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3. 돈
혜민이 모녀는 회사에 입사하기로 했다.
“우리 딸 책임질 거지?”
“네, 회사 대표로서 사원의 안전을 위해서. 네, 그럴 겁니다.”
친절한 설명을 덧붙였다.
안 그러면 이상한 소문을 낼 것 같으니.
그 말에 혜민의 엄마가 웃었다. 시원한 느낌의 미소였다.
서울로 돌아와 곧장 잠이나 좀 잘 요량으로 방으로 향하는데, 사옥 앞에서 김근육 사원과 마주쳤다.
“저도 잡혀가면 구해 주시나요?”
그러더니 대뜸 이리 묻는다.
“잡혀갈 생각을 왜 하는데요?”
“아니요. 그냥 궁금해서.”
덩치는 어지간한 반달곰 뺨을 후리게 생겨서 왜 수줍어하는 포즈를 취하시는 건지.
이상하게 몸을 베베 꼬네.
그게 또 묘하게 어울리긴 하지만, 난 거듭 주변에 정상인이 없다는 생각만 든단 말입니다.
“저보다 알이 먼저 나서겠죠.”
주변에 듣는 사람이 없기에 속삭여 주니.
“알 새끼보다 전, 아니에요. 가 볼게요. 쉬세요.”
그리 돌아서는 김근육 씨는 청기사 레이드 때보다 나은 모습을 보여 주겠다며 훈련장으로 향했다.
사람은 이상하지만, 열심히 하는 모습은 보기 좋았다.
돌아온 집이다. 청기사 레이드 이후 안 쉬고 주문쟁이 뚝배기까지 깨고 왔으니, 좀 쉬고 볼 참이었다.
“대표님, 급한 방문이 있다고…….”
“쉴 겁니다. 메모 남겨요.”
비서 아저씨의 전화에 답하고 전화도 꺼 버렸다.
딱 반나절, 어떤 연락도 안 받고 휴식에 전념했다.
먹고 쉬고 놀고 먹고 자고, 다시 먹는다.
난 위장을 가득 채우는 시간을 즐겼다.
“아들, 오늘 좀 치네?”
어머니가 감탄할 정도로 먹었다.
딱히 에너지가 부족해서 그런 건 아니고.
훈련에 임하려면 평소에 에너지를 비축해 둬야 하는 법이니까.
컨디션은 딱 좋은 편이었다.
머릿속으로 어떻게 몸을 단련하고 훈련할 것인지, 되새기며 푹 자고 일어났을 때다.
“대표님, 손님이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사무실에 출근하자마자 비서 아저씨가 말했다. 오랜만에 봐서 그런지, 아저씨 안색이 부쩍 좋아 보였다.
“아저씨 뭐 좋은 일 있어요? 얼굴 좋네요.”
“여기서 일하는 것 자체가 좋은 일이죠. 애들이 아주 좋아합니다, 아빠가 NS에서 일한다고 하니. 손님이 정말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그래요?”
생각해 보니, 공식적으로 인포메이션 센터를 통해 연락이 오고 손님이 오는 건 처음이었다.
“애들 견학이라도 한번 오라고 해야겠네요.”
머릿속에 도는 생각과는 별개로 말했다.
“사인도 한 장 해 주시면 애들한테는 그게 보물이 될 겁니다.”
비서 아저씨가 말했다.
내 사인이 그 정도인가.
하긴, TV를 틀면 연신 청기사 슬레이어 특집 따위가 방영 중이다.
실제로 내가 출현한 건 아니고 이전에 출현했던 영상 자투리와 내 능력을 파헤치는 토론 따위다.
그조차도 나한테 다 우호적인 내용이고.
지금 세상에서 날 싫어하면 인간형 인베이더 소리를 듣는다는 우스갯소리도 나오는 판이었다.
비서 아저씨가 차와 다과를 준비한다고 나갔다.
누가 왔는지 안 물어봤네.
뭐, 물을 거 있나. 사람이 왔으면 만나면 되는 거지.
“올라오라고 했죠?”
바깥을 향해 물으니.
“네.”
우렁찬 비서 아저씨의 답이 돌아왔다. 활력이 넘치는 목소리다.
기다리는 사이 소파에 몸을 맡겼다.
푹신했다. 비싸고 좋은 거라고 하더니, 진짜 그러했다.
참 편한 소파다. 안락했다. 눈이 창밖으로 향했다.
창문을 통해 햇살이 스며들어 사무실 안을 비췄다.
따뜻한 질감이다.
위잉.
한쪽에서는 공기 청정기가 돌아가는 소리가 들렸다.
평화롭다.
청기사를 죽인 인류, 특히 한국은 축제 분위기였다.
삶을 생생하게 느끼는 순간이다.
위기와 아찔함에서 안도감을 느끼는 포인트다.
나도 지금을 즐겼다.
마법사를 상대하느라 놓친 여유를 만끽했다.
공기 청정기의 소음과 창가의 햇살을 배경 삼아 그리했다.
이대로 있다 보면 낮잠이 들 것 같았다. 초여름이 다가오는 중이다.
건물 안에 있는 온도 조절 장치가 자동으로 실내 온도를 적절하게 맞춘다. 습도도 마찬가지다.
편안했다.
한가로이 소파에 앉은 채로 눈을 반쯤 감았다.
곧 저 멀리 승강기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문이 열리는 소리도 함께다.
“대표님께 누구라고 소개해 드리면 됩니까?”
비서 아저씨.
“누구인지 말 안 했습니까?”
영어다. 처음 듣는 목소리다. 꽤 듣기 좋은 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동훈 이사라는 사람한테 말했습니다.”
또 영어다.
비서 아저씨는 유능했다. 영어 대화를 알아듣고 대응했다.
“네, 이동훈 이사님이 보증한다고 했습니다만, 딱히 누구라고 말은 안 해 주시더군요.”
팬더 형 일 좀 똑바로 하지.
비서 아저씨 곤란하게 왜 그러냐고.
“직접 소개해도 되겠습니까?”
톤이 좋은 목소리가 말했다.
비서 아저씨가 주춤한다.
청기사 레이드 이후, 감각이 더 세밀해진 것 같다. 눈을 감았고 딱히 청각에 집중하지 않았는데도 상대방의 모습과 움직임 따위가 알아서 머릿속에 들어왔다.
이건 무슨 조화지.
난 원리를 금세 깨달았다.
정신의 이완.
이완된 신경이 오감을 통해 들어오는 모든 정보를 더 선명하게 만드는 거다.
여유가 만드는 조화였다.
따각, 따각.
가죽을 여러 번 겹쳐 만든 구두 굽 소리가 점점 커졌다.
“……깰 때까지 기다리도록 하죠.”
내 바로 옆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난 눈을 떴다.
“안 자요.”
금발의 푸른 눈, 덩치는 꽤 큰 편이었다.
그 바로 옆, 특수종이다.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단련된 몸이다.
변신족임이 분명했다.
적의는 안 보이지만, 날 자신의 공격 범위 안에 두고 있다.
금발의 푸른 눈을 지키는 사람이 이 변신족 하나만은 아니었다.
둘이 더 있었다.
이쪽은 불멸이다. 순혈 불멸자의 특징이 여실한 얼굴이다.
미치도록 잘생겼다는 말이었다.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보면 감탄이 나올 정도의 미모다.
정기남 서양 버전이다.
남자 하나 여자 하나.
둘 다 검은 정장에 흰 셔츠.
변신족의 복장도 마찬가지다. 안쪽에 방검방탄복으로 보이는 슈트를 입어서 몸이 조금 두꺼워 보였다.
모든 정보를 한눈에 넣고 정리, 상대를 보며 난 고개를 갸웃했다.
“맞아요?”
“뭐가 말입니까?”
변신족 남자가 통역을 겸했다.
머리가 검은 걸 보니, 한국계 미국인인 듯하다.
“반나절 기다렸다고 들었는데, 미합중국 대통령이 그리 한가한 자리인가 싶어서요.”
난 궁둥이를 떼고 일어났다.
“……관찰력이 남다르군요.”
미합중국 대통령이 답했다.
올드 포스, 세계 정부 연합의 가장 큰 세력은 어디인가.
당연하게도 미국이었다.
특수종의 질과 양도 압도적일뿐더러.
아더 사이드로 갈 수 있는 통로인 화이트홀도 가장 많이 확보했다.
군사력, 과학 발전 정도 등 모든 게 우월한 나라.
즉, 올드 포스의 수장이다.
“처음 뵙겠습니다. 콜 레이너입니다.”
미합중국 대통령이 어색하게 고개를 숙였다.
한국식 인사였다.
“팬입니다.”
그리고 한마디 덧붙인다.
올드 포스의 수장, 현 특수종 시대를 이끄는 왕이라 해도 무방할 사람이 하는 말이다.
“제 팬이요?”
“네, 청기사 슬레이어의 팬입니다.”
생긋 웃으며 대통령이 말했다.
“일단 앉으시죠.”
찾아온 손님을 멀뚱히 세워 놓을 순 없는 노릇이었다.
다과 앞, 마주 앉은 대통령 뒤로 호위가 나란히 섰다.
변신족 친구만 통역 겸 옆에 앉았다.
“건강해 보이는군요.”
대통령이 내 얼굴을 빤히 보며 물었다.
관찰하는 시선은 아니었다. 반듯한 인상의 사람이었다.
“잘 먹고 잘 쉬었거든요.”
“주문 사냥꾼과 마찰이 하루가 채 안 된 거로 아는데요.”
정보가 빠르기도 하지. 이미 알 건 다 알고 왔네.
“네, 진짜 많이 먹고 푹 쉬었거든요.”
진심이다.
“그렇군요.”
여전히 웃는 낯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난 이 상황이 퍽 어색했다.
짧은 침묵 뒤, 대통령이 말을 이었다.
“오늘 날씨가 참 좋군요. 햇볕이 따사롭습니다.”
“네, 그렇죠.”
그 따사로운 햇볕에 몸을 맡기고 낮잠이나 자고 싶었다.
딱히 중요한 얘기는 없었다.
결혼은 했냐고 묻기에 오랜만에 내 이상형 얘기를 꺼냈고.
그걸 들은 대통령은 껄껄 웃었다.
“욕심이 크군요.”
“제가 이상형 쪽에서는 양보를 못 하는 타입이라서.”
야구 좋아하냐고 묻기에 딱히 챙겨 보지 않는다고 하니, 그럼 스포츠는 관심 없냐고 묻는다. 난 일이 바빠 챙겨 보는 편은 아니라고 답했다.
먹는 걸 즐기는 것 같은데 언제 식사 한번 하자고 한다.
기회가 되면 미국에 놀러 오란 말도 하고.
난 대강대강 넘어갔다.
올드포스의 수장이자, 미합중국 대통령.
권력의 정점에 이른 사람이긴 한데, 시답잖은 말만 주고받다 보니 그냥 지나가다 만난 아저씨 같기도 하고.
또 그런 것치고는 꽤 잘생긴 얼굴이기도 했다.
혼혈? 쿼터 불멸자쯤은 되는 걸까.
보는 것만으로는 알기 어려웠다.
몸 안에 뭘 이렇게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지.
주문 냄새도 나고, 사이오닉 냄새도 난다.
이런저런 방호 기어가 대충 여덟 개는 넘는 것 같았다.
하나하나가 엄청 비싼 거겠지?
하여간 이 방호 기어 덕분에 기세를 읽기 힘들었다.
“제 개인 연락처입니다. 필요하면 연락하세요.”
대통령이 대뜸 명함 비슷한 걸 꺼냈다.
전화번호만 달랑 적혀 있는 은빛 금속 카드다.
“미국 직구로 운동화 살 때 부탁해도 되나요?”
반사적으로 농담을 던지니, 또 껄껄 웃는다.
“얼마든지.”
쿨하다. 쿨내가 풀풀 풍긴다.
미국에서 온 권력자 아저씨는 영양가 없는 얘기만 잔뜩 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할 일이 많은 건 이럴 때 슬프군요. 기회가 되면 또 놀러 와도 되겠습니까?”
“네, 뭐, 저도 안 바쁘고 그러면.”
“네, 좋습니다.”
대통령 아저씨가 일어나 나가자, 호위가 줄줄이 그 뒤를 따랐다.
여자 불멸자 호위가 문을 열자, 대통령이 밖으로 나가다 말고 날 돌아보며 물었다.
“미스터 유는 꿈이 뭡니까?”
“세계 평화요.”
반사적으로 답했다.
뭐, 틀린 말은 아니다. 내 주변의 평화, 인베이더 없는 세상 따위가 내 꿈이니까.
이뤄질 수 없는 꿈이든, 이룰 수 있는 꿈이든, 내 안에는 대략 저런 종류의 소망이 있다.
“저랑 같군요. 그럼 더 빠르고 더 안전한 길이 있다면 그 길을 걷겠습니까?”
내가 아무리 생각 없이 굴고 있어도 이 말은 알아들었다.
미국으로 넘어올 생각은 없냐고 묻는 거잖아.
난 답했다.
“마음 내키면요.”
그 말에 대통령은 또 껄껄 웃었다.
“또 봅시다.”
그러곤 떠났다.
“후우.”
옆에서 비서 아저씨가 숨을 내쉬었다. 긴장했었나 보다.
난 왜 긴장이 안 되나.
그냥 덤덤했다.
얘기를 나누면서도 머릿속은 계속 청기사와의 싸움 복기와 훈련 스케줄만 가득했다.
나도 할 일이 많은 몸이란 말이지.
그럼 이제 훈련이나 하러 가 볼까.
“대표님, 다음 손님이 기다리십니다.”
“또요?”
“한국 대통령이십니다.”
이 양반들이 여기서 정상 회의라도 하기로 한 건가.
한국 대통령이 왔다.
표창장을 주러 왔단다.
청기사 소멸 작전에 일등 공신이라고 했다. 그 뒤 말을 덧붙이길.
“차기 대통령 생각 없습니까?”
약을 잘못 드신 건가, 드실 약을 안 드신 건가.
“없는데요.”
대통령은 무슨.
“아쉽군요. 그럼 국가안전정보국장은 어떻습니까?”
그런 직책도 있었나.
“별로요.”
“행안부 장관이란 타이틀도 잘 어울릴 것 같은데.”
“제가 아버지 위에 앉으라고요?”
“그건 좀 그런가.”
이 양반, 진짜 약 잘못 먹은 것 같은데.
혼자서 뭐라 뭐라 중얼거리더니, 자리에서 일어나 떠났다.
“유럽 연합에서…….”
비서 아저씨가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진짜 다 같이 손잡고 약을 드셨나.
올드 포스 연합에서 한 사람씩 다 들르기로 한 거야? 이게 맞아?
“좋아요. 들어오라고 해요.”
거절해도 상관없지만, 여기까지 온 수고가 있지 않나.
맞이했다.
유럽 연합의 수장이란 사람이 왔다.
은발의 푸른 눈, 초능 특수종이었다.
“선물입니다.”
비슷한 얘기가 오갔다.
청기사 죽여 줘서 고맙다. 그건 전 세계의 축복이자, 내 존재 자체가 축복이란 말도 했다.
선물도 줬다.
방호 기어였다. 스펠 기어의 일종이었고 소위 말하는 항마 기어, 즉 주문 방어 기어였다.
금액으로 치면 10억은 거뜬히 넘을 물건을 준 거다.
받았다. 준다는 물건을 거절할 이유는 또 뭔가.
이후 미국의 무슨 기업에서도 사람이 왔고.
중국, 일본에서도 사람이 왔고.
마지막으로는 단군 그룹 회장이 왔다.
그러니까 내 외할아버지다.
“손주, 오랜만에 안아 보자꾸나.”
그리 말하며 들어오셨다.
“네.”
안아 줬다. 할아버지는 화끈한 성격의 소유자다. 말을 돌리지 않았다.
“단군 그룹 자회사로 들어와라. 어떤 걸 원하든 모든 지원을 약속하마. 네 어머니도 당연히 복귀할 거고. 그룹 경영에 관심 있으면 후계도 너 해라.”
그룹이 줄 수 있는 건 다 주겠다고 하기에.
“전 자수성가할 겁니다.”
뻥 차 줬다.
굳이 뭐, 나 혼자서도 잘합니다.
“진짜?”
“네.”
“굳이?”
“네.”
“왜?”
“이쪽이 마음이 편하니까요.”
“으흠.”
외할아버지가 턱을 긁으며 날 빤히 바라봤다.
“회사 운영에 제일 중요한 게 뭔지 아나? 손자?”
“사람?”
그 말에 할아버지의 눈이 반달처럼 휘었다.
“땡.”
“그럼 뭔데요?”
“숙제다. 스스로 알아봐라.”
할아버지는 그 말을 남기곤 돌아섰고.
난 곰곰이 생각하다가 내 머리를 혹사할 일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동훈이 형이랑 우미호 불러 주세요.”
머리 좋은 사람을 둘이나 뽑아 놨는데, 굳이 내 머리를 왜 쓰나.
곧 둘이 내 사무실에 올라왔고.
“어디 쪽 지원받기로 했어?”
동훈이 형이 소파에 풀썩 앉으며 물었다.
“지원?”
난 소파 팔걸이에 비스듬히 궁둥이를 걸친 채 되물었다.
“아무것도 안 받기로 한 건 아니지?”
미호가 뒷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뭘?
“너, 우리가 먹여 살리는 입이 몇 개인지는 아냐?”
동훈이 형이 되물었고, 우미호는 미간을 찌푸렸다.
“여러 개.”
농담을 던졌다.
우미호의 미간 주름이 깊은 계곡이 되었다. 이마에 음영이 졌다.
“우리 돈 없어.”
우미호가 말했다.
NS, 내 뜻대로 세운 회사, 하고자 하는 일에 지원을 아끼지 않는 회사.
일각에서는 돈 먹는 하마라는 소리도 들리는 회사.
수익 창출 구조가 아직 완성되지 않았기에 듣는 소리이기도 했다.
“아차.”
난 이마를 치는 시늉을 했다.
그러자 동훈이 형과 우미호의 눈이 도끼눈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