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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격 외 혈통 천재-336화 (336/488)

336. 손자 말고

“됐어요.”

필요했다면, 할아버지의 이름과 그의 삶을 내가 알아야 했다면 아버지가 벌써 말씀하셨을 거다.

그런데 안 했다.

어머니도 딱히 안 물어본 눈치다.

아니, 아예 관심조차도 없어 보였다.

난 그런 두 분의 모습에서 배려를 봤다.

말하고 싶을 때까지 기다리는 배려.

그리고 그 배려를 충분히 받아들이는 태도.

참 잘 어울리는 두 분이시다.

그러하기에.나도 궁금하지 않았다.

한때, 어떤 미치다 못해 돌아 버린 새끼들이 테러단체를 만들었나 궁금했던 적은 있었지만, 내 할아버지가 테러단체의 시초였을 줄은 몰랐다.

신기하긴 해도 손자로서 그 사람을 만날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다.

“어떤 사람인지 보고 싶진 않고?”

“아버지가 안 보셨다면 이유가 있겠죠. 저 때문에 굳이 만날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우두커니 선 아버지는 한동안 말이 없으셨다.

따사로운 햇볕이 눈가를 스침에도 미간조차 찌푸리지 않은 채, 그저 묵묵히 내 눈을 바라보셨다.

나도 그 눈을 마주 바라봤다.

맑다.

어머니의 눈만큼이나 맑다.

행안부에서 수십 년, 긴 세월 정치와 작전에 임했던 불멸자.

사우전드 페이스란 이름의 얼굴을 가진 최고의 스파이.

자신을 감출 줄 아는 남자이자, 아내와 가족을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하는 팔불출.

여기에 할아버지의 이름은 필요 없었다.

유연호, 난 그 세 글자의 이름 앞에 내 아버지란 호칭만으로 충분했다.

여기에 불멸교를 만든 테러범의 아들이란 꼬리표가 붙을 필요는 없었다.

어머니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간다. 한없이 자애로운 미소다.

변신족 마더 테레사 모드다.

“많이 컸네.”

어머니가 말하고.

“그러게.”

아버지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툭툭 두 번 어깨를 두드린 손을 내리며 아버지는 미소를 보이셨다.

해피 엔딩, 더없이 행복한 엔딩이다.

불멸교 사도가 가정불화를 노렸다면 대실패였다.

아버지는 처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주저하거나, 당황하시지 않으셨다.

그 모습에서 딱히 숨길 게 없다는 걸 알았다.

“그래도 궁금한 거 있으면 다 물어봐라.”

돌아가는 차 안에서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별로요.”

난 어깨를 으쓱했고 어머니는 그런 아버지의 손을 잡았다.

“중요한 일이었으면 말했겠죠. 예전에 연 끊었다고 했었잖아요. 그럼 됐어요. 당신 마음 편할 때, 그때 해요.”

“딱히 불편할 건 없는데.”

“별 관심이 없다는 말을 부드럽게 돌려서 한 거니까, 적당히 알아들으세요.”

“……그럽시다.”

반농담 삼아 하는 만담은 두 분이 즐기시는 장난 거리다.

장난의 끝은 언제나 아버지의 패배였다.

그리고 질문은 의외의 곳에서 나왔다.

늦게 합류했지만, 가족이라 생각하기에 함께한 여동생의 입이 열렸다.

“아버지는 왜 할아버지랑 연을 끊었어요?”

목소리 톤에서 고심하다 던진 질문이었음이 느껴졌다.

마리라면 궁금해할 문제다.

그녀는 부모가 없다.

눈 뜨고 주변을 인식했을 때 마리는 실험관의 쥐였으며 간신히 탈출했을 때도 그녀의 아버지라 주장하는 남자는 연구원 중 하나였다.

이후 내 호적에 합류.

마리에게 가족이란 두 단어는 세상 그 어떤 것보다 소중할지도 모른다.

그런 마리이기에 친아버지와 연을 끊는다는 개념을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르고.

뭐, 현실이 동화 속 세상도 아니고.

가족이라고 전부 화목한 건 아닌데 말이야.

세상에는 정말 별의별 개자식들이 산재해있다.

물론 대부분 부모는 아이를 보호하고 사랑하겠지만.

안 그런 새끼들도 많다는 거지.

아버지는 그 말에 눈에 힘을 주고 마리를 바라봤다.

음? 뭔가 마음에 걸리신 눈치인데.

아버지가 입을 여셨다.

“아빠.”

“네?”

마리가 되물었다.

“아빠라고 해야지, 아버지가 뭐냐, 듣기 나쁘다. 아빠 해.”

아홉 살 꼬맹이도 아니고 얘도 이제 곧 스물인데, 아빠라니.

“주책.”

내가 중얼거렸다.

“너도 아들 낳아 봐라. 딸 가진 아빠들이 그렇게 부럽더라.”

“마리가 실수했어요. 네, 아빠.”

마리가 말을 바꿨다. 그제야 아버지는 흡족한 얼굴을 했다.

“자식은 아버지의 등을 보고 자란다고 했어. 그런데 난 친부의 등을 본 적이 별로 없었거든. 불멸교 만들 때는 바쁘다고 코빼기도 안 비췄고, 아내는 정략결혼으로 만났다고 애 낳아 줘도 내팽개쳐 버린 영 정이 안 가는 인간이었어.우울증에 걸린 어머니를 마지막에 돌보기라도 했다면, 그런 척이라도 했다면 그냥 넘어갔을 텐데, 그때도 안 오기에 그 순간 마음먹었지.저 사람은 이제부터 내 아비가 아니라고.”

할애비란 작자가 좋은 사람은 아니었단 거다.

“네, 마리는 알겠어요.”

슥슥.

아버지가 마리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골치 아픈 얘기지? 쇼핑이나 하러 갈까? 옷 사 줄까?”

그 말에 마리가 눈을 빛냈다.

“쇼핑?”

“그래. 쇼핑. 오카로 화끈하게 긁어 주마.”

“오카요?”

“오빠 카드.”

“그거 좋네.”

어머니가 동조했다.

이 양반들이 왜 남의 카드로.

“마리가 그래도 될까요?”

마리가 큰 눈을 깜빡이며 날 바라봤다.

백미러로 순수 그 자체를 담은 눈망울을 본 순간, 난 차마 거절할 수 없었다.

“갑시다. 오늘은 내가 쏜다.”

이후의 일을 결론만 말하자면, 아버지는 마리에게 원피스를 사 주고 싶으셨다.

파랗고 하얗고 하늘하늘한 그런 원피스.

그리고 마리는 아버지의 바람과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였고.

“암시장을 가고 싶다고?”

목적지부터가 아예 달랐다니까.

백화점이 아니라 암시장으로 가더니, 제 도끼에 바를 기름 따위와 일회용 스펠 기어 따위를 샀다.

“마리는 부적이 갖고 싶었어요.”

눈을 빛내며 좋아하는 마리를 보며 아버지는 차마 백화점을 가잔 말을 하지 못하셨다.

그리고 계산은 아버지가 했다.

오카 쓰자면서 아빠가 냈다.

딸 아이 선물이라고 본인이 사 주고 싶으셨나 보다.

그래서 나도 하나 사 달라고 했더니.

정말 세상 다시 없을 몹쓸 놈을 보는 눈빛을 보내셨다.

무슨 이런 일로 불멸자의 비기까지 쓰시는 건지.

기척을 조정해 후레자식을 보는 눈빛을 만들다니, 이거 너무한 거 아니냐고.

“아들, 양심 없니?”

당연하지만 어머니도 아버지 편.

“마리는 오빠가 조금 너무했다고 생각해요. 오빠는 돈이 많아요.”

마리까지 이런다.

얘는 아버지 앞에서는 더 말투가 단순해지는 경향이 있다.

분명 회사에서나, 작전 수행 중에 보면 더없이 명료하게 말하는 것 같은데 말이야.

“그렇지. 우리 마리 잘한다.”

아버지는 그런 딸을 보며 기꺼워하셨다.

그래, 다 좋으면 된 거지 뭐.

한바탕 웃고 떠들고 부모님 두 분을 모셔다드렸다.

“어머니도 휴가 드릴게요. 아버지 쉬실 때 같이 쉬면 좋잖아요.”

“아들이 회사 사장인 게 이럴 때 또 좋네.”

어머니는 거절하지 않으셨다.

마리는 훈련이나 하고 싶다며 회사로 향했다.

회사 사무실에 도착한 난 허브차를 한 잔 마시며 짧은 여유를 즐긴 뒤, 사내 전화를 들었다.

“공주님 좀 불러 주세요.”

비서 아저씨는 말하지 않아도 많은 일을 한다. 아마도 미리 얘기해두고 대기시켜 뒀을 거다.

그 덕분에 5분도 되지 않아 사무실 문이 열렸다.

“불렀어?”

이름 전뇌 공주.

사이오닉 협회가 노리는 아이.

협회 새끼들은 내가 이 아이를 확보한 뒤로 도로 내놓으라고 난리를 부리는 중이다.

아주 지랄도 풍년이지.

얘는 사람이다. 물건 아니고.

뭘 내놓으라고 지랄이고, 무슨 이세계 소재 거래 금액 동결권 따위를 약속하고 지랄이란 말인가.

진심 짜증이 났기에 다 무시해 버렸다.

중간에 얘한테 물어보긴 했다.

“협회로 가고 싶냐?”

“그건 계약 위반인데, 왜 내가 필요 없는 것 같아?나 일 잘해, 잘할 수 있어. 수명 깎인다고 일 안 시킨 건 너잖아. 일할게, 존재 가치 증명할 수 있어.씨발, 오랄 땐 언제고 왜 이제는 가라고 지랄인데.”

여기서 느낀 게 두 가지다.

하나는 언어 순화 과외 선생의 필요성, 그러니까 혜민이를 어서 얘 옆에 붙여 줘야겠다는 거고.

둘은 협회에는 가기 싫어한다는 거다.

“안 보내. 거기 싫어하냐?”

“……나 떠보냐? 하, 염병 났네. 좋겠냐? 그쪽에서 실험한다고 내 몸에 칼이고 주사기고 쑤실 게 뻔한데, 칼이랑 주사기만 쑤시면 다행이게? 괜히 혈통 잇는다고 다른 것도 쑤시면 기분이 좋겠냐?”

애가 입이 좀 자유분방해서 그렇지 말하고자 하는 건 명확한 아이다.

“오케이.”

이거로 끝이었다.

협회에는 절대 안 보낸다. 개수작 부리면 뭐, 나도 가만히 안 있으면 된다.

다행인지 아닌지 모르겠는데, 협회에서 무력 도발 따위를 하진 않았다.

오히려 부협회장이란 여자가 비공식적 루트로 사과도 했다.

다만, 협회의 양아치 새끼들이 독점하는 이세계 물건 가격을 NS에만 무지막지한 금액에 팔긴 했다.

뭐, 그렇다고 사람을 물건 취급하는 건 성미에 맞지 않는다니까.

“차 마실래?”

난 짧은 상념을 뒤로 넘기고 물었다.

“술은 없어?”

“너 미성년자다. 자식아.”

“짜게 구네.”

음, 그래도 장족의 발전이다.

애가 욕은 좀 줄었다.

그 후 바로 혜민이를 붙여 줬더니 힘 좀 썼나 보다.

“대표가 언니 붙여 준 거 맞지? 그건 고맙네. 언니 멋있어. 완전. 아, 그리고 난 대표한테 매력 일도 안 느끼니까 개수작 부리지 말고. 개수작 부리면 발로 찰 거야. 거기.”

눈으로 내 낭심을 보며 하는 말이다.

난 그 순간 실수를 깨달았다.

혜민이를 붙여 두면 더 강한 애한테 눌려서 나아질 줄 알았다.

강혜민도 멍청이가 아니니, 내가 원하는 게 뭔지 알 테고.

다만 내가 간과한 건, 전뇌 공주가 혜민이한테 급속도로 물들을 수 있었다는 것.

어째 주변에 있는 애 중에 정상이 없냐.

“그래서 좀 알아봤고?”

“말한 대로 수명이 깎이지 않는 범위 안에서 능력 활용했고, 위치 나왔어.”

와우.

이건 뭐 안 놀랄 수가 없네.

전뇌 공주의 능력은 탁월하다.

모든 전자기기 시스템을 제 안방 드나들 듯 드나든다는 것.

일반인이 열심히 타자 치면서 코딩할 때, 얘는 손만 대면 그 복잡한 암호 체계를 슈팅 게임을 하듯 다 부수고 피해 버린다는 거다.

슈팅 게임 비유도 과하다. 그것보다 더 쉬운 게 분명했다.

분명 현재 체력이 가능한 범위 내에서만 능력 발휘하라고 했는데.

어지간한 정보 단체에서도 놓치고 있는 사람의 위치를 단숨에 찾아냈으니까.

“이름 유무인, 불멸교 창시자, 맞지? 찾는 사람?”

맞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불멸교의 창시자라잖아. 만나 보고 싶었다.

아버지의 권유로 말고.

아버지랑 같이 가면 손자로서 할아버지를 만나게 되는 거 아닌가.

그건 싫다.

그러니까 손자 말고.

NS 대표로 가고 싶었다. 그래서 아버지 빼고 가족 빼고 혈연 빼고.

담백하게 테러단체를 졸라, 아주, 매우, 몹시 싫어하는 신생 무력 집단이자, 민간 군사 기업의 대표로서 유감 갖고 만나러 갈 참이었다.

“잘했다.”

난 서랍에서 막대 사탕 하나를 꺼내 던졌다.

탁하고 그걸 받아 챈 전뇌 공주가 인상을 썼다.

“내가 앤 줄 알아?”

그럼 네가 어른이냐?

전보다 살이 좀 올라서 보기 나쁘진 않지만, 아직도 말랐다.

더 먹고 더 쉬고 제 능력을 활용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능력 활용이야, 정직이가 가르치면 딱 맞겠지.

광변환을 거기까지 발전시킨 놈이다.

배우고 가르칠 게 있을 것이다.

그나저나, 혜민이는 이제 떨궈 놔야 하나.

괜히 제2의 강혜민 따윈 보고 싶지도 않은데.

그 와중에 내가 개수작을 부리면 불알을 걷어차라고 가르친 거냐?

강혜민 자식의 뇌는 대체 어떤 구조인 건지.

내 앞에서 전뇌 공주가 손가락을 허공에 휘저었다.

“보안 폴더로 넣어 놨어.”

그리고는 오해 가득한 말을 남기고 밖으로 나갔다.

“단둘이 방안에서 십분 이상 있으면 안 돼. 대표한테서 이상한 페로몬이 나올 수도 있다고 했어.”

좋아, 결정했다. 강혜민은 떼 놓자.

애 버릇 고치려다가 애를 더 버려 놓겠다.

나간 전뇌 공주를 두고 난 전화 호출 버튼을 누르고 말했다.

“출장 좀 가죠. 미호만 불러 주세요.”

전뇌 공주는 위치만 딸랑 던져 둔 게 아니었다.

그녀의 보고서는 짧게 요약되어 내 보안 폴더에 자리했다.

그 안에는 현재 유무인의 상태와 상황이 보였다.

대규모 병력이 필요한 시점은 아니었다.

“네, 알겠습니다.”

비서 아저씨가 답했다.

불멸교 창시자라, 만나면 물어보고 싶은 게 많았다.

난 의자를 뒤로 젖혀 누웠다.

체력적으로 지칠 건 없었다.

그저 오랜만에 만난 아저씨가 떠올랐을 뿐이고.

그 외에도 할 일이 산더미라는 게 머릿속을 맴돌았을 뿐이다.

멍청이 집합소인지, 테러단체가 놓친 화이트홀이 있다.

아직 아무도 거기에 화이트홀이 있는지 모르긴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놔둘 순 없으니, 그걸 확보하기 위한 작업이 진행 중이다.

혼자서 먹긴 좀 크려나?

요한 형이 말하기를 이 정도 규모의 홀이면 근처에 다른 화이트홀이 있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수년 동안 이어진 블링크 홀 현상.

그 영향인지, 생각보다 화이트홀의 크기가 크다는 말도 했었다.

만약 홀 안쪽, 이세계가 손댈 수도 없는 극악의 환경만 아니라면 대박이 분명한 보물이다.

들어가자마자 용암만이 가득한 이세계도 있다.

거긴 뭐, 들어갈 수가 있나.

들어가면 곧바로 수육 신세인데.

화이트홀을 해결하기 위해 내가 방송에서 지른 정규 채용도 한창 진행 중이다.

안 그래도 요새 그 덕분에 떠들썩했다.

욕 반, 지랄 반이라고 들었었다.

내가 생각해도 조건이 조금 빡빡해지긴 했지만, 그 정도는 해 줘야 했다.

회의 때도 말했지만, 안 되면 포기다. 그런데 욕 반, 지랄 반 치고는 지원자가 넘쳤다.

내 예상보다도 지원자가 많았다.

정규 채용 경쟁률, 1100:1.

어지간한 공기업을 씹어 먹는 수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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