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규격 외 혈통 천재-307화 (307/488)

307. 우미호 (1)

짹짹짹.

참새가 운다.

창문에 달린 엷은 흰 커튼 너머에서 적당한 빛이 스며들며 방을 밝혔다.

난 눈을 떴다.

일어나자마자 침대에서 내려와 몸을 풀었다.

스트레칭과 함께 근육이 유연하게 풀린다. 컨디션이 더없이 좋았다.

비가 오는 날보다 밝은 햇살이 내리쬐는 날을 더 좋아하는데.

오늘이 그랬다.

짹짹짹.

새가 울고.

햇볕은 더없이 따사롭다.

무엇보다 꿈 한 번 꾸지 않고 푹 잤다.

거실로 나갔다.

사옥 꼭대기 층 펜트하우스의 넓은 베란다 창에서 햇볕이 내리쬈다.

위잉.

원두 그라인더로 커피 원두를 갈고.

붓으로 그라인더 입구를 잘 털었다.

원목으로 만든 통에 잘 갈린 원두 가루를 넣고 그걸 톡톡 드립퍼 위에 씌운 기름종이 위에 털어 냈다.

정수기 온도를 85로 맞춰 스텐 주전자에 물을 따랐다.

기름종이 위에 편편하게 깔아 둔 원두 라인을 따라 물을 졸졸졸 흘린다.

불멸자의 감각과 변신족의 육체 통제력이 빛을 발한다.

더없이 일정한 속도로 따라내는 물이다.

그렇게 원두 위에서 한 바퀴 물을 돌린 후, 뜸을 들였다.

커피 향이 코를 찔렀다.

불멸자는 예민하다. 미각의 예민함은 그들을 전부 미슐랭 혓바닥으로 만들었다.

변신족은 후각이 그렇다. 후각만은 불멸자보다 더 예민하다.

흔히 말하는 개코 일족이다.

그러므로 이 고가의 원두 향은 변신족에게 마약과도 같았다.

찌르르.

전신에 전율이 인다. 그만큼 좋은 향이다.

향을 마음껏 음미하고 마저 물을 부었다.

일정한 속도로, 변신족의 육신은 몸으로 하는 걸 전부 능숙하게 만들어 준다.

머리가 안 돌아가더라도 몸으로 하는 거라면 천재 소리를 쉬이 듣는 게 변신족이다.

올림픽이나 세계 선수권 대회에서는 변신족의 피가 섞인 선수를 도핑한 선수보다 더 철저하게 배제했다.

그럴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혼혈, 피가 섞인 게 쿼터 이하라고 해도 올림픽 출전은 불가다.

일각에서는 특수종 올림픽 따위를 열자는 말도 나오지만.

지나가는 아홉 살짜리 꼬마가 들어도 옆집 흰둥이의 짖음과 다를 바 없는 소리였다.

변신족 창 던지기 따위 해서 뭐 하자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특수종을 보는 시선이 변하고, 치안이 확보되며 전처럼 특수종 실종 사건이 빈번하진 않지만.

아직도 미친놈은 많다.

미친 과학자 무리는 특수종의 피를 갈구하는 놈들이고.

그 외 미친 종교 집단도 있고.

불멸자를 제물로 바치는 놈들이 있다. 진짜로 이런 미친놈들이 존재한다.

하여간 세상 참 험난하다.

핸드 드립으로 커피를 한 잔 내리고 홀로그램을 띄워 지난 밤 온 연락을 들춰봤다.

[옆 나라 왕자] 무엄하다. 이틀에 한 번, 아니 일주일에 한 번은 연락하라. 어째 왕이 된 이 몸이 더 자주 연락한단 말이냐?

바빴다. 십이세 새끼야.

아닌 게 아니라 정말 꽤 바빴다.

암시장을 털어먹은 지 일주일이 지났으니까.

난 그때 일을 떠올렸다.

* * *

“많이도 해 처먹었네요?”

진심 감탄했기에 절로 그런 말이 나왔다.

로버트라 자신을 밝힌 뒷골목의 왕은 머쓱해 하지 않았다. 그는 태연했고 당당했다.

이전처럼 식은땀을 흘리는 대신 그는 뭔가를 포기한 사람처럼 굴었다.

“윗선은 더 해 먹었습니다.”

이쪽 암시장은 무슨 판타지 세상에 나올 것 같은 지하 도시 따위처럼 보인다.

철컹철컹!

가끔 들리는 지하철 굴러가는 소리만 아니라면 정말 천막 사이 골목에서 드워프 따위가 튀어나와도 놀라지 않을 것 같은데.

“끝?”

천막 사이 골목에서는 드워프 대신 정아 누나가 활을 들고 튀어나왔다.

“네.”

그 뒤로 요한과 귀태가 나왔고.

귀태는 보자마자 내 뒤로 바짝 붙어 물었다.

“찾았냐?”

“가는 중.”

그러자 눈에 불을 켜고 따라붙었다.

쫓아오도록 놔뒀다. 귀태는 이 일에 가장 분전했다.

보이는 부분은 정아 누나 서포트가 전부지만, 뒤에서 한 일이 꽤 많다.

발에 땀 나도록 뛰었다는 거다.

안쪽, 도시 가운데 지은 건물 안에 들어선 참이었다.

진흙 사막이란 아더 사이드에서 지은 건물을 보고 감탄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여기도 마찬가지다.

자재 옮겨 오는 게 쉽지 않았을 텐데.

반듯한 콘크리트 건물이다. 건물 안쪽을 보니 시중 은행 같았다.

깨끗한 흰색 페인트 벽과 단단한 대리석 바닥이 보였다.

왼쪽 어깨너머로 VIP실이라고 쓰인 표시가 보였다.

창구와 번호표 발행기 따위도 있었고.

“환전이나 경매 물품 관리도 했습니다.”

묻지 않아도 로버트 아저씨가 눈치로 말했고.

그렇게 안쪽까지 들어서서 난 금고를 만났다.

그 금고를 보고 내가 감탄한 거고.

진짜 은행에서나 볼 법한 금고다.

문이 팔을 벌려 잡을 정도로 크고 가운데 좌우로 돌리는 잠금장치도 보였다.

이 정도 금고를 채우려면 보통 해 처먹고서야 불가능하지 않나.

여기가 진짜 은행도 아니고.

개인 물건을 이곳에 보관하는 미친놈은 없을 테니.

암시장 자체가 불법인데 뭘 믿고 여기에 귀중품을 맡기겠나.

그렇다.

이건 전부 뒷골목의 왕 소유였다.

“윗선 물건이 더 많습니다.”

그가 말했다.

“열어 볼래요?”

그는 순순히 응했다.

목숨만 건진다면 뭐가 어찌 돼도 상관없다고 그랬다.

그렇게 열린 금고다.

끼익.

이곳은 판타지 세계가 아니다. 금은보화가 넘쳐나진 않았다.

그 대신이다.

일단 성인의 심장이 있었다.

은은한 흰 빛을 뿌리는 보석, 그걸 본 귀태가 맞냐고 눈으로 묻는다. 혜민이 고개를 끄덕였다.

귀태는 품에서 곱게 접은 천을 꺼내 보석을 그러쥐고 다시 곱게 접어서 품에 넣었다.

그리고는 좌우를 살핀 뒤, 조용히 발을 물린다. 누가 보면 도둑놈 새끼인 줄 알겠네.

“먹고 째는 거 아니지?”

혜민이가 물었다. 타당한 의심이다. 제 딴에는 조심한다고 저러는 것 같은데.

더 의심스러운 행보다.

뭐, 이 마당에 암시장에서 우리를 습격하는 미친 집단은 없겠지마는.

“절대로.”

난 답했다.

방귀태는 돈 수십억보다 우미호가 더 좋은 놈이다.

저 보석이 근데 얼마라고 했던가.

아무리 못 쳐도 백억은 넘긴다고 했던가?

거, 부하 직원 동생 하나 구하기 참 빡세다.

보석 외에 서류가 잔뜩이다. 하나 들춰본 로즈가 눈을 빛냈다.

“노다지야.”

암시장에서 주로 다루는 게 뭘까.

그중 첫째가 바로 정보다.

정보는 곧 돈이자 힘이 될 수도 있었다.

금고에 있는 첫 번째 보화는 정보였고.

두 번째 보화도 넘쳐났다.

“아다만티움 따윈 취급하지 않습니다. 여기가 어딥니까, 암시장 아닙니까. 희소성이 없으면 보관도 안 했죠.”

뒷골목의 왕이 말했다.

그야말로 컬렉션이었다.

그중에는 패러사이티움도 보였다.

기생석, 지금은 강푸름이 떼간 내 기생 라이플 기어의 원류다.

푸름이가 뭐라고 했더라.

패러사이티움이 많이 부족하다고 했던가.

친구야, 여기 많이 있어.

괴로 만들진 않았지만, 덩어리가 어른 머리통 세 개를 합칠 만큼 컸다.

옆에서 멀뚱히 선 뒷골목의 왕이 눈에 들어왔다.

‘이 작자의 이름이 뭐였지?’로 시작했는데, 깜빡했다.

“이름이 로또였던가요?”

그래서 되물으니.

이건 진짜 미쳤구나.

하는 눈빛으로 로또가 날 쳐다봤다.

“풉.”

혜민이만 내 말에 웃었다.

나머지는 할 일 하기 바빴다.

로즈는 정보를 뒤지고 귀태는 보석을 아이 감싸듯 감싸고.

기남이는 안 보는 척 여기저기 둘러보더니, 손잡이 없는 칼날 모음 앞에서 멈췄다.

내 감각으로 봤을 때, 저주 또는 다른 주문이 엮인 칼날인데 무슨 흥미가 돋았는지 그걸 빤히 보는 중이다.

뒷골목의 왕은 순순히 보내 주기로 했다.

이유?

“놔둬도 죽을걸. 이걸 다 넘긴 걸 알면.”

혜민이의 말이다. 엄마한테 듣기로 자신을 쫓는 건 스위퍼라는 불법 마법 연맹 집단.

현상금 사냥꾼도 겸하는 애들인데, 그 친구들이 바로 암시장의 배후 주인이다. 그런데 걔들이 지금 상황을 알면 금고를 냅다 받친 저 친구를 가만히 놔두겠냐는 거다.

세최특이 상대였다고? 그럼 이해해야지. 잘했네, 금고도 그대로 갖다 바치고.

라고 하겠냐고.

불법 마법 연맹이란 매드 사이언티스트만큼 또라이 집단이다.

고로 혜민이가 한 게 맞는 말이었다.

로또도 그걸 인정했다.

“파괴신이라고 들었습니다. 손만 대면 다 때려 부순다고.”

“내가?”

로또의 말에 내가 날 가리키며 되물었다.

“틀린 말은 아니네.”

듣고 있던 혜민이 답했다.

아니, 틀렸지.

내가 뭘 때려 부쉈다고.

“세이브 & 머니랑 아더 사이드 진흙 사막 기지 쪽도 터졌다고 들었고, 프로메테우스 지부랑 박혁 연구소랑 한국 범죄 조직이랑.”

“그만.”

뒷조사 한번 철저하게 했다. 로또는 내 과거를 줄줄이 읊었다.

“기왕 하는 거 스위퍼도 좀 박살 내주시면 좋겠습니다.”

“이제까지 몸담았던 곳 부숴달라고요?”

“여기 넘긴 거 알면 전 죽은 목숨이거든요.”

그런 말을 이리 태연하게 하는 이 양반도 정상은 아니다.

어쨌든 이런 이유로 방생하기로 했다.

놔두면 우리한테 도움은 됐지, 방해는 되지 않을 거라는 판단이다.

근데 파괴신이라니 누가 그런 소리를 해 대는 건지.

* * *

그렇게 금고 이송 작업이 딱 사흘이 걸렸다.

이후 암시장은.

“내가 나이를 헛먹진 않았지. 사위, 장모만 믿어.”

“누가 사위고 누가 장모입니까?”

엄마고 딸이고 진짜 왜 이러는 걸까.

하여간 자칭 장모, 혜민이 어머니, 김주희 여사께서 나섰다.

그녀는 수완이 좋았다.

좋은 정도가 아니다. 사흘 만에 암시장 시스템 전반을 확인한 뒤.

안에 남은 테러 단체 잔챙이를 탈탈 털어 냈다.

그러면서도 암시장은 제대로 돌아갔다.

팔 사람은 팔고 살 사람은 사고.

경매도 이뤄지고.

그러면서 제 연구를 위한 자원 요청도 잊지 않았다.

옆집 아줌마는 능력자였다.

마법 연구만 하면서 틀어박힌 주문쟁이가 아니었다.

혜민이 데리고 도망 다니면서 이것저것 주워듣고 알아놓은 게 많았을뿐더러.

스펠 크리에이터로서 능력도 출중했다.

꿀꺽.

난 홀로그램으로 사회 뉴스 따위를 보며 커피 한 모금을 삼켰다.

변신족의 후각이 기쁨을 느낀 만큼.

불멸자의 미각도 만족감을 표한다.

미슐랭 혓바닥을 만족시킬 커피였다.

완벽한 핸드 드립 기술과 원두가 만나 미미(美味)를 피웠다.

맛나고 또 맛나다. 아름답게 맛나다. 커피 한 잔에 행복감이 느껴질 정도다.

하는 김에 식빵을 구워서 달걀을 풀어서 부은 뒤, 구워서 딸기잼을 발랐다.

즉석에서 만든 프렌치토스트와 커피 한 잔이다.

날은 좋고 입은 즐거웠다.

그러며 오늘 일정을 살폈다.

우지호, 우미호의 동생을 치료하기로 한 날이었다.

사실 내 일정이야 별거 없다.

이번에야 암시장을 암중에 장악하기로 해서 바빴던 거지.

그 바쁨도 그저 얼굴을 비추면 끝날 일이었다.

단군에, 정부에, 암시장에 알게 모르게 줄을 댄 이들에게 얼굴을 들이밀어서 이제 내가 주인이라고 고지하는 게 전부였다.

우미호가 내가 직접 가야 한다고 해서 움직이느라 바쁜 거였다.

그 외에는 난 일을 하지 않는다.

대외적인 업무는 사실상 팬더 형과 우미호가 맡아서 하고.

내부 관리 단속은 중고 형이 맡아서 하고.

인사팀 운영은 스티븐 최가 한다.

보통날의 난 먹고 자고 훈련한다. 간간이 이런저런 일을 하긴 한다.

가령 오늘처럼 우지호 구하기 프로젝트 같은 거.

난 암시장 안에서 민간에게 피해를 주는 독소를 빼길 원했다.

가령 민간인을 위해 파는 가루약 같은 것들.

불멸자를 위한 마약과 일반인을 위한 약은 종류가 다르다.

불멸자의 마약은 때론 고통을 수반하기도 하니까.

무조건 쾌감을 주는 게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마약이 아니라 불멸 비약이라 불러야 옳을 것이다.

먹고 씻고 나섰다.

날이 참 좋았다. 이런 날은 뭐가 되도 되는 날이었다.

“성공률은 80%.”

모든 재료를 모아서 시뮬레이션해본 혜민이 모친의 말이다.

이제부터는 우미호한테도 숨길 수 없었다.

실패하면 주체, 미호 동생에게 어떤 방식으로 주문의 여파가 미칠지 모르니.

“내가 말하게 해 줘.”

귀태 형이 나섰다.

지금쯤 말했을 거다.

우미호는 제 동생이 다시 멀쩡히 일어나 말하고 움직인다는 가능성에 기뻐할까?

아니면 실패할 것이 더 두려울까.

모르겠다.

애가 참 속을 모르겠단 말이지.

“차량 준비해 뒀습니다.”

밑으로 내려가니 아재 비서가 차를 준비해 줬다.

세단을 몰고 병원으로 향했다.

병실에 올라가니, 그곳에 이미 혜민이 모친과 혜민이, 우미호와 귀태 형이 와 있었다.

“일찍 왔네요.”

“네가 늦은 거지.”

귀태 형이 말했다. 목소리가 칼칼했다. 긴장한 티가 역력했다.

이 형, 이런 모습 처음이네.

우미호는 날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저 동생만 뚫어지게 볼 뿐이다.

무슨 생각 중이려나.

“그럼 시작해도 될까요?”

혜민이 모친이 물었다.

그녀의 손에는 홍염의 비늘과 성인의 보석이 들렸다.

홍염의 비늘은 말 그대로 비늘 모양의 보석이다.

그 안에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일렁임이 있었다.

보석이 마치 살아있는 듯 것처럼 보였다.

성인의 보석은 반대다.

묵직한 돌처럼 보이나, 희다. 더없이 흰 빛이다.

보기만 해도 마음이 치유되는 은은한 빛이 스며 나왔다.

두 개의 보석과 출중한 마법사.

이게 우지호를 구하는 조건이었다.

우미호는 쉽게 입을 떼지 못했다.

혜민이 모친 물음에 그녀는 입술을 달싹이다가 결국 답했다.

“……네.”

한마디 답에 담긴 말에 담긴 의미가 적지 않다. 그게 느껴졌다.

곧 혜민이 나섰다.

이 주문을 해제하기 위해 혜민이 모친은 주문을 만들었고.

그걸 혜민이 사용하는 게 조건이었다.

곧 해주, 저주를 푸는 마법이 시작되었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