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6. 가능성은 누구한테나 있다.
혜민이 양쪽 손을 복잡하게 놀린다. 손가락이 잔상을 그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 손가락에 따라 빛의 잔상이 생겨나기도 했다. 수인이라 불리는 주문을 만들어 내는 마법사의 손짓이었다.
허공에 손가락을 이리저리 꺾고 모양을 만든다.
그걸 보며 난 툭 하고 땅을 차 앞으로 나아갔다.
혜민이 그런 날 보더니 큰 눈을 깜빡거리며 손을 멈췄다.
소음도 기척도 없지만, 난 내가 뭔가를 피했다는 건 알았다.
혜민의 수작도 알아챘고.
겉으로 계속 손가락을 꿈틀거리는 척을 했지만, 정작 혜민이가 발동한 주문은 진즉에 출발했다.
그게 느껴졌다.
“뭐였어?”
코를 훔치며 물으니.
“저주 비슷한 거.”
혜민이 답했다.
그리고는 슬쩍 손을 내리더니 등 뒤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여전히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뭔가 내 코를 노리고 날아오는 게 느껴지긴 했다.
고개를 꺾어 피했다.
만약 지금 날아온 게 칼이나 날붙이였다면 종이 몇 장 차이로 피했다고 할 수 있었다.
물론 날아온 건 날붙이가 아니라 주문이었다.
기척도 없고 육안으로 구별도 되지 않는다. 그저 육감의 그물에 걸린 것뿐이다.
“너 뭐야?”
혜민이가 꽤 놀랐나 보다.
서방 대신 너란다. 오빠도 아니고 너란다.
“너 아니고 대표님.”
꺾은 고개를 본래 자리로 돌리며 내가 말했다.
“보여?”
“대강 느낌으로?”
“대강이 아니잖아.”
혜민이 다시 뒤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렸다. 또 코를 노리고 뭐가 날아온다.
고개를 숙여 피했다.
“지금 거는 주문은 뭐냐?”
호기심에 물으니.
“코막힘 저주.”
그딴 주문도 있는 거냐?
고개를 비딱하게 든 채로 혜민이를 바라보자, 얘가 당당하게 가슴을 펴며 말했다.
“비염 없지? 그거 걸려 보면 알 거야. 지금 건 저주가 얼마나 최악의 저주인지.”
그래. 살에서 벌레가 튀어나오는 것보다 코 막히는 게 더 괴롭겠지, 그렇겠지.
뭐, 훈련 중에 최악의 저주를 걸 순 없는 노릇이긴 하니까 적절한 수준이었다.
“주문길이 보이는 거야.”
혜민이 단정 지어 말했다.
주문길이 뭔지 대강 설명도 들었다.
주문의 타이밍이나 그딴 걸 보는 거라고.
이른 새벽에 불렀더니, 데이트냐고 되묻던 혜민이는 더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날 향해 물었다.
“어떻게 그게 되지?”
난 솔직하게 답했다.
“몰라.”
원리 따위 알게 뭐람.
그냥 느껴진다. 눈으로 보면 보이고 귀로 들으면 들리는 것처럼.
육감이 멋대로 주문 기척을 읽어 낸다.
이거 기남이도 되려나.
걔도 순혈 정가의 엘리트 불멸자니까, 되지 않으려나?
만약 안 되면 걔는 주문쟁이 앞에서는 쪽도 못 쓰고 당한다는 건가?
생각의 와중 혜민의 목소리가 계속 들렸다.
혜민이도 주문길이 보이는 특수종은 처음 본다고 했다.
그리고 주문쟁이가 마음 놓고 덤빈 이유가 상대가 마법에 조예가 조금도 없다는 걸 알아서 그랬을 거라고도 했다.
“역관광이지.”
혜민이 말을 끝맺었다.
“코막힘 저주 말고 다른 저주는 뭐 있어?”
난 주머니에서 에너지바를 꺼내 부러뜨려 반을 입 안에 넣고 말했다.
“스크롤로 만든 건 비염 저주랑 발기 부전, 옻 독까지 세 가지야.”
우둑우둑 단숨에 에너지바 반을 씹어 꿀꺽 삼킨 뒤, 물었다.
“그건 누가 만든 거니?”
“엄마.”
혜민이 어머니, 생각보다 잔인한 사람이구나.
발기 부전 저주라니.
그런 건 왜 만드는데?
내 표정을 읽었는지 혜민이 무덤덤하게 말했다.
“가끔 성희롱하는 새끼들한테 걸면 좋아. 기한은 끽해야 일주일 내외인데 뭐. 독해 봐야 한 달이고.”
일주일 동안 고자가 되는 저주다. 운 나쁘면 한 달이고.
생각만 해도 싫잖아.
혜민이와 얘기를 나누는 사이다.
뒤쪽에서 기척을 죽인 불멸자 하나가 달려들었다.
뛰어난 실력이다.
근접할 때까지 제대로 기척을 읽을 수 없을 정도로.
주문을 보는 눈과 기척을 느끼는 감각은 또 별개라는 생각이 들었다.
슬쩍 몸을 틀었다. 날 노린 나이프 칼날이 허공을 찔렀다.
몸을 틀은 채로 팔꿈치를 횡으로 휘두르며 찍었다.
빡.
습격한 놈이 왼팔을 제 얼굴에 바짝 붙이듯 들어 가드 했다.
왼팔에 보호 장구 따위를 꼈다. 손등과 팔꿈치 어림까지 덮는 단단한 금속 계열이다.
보호 장구가 일차로 힘을 흡수하고 여력은 적당히 흘린 상대가 나이프를 고쳐 잡은 뒤 가슴팍을 찍는다.
난 그걸 보며 상대의 발목을 걷어차며 날아오는 나이프의 면을 손바닥으로 때렸다.
묘기에 가까운 동작이지만, 이제 이건 묘기 축에도 속하지 못했다.
특히나 변신족의 육신에 훈련을 더한 몸이니, 이 정도야 뭐.
날 습격한 건 기남이었다.
기남은 발목이 내 발끝에 걸렸다.
그거로 끝이었다.
틱.
완력의 차이가 역력하다. 변신족의 괴력은 스치기만 해도 아프다.
기남은 몸의 균형이 흔들렸고.
난 단숨에 기남의 뒤로 돌아가 목을 팔뚝으로 감았다.
오랜만에 넥광익 모드다. 한 손에는 에너지바 반을 든 채였다.
“오늘은 왜 덤비냐?”
기남이 이 새끼는 나만 보면 삼시 세끼 챙겨 먹듯 덤볐다. 아침 훈련에서 한 번, 점심 훈련에서 한 번, 퇴근 전에 한 번.
“뒤통수가 재수 없게 생겨서.”
그리고 번번이 이렇게 이유를 만들어 온다.
그게 더 황당하긴 했다.
시발 팀장이 날 상대했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나도 한때 화림에서 아침마다 팀장한테 시비를 걸어 덤빈 적이 있었다.
기남이 매번 덤빌 때마다 나도 그에 상응하는 대가로 보답하는데도 이런다.
기절시킨 뒤, 회사 앞 출입구에 눕혀둔다거나.
양쪽 눈을 밤탱이로 만들어 팬더 형 동생으로 만들어 준다거나.
앞니 두 개만 딱 부러뜨려 준다거나.
그렇게 해도 이 새끼는 끊임없이 덤볐다.
기남이는 마조히스트였다.
발가벗겨 인포메이션 센터에 둔 적도 있는데 아랑곳하지 않았다.
인포 누나 말을 들어 보니, 창피한 척은커녕 얼굴색 하나 안 변하고 유유히 떠났다고 한다.
이 새끼는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그래도 기왕 덤빈 거, 얘도 주문길이 보이나 실험이나 해 보고 싶었기에.
“혜민아 그 저주, 두 번째 것 일주일짜리로 부탁한다.”
“굳이?”
혜민이 되물었다.
“굳이.”
“이건 변태 새끼들한테나 쓰는 건데.”
그 변태가 이 새끼다. 맞아도 맞아도 자꾸 덤빈다고.
혜민이가 나한테 잡힌 기남이를 향해 포스트잇을 찢으며 수인을 맺는다.
난 그 틈에 기남이를 놓고 빠졌다.
주문의 흐름이 보인다. 보이지 않는 저주가 내려앉는다.
오늘도 실패했음에도 아무렇지도 않은지, 기남은 제 목을 쓰다듬다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뭐지?”
차갑디차가운 눈으로 기남이 묻는다.
그 시선이 나한테 향했다가 혜민이한테로 돌아갔다.
“발기 부전 저주.”
차갑게 노려보든 말든, 혜민이는 할 말을 했다.
애초에 누구한테도 기로 밀리는 애가 아니다, 쟤가.
그 말에 기남의 미간을 찡그렸다.
그러더니 날 향해 시선을 돌리고는 다시 입을 연다.
“어차피 필요 없어.”
“……이 미친놈.”
그게 필요 없어? 완전 미친놈 아니야.
“지금 나한테 필요한 건 너다.”
“오해할 소리 좀 하지 마라. 미친 개나리야.”
기남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그런 의미가 아니다.”
“내 라이벌이야? 아니지?”
혜민이 옆에서 한술 더 뜬다.
“아니다. 둘 다 아니다. 야, 쌈닭 기남아, 너 뭐 못 느꼈냐? 그 고자 저주 걸리기 전에?”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난 내 훈련에 전념하는 중이다.
다만, 이런 생각이 들긴 했다.
과연 주문길을 보는 게 나만 가능한 건가 하는 그런 거.
아버지의 피닉스 팀원을 보면 꼭 그런 것만은 아닌 것 같거든.
“가능성이라는 건 누구한테나 있는 거다.”
아버지가 하신 말씀이 떠올랐다.
그럼 기남이도 가능하지 않을까?
“정기남 당분간 대련 금지.”
꿈틀.
그 말에 기남의 입술 끝이 살짝 떨렸다.
“주문길 보고 다시 와.”
통보했다.
“서방 대표님아, 그게 마음처럼 쉽게 되는 일이 아닌데요.”
혜민이 고개를 저으며 끼어들었다.
“너도 당분간 훈련에 전념하도록.”
“응?”
“마조 기남이와 동수 수준까지 몸 다루는 법을 익혀.”
생각해 보니 그렇다. 회사 대표가 이리 성장통을 겪으며 훈련에 전념하는데, 사원이란 것들은 뭘 한단 말인가.
도저히 그냥 두고 볼 수 없는 노릇이다.
“무슨 미친 소리야?”
혜민이 반항했다.
“이기면 데이트, 저녁 식사는 전망 좋은 레스토랑.”
“이 쭉정이를 때려눕히면 된다는 거지?”
혜민이 허리춤에 꽂은 스크롤 포스트잇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네 주변에는 또라이만 있구나.”
기남과 혜민이 서로를 노려본다.
퍽 정겨운 광경이었다.
또라이 순위가 있다면 1, 2위를 다투는 둘이 저리 서로를 향해 살의를 불태우니.
“싸워라, 이겨라, 이기는 편 우리 편.”
응원 한 판 날리고 자리를 비켜 줬다.
난 둘의 성격은 믿지 못하지만, 능력은 믿었다.
저주라 불릴 정도로 재능을 타고난 스펠 유저인 혜민이.
쟤한테 필요한 건 기본 전투 능력이다.
격투와 무기 다루는 기술 같은 건데.
그건 이 회사 통틀어 기남이만 한 애가 없을걸?
쟤가 저래 봬도 광학 병기까지 다루는 불멸자다.
광학 병기는 일반 기어보다 다루기가 몇 배는 까다롭다.
붙어 지내다 보면 자연히 배우는 것들이 생길 것이다.
그럼 기남이가 얻을 건 무엇인가.
정기남의 문제점은 제 부족한 부분을 모른다는 거다.
저 개나리는 격투 능력, 무기술 따위에 시간을 쏟아붓고 제 감각을 더 갈고 닦을 생각을 하지 않는다.
주문길을 읽을 수 있다면.
만약 기남이가 그걸 한다면.
더 나아진다. 육감의 눈이라는 게 단순히 주문길 따위를 읽는 것에 그치진 않을 것이므로.
가능성은 누구한테나 있다.
아버지가 한 말이 머릿속을 떠돈다.
회사에 소속된 이들은 내 사람이다.
밖에서 맞고 다니게 둘 순 없다.
절대 내가 지옥 훈련한다고 남을 시키려고 하는 게 아니다.
어머니를 찾았다.
훈련장 한쪽에 곱게 앉아서 뜨개질 중이셨다.
그 옆에서 마리도 함께였고.
넉넉한 반팔 티셔츠 밖으로 드러난 어머니의 이두 근육과 전완근이 꿈틀거렸다.
뜨개질하려고 만든 근육이 아닐 건데.
“한가하신가 봐요.”
가끔 어머니는 서두 없이 결론을 툭 뱉는 이야기 방식을 선호하신다.
“넌 불멸자의 피로 그걸 채웠지만, 일반 변신족은 섬세함이 필요하단다.”
고로 뜨개질이 훈련이란 거다.
실제로 그래 보였다.
마리는 땀을 뚝뚝 흘리며 손을 놀리고 있었으니.
뜨개질이란 게 본래 저렇게 치열한 취미였나.
“아다만티움 바늘이다. 푸름이가 만들어 주더라.”
어머니가 뜨개질바늘을 놀리며 말했다.
자세히 보니 바늘이 검다.
묵직해 보이기도 했다.
이제 보니 마리는 인듀어까지 입었다.
고로 이건 훈련이 맞았다. 뜨개질 훈련이었다.
“그래서 뭐?”
어머니가 고개를 숙인 채 물었다.
“네?”
“할 말 있거나 시킬 거 있어서 온 거 아니니?”
변신족인데도 눈치가 귀신이다.
엄마라 그런 건가.
엄마의 눈에 아들의 속내 따위는 금세 읽힌다는 걸지도 모른다.
훈련 코스에 포커페이스 훈련도 좀 섞어 넣어야겠다.
“이동훈이요.”
“그래.”
짧은 대화 속 모든 게 담겼으니.
모자의 마음은 통했다.
통나무 과외 선생이 없으니, 어머니의 갱생 마녀가 힘을 써 줬으면 했다.
이동훈을 비롯한 요한, 귀태, 정직, 로즈 등 전투 가용 인원 모두의 실력을 업그레이드해 주길 바랐다.
어머니 실력이라면 가능했다.
청기사와 호각을 다툰 난 청기사 슬레이어란 이름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가 어머니와 싸워 압도적으로 이길 수 있냐 묻는다면 아직도 모르겠다고 답할 터였다.
실제로 내가 청기사에게 형편없이 밀렸으면 어머니가 나섰을 거다.
아버지도 마찬가지였다.
새로이 피닉스팀을 만나며 새삼 내 부모님이 이 판에서 끝내주게 잘나가는 사람들이라는 걸 깨달았다.
“피닉스팀한테 훈련받는다고 하니까 호응이가 선물을 보내 줬다.”
어머니가 바늘을 정리했다. 쇠뿔도 단김에 빼는 거라는 건 어머니가 좋아하는 속담이다.
이대로 팬더 형 멱살을 쥐러 갈 참으로 보였다.
“선물이요?”
일어나는 어머니를 보며 나도 걸음을 맞췄다.
“화랑단.”
난 피닉스팀을 달달 볶으며 내 실력 향상에 힘을 들이는 중이었다.
그리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비밀이 없는 사이고.
아버지는 말씀하셨을 거다.
최근에 내 주변에 일어난 일을.
어머니는 그걸 듣고 생각했을 거다.
불멸자로서의 능력만 중요할까 하는.
갱생 마녀로서의 경험이 현재 상황을 끌어냈을 터.
그 결론이 이거였다.
“조카.”
삼촌 강호응을 필두로 화랑단 에이스가 왔다.
총원 다섯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