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3. 그저 걸었을 뿐 (2)
기척 두 번 죽이기.
순혈 정가의 비전이다.
한 번 기척을 죽인 후, 다시금 제 기척을 숨겨 이동한다는 거다.
들었을 땐 말도 안 되는 이론이라 생각했지만.
‘불가능은 없다.’
광익을 떠올린 기남은 그리 생각했다.
그는 결국 이뤄 냈다.
기척 속이기와 죽이기를 적당히 섞은 비전이었다.
제 숨을, 제 몸에서 나는 소리를 기세를 완벽하게 없앨 수 있나?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숨으면 된다.
바위 뒤에 숨듯 거짓 기척을 만들어 던지고 그 뒤로 숨는다.
배울 땐 뒈지게 힘들었지만.
배워 두니 너무도 유용하다.
기척 두 번 죽이기는 암살자의 천적과도 같은 기예였기에.
‘쉽다.’
기남은 손쉽게 암살자의 멱을 딸 수 있었다.
골목 안쪽에 쇼크로 정신을 잃은 불멸자를 던지고 다시 집중.
그는 주변 상황을 파악하기 위해 모든 감각을 열었다.
‘미친 주문쟁이.’
기남은 강혜민의 저주에 시달렸다.
그 덕분인지, 아니면 본래 재능인지는 몰라도.
감각이 더 예민해졌다.
그 예민함이 눈으로 보지 않고 귀로 듣지 않아도 무언가를 느끼게 한다.
불쾌한 감각이 들었다 싶은 쪽에 감각을 집중하면 여지없이 암살자의 모습이 보였다.
첫 번째 덤빈 놈과는 달랐다.
주변을 경계한다. 저리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면 어설피 노릴 수 없다.
기남은 전투복에 달아 둔 다트를 꺼냈다.
‘과감함.’
순혈 정가에서 배운 게 기남의 모든 건 아니었다.
그 또한 한정직과 같은 훈련 과정을 겪었기에.
고정관념에 매이지 않았다.
서로 소리를 죽이고 기척을 죽인 전투지만, 때로는 과감함이 필요했다.
휙.
다트가 날았다.
딱!
벽에 부딪힌 소리에 암살자가 반응했다.
다트가 날아온 방향을 알아채는 건 어렵지 않을 것이다.
암살자가 달려든다.
몸을 숨기는 판이니, 소리를 낸 쪽이 불리한 건 당연했다.
하물며 암살자가 이리저리 흔적을 남긴 쪽에 다트를 던졌음에야.
승기를 잡았다고 믿는 암살자의 와이어가 목을 감는다.
기남은 기다렸다.
상대의 모습이 아직 제 머릿속에 명확히 보이지 않았다.
와이어가 목을 감고 피부를 파고든다. 그 짧은 찰나, 기남은 손을 아래에서 위로 털었다.
손잡이도 없는 칼날 하나가 그 손짓에 허공을 날았다.
푹.
와이어를 쥔 자의 손목에 칼날이 박혔다.
기남은 허리를 뒤로 꺾으며 머리 위를 향해 발끝을 세우며 찼다.
퉁.
압착 부츠 바닥에 장치된 칼날이 쑥하고 튀어나와 상대 이마에 꽂혔다.
기남은 목에 감긴 와이어를 풀었다.
기왕 이리된 거 골목 앞쪽에 작정하고 와이어로 함정을 만들었다.
좌우 벽에 짧은 다트를 박고, 거기에 와이어를 걸어 둔 거다.
세 번째 암살자가 왔다.
또 수 싸움이다. 서로 기척을 숨기고 눈치를 보는 전투다.
기남은 일부러 기척을 적당히 흘리며 상대를 유혹했다.
이번 상대는 신중했다. 쉽게 달려들지 않았다.
대신 기남과 비슷한 짓을 했다.
기남은 상대에게서 가문의 냄새를 맡았다.
정가의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봐주는 건 없다.
순혈 정가 출신으로 암시장 암살자 노릇을 하는 게 그리 놀랍지도 않았다.
세 번째 암살자는 자신만큼 능숙했지만.
바닥에 깔린 와이어를 밟았다.
단순한 함정.
깔린 와이어를 통해 다트가 핑- 하고 흔들렸고.
빈틈을 보인 세 번째 암살자는 반사적으로 몸을 숨겼다.
기척을 두 번 죽여 내달린 기남은 상대의 뒤를 잡았다.
상대가 몸을 뒤튼다. 몸을 휘돌린 상대의 팔꿈치에서 칼날이 튀어나온다. 보고 피한다. 기남은 목만 뒤로 젖혀 피하고 아래에서 위로 주먹을 뻗었다.
뻑.
턱을 맞은 상대의 동공이 풀렸다.
기남은 손을 뻗어 상대의 목을 졸랐다.
순식간에 뇌로 공급하는 혈류를 끊는다.
‘재수 없는 기술을 흉내 내버렸다.’
하도 당하다 보니 몸에 익은 유광익의 경동맥 압박이다.
그렇게 정직을 노린 암살자 셋이 기남의 손에 하나하나 골목에 쌓였다.
* * *
소음시장은 지하 도시와 같았다.
밑을 깊게 파서 2층짜리 건물도 보였다.
끝까지 걸어서 나가면 지상과 이어진다. 시장의 끄트머리가 나오는 교묘한 구조다.
지하가 전부가 아니고, 이어진 길을 따라 남대문 시장 일부를 잠식하기도 했다는 거다.
김정아는 머릿속에 담은 지형도를 되새겼다.
그녀의 역할은 상대의 저격수를 저격하는 것.
그녀는 그리했다.
포인트를 정했고, 그곳을 주시했다.
정확히는 지금 건달 짓을 하는 한정직을 노릴 만한 자리를 훑는 작업이었다.
불멸자는 타고난 저격수이며 훈련을 통해 극한의 인내심을 기르는 이들이다.
그런 불멸특수대에 있었기에 김정아는 타고난 저격수여야 했고.
고통 감내 훈련 따위 받지 않아도 인내심이 남달라야 했다.
그럴 수 있었다.
그래야만 한다면 김정아는 그 누구보다 잘 참았고, 그 누구보다 침착하게 방아쇠를 당겼다.
괜히 이중봉이 그녀를 보안 3팀 저격수로 삼은 건 아니었다.
그리고 김정아는 단순히 저격수의 소양을 가진 것만으로 특수대 내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기에, 또 다른 능력을 키워야 했다.
그게 바로 포지셔닝이다.
포지셔닝은 훈련으로 해결할 문제가 아니었다.
필요한 건 공부였다.
주변 지리를 파악하고, 어떤 곳이 좋은 포인트인지 판단한다.
그 포인트를 노리기 좋은 곳은 또 어떤 곳인지도 찾는다.
수천 개의 지형을 보고 익혔다.
사진으로 보고 직접 찾아가도 보고.
경험을 쌓고 외웠다.
이걸 수없이 반복함으로써, 그녀는 주변을 한번 훑어보는 것만으로 저격수의 위치를 파악하는 눈을 갖게 됐다.
어떤 특수종도 흉내 낼 수 없는 노력의 결정체였다.
그러므로 상대가 반응하지 못한 것이 놀랄 일은 아니었다.
A급 포인트 자리.
한 놈이 슬그머니 까만 총구를 들이민다.
김정아는 활을 꺼내 시위에 화살을 걸었다.
비약을 먹진 않았다.
그래서 레이저 활줄 대신 평범한 크롬강 활줄을 썼다.
합금 골무를 찬 채로 시위를 당긴다. 팽팽하게 당긴 시위가 볼을 스친다.
한때는 양궁 국가 대표가 될 뻔한 몸이다.
퉁.
화살은 적을 놓치지 않았다.
쌔액 하고 날아간 화살 끝은 상대의 손등을 꿰뚫었다.
“끅.”
작은 신음.
거기서 끝나진 않을 것이다. 맞으면 골로 가는 마취약을 듬뿍 발라 놨다.
맞은 저격수가 고개를 들어 주변을 둘러보지만, 보일 턱이 있나.
김정아의 위치는 상대가 포착할 수 없는 포인트다.
그 뒤, B 포인트에 있던 다른 저격수가 한 번 더 같은 걸 시도하다 종아리에 화살을 맞았다.
김정아는 유유히 자리를 지켰다.
그녀를 노리는 상대는 없다.
있다고 해도 상관없었을 것이다.
“따분한데. 미호 옆에 있고 싶다.”
스토커 또라이 방귀태와.
“선배, 요새 뭐 재밌는 일 없어요?”
떠버리 요한이 함께였으니까.
이미 주변을 깔끔하게 청소하고 잡은 포지션이다.
괜한 소란이 일기 전에 이쪽 지역을 장악해 버리는 게 편했기에.
그들은 그렇게 했다.
정직이 크게 소란을 피우는 사이, 외곽을 뒤집어엎은 셋이다.
“니들 뭐냐?”
그러자 꽤 거물이 왔다.
얼굴이 까맣다. 흑인이었다.
팔다리가 유난히 길었다.
양손에 쥔 긴 칼이 위협적으로 보였다. 요한은 권총을 꺼냈다.
“난 총인데.”
“너희 뭐냐고.”
상대는 총을 보고도 긴장하지 않았다.
그러니 꽤 거물이었다.
어쩔까?
요한이 귀태에게 눈으로 물었다.
귀태는 요한을 보지 않았다. 그는 당당히 나섰다.
“이 작전은 절대 실패해선 안 된다. 알고 있느냐? 이 깜둥아.”
요한은 생각했다.
이번 작전을 시작하면서, 귀태가 평소보다 몇 배는 미친 것 같다고.
그 평가는 정확했다.
인종 차별 발언에 흑인의 눈에 파란 불빛이 타올랐다.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파란 불빛이 일었다.
“저거 주문쟁이야, 미친놈아.”
요한이 귀태에게 경고했다.
“그런 거 모른다. 난 이 작전을 성공시킨다. 그게 내 역할.”
귀태가 달려들었다.
반쯤 미친 것처럼 보인 우직한 돌진에 흑인의 양팔이 움직였다.
잔상만 흐릿하게 보일 정도로 빠르다. 손에 든 칼이 허공에 선을 그었다.
바람은 그 선을 따라 칼날이 되어 날아들었다.
어지간한 방검복 따윈 천 쪼가리 자르듯 자를 주문이었다.
요한은 놀라면서도 총구를 당겼다.
풍! 풍! 풍!
소음기를 단 총이 불을 뿜었다. 총알은 상대를 뚫지 못했다.
퉁퉁퉁!
세 발 전부 허공에 생긴 삼각형의 방어막에 막혔다.
트라이앵글 필드였다.
그사이, 바람의 칼날이 귀태의 왼팔과 오른 발목을 잘랐다.
달리던 힘으로 귀태는 팔과 발목이 잘렸음에도 앞으로 나아가 굴렀다.
“병신.”
흑인이 그런 귀태를 욕했다. 귀태는 구르다 흑인의 발치에 멈췄고.
김정아는 이 모든 상황을 한 발 뒤에서 지켜봤다.
그녀는 흑인이 귀태의 머리에 발을 올리는 걸 봤다.
곧 침이라도 뱉을 것인지 입을 오므리는 것도 봤고.
김정아는 그걸 보며 방심은 금물이란 걸 되새겼다.
푹.
“끄, 끄아악!”
흑인의 입에서 비명이 터졌다.
바닥을 구른 귀태는 피를 철철 흘리면서도 상대의 발등에 칼을 꽂았다.
멀쩡한 오른손이 나이프를 쥐고 있다.
“나 불멸자야, 이 새끼야. 그리고 내 얼굴에 침은 내 여자만 뱉을 수 있어.”
저 미친놈은 무슨 소리를 하는 걸까.
요한은 귀태가 만든 타이밍에 달려들어 와이어로 상대의 목을 감쌌다.
필드 주문, 그러니까 트라이앵글이든 헥사곤이든 갤럭시든 일정 속도 이상으로 날아오는 충격에만 반응한다고 알고 있다.
불멸특수대 시절부터 NS에 입사하기까지 주문에 관해 배운 게 적지 않다.
떠버리라 불려도 그 또한 불멸특수대에서 엘리트 소리를 들었다.
혼혈의 몸으로 그런 말을 들었다는 것 자체가 그의 능력을 증명한다는 방증이다.
요한은 와이어를 상대의 목에 건 채로 당겼다.
꺽!
비명이 끊긴다. 목에 핏물이 질질 흐르기 시작했다.
그리 거물 주문쟁이 목을 자른다.
썩둑.
와이어에 잘린 목이 바닥에 떨어지고, 귀태가 그걸 손등으로 쳐 냈다.
암시장에는 천막도 몇 개 있었는데, 그 천막 사이로 기묘한 통로가 골목처럼 이어져 있기도 했다.
그런 통로 하나를 차지한 그들이다.
손목에 맞은 머리통이 밖으로 굴렀다.
그걸 힐끗 본 요한의 귀에 귀태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 팔하고 발목 좀.”
고통 감내 훈련은 이 정도로 쇼크사를 만들진 않는다.
“무식하게 달려들고 그러냐.”
“시간 끌어서 좋을 게 없다고 했으니까.”
“누가?”
“내 레이디가.”
미친놈.
요한은 그리 생각하면서도 피식 웃고는 팔뚝과 발목을 가져다줬다.
블러드젝을 꽂고 마약 몇 개를 씹어 삼킨 귀태는 곧 잘린 부위를 붙였다.
재생은 오래 걸리지만 잘리는 거 붙이는 거야, 혼혈에게도 할 만하다.
하물며 약의 도움도 있음에야.
굴러간 머리통이 데굴데굴 구르다 결국, 천막 골목 밖으로 나갔다.
“뭐야?”
밖을 거닐던 암시장 상인 하나가 미간을 찌푸렸다.
피비린내를 맡은 그가 골목 안에 고개를 들이밀었다.
“안녕하쇼?”
눈이 마주친 귀태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완전 무장한 셋을 본 상인은 뭔가 잘못됐다고 느꼈다.
그는 반사적으로 품에서 부적을 꺼내 찢었다.
제 상인 무리에 보내는 경고였다.
요한은 그걸 보면서 말리지 않았다.
애초에 조용히 뭔가를 할 생각은 없다.
그게 이 작전의 요지였다.
* * *
“어이, 젊은 친구, 나 여기 스펠 박스 사장인데, 적당히 좀 하지?”
정직이 하는 짓을 보다 못한 의로운 남자가 나섰다.
두꺼운 팔뚝의 눈썹 짙은 근육의 소유자다.
“난 젊지 않을뿐더러, 적당히 하는 법은 못 배웠는데?”
“말이 짧네?”
“한국인이야? 얼굴은 무슨 아랍계처럼 생겨서 예의를 따지고 그러나.”
정직은 도발의 명수였다.
“너 좀 맞을래?”
스펠 박스 사장이 성을 낸다.
정직과 스펠 박스 사장의 대치 상황, 곧바로 주먹이 오갈 것 같은 분위기에 새로운 손님이 등장했다.
“비켜.”
“나와. 길 터라.”
완전 무장은 물론이고 풍기는 기세가 남다른 이들이다.
‘이거 경력직 냄새가 나는데.’
정직은 나름대로 상대 실력을 보고 기준을 세웠다.
신입은 자기보다 못한 수준.
경력은 자기보다 나은 수준.
딱 두 가지 분류지만, 그거면 충분하기도 했다.
자기보다 센 놈이랑 싸우진 말고, 자기보다 약한 놈하고만 싸우면 될 일 아닌가.
‘감당 불가 같은데.’
상대가 다가오는 것만 봐도 꽤 하는 것처럼 보였다.
아까처럼 훈련도 제대로 받지 못한 어중이떠중이가 아니다.
하물며 광변환도 너무 남발했다.
페인팅으로 쓸 때도 에너지는 소모되니까.
숨이 차고, 사이오닉 에너지도 간당간당하니.
“뭘 이렇게 몰려와? 그럼 나도 여친 부른다.”
본래는 동료를 부른다지만, 뭐 애드립은 연기자의 자유 아닌가.
“누가?”
그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바로 곁에서 표범 가면의 여자가 나왔다.
“누가 여자친구?”
그녀가 말을 이어 반문한다.
“아니, 말하다 보니까.”
정직은 손가락으로 옆통수를 긁었다.
그걸 지켜보던 정직이 기준 경력직 무리 중 하나가 한걸음 나섰다.
“사랑싸움할 때는 아닌 것 같은데?”
팅.
음흉한 놈이었다.
말하다 말고 수작을 부렸다.
표범 가면은 어느새 오른손에 도끼를 꺼내 들었고, 방금 막 도끼 면에 뭔가가 맞고 튕겨 나갔다.
정직의 눈에 튕겨 나간 물건이 보였다.
화살이었다.
말을 건 놈 뒤쪽, 슬그머니 손을 내리는 놈이 보였다.
소매 한쪽에 기계 장치도 엿보였고.
그걸 본 표범 가면이 고개를 좌우로 꺾었다.
“좀 맞을래?”
그녀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