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규격 외 혈통 천재-299화 (299/488)

299. 선의는 때론 생각할 수 없는 곳에서 돌아온다.

남명진은 자신의 실수를 깨달았다.

‘화합을 원한다면 내가 먼저 했어야지.’

광익과의 사건 이후, 화림은 보릿고개를 지났다.

사소한 비품 하나 마음 놓고 사 주지 못할 정도로, 회사 사정은 최악으로 치달았다.

정부의 지원도 현저히 줄어서 때론 그게 원망스럽기도 했다.

‘유광익이 뭐라고.’

정부에서 자신을 이렇게 내친단 말인가.

실제로는 광익의 아버지인 유연호의 작품이었지만, 어쨌든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물론 남명진은 그걸 겉으로 표현할 만큼 아마추어는 아니었다.

그는 묵묵히 견뎠다.

해가 지면 그늘이 생기는 법이고, 졌던 해는 다시 뜨는 법이니까.

버티고 버텼다.

아더 사이드 확보권도 잃고 사유 재산을 쏟아야 했다.

다른 기업에 인재를 쏙쏙 빼앗기기도 했다.

유광익이 제 입맛에 맞는 인재를 빼갈 때는 속이 뒤틀리기도 했지만.

남명진은 1세대의 영웅.

경험만 놓고 보자면 현재 살아 있는 불멸자 중에서 손에 꼽는 위인이었다.

그는 위기를 기회로 삼았다.

‘화합.’

모든 특수종이 어울리는 집단.

그가 바라는 최종 형태다.

남명진에게도 꿈이 있었다. 그는 그 꿈을 위해 어지간한 건 포기할 수 있었다.

그가 가장 먼저 내려놓은 건 자존심이었다.

“지금 같은 시기에 서로 싸우면 뼈도 안 남을 것 같은데, 화해합시다.”

화림의 정치 구도는 사장과 이사진의 대립에 있다.

남명진은 일단 그 대립 구도부터 부쉈다. 자신을 희생했다.

이사진을 일일이 찾아가 힘을 합치자고, 그동안 과오를 인정한다며 고개를 숙였다.

“이럴 필요까지 있습니까?”

일전에 불멸교 스파이 사건 이후, 자신의 라인에 들어온 총괄 본부장 김동철이다.

그가 우려를 표했다.

권력을 잃으면 사나운 무리가 달려들기 마련이다.

“외부의 압력은 내실을 키우기 좋은 환경이 된다네.”

남명진은 자기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게 서서히 빛을 발했다.

화림은 정치 구도 따위가 없는 새로운 회사로 변모했다.

최근에는 다시 진흙 사막 아더 사이드 게이트도 확보했다.

지금의 이사진이 힘을 쓴 거다.

인맥을 동원해 행안부 요직에 있는 이들을 달달 볶아 이뤄 낸 성과다.

남명진의 지시가 아니라 이사진이 자력으로 움직여서 해낸 일, 그날 남명진은 제 생각이 옳다는 걸 증명했다.

사장과 이사진이 아닌, 화림이란 이름으로 하나 되어 나아가는 게 맞다.

다만, 그 대가로 포기한 게 남명진이 가졌던 권리다.

이제 화림은 큰 결정을 내릴 때, 전원의 의견을 듣고 결정한다.

회사의 이익에 반하거나 도덕적 문제가 있지 않은 이상, 다수결의 원칙을 따르기도 했다.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요. 비품 하나 제대로 사지 못하고, 연봉 동결은커녕 삭감까지 감행했으면서. 그렇게 온갖 노력을 다해 가며 지켰던 보물을 내주자 이겁니까?”

이사 중 하나가 이마에 핏대까지 세우며 말했다.

‘맞는 말이지.’

남명진은 속으로 동조하면서도 겉으로는 무심한 척 바라만 봤다.

“더군다나 우리 인재까지 뺏긴 마당입니다. 이게 맞습니까? 청기사를 잡은 거, 대단하지요. 그렇다고 먼저 고개부터 숙일 필요가 있을까요? 오히려 비굴해 보이지 않을까 걱정이군요.”

강태환 전무다.

실질적으로 이사진을 이끄는 머리.

불멸교 첩자였던 마윤 상무 덕분에 체면이 나락까지 떨어졌던 사람이다.

그 마윤 상무 사건도 참 아팠다.

그때는 유광익이 자신의 손바닥 안에서 노니는 원숭이 새끼인 줄 알았는데.

괜찮다. 지난 일이다. 그 일로 말미암아 보릿고갤 지나며 화합의 장이 열리지 않았나.

전화위복이란 이럴 때 쓰는 말이다.

NS에서 공식적으로 요청이 왔었다.

홍염의 비늘을 내어달란 말이었다.

화림이 사유 재산으로, 아더 사이드의 보석을 소유하고 있다는 건 아는 사람은 다 안다.

그럼에도, 정부도 쉽게 요청하지 못하는 보물이다.

보물을 구한 것도 지킨 것도, 남명진의 화림이었으니까.

복잡한 정치적 관계가 섞이기도 했다.

올드 포스, 세계 정부 연합에 소속된 한국 정부다.

때론 그 올드 포스가 공익을 이유로 이런저런 걸 요구하기도 한다.

그럴 때 자국 기업의 사유 재산이라는 핑계로 뺏을 명분이 없다는 말로 둘러대기도 했다.

그런데도 원하면 그에 상응하는 대가 그 이상을 받을 수도 있었고.

홍염의 비늘이란 건 그런 물건이었다.

의견이 안 된다는 쪽으로 굽어질 때쯤이다.

“줍시다. 필요하다면 줘야지.”

“……뭐?”

남명진은 포커페이스를 유지했다. 무표정이 무너지진 않았지만, 황당함에 외마디 물음이 나오고 말았다.

“이게 그렇게 놀랄 일입니까?”

말을 꺼낸 작자가 이어 말한다.

‘당신이 그러니까 놀라지.’

속으로 말을 곱씹은 남명진은 하고 싶은 말을 꾹 눌러 참았다.

“왜 줘야 한다는 겁니까?”

강태환이 나섰다.

그 말에 박영돈은 굳은 표정으로 좌중을 둘러봤다.

반쯤은 내줘야 한다고 생각하고 반쯤은 이게 무슨 짓인가 싶은 얼굴이다.

‘필요하다잖아.’

박영돈은 일전 청기사 사건 당시, 아들을 잃을 뻔했다.

그 당시 그는 속으로 소망했다.

아들을 구해 주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겠다고 빌었다.

소원은 이루어졌다.

아들은 검은 호랑이에게 구함을 받았다.

사람은 때론 작은 일에도 변하곤 한다. 박영돈은 아들이 멀쩡히 살아 있는 걸 본 순간, 꽉 껴안았다.

청기사 사건 이후 그는 사람이 변했다. 새로운 사람으로 태어났다.

그동안 자신이 얼마나 편협했고 꼰대 같았는지 깨달았다.

‘기회가 된다면.’

이 은혜를 갚으리라.

그는 은혜를 되새겼다. 뼈에 새겼고 심장에 새겼다.

아들도 마찬가지였다.

“아버지, 퇴사하고 싶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냐?”

“저 NS에 가겠습니다.”

“진심이냐?”

“진심입니다.”

아들은 그 길로 화림을 나섰다. 박영돈은 말리지 않았다.

새삼 아들의 소중함을 깨달은 시간이었지만, 그는 그보다 중요한 걸 알았다.

품에 안은 새는 영원히 날 수 없다. 절벽에서 밀어야 날갯짓을 하는 법이다.

아들이 날갯짓을 시작했다.

웨이팅 박, 박대기는 그렇게 NS 신입으로 들어갔다.

지금쯤 핵심 인사가 되진 못했더라도 승승장구하고 있을 것이다.

엘리트 소리를 듣던 아이다.

아들은 세최특 밑에서 수련을 쌓는다.

그럼 자신은?

화림의 이사진을 포기하고 가진 않을 것이다.

대신 이곳에서 할 수 있는 한 무엇이든지 할 생각이었다.

다만, 이제까지 세최특에게 자신이 필요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생긴 일이다.

“세최특이 부탁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들어 줘야죠.”

“부탁이라고 했으니 들어 줘야 한다?”

“그렇지요. 청기사 슬레이어의 부탁이라니, 들어 줘야 합니다.”

불멸자답게 큰 소리는 내지 않지만, 박영돈의 말에는 영혼이 깃들어 있었다.

반드시 그래야 한다고 믿는 광신도와 같았다.

“대가로 나중에 비슷한 보석 하나 구해 준다는 걸 달랑 말로만 한 건 알고 계시고?”

강태환은 비아냥거릴 의도가 없었다. 하지만 저리 무작정 들어 줘야 한다는 말을 듣자니, 기가 찼다.

자연히 말투가 꼬였다.

“네, 들었습니다.”

박영돈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래 대상이 그저 한마디 약속뿐인데, 그걸 우리가 들어 줘야 한다?”

그 말에 박영돈은 아예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열변을 토했다. 불멸자답게 조용한 어조다. 하지만 영혼을 담은 스피치다.

“그가 누구입니까? 화림 출신이라고 해서 그를 얕보고 있는 건 아닙니까? 세최특, 세계 최강의 특수종이란 별명이 붙은 혼혈입니다. 그게 끝입니까? 청기사를 잡아, 네임드 슬레이어란 이명이 붙은 위인입니다. 그런 사람의 부탁입니다. 그런 사람의 말입니다. 그 무게가 어떻게 가볍겠습니까? 들어 줘야 합니다. 홍염의 비늘을 대가로 아무것도 안 준다? 그럼 더 좋은 겁니다. 평생 마음의 빚을 하나 지는 거니까요. 이미 사장님과 관계가 있다고 들었는데, 이 기회로 좋은 관계로 나아가면 더 좋은 거 아니겠습니까? 제 말이 틀립니까?”

마음을 다해 도와야 한다고 생각하니, 박영돈은 절로 입이 열렸다. 열변이었다.

남명진이 보니, 몇 명이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묘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뜯어서 보면 다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마음을 움직이는 열변이다.’

자리에서 일어난 박영돈은 손짓까지 섞어 가며 말했다.

평소에 세최특이라면 반쯤 사기꾼 취급을 하던 작자가 이리 나서니 놀랍다.

‘아들을 구해 줬다고 했던가?’

그래서 그 아들이 NS로 간 것도 안다.

그 순간이 얼마나 극적이었기에 저 사람을 저리 만들었을까.

열변의 끝에 믿습니까만 붙이면 광신도나 다름없었다.

‘줘도 되지.’

홍염의 비늘은 귀한 물건이지만, 남명진은 냉정했다.

지금의 유광익에게는 뭐든 줄 만했다.

정부의 요청은 무시하지만, NS를 통해 들어온 광익의 공식 요청은 무시할 수 없는 법이다.

‘공식 요청이라고 하기에는 좀 가볍긴 했지만.’

자신에게 직접 온 연락이다.

“홍염의 비늘 좀 주세요. 나중에 비슷한 거 생기면 드릴게.”

염병, 이걸 부탁이라고 할 수 있나?

남명진은 정신이 흐트러지는 걸 붙잡았다.

정신 줄을 놓고 상대 페이스에 말리면 끝장이다.

그는 정중하게 답변했다.

이사진과 상의해 보고 답변하겠다.

그 상의의 끝이 이거다.

“줘야 합니다. 반드시. 그는 세최특입니다.”

박영돈의 열변.

남 사장은 결정했다. 줘도 되고 안 줘도 된다. 두 가지 경우, 전부 이득이 되는 쪽으로 생각해 둔 게 있었다.

주기로 마음먹은 건, 박영돈의 열변 덕분이다. 그 덕분에 이사진 전체 의견이 그리 기울었다.

광익이 청기사 사건 당시 구했던 박대기, 그의 아버지 박영돈.

선의는 때론 생각할 수 없는 곳에서 돌아오는 법이었다.

* * *

“준다고요? 그냥? 뭐 바라는 거 없이?”

“응. 그냥 준다네.”

막 다과 타임을 시작할 참에 온 연락이었다.

테이블에 놓인 걸 일견하고 난 물었다.

“왜요?”

화림에 홍염의 비늘을 요청했다.

정부를 통해서 말했는데 씨도 안 먹혔다.

그렇다고 훔치자니, 어찌나 잘 숨겨 놨는지 찾기도 어렵다.

위치를 알아내는 게 급선무라 생각해 팬더 형과 상의 중이었는데, 화림에서 홍염의 비늘을 그냥 내주겠단다.

“남 사장님 노망났어요? 이제 갈 때가 됐나.”

“이사진이 넘겨주자고 강력히 어필했다는데?”

화림의 이사진이?

나랑 사이좋은 사람이 있던가?

곰곰이 머리를 굴려 봤지만, 대답은 ‘아니오’다.

그나마 아는 얼굴이라면 김동철 이사 정도가 전부인데.

남 사장도 알긴 알지만, 그 사람은 정당한 대가 없이 뭘 내줄 위인이 아니니까.

그런데 그냥 준다?

“나중에 비슷한 거 하나 구해 준다는 내 말을 믿고요?”

“이름값이라는 거지. 네 이름 석 자를 걸고 한 말이니, 무게가 달라졌다는 의미도 될 테고.”

팬더 형이 말했다. 팬더 형은 상황 파악이 빨랐다.

놀라는 것에서 끝나지 않고 그 일의 앞뒤를 따진다. 우미호나 이 형이나 참 똑똑하다.

그렇게 치면 요한 형도 이런 타입이긴 하지.

“그래도 그냥 내줄 줄은 몰랐는데.”

“그건 나도 그래.”

딱, 딱, 딱.

팬더 형이 티스푼으로 세라믹 테이블이 위를 두드렸다. 재촉하는 손짓이다.

일의 앞뒤를 파악하려다가 관뒀다.

준다면 좋은 거지, 뭐.

난 머리 대신 손을 썼다. 들고 있던 스푼을 들이밀었다. 팬더 형도 나와 같았다.

푹.

부드러운 크림, 그 밑에 깔린 스펀지 형태의 빵과 안쪽을 속속들이 채운 딸기 과육, 크림 위에 얹어진 딸기까지 한 스푼에 챘다.

훈련은 많은 에너지를 소비한다. 고로 난 평소에 많이 먹어 둬야 했다.

기왕 먹는 거 맛있는 거 먹으면 얼마나 좋나.

지금은 봄.

봄의 딸기는 진리다. 특히나 제대로 된 제과점에서 만든 딸기 생크림 케이크는 진리 그 이상이다.

스푼을 입 안에 넣었다.

부드러운 크림이 달곰한 맛의 폭죽을 터트리고 그 뒤를 딸기가 따라와 상큼함을 얹는다.

크림, 딸기, 빵의 조화다.

이건 완벽한 합치다.

변신족의 비기, 마음과 몸의 합치보다 더한 합치.

“맛있다. 너무 맛있다.”

팬더 형이 감탄했다.

“잊지 말아요. 형만 부른 거.”

한 스푼 더 뜨며 말하자, 팬더 형이 고개를 끄덕였다.

불멸자는 대부분 미식가다.

미각이 예민하기에 어쩔 수 없다.

그 와중에 밋밋한 미각으로 살아가는 놈도 있다지만.

하여간 이 형도 반은 불멸자, 입맛이 까다로운 편인데.

이 빵집 케이크는 하나 사려면 2시간은 줄을 서야 하는 곳이었다.

고로 나눠 먹을 양이 아니다.

“크으, 흐으.”

팬더 형이 신음까지 흘리며 처먹는다.

이 형 장가는 가려나.

외모는 멀쩡한 방귀태도 저리 노력하는데, 이렇게 살다 보면 우리 팬더 형 평생 솔로로 사는 거 아닐까?

“음, 너무 좋아.”

그리 뚝딱 7호 크기 케이크를 둘이서 해치운 뒤다.

입가에 남은 크림을 손가락으로 삭 밀어 입에 넣은 팬더 형이 말했다.

“준비는 끝났다.”

“네, 좋아요.”

“괜찮으려나 모르겠네, 그쪽도 만만찮게 저력 있는 곳이라는 거 알지?”

“문제없어요.”

난 단정했다.

지금 말하는 건, 우미호 동생 우지호 살리기 프로젝트 일환에 섞인 실전을 위한 얘기였다.

죽어라 훈련만 하면 뭐하나, 실전도 치러야지.

그 실전을 위해 난 암시장을 치기로 했다.

“스케일 죽여 주긴 하네.”

팬더 형이 접시에 남은 크림을 포크로 긁어 내며 말했다.

“물건 하나 구하려고 암시장을 뒤집어엎자니.”

“겸사겸사하는 거죠.”

내가 말한 실전 코스는 한국에 있는 암시장 잡아먹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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