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9. 이 빠돌이 새끼가
이중봉은 연초를 꼬나물고 멍하니 하늘을 바라봤다.
화이트 홀에서 뭐 빠지게 고생하고 돌아온 뒤, 즐기는 달콤한 휴가다.
‘쉬니까. 기분이.’
이상했다.
그동안 너무 험하고 거칠게만 살아서 그런 것일지도 모르겠고.
긁적.
엄지 끝으로 이마를 긁은 중봉은 아예 뒤쪽 의자에 앉았다.
작은 전원주택이 그의 집이었다.
기왕 쉬는 거 집에서 아예 늘어지게 쉬어 볼 참이었다.
안 그러면 정신이 너무 마모되는 기분이 들 테니까.
화이트 홀, NS가 소유한 뒤 ‘꽃밭’이라 이름 붙은 곳은 전투의 연속이었다.
어릴 때 휴즈 게이트가 터졌을 때나 했던 고생을 거기서도 했다.
‘광익이 개새끼.’
다 늙은 자신을 어떻게 그렇게 굴린단 말인가.
이제 일선에서 물러날 나이가 됐는데.
후학을 양성하며 쉴 나이다.
어디 교관이나 하면서 놀 나이가 다 됐다.
뭐, 그럴 생각은 개미 손톱만큼도 없긴 했지만.
아무것도 안 하고 멍하니 하늘만 바라보니, 생각만 계속 이어졌다.
‘지금쯤 남 사장 똥줄 좀 타겠네.’
최미남과 프로메테우스를 다 잡아먹어 버렸으니, 얼마나 성질이 나겠나.
‘정부도 성질이 났으려나?’
단군 그룹도 이 일에 공 좀 들였을 텐데.
이중봉은 광익을 말리지 않았다. 아니 말릴 수 없었다.
말리는 시늉은 했다. 이 일이 왜 필요한지, 왜 그들을 놔두는지, 정말 모를까 봐, 설명만 했다.
그러자 광익이 세상 한심한 눈으로 보며 말했다.
“지금까지 그렇게 해서 뭐 성공한 적은 있고?”
있기야 있지. 있긴 한데.
“그리고 또, 놔둬서 생기는 문제는? 저 뭣 같은 테러 단체 친구들이 들어와서 퍼트린 마약, 그 마약으로 생긴 사고, 어쭙잖게 수행하는 암살 의뢰, 참, 별짓 다 했다. 그쵸?
근데 이게 경미한 피해라고 놔둬야 한다네. 아, 경찰 쪽 이지혜 팀장 알죠? 그 누나가 화가 잔뜩 났더라고. 염병, 니기미 시발. 시민 피해는 생각 안 하냐고.”
중봉은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할 말이 없었다.
큰 그림을 보라고 해야 하는데, 그래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었다.
저렇게 죽거나 다쳐 망가진 사람의 인생은 누가 보장한단 말인가.
그래, 테러 단체 뿌리 뽑는 거 좋지.
뿌리 쑥 뽑아서 삭초제근하면 얼마나 좋겠나.
그래, 그렇게 됐다고 치자. 그럼 망가졌던 인생이 짠하고 회복되는 건가? 죽은 자가 살아 돌아올까?
그럴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현실은 판타지 세상이 아니므로.
덕분에 중봉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야 했다.
아, 그래도 한마디는 했다.
“마지막 욕은 네가 붙인 거 같은데? 이지혜 팀장이 한 말이 아니라?”
“거, 사소한 건 따지지 마시고. 내가 지금 열변을 토했잖아요. 그 핵심을 파악해야지.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고 그래요?”
중봉은 새삼 속으로 읊조렸다.
‘유광익 개새끼.’
이후에 일어난 일도 말리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부추겼다.
광익은 사이오닉 협회에 쳐들어갔다.
참 대단히 미친 새끼다.
세최또란 이명이 괜히 붙은 게 아니었다.
홀로 들어가 협회를 뒤집어엎고 나왔다.
하긴 지금 그 괴물을 누가 잡겠나.
중봉도 자신 없었다.
사실 노필두를 죽였다는 걸 알았을 때부터 정면 승부로는 쉽지 않다는 걸 알았다.
상성이란 게 있으니, 쉽게는 안 당하겠지만, 그래도 지금 광익은 무섭다.
괜히 대련하자고 하면서 눈을 빛내면 핑계를 찾기 바빴다.
“대련? 안 하실? 몸이 찌뿌둥하니, 사람 패기 딱 좋은 날인데.”
“이중봉 팀장님, 몸 너무 안 움직이면 녹습니다. 저랑 대련 한 판?”
“미들픽 베이비, 주먹 대화 한 판?”
하, 여러 차례 참 지독하게도 괴롭히더라.
다 업보다, 업보.
화림에 들어왔을 때 갈구던 자신의 업보.
그래도 욕을 안 할 순 없었다.
지금쯤이면 미국으로 향하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을 것이다.
펜타곤이 그를 긴장하게 할 수 있을까?
그게 아니라면 올드 포스가 광익을 바짝 쫄게 할 수 있을까?
‘퍽이나 쫄겠다.’
중봉은 생각을 멈췄다. 쉴 때는 쉬어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 일어날 일에 활기차게 움직일 수 있을 터.
그는 생각을 멈추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따사로운 햇살과 바람이 그의 얼굴을 감쌌다.
복수가 끝나면 허무하고 외로워지리라 예상했던 그의 삶은.
하루하루 아직도 다이내믹했다.
광익과 대련을 피해야 했고.
그가 벌인 일에 일조해야 했다.
“뜯어 고쳐 볼까 해서요. 이 세상.”
은연중에 말한, 광익의 목표를 이루도록 도와야 했다.
몸이 열 개라도 부족할 터였다.
앞으로는 이렇게 여유 있는 시간이 그리 넉넉지는 않으리라는 선명한 예감이 들었다.
흑인 팬은 딱 사인만 받고 귀찮게 굴지 않았다.
“가는 동안 편-안 하게.”
근데 이 새끼 한국말 누가 가르쳤냐?
“이 비행기 좋다.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이다. X이스 침대보다 좋다.”
자꾸 이따위로 말한다. 한국 광고 보고 한국말 배웠니?
“이해해라. 그는 자신의 우상을 만나 들떴다.”
팀장으로 보이는 스패니쉬 친구가 말했다.
눈이 부리부리하고 코끝이 오뚝한 친구다.
담백한 말투로 말을 툭툭 거는데, 성격이 무난해 보였다.
어찌 됐든 비행은 편했다.
흑인 친구가 말한 대로 정말로 흔들리지 않는 편안함이다.
여기에도 무슨 신공학의 무슨 공법 따위가 들어갔겠지.
미국은 특수종 세상에 가장 우월한 과학력을 가진 곳이다.
그들의 힘은 여러 곳에 뿌리를 내리고 있다.
세계 정부 연합의 수장이란 타이틀을 포커 쳐서 딴 건 아니란 거다.
편하니까 졸렸다.
난 잤다.
눈 감고 푹.
꿈을 꿨다. 등판이 나오는 꿈 대신 꽃밭이 나왔다.
튤립, 장미, 백합, 국화 그 외 이름 모를 꽃이 가득한 곳이었다.
사방이 꽃이었고 꽃나무였다.
머리 위로 벚꽃 잎이 휘날렸다.
벚꽃 잎을 보는데 이상하게 기남이 치아가 생각났다.
대체 왜?
그리 꽃밭을 감상하는데, 저 멀리서 섹시하고 청순하고 고아하고 귀엽고 지적이며 배려 깊고 같이 놀아 줄 것 같고 얼굴 예쁘고 몸매 좋고 어우동과 신사임당이 반반씩 섞인 그런 여자가 달려왔다.
그녀와 난 꽃밭을 거닐며 놀았다.
즐거웠다. 나도 모를 미소가 절로 나올 정도로.
그리 웃으며 꽃밭을 거니는데 그녀가 물었다.
“근데 혜민이가 이거 봐도 괜찮을까?”
아, 시발 꿈.
눈을 떴다.
다 좋았는데, 마지막이 악몽이다.
이걸 지랄맞은 꿈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행복한 꿈이라고 해야 하나.
“진짜 편하셨나 보군요.”
일등석 그 이상의 대우였다. 난 비행기에 갖춰진 침대에서 잤다.
편하니까 잤겠지? 그리 자고 일어난 참에 스패니쉬 팀장이 침실 밖에 서서 물었다.
“물침대였으면 더 좋았을 것 같긴 하지만, 네, 좋네요.”
“긴장되진 않으십니까?”
스패니쉬 팀장은 날 무슨 신기한 동물 보듯 보며 물었다.
“긴장?”
긴장은 무슨.
“당신의 증언으로 당신의 친구는 세계 정부 연합의 적이 될 수도 있습니다.”
날 걱정해서 묻는다기보다는 정말 내 태도가 신기해서 그런 것 같았다.
“안 그럴걸요.”
세계 정부 연합이 머저리 집합체가 아니라면 안 그럴걸?
적어도 난 그렇게 생각한다.
만약 전부 머저리면?
그런 머저리가 특수종 세상을 이끌어가는 게 잘못된 거다.
그럼 이후 세상은 엑스큐라시가 전면에 나설 것이다.
올드 포스는 나랑 싸우기 바빠질 테니까.
“올드 포스가 우습게 느껴지는 겁니까?”
스패니쉬 친구는 하고 싶은 말이 뭘까?
“시비?”
덤비는 건가? 싸우자고?
“설마, 그럴 리가.”
스패니쉬가 손사래를 쳤다. 노우, 네버를 연발하는 걸 보니, 진심이 느껴졌다.
“그저 올드 포스의 늙은 괴물들은 만만치 않다는 걸 말해 주고 싶었습니다.”
그에게 느껴지는 건 호의였다.
이거 뭐, 그냥 아무 이유도 없이 날 좋아해 주니까 좋긴 한데.
스패니쉬 팀장은 재차 말했다.
“한발 물러나서 상황을 해결할 수 있다면 그게 제일 좋을 것이다.”
“그런 얘기 막 해 줘도 되나?”
근데 너 올드 포스 소속 아니냐? 미국 대통령이 삐지면 어쩌려고 이런 걸 말하는 거냐.
이 비행기 안에서는 한 모든 말과 행동은 곧바로 미합중국 대통령 아저씨 귀에 들어갈 텐데.
“괜찮아. 이건 하얀 집에 사는 당신의 친구가 보내는 선물이니까.”
말하며 스패니쉬 팀장이 생긋 웃는다. 난 침대에 반쯤 걸터앉은 채로 피식 웃었다.
난 백악관에 친구가 없다. 하지만 내 친구가 되고 싶은 사람은 있지.
그러니, 지금 스패니쉬의 의견과 도움은 전부 대통령의 입김이란 거다.
또한, 이 말은 날 부른 게 대통령이 아니란 것과도 같은 말이고.
재밌네.
“팀장, 그의 침대 옆자리를 넘보는 거야?”
그사이 내 침실로 다른 사람이 머리를 들이밀었다.
“머저리 같은 소리 좀 집어치워라. 난 여자가 좋아.”
“그게 팀장의 가장 큰 단점이지.”
갈색 머리칼의 푸른 눈이 인상적인 게이 팀원이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나 또한 우렁차게 말했다.
“I like girls. Very, very, very.”
혹여 오해가 없도록 해 주는 거다.
게이와 스패니쉬 팀장이 눈을 마주쳤다. 게이는 아주 잠시 침묵의 끈을 잡았다가 놓았다.
“이제 도착입니다. 유.”
“알겠습니다.”
난 얌전히 답했고.
돌아선 둘이 속삭이는 소리가 예민한 내 청각에 잡혔다.
“……팀장, 저 친구 여자가 필요하다고 한 거야? 백악관에서 콜걸을 불러 달란 거야?”
“음. 그건 나중에 다시 한번 물어보지.”
염병.
콜걸은 무슨, 사랑 없는 관계란 없다는 게 내 모토다.
그래서 아직 내가 모태솔로라고.
……어쩌다가 내가 이렇게 됐지.
이러다가 진짜 주변에 있는 여자 중 하나랑 결혼하는 거 아닐까.
최악은 피하자. 언제나 방법은 있다.
잡생각을 하는 와중에 비행기가 착륙했다.
비행기에서 내리자, 흑인 팬과 게이 팀원, 스패니쉬 팀장이 내 호위를 자처했다.
“극진하네요.”
“귀빈이시니까.”
스패니쉬가 답했다. 귀빈이라 콜걸도 불러 줘야 하는 마음의 고민이 있어 보이는 눈이었다.
“갑시다.”
일이나 하자.
날 초청한 건 화이트하우스다. 대외적으로는 그렇다.
하지만 내가 도착한 곳은 아니다.
주변에 군인과 특수종이 즐비한 한 건물이었다.
안으로 들어서니, 곳곳에 숨은 기척이 느껴졌다.
준비가 아주 철두철미한걸.
건물 밖 창문 밖을 보니 공원이 보였고.
공원에서는 한쪽에 높고 뾰족한 추모비가 세워진 게 보였다.
걷다 보니, 이세계 금속을 발라 만든 강화문이 보인다.
“도착했습니다.”
스패니쉬 팀장이 말하고 곧 문이 열렸다.
열린 문 안, 청문회 비슷한 게 열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그 중앙에 엉거주춤 서 있는 외국인이 보였다.
익숙한 얼굴이다.
열 살 때부터 싹수를 보인 입이 더러운 아이.
초능국의 왕자.
NS 무역 파트의 큰 손.
내 회사 직원의 동생.
그리고 내 친구, 알이다.
“초능국의 왕께 물어봅시다. 정말 이런 일이 일어날 줄 모르고 나선 겁니까?”
그 앞으로 올드 포스에서 방귀 소리가 제일 크다는 이들의 모습이 보였다.
다들 진짜 출타하시진 않으셨고 홀로그램으로 나섰다.
그것도 다 무슨 프로그램 따위로 얼굴에 노이즈를 잔뜩 낀 채로.
올드 포스를 실질적으로 운영한다는 위원회다.
위원은 총 여덟.
그들은 각자 정체를 숨기며 어떤 한 나라의 이익도 대변하지 않는다.
그들의 의견이 필요한 순간은 언제나 올드 포스 외부의 적을 처리할 때뿐.
돌아가는 꼴을 보니, 겁주려는 의도가 여실히 보였다.
올드 포스를 적으로 두겠냐는 위협.
보는 순간 짜증이 치솟는데 어쩌겠나.
내가 뭘 할 수 있다고.
할 수 있는 거야 고작 이런 것뿐이지.
“조약을 어기면 올드 포스의 적이 될 수도 있다는 걸 정말 몰랐습니까?”
난 한 번 더 윽박지르는 홀로그램 앞으로 걸었다.
“유, 세최특? 청기사 슬레이어?”
뒤에서 다급히 날 부르는 소리가 있지만, 알게 뭐람.
“헬로우 에브리원.”
대충 영어 한마디 씨불여 주고 그다음부터는 한국말로 쐈다.
알아서 통역해서 들을 거다.
“내 이름은 유광익, 세최특이라고도 불리며 청기사를 죽인 몸이다. 그리고 초능국 알과는 형제와 같다.”
내가 불멸특수대 있던 시절, 사내 재판에 알이 쳐들어와 난장을 피운 적이 있다.
그때의 알이 떠올랐다.
날 걸고넘어지던 불특대 차장에게 차장 나부랭이가 덤비냐고 비아냥거리던 그때의 알, 그 모습이 지금 고개를 푹 숙인 알의 모습과 오버랩되어 보였다.
우리 애한테 누가 뭐라고 했냐?
사내 재판에 섰던 그때의 나와는 다르기에.
한마디, 한마디에 실린 무게가 다르기에.
그리하여 그 누구도 날 무시하지 못했다.
침묵이 흐른다.
그 침묵 사이로 알이 조그맣게 속삭였다.
“혼자야?”
뭐?
알이 재차 묻는다. 아, 내가 혼자 온 줄 알고 불안한 건가.
알이 가련한 작은 새처럼 어깨를 떨 것 같았다.
걱정하지 말라고 혼자서도 괜찮다고.
그리고 혼자도 아니라고.
다 괜찮을 거라고 말해 주려고 입술을 떼기 직전, 알이 먼저 말했다.
“글레이브 걸스는 같이 안 왔어?”
이 빠돌이 새끼가.
한순간 평정심이 우주 저 멀리 날아갈 뻔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