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2. 누군가에게는 험로가 누군가에게는 지름길일 뿐이다.
난 양손에 든 나이프의 무게를 느끼며 손에서 핑그르르 돌려 역수로 쥐었다.
이 나이프는 레이저 블레이드가 아니다. 아다만티움 통짜 나이프일 뿐이다.
다만, 칼날을 다듬는 게 광학병기를 만들기보다 어렵다고 했던가?
그래서 더 마음에 쏙 드는 무기였다.
강푸름은 이걸 커스터마이징 무기라 하기도 부끄럽다고 했으나, 맞춤 무기라 부르기에 한 치도 부족함이 없었다.
무게감, 균형, 잘 갈린 칼날, 내 손에 딱 맞는 그립까지.
과장되게 말하자면, 이제까지 내가 쓰던 나이프는 커터 칼 수준이었다.
작고 동그란 두 개의 빛나는 구슬.
구슬이 허공에 긴 선을 그리며 잔상을 만들어 냈다.
곧 그 선은 나한테로 돌진했고.
난 역수로 꼬나 잡은 나이프를 교차하며 허공을 향해 그었다.
스커억. 부부북.
칼날이 날아온 까만 덩어리를 갈랐다.
광학병기가 아니라고 했지만, 더없이 날카로운 칼날이다. 내 손에는 두꺼운 종이를 베는 정도의 질감만 남았을 뿐이다.
더럽게 잘 드는 칼이었다.
칼날이 지나간 허공에서 훅하고 더운 김이 뿜어졌고, 잘린 검은 덩어리 속에서 뜨거운 살과 내장 따위가 바닥에 떨어졌다.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그래도 보는 것만큼 정확하진 않겠지.
강푸름 연구팀이 만든 마스크는 기본적으로 통신기를 내장했다.
그것도 미리 연결된 마스크끼리 가능한 양방향 통신이다.
채널이 무려 120개라고 했던가.
무슨 채널이 그렇게 많이 필요한지는 모르겠지만.
“채널 에이 다시 포. 시야 확보 요망.”
“확인.”
내 바로 뒤에서 내려온 기남의 목소리가 들렸다.
틱.
곧 바닥에 작은 구슬이 굴러왔다.
강푸름 특제 섬광 장치다.
탄이 아니라 장치다.
곧 구슬이 쪼개지며 앞쪽으로 빛을 뿌렸다. 방사형으로 퍼진 빛이 사방을 밝혔다.
찌지지지지직!
곧 쥐 울음소리 같은 게 울리며 눈앞의 광경을 비췄다.
천장 위쪽이었다.
위에서 진자운동 하듯 흔들리는 놈들이 보였다.
넘버링 21 모스키토 뱃, 모기 박쥐다.
“넘버링 21, 모기 박쥐, 모스키토 뱃 확인, 추정 개체 수 백예순둘.”
기남이 순식간에 인베이더 개체 수를 파악했다.
로스트 노쓰는 잃어버린 땅.
이곳에는 하루에도 수십 번씩 블랙홀이 생기고 없어진다. 그로 인해 인류는 이 땅을 이상 현상 중 하나로 규정했다.
깜빡이는 구멍, 블링크 홀.
그 덕분에 이곳에는 언제나 인베이더가 넘친다.
그 현상을 눈앞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땅굴까지 아주 인베이더가 가득한 거지.
허공에서 붕붕- 몸을 흔들던 놈들이 곧 하나둘씩 달려들었다.
그리고 우리 쪽에서도 사람이 하나 튀어 나갔다.
“마리가 해요.”
어이쿠?
“놔둬라.”
어머니가 말했고,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마리가 등 뒤에서 도끼를 뽑아 들었다.
뽑아 들고 휘두른다. 날아드는 모스키토 뱃 무리 사이로 도끼가 휘어지는 선을 그리더니, 곧 참격으로 놈들을 환영했다.
놈들의 주둥이는 빨대 형태, 거기에 꽂히면 1초에 10cc씩 피를 빨려들어 간다.
피를 뺏기는 것만큼 체력도 잃게 되고, 미라처럼 말라비틀어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그래서 이게 위험하냐고 묻는다면.
글쎄, 이걸 뭐라고 해야 하나.
마리는 춤을 췄다. 날랜 발동작을 겸비한 도끼의 춤을.
그리고 그 춤은 날아드는 인베이더를 싹둑싹둑 썰고 또 썰었다.
반사적으로 총을 들고 겨눈 정직이는 곧 방아쇠에서 손을 뺐다.
백예순두 마리의 인베이더가 달려들었지만, 썰리는 건 순식간이었다.
몇 마리가 마리의 어깨나 옆구리를 노리며 기어코 그 빨대 주둥이를 들이밀었지만.
퉁!
단단한 전투 슈트를 뚫지 못하고 튕겨 나갔다.
후두둑.
곧 마지막 모기 박쥐가 도끼에 두 쪽이 났다. 찢어진 날개가 바닥에 흩뿌려졌다. 마리는 고깃덩이가 된 그 가운데에서 가볍게 숨을 골랐다.
“준비 운동으로 딱 맞네요.”
그러니?
“인베이더가 좀 더 나오려나?”
“그렇지 않겠냐? 지하에도 그득한가 본데.”
뒤에서 귀태, 요한 혼혈 페어가 속닥거렸다.
“장미야, 여기 꽤 위험하다고 했지?”
“그랬지.”
내 물음에 로즈가 답했다.
땅굴에는 인베이더가 나오기에 뚫고 나가는 게 꽤 험난할 거라고 했다.
그래, 그랬지.
이후 로즈의 말대로 인베이더가 튀어나오긴 나왔다.
땅굴 파는 걸 취미로 삼았는지, 고블린 무리가 그다음이었다.
투두두둥.
자동 소총으로 무장한 우리는 이백 마리의 고블린을 단숨에 쓸어버렸다.
가까스로 가까이 온 몇 놈은 마리가 도끼로 썰었다.
“이동.”
정리하고 움직인다.
인베이더가 또 튀어나온다. 트롤이었다.
재생력이 끔찍한 놈들인데.
화륵.
이건 귀태 형이 화염방사기로 태워 버렸다.
그 뒤에도 이런저런 인베이더가 튀어나오긴 했다.
원래라면 까다롭다고 할 놈들도 있었다.
가령 슬라임 같은 것들도 있었으니까.
그건 빙결탄으로 얼렸다.
“……장미야, 여기 위험하다고 했지?”
“아, 뭐. 위험해. 이전에 프로메테우스로 여기 조사하러 왔을 때는 사상자가 나왔다고.”
로즈가 짜증을 냈다.
누가 뭐라고 했냐.
그냥 물어보기만 한 건데.
하여간 애가 짜증이 많다.
워어어어어!
너무 쉽다고 말해서일까.
진짜 까다로운 인베이더가 나왔다.
오거다.
“오거다.”
로즈가 말했다. 위험한 인베이더다.
힘이 장사인 놈이다. 근접전에서는 변신족과 버금가는 괴력의 인베이더.
퉁! 펑!
놈은 나오자마자 머리통이 터졌다.
깨진 두개골과 뇌수와 피가 사방에 흩뿌려졌다.
그 밑으로 미리 던져 둔 라이트 비즈가 데굴데굴 굴렀다.
곧 오거의 몸이 뒤로 기울더니, 쿵 하고 쓰러졌다.
사지를 부들부들 떨며 오거가 죽었다.
정아 누나의 캐쉬 히포가 만든 작품이었다.
작품명은 ‘좋은 인베이더는 죽은 인베이더뿐이다’라고 짓겠다.
이게 나만 이렇게 느끼는 걸까.
이전에 했던 전투는 특이종이며 숫자도 수백을 넘어선 놈들과 싸우는 일이 많았기에.
“땅굴이 좁아서 그런가, 많지는 않네.”
어머니가 말하며 하품을 했다.
그래, 위기감이 없었다.
“또 오는데요?”
정직이가 말하며 앞쪽을 향해 라이트 비즈 몇 개를 더 던졌다.
이번에는 오크 무리다. 꽤 많았다.
한 오십 마리쯤?
하물며 그중에는 방패로 무장한 놈도 있었는데, 그랬는데.
“와, 오크다.”
내가 말하자마자, 기남과 요한, 귀태, 미호가 핀포인트 사격으로 머리통을 터트리기 시작했다.
퍼버버버벙.
북 터지는 소리가 연이어 울리더니, 다가오는 족족 바닥에 픽픽 쓰러진다.
로스트 노쓰, 잃어버린 북의 땅.
이곳에는 블링크 홀 현상으로 인베이더가 무수히 생긴다.
그럼으로써 인베이더 범람 현상이 일어나기도 한다.
각국 국경을 인접한 러시아, 한국, 중국 등은 MZ, 무장 지역으로 경계선을 구분했고, 그곳에 군대를 주둔시켰다.
인베이더가 범람해 넘어오지 않도록 주기적으로 소탕하는 거다.
“장미야.”
“말 걸지 마. 마음 복잡하니까.”
로즈는 그랬다. 이곳은 험로라고, 위험하다고.
하지만 그 위험이야 상대적인 거니까.
이후 갖가지 넘버링의 인베이더가 나왔으나.
불멸특수대 시절 깐깐한 훈련으로 약점을 파악한 전직 불특대 대원의 활약과.
어머니에게 훈련받은 마리의 활약.
“징그럽네요.”
거기에 요새 무슨 훈련을 하는지 체구가 조금 작아졌지만, 괴력을 발휘하는 김근육이 있었고.
팟.
몸을 빛으로 변화시켜, 사일런스 웜의 촉수를 피한 뒤 몸통에 화염수류탄을 꽂는 정직이가 있었다.
“아무리 겉모습뿐이라지만, 가슴이 찢어지네, 진짜.”
최상위급 마나 유저라는 혜민이까지 있었다.
혜민이는 내 모습을 흉내 낸 도플갱어를 맞이하더니 서슴없이 뛰쳐나가 사정없이 후려갈겼다.
대가리를 하이킥으로 걷어차더니, 수인을 맺고 스크롤 대용 포스트잇을 허공에 던져 고드름 창을 만들곤 머리에 꽂았다.
고드름 창을 맞은 도플갱어가 녹색의 질퍽한 액체로 변해 흘러내렸다.
이 도플갱어 무리가 땅굴 탐험의 하이라이트였다.
도플갱어는 내가 선두에 선 탓에 전부 내 모습을 흉내 냈고.
이 순간만큼은 NS팀이 전부 하나가 되어 열정적으로 싸웠다.
“다들 열심히 하는데 나라고 놀 수 있나.”
미들픽 도그 베이비께서 뛰쳐나가더니, 도플갱어의 머리통을 권총 뒤쪽으로 후려쳐 깼고.
기남이는 하나같이 목을 와이어로 감아 졸라 죽이거나 잘라 죽였고.
조용하던 로즈조차 한 걸음 나서더니 메두사의 눈을 발동.
멈춘 도플갱어의 머리통을 삼단봉을 휘둘러 깼다.
“머리통 부숴, 다 죽여 버려.”
“와, 체증이 풀린다. 나 왜 속이 시원하냐.”
요한, 귀태도 나서고.
미호도 말없이 레이저 블레이드를 휘둘렀다.
그 비싼 광학병기를 여기다 쓰냐?
고작 도플갱어한테?
그리고 너희 이제까지 잘도 총을 갈기더니, 지금은 왜 하나같이 육탄전이냐?
“네가.”
“뭔데.”
“자꾸.”
“때리냐.”
정직이는 한마디에 한 마리씩 머리통을 후렸다.
왜 나한테 하는 말 같지?
어머니와 마리, 나, 김근육만이 자리를 지켰다.
왜 팬더 형까지 저기 나서서 노동에 심취한 듯 땀을 흘리고 있는 거냐.
“아들.”
“네. 어머니.”
“평소에 뭘 어쨌길래 이러는 거니?”
할 말이 없었다.
이제껏 알뜰살뜰 잘 챙겨 줬더니만.
기남이 새끼는 근접전 실력이 형편없는 것 같아서 덤비는 족족 기절시켜 줘.
정직이는 뒤처질까 간간이 대련해 줘.
혜민이는 자꾸 헛소리하길래 정신 차리라고 쓴소리 뱉어 줘.
팬더 형은 지루할까 봐, 일 만들어서 던져 줘.
청기사랑 러브샷하고 뒈질 것 같은 걸 살려서 회사에 데려온 작자도 있다.
하나같이 다 잘해 준 일뿐이지 않은가.
“후우, 다 끝냈다.”
도플갱어를 다 때려잡은 정직이가 이마의 땀을 닦았다. 신성한 노동을 끝낸 노동판의 모습이 엿보이는 행위였다.
“너 인베이더랑 싸우면서 뭐라고 한 거냐?”
그런 정직이게 물으니.
“전투에 심취해서 기합 좀 넣은 겁니다.”
표정 하나 안 변하고 입을 터네.
허허, 야무지게 키워 놨더니 내 뒤통수를 쳐?
“다들 나한테 감정이 있나 봐.”
“감정은 무슨 인베이더니까 처리한 거지.”
중봉 씨가 말했다.
“굳이 총 놔두고 주먹으로?”
“적지가 가까워졌다. 총격음은 조심하는 게 좋지.”
이중봉 씨는 어째 날이 갈수록 능글맞아지는 것 같았다.
“적지가 가까워진 건 어떻게 알고요?”
“불멸자의 육감이 그렇게 말한다.”
“……아오.”
말이나 못 하면 밉지도 않지.
“사소한 일에 열 내지 마라. 작전 중이다.”
기남이 말했다.
사소한 일에 열 낸 게 누군데, 미친놈아.
도플갱어 목을 하나같이 와이어로 딴 놈이 할 말이냐?
난 무슨 인베이더 데리고 행위예술 하는 줄 알았네.
“휴우, 혜민이 가슴이 찢어지는 줄 알았어요. 아무리 인베이더지만 겉모습이 너무 닮아서.”
“네 이름 3인칭으로 부르지 마. 일주일 전에 먹은 게 올라온다. 자식아.”
“쳇, 마리한테는 아무 말도 안 하면서.”
너랑 마리랑 같냐.
쟤는 동생이고 넌 강혜민이잖아.
“젠장맞을 서방.”
“서방 소리도 하지 말고.”
그리고 열심히 후려칠 때는 언제고 가슴이 찢어진다는 헛소리는 왜 하는 거냐.
“우미호 너.”
“놔둬. 다 나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미호를 탓할 거면 날 탓해.”
방귀태 요새 아침 드라마 보나.
끼어드는 타이밍과 후리는 대사 보소.
“……가자, 가.”
하여간 사소한 일이었다.
인베이더는 위협이 되지 못했기에 나아가는 길에 어려움은 없었다.
그리 쭉쭉 가다 보니, 반나절도 되지 않아, 귓가로 소리가 들리고 코에선 냄새가 났다.
“기척.”
“냄새.”
기남과 마리가 동시에 반응했다.
한쪽은 불멸자의 감각으로 다른 쪽은 변신족의 후각으로.
난 통신 대신 수신호를 보냈다.
여기부터는 정찰이 필요하겠다.
나와 이중봉, 정기남이 앞장섰다.
기척 죽이기는 필수였다.
그리 나아간 곳, 공터였다.
달랑 공터만 있는 건 아니었다.
보기만 해도 불길해 보이는, 주황빛의 커다란 원통을 실은 수레와 함께였다.
누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저게 바로 백두산 활화산 라이브 쇼의 핵심 장치라는 걸.
그 앞을 지키는 놈들이 눈에 들어왔다.
완전 무장한 용병 나부랭이 따위로 보였다.
그리고 내 눈에는, 저것들이 지금껏 헤쳐나온 인베이더보다 위험해 보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