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1. 작전명 등산
“마리는 저 사람이 잘못되면 안 돼요. 그럼 마리는 슬퍼요.”
박병준 박사는 마리의 말을 떠올렸다.
그는 마리를 딸로 여겼다.
이유도 없이 대뜸 딸로 삼겠다 하면 딸이 되는 거냐고 따져도 할 말 없는 관계였지만.
마음이란 게 어떻게 그런가.
직접 입히고 먹이고 재우며 키운 아이다.
정 따위는 잊은 사막 같은 박사의 가슴에 새로운 꽃을 피운 아이다.
그리 지켜 주려 한 작은 파랑새가 이제는 둥지를 찾았다. 박사는 마리가 그저 행복하기만을 바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욕망은 끝이 없는 법이라던가.
박사에게도 소망은 있었다.
딸과 아버지란 소리를 듣고 싶었다.
그게 안 되면 조금이라도 더 가깝게 지내고 싶었다.
다만, 바람은 바람일 뿐인지라, 지켜보는 거로 만족하려고 했었는데.
“자, 이 약 세 가지만 딱 되는 겁니다. 다른 약은 더 먹으면 안 된다고, 알아듣는 거지? 당신 잘못되면 안 된다고. 하, 제발 그냥 어디 안 나가면 안 되나? 왜 지금 이러냐고.”
박병준 박사는 침을 튀겨 가며 말했다.
마지막에는 반쯤 애원하는 어조였다.
김정아는 손등으로 볼에 튄 침을 닦았다. 새로 받은 압축강화 장갑을 낀 손이다.
몇 번 주먹을 쥐었다가 펴보니, 썩 마음에 드는 압력이 느껴졌다.
이 정도면 불멸특수대 시절 받았던 기본 장비보다 질이 높았다.
“듣고 있는 거지?”
울상이 된 박사가 말했다. 김정아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네.”
“다시 정리합니다. 약 몇 개 먹을 수 있다고 했습니까?”
박사가 물었고.
“네.”
정아는 답했다. 장갑 외에 전투화도 마음에 쏙 들었다.
바운스 가죽을 내피에 대고 케블라와 몇 가지 신소재를 때려 박고 아다만티움 합성 섬유 따위를 넣었다고 들었는데.
확실한 건 불멸특수대 시절 받았던 부츠랑은 비교도 할 수 없이 더 좋다는 거다.
발목을 비트니 부드럽게 휜다. 불편함이 조금도 없다. 그런데도 강도는 어지간한 총탄을 튕겨 낸다고 들었다.
빡!
박사가 테이블 위를 때렸다.
“아니!”
그 위에 있던 토가레프가 흔들렸다.
김정아는 침착하게 흔들린 총을 제자리에 두고 발목 스트레칭을 끝냈다.
“후우, 내 얘기 듣고 있는 거지?”
호흡을 가다듬은 박사가 물었다.
“네.”
답하며 김정아는 마저 장구류를 챙겼다.
“제발, 미치겠어. 왜 나간다는 거냐고.”
박사는 반쯤 울먹였다.
“네.”
김정아는 반사적으로 답하고 토가레프의 탄을 채웠다.
전부 특수탄이었다.
활과 캐쉬 히포, 지문 인식 형 수류탄을 비롯한 개선된 모든 장비도 마저 챙겼다.
그사이 박사는 포기했다.
“좋아요. 하지만 명심해야 합니다. 아직 당신 몸은 전부 회복된 게 아니라는 거, 대표한테 똑똑히 말해 둘 겁니다.”
“네.”
김정아는 답한 뒤 발을 뗐다.
몸 상태가 전에 없이 좋았기에 컨디션은 최상이었다.
컨디션이 최악이었어도 상관없었으리라.
상대는 프로메테우스.
부모의 원수이자, 제 인생의 원수.
그들이 관계됐다면 그녀는 쉴 수 없다.
지금 김정아의 머릿속에는 프로메테우스를 죽이는 것만 가득했다.
* * *
강푸름 이 새끼, 사실 어디 외계인이라도 데려와서 기르는 거 아닌가?
아니면 외계인이랑 눈이 맞았는지도 모른다.
특수 상황 발생으로 당분간 자리를 비운다고 하니, 강푸름은 전투가 예상되냐고 물었고, 난 고개를 끄덕였다.
그 덕분에 작전명 ‘등산’의 출진까지 사흘이 밀렸다.
그동안 강푸름은 프로토 타입의 장비를 보급했다.
“이거 내 커스터마이징 장비냐?”
지문 인식 수류탄을 보고 물으니.
“아니, 기본 장구. 이중봉 팀장님의 요구 사항.”
강푸름은 그 말만 쏙 하고 제 연구실에 틀어박혔다.
덕분에 또 부소장만 바빴다.
“이전에 개발한 아다만티움 합금 섬유로 만든 슈트예요. 그리고 이건 마스크요.”
슈트는 전신에 착 감겼고.
마스크는 입을 가리고 양방향 통신기가 달렸다.
눈 부위만 특수처리를 했다고 했는데, 과연 그랬다.
“눈깔 다치지 말라고 트라이앵글 필드를 넣었어?”
“돈 좀 들었어요.”
부소장이 납작한 가슴을 내밀며 말했다.
자랑스러울 만했다.
상시 가동형은 아니다. 일정 속도 이상의 충격을 센서로 감지해 마나를 발동시키는 새로운 스펠 기어 제품이 들어갔다고 하는데.
그건 당연히 암시장의 주인, 강혜민 모친의 작품이었다.
강푸름이랑 손발 기가 막히게 잘 맞네.
이러다 혜민이 새 아빠가 강푸름이 되는 거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잘 맞는다.
아우, 끔찍한 상상이다.
중고 형은 강푸름의 연구가 상용화가 될지 모르겠다고 하지만.
난 확신했다.
이거 된다. 다만, 내가 팔 생각이 없다는 게 문제지.
적어도 지금은 팔 생각이 없다.
“그 철판으로 만든 거죠? 이름은 지었어요?”
그리핀 섬유가 아다만티움 2% 함유라고 그랬던가.
그걸 보고 아다만티움 함유 20% 철판을 만든 게 기억났다.
“네, 투엔티요.”
이름은 단순하지만, 난 그 이름에 내포된 강푸름 연구팀의 야망을 볼 수 있었다.
지금은 아다만티움 20% 함유지만, 더한 걸 만들겠다는 야심이다.
그나저나 원자재 만들었다고 이렇게 뚝딱 제품이 나오는 게 맞나.
“고생 좀 했어요.”
부소장이 말한다. 그래, 이 투엔티 슈트 하나 나오는 데 내가 보지 못한 농후한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이걸 위해 수많은 밤을 새우고 그리 고생했겠지.
“정시에 퇴근하면서도 놀 건 다 놀려니 적응하기 힘들더라고요.”
음?
“강 팀장님이 초안 다 잡아서 나머지 정리만 하는 건데도 시간이 부족하다니, 저 한 명보다 여기 연구원 열 명이 더 느린 거 아세요? 자괴감 때문에 힘들었어요.”
음, 내가 모르는 농후한 이야기 따윈 없었다.
그래도 힘든 건 힘든 거니까.
“전부 쉬고 보너스 받아 가세요.”
기분이다.
이럴 때마다 중고 형은 나 때문에 회사 허리가 휘청인다고 하는데 우리 회사가 버는 돈이 얼만데 이런대서 쫀쫀하게 구나.
전투 슈트, 같은 소재가 들어간 부츠와 장갑.
수류탄을 비롯한 기본 장구의 질이 달라졌다.
사흘을 기다릴 가치가 있었다.
기다리는 사이, 로즈한테 급하냐고 물었더니.
“이미 늦은 건지, 아니면 미리 안 건지, 어떤 것도 확신할 수 없어.”
더럽게 급하다는 소리다. 테러 집단이 무슨 짓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거니까.
그래도 무작정 출발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로스트 노쓰, 잃어버린 북쪽에 들어가는 루트도 평범과는 거리가 멀었으니까.
준비는 철저할수록 좋았다.
“어떤 위험을 내재하였는지는 추측 불가. 하지만 아는 길이 이쪽뿐이야.”
로즈는 전직 테러범답게 개구멍을 많이 알았다.
백두산으로 가는 루트는 전쟁 중에 뚫린 땅굴이다.
정확히는 북한이 뚫어 둔 굴이다.
아직 본 적은 없지만, 어디 두더지 변신족이라도 구한 게 분명하다는 게 정설로 받아들여질 만큼 북한은 참 열심히도 굴을 팠다.
로즈는 그 땅굴 중 몇 개를 알았다.
그거로 루트는 확정이었다.
난 사흘 동안, 훈련에 매진했다.
틈틈이 나한테 말을 전하는 이들이 없었다면 정말 진심으로 매진했다.
가끔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만 봐도 기분이 좋아져 일이 잘되는 날이 있다.
나한테는 이번 작전이 그랬다.
무척 보고 싶은 친구들이 잔뜩 있을 테니까.
작전명도 등산이 아니라 오작교라 붙이고 싶었을 정도다.
그러니 훈련에 절로 힘이 붙었다.
불멸과 변신의 기초 훈련.
임팩트를 기반으로 한 전투 훈련.
어머니와 마리를 두고 하는 대련.
정기남 기절시키는 것도 중간에 섞였다.
그리 시간을 보내니, 사흘은 금방이었다.
우리는 사흘 뒤 새벽에 움직였다.
아직 정부를 비롯한 누구도 알지 못하는 정보를 기반으로 시작된 작전이었다.
“가는 길에 CCTV에 우리 안 찍히게 할 수 있어?”
떠나기 직전, 이번에 구한 전뇌 공주란 꼬맹이에게 물었다.
“그 정도는 힘들지도 않아. NS 보안 서버가 더 지랄 같았거든. 후, 담배 없어?”
담배는 무슨, 얘는 강제 금연이었다.
눈 밑이 퀭한 박병준 박사가 정아 누나 절대 무리하지 않게 해야 한다고 신신당부하며 얘도 살폈는데, 꽤 인상적인 평가를 남겼다.
“무리하지 않고 건강 관리만 잘해 주면 괜찮을 거로 보네.”
건강 관리, 고로 잘 먹고 잘 싸고 잘 자고 안 좋은 거 피하고 좋은 거 잘 챙겨 먹이면 된다는 말이다.
그런데 담배는 무슨.
콩.
난 담배 대신 꿀밤을 선물했다.
“아파, 무슨 짓이야?”
“버릇없게 굴면 볼기짝을 때린다.”
“성희롱이야. 미친 새끼야.”
일단 얘 주둥이부터 어떻게 해야겠는데, 몸이 이래서야 어머니한테 맡길 순 없고 역시 혜민이가 제격일 거다.
물론 이번 작전 끝내고 나서의 일이 될 거다.
예를 살리는 것도 건강 관리라고 퉁 쳤지만, 그것만으로 해결될 일도 아니니, 이 또한 이후의 일이 될 거고.
그것 말고도 해결할 일은 산더미지만.
난 지금에 집중했다. 이전에 만났을 때는 크로커다일 친구에게 내가 좀 맞았는데, 이번에는 어떨까.
그 결과가 무척이나 궁금했다.
그런 내 눈에, 눈에 힘을 준 로즈가 보였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모르겠지만, 손에 힘이 들어갔다. 주먹을 쥐고 있는데, 손을 펴 보면 손바닥에 손톱자국이 가득할 거다.
복잡한 심경이란 걸 안 물어도 알 수 있을 듯했다.
그렇다고 해 줄 말도 없었다.
난 눈을 감았다. 이미지 트레이닝이나 할 참이었다.
그리 트레이닝 중에 머릿속에서 재밌는 생각이 번뜩였고, 그게 나도 모르게 얼굴에 나온 듯했다.
“아들, 좋은 꿈 꾸니? 차에서 졸면서 몽정은 안 돼요.”
나도 모르게 웃었는데 그걸 어머니가 봤다.
“아니요. 잠깐 졸았어요.”
“밤에 힘들면 찾아와. 우리 집 비밀번호 알지?”
혜민이가 속삭였다.
“뭘 알아? 저리 좀 가라.”
어머니가 그걸 보며 흐뭇한 미소를 보이셨다.
“손주 볼 날이 얼마 남지 않았구나.”
“아니요, 아니에요. 이상한 말 좀 그만하세요. 혜민이가 더 날뛰잖아요.”
“엄마는 느낀 대로 말한 것뿐이에요.”
“두 번 느낀 대로 말씀하시면 아들을 사회적으로 매장하시겠습니다. 어머니.”
“건강하면 좋은 거지. 아들.”
중요한 작전 나가는 와중에 이게 뭐 하는 짓인지.
“혈기왕성하군. 그럴 때지.”
옆에서 그걸 듣던 로즈가 말했다.
그제야 어머니가 왜 이러시는지 알았다.
긴장감에 폐가 쪼그라든 로즈를 위해서였다.
“넌 함정이면 진짜 쥐어팰 거니까, 긴장 놓지 마라. 또라이 장미야.”
“지랄 마. 머릿속에 시한폭탄 같은 주문을 심어 놓고 무슨 함정이고 지랄이야.”
“넌 내가 아는 필리핀 최고의 미친 아이니까 가능하다.”
“나 말고 다른 필리핀 사람 알아?”
“아니.”
“풉.”
그 말에 혜민이가 웃음이 터졌다. 얘는 웃음 포인트가 어디 있는 건지 모르겠다.
웃기려고 겨드랑이를 쿡 찌를 때는 가만히 있으면서 손등을 툭 치면 꺄르르 웃는 것 같은 아이다.
“……너랑 이야기하면 내가 이상해져.”
로즈가 항복 선언을 했다.
시답잖은 말이 몇 번 오갔는데, 중간에 내가 의문이 들어 혜민이에게 물었다.
“너 왜 로즈한테는 질투 안 하냐?”
이전에는 했던 것 같은데.
“아, 그럴 필요가 없거든.”
이건 또 무슨 개소리야.
뭐, 말했든 영양가 없는 얘기였다.
우리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군부대나 있을 법한 곳이었다.
“MZ를 뚫고 갈 순 없어. 그건 너무 비효율적이니까.”
고로 터널이 답이란 거다.
로즈의 안내로 도착한 터널 입구는 쇠문이 용접되어 있었다.
“마리가 열게요.”
“됐어. 괜히 소란스럽다.”
마리가 힘으로 뜯어 내려는 걸 기남이 나섰다.
우리 기남이는 나이프를 꺼내더니, 쇠문의 이음새에 대고 그었다.
그을 때마다 끼잉 하는 소리가 울리더니, 썩둑 잘렸다.
순간적으로 레이저를 뿜는 광학 나이프였다.
강푸름이 준 기초 장비류에 있던 거다.
각각 몸에 걸친 것만 서울 아파트 한 채 값이라고 했던가.
그리 생각하니, 더없이 든든했다.
특수종 세상에는 비용 보존의 법칙이란 게 있다.
정직하게 돈을 들여 만든 물건은 어지간하면 제 값을 한다는 거다.
농담 삼아 하는 말이지만, 사람들은 이런 말을 신뢰하는 편이었다.
따로 연구하지 않아도 살면서 깨달은 지혜이므로.
퉁.
열린 문을 마리가 들어서 옆으로 옮겼다.
“어둡네.”
“밝았으면 좀 무서웠을 거 같다. 폐쇄된 땅굴인데, 그럼 누가 있단 소리니까.”
뒤에서 혼혈 페어, 귀태와 요한의 떠드는 소리를 뒤로 하고 내가 앞장섰다.
내가 선두에 서는 게 당연했다.
이 팀에서 내가 가장 대응이 빠를 것이며.
초고속 재생이 가능한 불멸자이니까.
그리 난 어두운 땅굴 안으로 발을 들였다.
심연처럼 깊은, 검은 어둠이 어서 오라고 날 반기는 것 같았다.
쿰쿰한 지하 공기가 위로 솟았고.
마스크가 자동으로 공기 정화 시스템을 발동했다.
어둠 사이, 땅굴 안에서 내가 처음 본 건, 우습게도 빛나는 무언가였다.
불멸자의 감각이 움직이며 상대를 파악했다.
“대기.”
한마디를 뱉으며 난 양손을 교차해 옆구리를 훑었다.
곧 나이프 두 자루가 손에 잡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