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7. 박춘배를 찾아갔다.
“지시 사항이 안 전해진 건가?”
남명진은 오랜만에 짜증이 확 솟구쳤다.
최미남과 프로메테우스.
그들을 잡지 못해서 놔둔 게 아니었다.
이미 들어왔을 때부터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다.
아찔한 수준의 사고만 치지 않는다면 놔둘 생각이었다.
그들이 곧 프로메테우스의 손과 발이 될 테니까.
‘그럼 다음이 쉬웠을 거고.’
테러 단체는 항상 문제다. 세계 정부 연합은 네임드보다 그들의 문제를 더 심각하게 보기도 했다.
네임드야 막으면 끝이지만, 이것들은 뽑아도 뽑아도 계속 자라나는 잡초였으니까.
그 잡초의 뿌리를 뽑으려면 결국, 수장을 잡아야 했다.
프로메테우스의 수장, 인류가 만들어 낸 악마, 램 더스트.
능력은 미확인이나, 초능 특수종에 단일 능력자라는 것까지는 알아냈다.
이만한 정보를 얻는 것도 엄청난 시간과 자원이 소모됐다.
그러니 이번이 그 능구렁이 같은 새끼를 족칠 기회라고 생각했다.
그건 남명진뿐 아니라 대통령을 비롯한 한국에 자리 잡은 모든 기득권층의 생각이었다.
고로 최미남을 놔둔 건 프로메테우스의 수장, 램 더스트를 노린 한 수였다.
활개 치라고 놔둔 대가는 그쪽으로 향하는 단서를 얻기 위한 준비 단계였다고 봐도 좋다.
대형 프로젝트이자 특수 미션이었는데.
그걸 NS가 중간에서 깔끔하게 깨부쉈다. 흔적도 안 남기고 먼지로 만들었다.
‘멍청한 건가. 고집이 센 건가.’
NS에는 이동훈과 우미호가 있다. 남명진도 눈여겨봤던 이들이다.
아니, 거기까지 갈 것도 없다.
어느 정도 상황 파악을 할 수 있는 안목이 있다면 그들을 놔뒀을 거다.
이중봉이라면 말렸을 거다.
그런데 왜?
왜 이렇게까지 하나?
비서가 제 안경을 손등으로 올렸다.
“전할 말은 다 전했다고 합니다.”
경찰 쪽에서 맡은 일이다. 최미남 일행을 건드리지 말 것.
광익에게 그리 전하기로 했었다.
“그런데?”
“그런 식으로 꼼수를 쓰니, 못 잡는 거라고 자기가 알아서 한다고 했답니다.”
“……이 새끼.”
남명진은 순간 열이 오르려는 걸 내리눌렀다.
“그렇게 쉽게 되는 거였으면 그동안 구경만 했을까.”
비서는 말이 없었다. 묵묵히 자리를 지킬 뿐이었다.
남명진은 툭 말을 내뱉은 뒤로 괜한 생각이 들었다.
이제까지 광익이 한 일이, 그가 이룩한 모든 것이 이전의 그 어떤 누구보다 찬란하게 빛나고 있었으므로.
앞으로도 빛났으면 빛났지, 이대로 사그라지진 않았을 것 같기에 그렇다.
‘내가 늙은 건가.’
늙기야 진즉에 늙었다. 다만, 아직 일선에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1세대의 영웅으로서.
지금도 할 일이 있다고 믿었을 뿐.
사소하다면 사소한 일인데도 이번 일로 그 믿음에 작은 균열이 생겼다.
썩 좋은 기분은 아니었다.
“술이나 한잔하지.”
남 사장은 그날 비서와 마주 앉아 수십 잔의 갈색 액체로 위를 적셨다.
속이 쓰린 날이었다.
불멸특수대 시절에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많았다.
개인 능력의 문제보다는 여기서 나서도 되나 하는 의문이 먼저였다.
“그런 것치고는 너무 나대지 않았나?”
이런 얘기를 하고 있으니, 정기남이 딴지를 걸긴 했지만.
진짜 했다. 저런 고민.
지금은 좀 다르다.
내가 하지 못하는 일보다 할 수 있는 일이 더 많다.
가령 시비 거는 상대가 한국 특수종 세상의 한 축이라고 해도 난 그자의 얼굴에 주먹을 내지를 수 있게 됐다.
후환이 두렵지 않냐고? 그것까지 감당할 정도가 됐다고 말하는 게 옳겠지.
회전문을 통과하고 들어서니, 사람이 득실거렸다.
“이곳은 사이오닉 협회 한국 지부입니다. 협회는 인류의 무궁한 발전과 평화를 위해 애쓰고 있으며 초능 특수종의 인권 향상을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넓은 홀 중앙에는 홀로그램으로 구현된 인공지능이 떠들었다.
건물 참 더럽게 넓다. NS 본사에 다섯 배는 되겠네.
내가 있는 곳은 사이오닉 협회 한국 지부였다.
한쪽에 능력 개화 신고 장소 안내판이 보였고.
반대편에는 범죄 신고 번호가 커다랗게 쓰여 있었다.
초능 특수종의 범죄는 사회 문제다.
어느 날 갑자기 특별한 능력을 타고난 이들은 사고를 치기 마련이니까.
불멸자와 변신족과는 다르다.
몇 년 전만 해도 정체를 숨기고 사는 불멸과 변신이 그리 많았으니.
지금은?
내 영향도 있고 해서 많이 변했다.
일단 한국의 테러 단체를 갈아엎어 놨더니, 미친 과학자 집단도 활개를 칠 수가 없었다.
과학자 무리 중 들어오는 놈들도 몇 없었고, 들어올 때마다 내가 후려치기도 했다.
NS의 치안 사업 중 하나였다.
미친 과학자를 두들겨 패서 그들이 연구한 자료 싹 빼돌리곤 하니.
누가 여기에 오고 싶어 하겠나.
자연스레 숨통이 트인 이들이 많아졌다.
그래도 불편한 건 있겠지만, 적어도 전보다는 낫다는 거다.
반면 초능 특수종은 대우가 좀 다르다.
이들은 특수종보다 일반인에 가깝다. 생물학적으로 그렇다는 게 아니라, 사람들이 받아들이는 게 그렇다.
그러다 보니, 배척보다는 환대를 받는 편이다.
물론 범죄자 새끼는 제하고 말이다.
일부 범죄자 무리가 초능 특수종 얼굴에 먹칠한다는 말도 종종 들었다.
반대로 초능 특수종 자체가 문제라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지만, 그들은 소수다.
가진 무력, 권력, 금력은 불멸과 변신이 압도한다.
하지만 사이오닉은 다른 걸 가졌다.
인심이다.
하물며 이들이 사회에 이바지한 게 뭔가, 판독기 사업이다.
협회 덕분에 지금처럼 안정기에 들어섰다고 말하는 이들도 많았다.
틀린 말은 아닌데.
그거로 협회는 이득을 취했다. 아주 많이 뜯어먹었다.
그러니 주고받은 거다.
인류를 위해서? 무슨 미친 소리를.
협회장이 그런 로맨티스트였다면.
내 왼 손목을 낭만주의자를 위해 바치겠다.
불멸자니까 손목이야 다시 자라겠지만.
그만큼 그런 인간이 아니라고 확신한다는 거다.
단 한 번도 보지 않은 사람이지만, 때론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들도 있는 법이다.
가령 그 사람이 남긴 말, 그 사람이 했던 일, 그 일의 결과 같은 것 말이다.
그래서 난 협회장을 반쯤은 개자식이라 말하겠다.
일단 제 유전자를 뿌려서 사생아 집단을 만드는 것부터 뇌 주름에 때가 잔뜩 낀 새끼가 아닐까 싶다.
“……7층은 협회 소속 초능 특수종이 상주합니다. 좌측 기둥을 꺾어서 돌아가시면 지하로 내려가는 승강기가 있습니다.”
홀로그램 인공지능이 손을 뻗어 한쪽을 가리켰다.
막 각 층을 안내하는 중이었나 보다.
난 홀을 가로질러 걸었다. 그리고 목적한 곳에 도착해 발을 멈추고 눌러쓴 모자를 벗었다.
모든 걸 홀로그램이 해결할 순 없다.
초능력자의 민원이나, 허가 같은 문제를 제하고 협회의 높으신 분에게 용무가 있다면 이쪽으로 와야 한다고 들었다.
나도 이렇게 접근한 건 처음이긴 하지만.
지루했는지, 하품하던 여자와 눈을 마주쳤다.
“……어?”
그리고 안내역의 여자는 날 알아봤다.
“세최특?”
“너무 큰 소리로 부르면 주변에 있는 사람이 몽땅 다 올 것 같은데.”
“…….”
여자는 제 손으로 제 입을 막았다.
“읍읍읍!”
그렇다고 입을 막으면 안내는 누가 하고?
입술을 보여 줘야 독순술이라도 할 거 아닌가.
그래도 대강 뜻은 이해했다. 불멸자의 예민함은 상대의 몸짓과 눈빛만으로 뜻을 하고자 하는 말을 유추하기도 한다.
그녀의 눈은 ‘여기는 왜?’라고 말하는 듯했다.
“한국 지부장, 그러니까 협회장 있어요?”
상대는 여자, 난 마성의 매력을 섞어서 말했다.
경찰이 압송해 간 최미남은 미소와 몇 마디 말로 남자를 홀렸었지.
나라고 못 할쏘냐.
“저기, 네, 아마도?”
놀란 여자가 말을 더듬었다.
난 미소를 보였다.
“확인해 주시겠어요?”
부드러운 미소와 저음으로 깔리는 한마디.
가라, 유광익의 매력에 빠져 보시라.
“그게, 보고를 일단 해야 할 것 같은데요?”
여자는 메뉴얼대로 해야 한다고 거듭 말했다.
“그냥 확인만 해 줘요.”
다시 미소를 날렸다.
여자는 놀란 게 가라앉았는지, 잠시 내 얼굴을 빤히 보다가 물었다.
“무슨 일로 찾으시는데요?”
“그냥 이런저런 일로.”
“그냥 보내 드릴 수 없는 거 아실 텐데요. 대뜸 찾아온다고 만날 수 있는 분이 아니라는 거, 아시잖아요?”
“그건 그런데.”
“기다리세요. 윗선에 보고하겠습니다.”
저기, 음.
이 여자는 보는 눈이 없는 사람이었다.
……기남이를 데려올 걸 그랬나?
뭐, 그렇다고 해서 변할 건 없었을 거다.
협회장을 만나겠다는데 그냥 보내 주겠냐고.
장난으로 한 거다. 장난으로.
내가 이 여자를 못 꼬드겨서 그러는 게 아니고. 진짜다.
곧 여자의 상사가 왔다.
눈썹이 날렵한 남자였다. 걸음걸이를 보니, 몸을 단련한 태가 나는 사람이었다.
그도 놀랐다. 눈썹을 씰룩이는 거로 자신이 놀란 걸 표현했고.
“한국 지부장 좀 만나고 싶은데요.”
“무슨 일로 오셨는지 먼저 말씀해 주셔야겠습니다.”
태도가 딱딱했다.
“엄청 좋은 일로 온 건 아니고. 제안할 게 있어서요.”
나도 마주 답했다.
괜히 돌리고 꼬아서 말할 필요가 없었으므로 그렇게 했다.
“혼자서?”
“뭐가 겁이 난다고 여럿이서 올까요.”
남자는 곧 위쪽으로 무전을 쳤고.
난 안내를 받았다.
앞서 걷는 남자의 어깨가 굳은 게 보였다.
긴장하기는.
안내된 곳은 지부장실.
묵직한 자단목 문에 멋들어진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괜히 발로 걷어차고 싶게 생긴 문이었다.
기름칠이 잘 되어 있는지 소음 하나 없이 문이 열렸다.
“들어가시죠.”
긴장한 남자의 말에 들어서니, 작은 테이블을 두고 앉은 늙은 남자가 보였다.
나이는 쉰쯤 되었을까?
내 눈길을 받은 남자가 입을 열었다.
“불멸자는 늙지 않아서 좋겠지만, 우리는 아니라네. 내가 협회장 박춘배네.”
협회장이 말했다.
박춘배, 한국 지부장이자 한국 사이오닉 계의 협회장이라 불리는 남자.
사이오닉 협회는 각 지부를 개별 협회로 취급하기도 한다.
그만한 권력과 힘을 쥐여 준다는 뜻과 같았다.
박춘배 씨 혼자 있는 건 아니었다.
그 뒤로 남자가 둘, 여자가 하나 서 있었다.
“할 말이 있어서 왔는데.”
“급하군. 젊어서 그런 건가? 앉게 차라도 한잔해야 하지 않겠나.”
난 멋들어진 축포를 쏘아 내며 귀환을 알렸다.
한국에 들어온 테러 집단을 후려 까고 그걸 기사로 냈으니까.
그렇다고 해서 내가 여기로 곧장 온다는 건 예상 밖이었을 텐데, 춘배 씨는 태연했다.
춘배, 춘배, 이름 참 입에 착 감기네.
“저 없을 때 시비를 많이 거셨던데?”
앉으며 말했다
“말투가 거칠어, 젊음의 특권이지.”
자꾸 나이를 들먹이시네. 아, 자기 나이가 더 많으니, 동방예의지국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으로서 예의를 지켜라?
에이, 그건 아니지.
내가 삼강오륜을 좋아하긴 하는데.
이건 진짜 아니지.
나 없는 동안 신나게 시비를 걸어 놓고 이제 와서 무슨 예의를 따져.
양아치 냄새가 폴폴 난다.
“말투뿐 아니라 주먹도, 하는 짓도 좀 많이 거칠고 그런데.”
말하며 기세를 끌어올렸다. 야생의 살기를 기반으로 하는 변신족의 기세다.
공기가 삽시간에 무거워졌다.
미소를 머금은 채 기세만 끌어올렸다.
“여기가 어디라고!”
뒤쪽에 있던 여자가 눈을 부라렸다. 눈에서 보석에서나 볼 것 같은 광채가 어린다.
저 눈에서 금방이라도 뭔가 튀어나올 것 같았다.
“여자 친구예요?”
그걸 보며 물으니, 여자가 어금니를 깨물었다. 볼 근육이 바짝 조여진 게 보였다.
이제 쏜다. 레이저든 뭐든 뱉어 낼 거다.
“향아, 그만.”
협회장이 그런 그녀를 말렸다.
그리고 날 빤히 보더니 물었다.
“차를 마실 마음은 없나 보군.”
“공사다망해서요. 잠깐 휴가 좀 다녀오니까 회사에 날파리가 많아졌더라고요.”
“날파리라.”
협회장이 끌끌하고 혀를 찼다.
“이렇게 대뜸 찾아와서 깡패 같이 굴면 좋을 게 없을 텐데?”
지금 저 말은 내가 들이미니, 저쪽도 마중 나온 셈이었다.
그래, 말 좀 편하게 합시다.
속 시원하게.
“저 친구들 내보내세요. 그게 좋을 겁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바로 뒤에 있던 중년 남자가 말한다. 묵직한 저음이었다.
난 협회장을 생각해서 한 말인데 말이야.
있으려면 있든가.
등받이에 등을 기대고 다리를 꼬았다.
한껏 여유를 부린 내가 입을 열었다.
“전뇌 공주를 달라고 하셨다고?”
뭐라 답하기도 전에 마저 말을 이었다.
“초능국도 걸고 넘어지셨고. 판독기로 소송도 거셨던데?”
“그래서. 지금 날 패 죽이기라도 하겠다는 건가?”
에이, 설마.
그래도 우리가 인베이더와 테러 단체를 적으로 둔 같은 편인데, 죽이기까지야 하겠나.
“쟤들 내보내라니까.”
“뒷감당이 되겠나?”
“못 할 것 같으면 오지도 않았어요. 올드 포스든, 엑스큐라시든, 마법 연맹이든 뭐든, 나 건드리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 줄 생각으로 온 거니까.”
NS는 곧 나다. 건드렸다면 책임을 져야 할 거 아닌가.
“지부장 아저씨, 마지막으로 말하는데, 쟤들 내보내요.”
아니면 부하들 보는 앞에서 털린다?
내 말에 춘배 씨의 눈가가 파르르 떨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