는 법.’

뭐, 지지고 볶고 할 것 없이 날 잡고 사고 치면 될 일이다.

다만 불안감은 여전했다. 이게 마법사의 직감이지, 여자의 육감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광익을 보며 불안감이 엄습하곤 했다.

‘괜찮아.’

혜민은 자신을 다독였다.

이제는 안다. 광익은 성큼 다가오는 여자보다 기다리는 여자를 더 선호한다.

광익의 여성상을 다 알 순 없지만, 하나는 확실했다.

들이댄다고 성공할 순 없다는 거.

“들었어?”

그런 와중이다. 김근육이 와서 대뜸 자신한테 말을 걸었다.

훈련하다 왔는지, 전신에서 김이 폴폴 나는 게 보였다.

손가락 사이로 긴 막대 따위를 돌리던 혜민이 고개를 모로 꺾었다.

“싸우는 시인 연맹주하고 데이트한다고 하던데.”

김근육이 말했고 혜민은 미간을 찌푸렸다.

데이트? 연맹주? 러시아? 누가?

“대표님이.”

김근육의 속삭임은 악마의 그것과 같았다.

‘서양 미녀가 취향이었냐? 마법사에 서양 미녀?’

우둑.

손에 낀 막대형 기어가 부러졌다.

파직하며 마나와 공기가 만나 스파크를 일으켰다.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