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6. 평화주의자 유광익
뒷골목의 왕, 로버트는 한국에 들어와 처음 배운 말이 떠올랐다.
‘개새.’
이어 두 번째 배운 말도 연상되어 머릿속에 흘렀다.
‘씹새.’
한국어 과외 선생이 문제였다.
입에 욕을 달고 다니는 놈을 가이드랍시고 데리고 다녔더니 이 모양이다.
가이드 놈은 툭하면 새를 찾았다. 그것도 두 마리를.
더블 버드, 로버트는 그에게 그런 별명을 지어 줬었다.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세최특을 향한 욕이 아니었다.
세최특의 약점을 들고 온 놈이 떠올랐을 뿐.
‘돌아가면 혀뿌리부터 지져야겠다.’
로버트는 평온한 표정으로 미래를 계획했다.
머리에 돌기가 나고 바위로 변하는 초능 특수종 새끼의 미래를.
바위 변신 초능 특수종의 이름은 하종훈이었다.
암시장에 끌려왔던 종훈은 확신을 담아 말했었다.
“그 새끼는 괴물이 맞습니다. 그럼 세최특을 제외하면 그 주변은요? 다 세최특 같을까요?”
아닐 것이다. 동료는 약할 것이다. 고로 그건 세최특의 위크 포인트다.
가족, 친구 모든 게 약점이 될 수 있다.
오래전에 봤던 미드의 대사가 떠올랐기에 생각이 여기까지 미칠 수 있었다.
슈퍼 히어로의 약점은 무엇인가.
사람이라고 했다.
그가 아끼는 사람, 그가 아끼는 모든 것.
어느 정도 합리적인 의견이었고 생각이었다.
그래서 로버트도 인정하는 바였고.
다만, 괜히 타초경사의 우를 범하지 않기로 했을 뿐이다.
풀숲을 건드려 괜히 잘 쉬고 있는 뱀의 화를 돋울 필요는 없지 않나.
그저 뱀이 먼저 덤빌 줄 몰랐을 뿐.
무엇보다, 그 미친 초능 특수종 새끼의 합리적인 의견이 개똥 같은 소리가 되지 않았나.
‘안 약하다. 이 새끼야.’
전투력은 상대적인 법이다.
로버트는 한눈에 상대의 전력 수준을 알아볼 수 있었다.
싸우자고 하면 싸울 수 있지만, 세최특이 없어도 이들이 다 덤비면 목숨을 보장하기 어렵다.
거기에 세최특이 낀다면?
자신은 죽는다. 반드시 죽는다. 볼 것도 없다. 죽는다.
죽을 걸 알면서 싸울 것인가?
‘그런 멍청한 짓을 왜.’
로버트는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세상 어떤 것도 제 목숨보다 귀중하지 않다는 걸 안다.
길게 오래 사는 게 그의 목표다.
마법사치고는 소박한 목표라 할 수 있지만, ‘길고 오래’가 중요했다.
그는 최소 이백 년은 살고 싶었다.
주문은 그의 바람을 이뤄 줄 가장 빠른 길이었고.
그는 목숨에 연연했다.
무엇보다 지금 당장 암시장의 실권을 넘긴다고 해도 후일 되돌려 받으면 그만 아닌가.
암시장에 엮인 큰 손이 어디 한둘인가.
그들이 과연 두고만 볼 것인가.
운영은 또 어떻게 할 것인가?
무엇 하나 쉬운 일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건 전략적 후퇴였다.
생각하며 로버트는 세최특과 눈을 마주했다.
그 눈을 보고 뭔가를 읽어 내기란 참 어려웠다.
그는 생각에 잠겨 있는 것처럼 보였다.
혹시?
‘죽일지 살릴지 고민하는 건가?’
살인에 미친 놈인가?
그럼 방법을 달리해야 할 것이다.
얌전히 암시장을 넘기는 것으로 끝나지 않을 테니.
로버트는 남몰래 마나를 끌어모아 주문을 준비했다.
툭.
세최특이 늘어뜨린 오른 검지로 제 허벅지를 두드렸다.
한 번.
툭, 툭.
두 번, 세 번.
꿀꺽.
로버트는 침을 삼켰다. 아무것도 하지 않았음에도 관자놀이를 따라 식은땀이 흘렀다.
물속에 얼굴만 빼고 몸을 담근 것처럼 숨쉬기가 답답했다.
* * *
상대가 저리 나오는 데는 이유가 있는 법이다.
난 그 이유를 찾았다. 금세 알아냈다.
설명이 따로 필요치 않았다.
흘러가는 상황, 일어나는 일을 정리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걷기만 하면 된다더니.
사람이 몰린 곳을 당당히 걷기만 하라 했다.
군중 사이에서 비켜 달라고 비집고 들어갈 순 없는 노릇이었다.
적당히 야생의 살기를 뿌렸고, 기세에 질린 이들을 모세처럼 가르며 걸었다.
그거로 엔딩이다.
시나리오가 끝났다.
어디 보자.
팬더 형이 짠 건 아니고.
구미호와 팬더 형 둘 다 머리가 기가 차게 돌아가는 이들이지만, 스타일이 조금 달랐다.
어찌 보면 미묘한 차이고.
어찌 보면 확연히 다르다.
팬더 형은 판을 뒤엎고 새로 짜는 곰탱이고.
미호는 상대가 깔아 둔 판에 은근히 끼어들어서 흐름을 제 의도대로 움직이는 걸 즐기는 여우 새끼다.
그래서 이게 미호가 벌인 판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팬더 형도 돕긴 했겠지만.
시나리오의 핵심은 꼬리 아홉 개쯤 달린 것 같은 불멸자 우미호 짓이다.
근데 이걸 전략이라고 해야 하나?
전략이라기보다는 협박 아닌가?
뭐, 협박도 때론 전술적 무기가 되는 법이다.
우미호는 정직이와 마리, 김근육, 정기남을 써서 말했다.
싸울래? 우리 이 정돈데? 싸우고 싶으면 덤비고.
대신 각오는 하고 들어와라.
정직이의 역할이 중요했다.
그는 미끼이자, 무력시위의 선두였다.
암살이든 저격이든 뭘 해도 상관없다는 식으로 내세운 미끼.
동시에 정직이 하나를 어쩌지 못하게 만들며 보이는 무력 시위.
뻔뻔한 정직이는 연기 반, 진심 반으로 암시장을 뒤엎었다.
상대가 보기에는 얼마나 기가 찰 것인가.
암살자를 보냈더니 그림자 뒤에서 족족 당하고.
저격을 명했더니 먼저 저격을 당해 버렸다.
그래서 주문쟁이를 파견하고 암시장을 지키는 주 전력도 내보냈다.
그 와중에 시장 안에 있는 불멸교도의 등을 떠밀기도 했을까?
그랬을 것이다.
직접 나서는 걸 제외하고는 전부 다 했는데.
이빨도 안 들어간 격이다.
생각이 이어지며 절로 결론을 끌어 냈다.
우미호는 이미지를 만들려고 하는 거다. NS 전투조의 대외적인 이미지다.
그 이미지가 나한테도 보였다.
오르지 못할 나무.
세계 정부 연합 올드포스, 글로벌 기업 연합체 엑스큐라시, 초능 협회, 프로메테우스, 불멸교 등등.
특수종 세계에 이름을 날리는 집단의 특징은 무엇인가.
나를 제외하면 이들을 향해 쉬이 칼을 뽑는 이들은 없다.
특수종 세계에서 이들의 이미지는 강자 그 자체이므로.
쉬이 덤빌 수 없는 거다.
우미호가 바란 게 그거였다.
압도적인 전력으로 찍어 누르는 것.
고작 암시장 하나 먹는 게 얼마나 대단하냐고 하겠지만.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게 얼마나 황당한 일인지 알 수 있다.
암시장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다.
그런 거위를 이제까지 그 누구도 노리지 않았을까?
많이들 노렸을 것이다. 다만, 거위의 배를 가르면서까지 가질 필요가 없었을 뿐.
특히나 거위의 배에 칼을 대는 순간, 그놈은 특수종 세계에서는 공적쯤 될 거고.
이곳에 엉킨 이들이 어디 한둘인가.
우미호는 이후 상황까지 예측했을 것이다.
마침 미국이 나에게 우호의 표시를 해 왔고.
한국이야 표창장 세례를 하는 중이었으며.
내 외가는 단군 그룹이니.
할아버지는 내가 원하면 당장 그룹 후계자로 삼을 기세였다.
행안부를 비롯해 모든 정부 각처에서도 날 건들지 않을 것이다.
내가 이제까지 한 일도 있지만, 아버지 덕이 크다.
“너 팀장님 잘 모르는구나.”
피닉스 팀원 누나가 사람들이 쉬쉬하는 일 몇 개를 알려 줬다.
겉으로는 항상 부모 도움을 바라는 건 장성한 아들이 할 짓이 아니라고 했으면서.
쓴소리도 받아들일 줄 아는 사람이 되라고 했으면서.
그랬으면서, 아버지는 뒤에서 날 조금이라도 건들면 아주 눈에 불을 켜고 작살을 내셨다고.
행안부 요직에 앉은 사람 중 하나가 내 악플을 쓴 적이 있었는데.
기어코 그거 쓴 작자를 찾았다고.
“익명으로 댓글 달면 모를 줄 알았어요?”
겁을 집어먹은 작자가 오줌을 지릴 뻔했다고 했다.
재밌는 아버지다.
어쨌든 황금알을 낳든 무정란을 낳든, 거위 하나 꿀꺽했다고 날 향해 툴툴거릴 곳이 없다는 거다.
우미호는 거기까지 계산에 넣은 거고.
상대는 이리 생각하겠지.
일단 넘긴 다음 나중에 두고 보자고.
황금알을 낳아 봤자, 거위 다루는 법은 모를 거로 생각할 테니.
그리 생각하면 오산이지.
어쨌거나 우미호 이 자식, 요망할 정도로 머리를 잘 굴렸네.
상대 의도, 아군의 전력, 이걸 퍼트릴 눈과 입.
모든 걸 계산했다.
일 잘하는 직원을 두니 여러모로 편하다.
내가 했어도 이렇게 할 순 없을 테니.
암시장은 다양한 사람이 오가는 곳이다.
여기도 사람 사는 곳이라는 거다. 고로 길거리에 먹거리를 파는 이들도 있었다.
난 그 옆에서 어쩌다 보니 일등석에 앉아 모든 사태를 지켜보는 어묵 장사꾼을 바라봤다.
보글보글 끓는 푹 익은 무와 어묵이 눈에 들어왔다.
어묵을 파는 중년 남자는 멍한 눈으로 상황을 지켜보는 중이었다.
내가 돈을 들고 왔던가?
깊은 생각에 빠진 탓에 오른 검지로 몇 번 허벅지를 툭툭 쳤는데.
눈앞에 있는 파란 눈의 대장이란 놈이 식은땀을 흘린다.
이 양반 어디 아픈가.
“……저기.”
입을 열었다.
그러자 남자가 발작하듯 손을 떨더니 곧 숨을 푹 내쉬더니 말했다.
“따로 원하는 거라도?”
많지. 많은데, 일단.
“돈 있어요?”
“돈? 금고를 원하는 거라면…….”
“어묵 좀 사 먹게요. 출출하네. 구경만 했는데도 배가 고파.”
이 새끼 뭐지?
황당함이 두 눈에 물든다. 난 진심인데.
“어묵?”
“맛있어 보여서.”
뒷골목의 왕이란 남자는 주섬주섬 주머니를 뒤지다가 뒤쪽을 향해 손을 뻗었다.
“돈 있냐?”
그러더니 현금을 빌려와 어묵을 사 줬다.
이렇게 하고 보니까.
“삥 뜯는 건가?”
“세최특이 암시장의 주인한테 삥?”
“그, 되게 뭔가 말이 되는 것 같기도 하고. 넘긴다며.”
“여길? 근데 그걸 마음대로 정해도 되나, 여기에 엮인 곳이 하나둘도 아닐 텐데?”
구경꾼의 속삭임을 한 귀로 흘리며 어묵을 씹었다.
뜨거운 육즙이 입안을 한 바퀴 돌았다.
묵직하고 진한 국물 맛이 일품이었다.
우적우적.
앉은 자리에서 몇 개를 먹자, NS 직원이 자연스레 내 뒤로 섰다.
노점 앞에 초라하게 놓인 바 테이블 형태의 의자에는 나와 뒷골목의 왕만 앉았다.
얼추 배를 채우며 내가 물었다.
“성인의 심장, 갖고 있죠?”
내 물음에 뒷골목의 왕의 미간이 꿈틀거렸다.
금고 얘기를 꺼내서 하는 말인데.
기왕 먹는 거라면 쌀 한 톨 남김없이 탈탈 털어먹고 싶다는 게 내 생각이다.
그리고 이건 팬더 형과 우미호도 동의하는 바이고.
“돈 많겠지? 보너스 두둑이 챙겨 줘라. 피규어 한정판 나왔다.”
이 형은 이래서 장가나 가려나.
“업무 성과 보너스, 약속해.”
구미호야, 그래. 동생 살리려고 고생한다.
둘 다 참 돈 많이 밝혀.
물론 타당한 이유가 있는 돈벌레다.
거기에 난 이게 장점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이 돈을 좋아하는 건 죄가 아니지 않나.
돈을 모티베이션 삼아서 열심히 일하니, 장점이지.
왕은 곧 모든 걸 포기한 듯 숨을 푹 내쉬었다.
“날 죽이겠다거나?”
“사람을 왜 죽여요. 저 평화주의자입니다.”
이런 미친 새끼가?
입 밖으로 꺼내진 않았지만, 왕이 표정으로 말했다.
“진심인데.”
나 진짜 평화를 사랑하는 남자다.
내 어릴 때 소원이 세계 평화였다.
지금도 가능하면 평화롭게 살고 싶고.
그런데 왜 그런 표정이냐.
“미친놈.”
어느새 내 뒤에서 호위처럼 자리 잡은 기남이 중얼거렸다.
이 새끼는 낄끼빠빠를 모르고 끼어드네.
“이제 도발은 필요 없어.”
통신기를 통해 미호가 말하고.
“진정해요.”
김근육이 날 말린다.
“마리는 오라버니 믿어요. 평, 평화 만세.”
시선을 피하며 말하지 말아 줄래?
“약 챙겨 먹고 다녀라.”
로즈까지 입을 턴다.
이것들이 진짜.
“나도 평화주의자야.”
마지막은 혜민이다. 그녀가 목을 좌우로 꺾으며 말했다.
네가 말하니까 알겠다. 어떤 느낌인지.
강혜민은 훌륭한 반면교사였다.
어쨌든.
“금고, 심장, 장부. 다 주시죠.”
벌컥.
난 어묵 국물을 삼키며 말했다. 진짜 일품이네. 뜨끈한 국물이 목을 타고 지나가 내장을 데웠다.
“전부?”
“빼먹으면 가슴 아프지만, 제 마음에 평화가 사라질 겁니다.”
협박처럼 보일 수 있다.
어떻게 보면 갈취일 수도 있지만.
암시장 운영하는 놈들이 뭐 얼마나 깨끗한 집단이라고.
그리고 난 준법정신이 그리 투철하지도 않다.
어떻게든 다 뜯어 가겠다는 말이었다.
* * *
암시장에 몸을 숨겼던 하종훈은 가까스로 몸을 빼냈다.
‘미친 새끼.’
자신을 쫓아온 걸까?
어떻게 암시장까지 와서 저런 난리를 치는지.
모든 상황은 단숨에 끝났다.
세최특의 출현.
암시장의 실권 이양.
그 뒷골목의 왕이라는 작자는 모든 걸 얌전히 넘겼다.
종훈은 그즈음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생각이 들었고, 곧바로 튀었다.
주저는 없었다.
세최특이 자신을 뒤쫓을지 모른다. 자신과 세최특은 그만한 원한이 쌓인 관계다.
혼자서 암시장을 빠져나가긴 어려웠다. 종훈은 머리를 굴렸다.
나갈 방법이 보였다.
“확실한 거지?”
프로메테우스의 테러범이 함께했다.
테러 단체 소속이 암시장에서 몸을 빼는 건, 세최특과의 관계를 생각해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도 얌전히 있다가 죽을 생각은 없었으니.
하종훈은 이들이 빠져나갈 줄 알았다.
그래서다.
혼자서 도망가긴 글렀다 싶어서 빌붙었다.
“네, 확실합니다.”
물론 대가는 확실했다.
세최특의 약점, 하종훈은 여전히 같은 방식으로 세최특에게 약점이 있다고 믿었다.
그는 그걸 미끼로 빠져나갔다.
쫓는 사람은 없었다.
‘아슬아슬했다.’
종훈은 그리 생각했다.
세최특이 쫓는다고 생각하니 아찔했지만.
‘빠져나왔어. 반드시 복수한다.’
그는 복수의 칼을 간다.
물론 광익은 그가 복수의 칼을 쥐었는지도 몰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