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1. 재능은 때론 저주가 된다 (9)
상대가 당황한다. 보이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동시에 이해할 수도 있다.
내가 청기사를 상대했을 때 그랬으니까.
자신 있었다.
인류의 악몽이든, 뭐든, 잡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불멸과 변신, 두 개의 혈통을 이음으로 내가 다른 특수종과 궤가 다른 힘을 가졌음을 알았으니까.
노력도 있었다.
이제 네임드와 붙어 봐도 되지 않을까 했다.
그리 믿었기에 청기사와 싸운 거다.
그런데 결과는 어떤가.
사람들은 열광했고 환호를 내질렀다.
급기야 청기사 슬레이어란 별명까지 붙여 줬다.
그래서 좋나? 그게 만족스럽나?
아니, 난 만족할 수 없었다.
부족함을 느낀 전투다. 덕분에 갈망이 생겼다.
정체되진 않았지만, 여기서 더 뭘 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드는 참이었는데, 의문이 생기다가 쏙 들어갔다.
난 더 강해질 수 있다.
난 더 나아갈 수 있다.
청기사와의 전투 후, 그런 생각이 가득했다.
그런 와중에 생긴 일이 이 주문쟁이의 시비였고.
“선은 너희가 넘은 거다.”
나는 침묵을 깨며 발을 뗐다.
육감의 영역이 눈을 뜬 것처럼 주변을 관조한다.
처음 느껴 보는 거지만, 금세 익숙해졌다.
혜민이를 통해 주문 적응 훈련을 한 적이 있다. 꽤 난해했다.
마법이란 건, 주문이란 건, 타이밍을 읽기도 그렇다고 공격의 흐름이 보이는 것도 아니니까.
반쯤은 운, 나머지 반은 육감에 기대야 했다.
그나마 은연중에 느낌으로 알아채서 그 정도였다.
보통이라면 뭐가 날아오는지도 모르고 당하는 이들이 태반이리라.
지금은 조금 달랐다.
운에 기대지 않아도 느껴졌다.
난 주문의 발현을 느꼈고 피했으며 예상되는 지점을 향해 땅을 박차 위로 뛰었다.
투명화 주문 따위를 썼는지 보이진 않는다.
하지만 느껴지긴 했기에 손을 뻗었다.
새끼손가락에 뭔가가 걸렸고, 난 손가락 힘만으로 상대를 붙들었다.
“억!”
파삭.
비명과 함께 주문이 깨진다.
투명화가 깨진 상대의 모습이 보였다.
새끼손가락에 걸린 건 로브 자락이었고, 후드 로브에 목이 졸린 놈이 보였다.
난 새끼손가락에 힘을 주고 당기며 무릎을 치켜올렸다.
무릎 끝과 상대의 머리가 만났다.
뻑!
우드득.
한 방에 목이 부러졌다. 덜렁거리는 목이다. 눈빛이 흐려지더니, 초점을 잃는다. 즉사다. 난 목이 부러진 시신을 앞으로 던졌다.
날 향해 날아오던 무언가가 시신에 맞닿자, 허공에 보라색 빛무리가 터졌다.
주문은 보는 맛이 있었다.
허공을 수놓은 보랏빛이 사슬 형태로 변하더니 시신을 옭아맸다.
난 땅에 내려서기 전, 핸드 불릿 다섯 개를 더 던졌다.
퍼버버버버벙!
폭탄이라도 터진 것 같았다.
방호 주문과 핸드 불릿이 만나 허공에 파문이 연신 일어났다. 육각형의 방호막과 삼각형의 방호막이 허공을 수놓았다. 헥사곤 필드가 둘, 트라이앵글 필드가 하나다.
방호 주문에 금이 가더니 바사삭 깨졌다.
여전히 투명화를 유지하는지 모습이 보이진 않지만, 그게 문제가 될 수는 없었다.
“이 무슨!”
앳된 목소리가 외쳤다.
목소리에 놀람이 가득하다.
놀라긴 뭘 놀라나.
내 만족 여부를 떠나, 청기사 슬레이어란 이명을 뭐, 뒷돈이라도 찔러 주고 산 줄 알았나?
시간을 끌 필요가 없기에 난 다시 몸을 움직였다.
마법을, 주문을 상대함에 위기 따윈 없었다.
* * *
빌은 이 상황을 믿을 수 없었다.
마력은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은 특수종이다.
그런데 그 특수종이 마치 주문길이라도 보이는 듯 움직이지 않나.
마법사보다 잽싸고 유연한 몸뚱이가 주문을 번번이 피한다. 마치 마법사처럼 주문을 읽어낸다.
상대의 마력 패턴, 발현 타이밍을 읽어내는 수준이 그렇다.
마력 패턴, 발현 타이밍, 주문의 형태를 읽는 걸 곧 주문길을 읽는다고 말한다. 지금 상대가 하는 일이 그거였다.
마력이 개미 눈곱만큼도 없는 특수종이 말이다.
‘감으로?’
정답이었다. 광익은 순전히 감으로 그러는 중이었다.
앳된 목소리의 마법사, 빌은 아찔함을 느꼈다.
이럴 수가 있나?
아무리 날고 기는 특수종이라고 해도?
말이 안 된다.
어떤 변신족이, 어떤 불멸자가 이럴 수 있나!
당황은 곧 분노가 된다. 이해할 수 없는 현실은 받아들이기 어려운 법이다.
빌은 손을 꼬았다.
수인을 맺고 입술은 연신 달싹였다.
스치기만 해도 상대의 몸을 부패하게 하고 정신을 오염시키는 저주를 수 차례 퍼부었다.
쉽게 생각한 일이었다.
세최특이 와서 곤란한 상황이 돼도 몸을 빼는 건 쉽다고 생각했다.
물론 죽이면 더 좋은 거고.
하물며 모든 상황이 저 특수종을 잡도록 몰아쳤다.
나갈 길이 막혔고 세최특이란 놈은 연신 도발했다.
욕심이 가장 큰 문제였다.
청기사 슬레이어를 잡는 마법사라니.
그 이명이 어찌 탐나지 않을까.
마법의 위대함을 알리는 일이 됐을 것이다.
자신의 의도대로 됐다면, 그래 됐을 것이다.
세최특은 몸에 스펠 기어 하나도 걸치지 않았다.
주문에 대한 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는 거다. 빌의 선택지에 패배는 없었다.
이대로 도주에만 성공해도 성공이었으므로.
빌의 생각은 끝까지 이어지지 못했다.
당혹스러웠기에 그 생각이 논리적이지도 못했다.
“왜 이렇게 되는 거냐!”
빌이 외쳤다.
저주 주문을 탐닉하다 오히려 역으로 저주에 갇혀 영원히 어린 아이의 몸을 갖게 된 마법사 빌.
그는 소위 말하는 음지의 마법사 중 손에 꼽히는 재원이었다.
혜민이 당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는 거다.
퍽, 퍽!
소음이 들린다.
동료 둘이 피떡이 돼서 바닥에 널브러졌다.
부유 주문을 포기하고 내려온 빌의 앞에 세최특이 섰다.
팔을 뻗으면 닿을 거리다.
“더 안 해?”
세최특이 물었다.
빌은 그를 노려봤다. 형용할 수 없는 분노만 끓어올랐다.
그러다 불현듯 불멸교의 십이사도란 작자가 한 말이 생각났다.
“세 번째 눈을 뜬 불멸자가 있다면 주문길도 볼 수 있다. 그럼 마법사는 불멸자의 상대가 되지 못해. 불멸을 잡는 게 마법이라고? 어림도 없는 소리가 될 거다.”
‘세 번째 눈?’
그건 불멸교가 믿는 이론 중 하나였다.
극한까지 자신을 몰아붙인 불멸자는 세 번째 눈, 육감의 눈을 뜨게 된다는 설이 있다. 다만, 어디까지나 이야기에 가깝다고 생각했었는데.
“혜민이 어디 있냐고 물어보면 대답해 줄 거냐? 아, 안 해 주겠네.”
대답은커녕 입술도 떼지 않았는데 상대가 말했다.
자신의 속내가 읽히는 기분이 들었다.
생각과 별개로 빌은 마지막 주문을 발동하려 했다.
마력을 전신에 휘돌렸다.
반쯤은 정신이 나간 채로 한 짓이었다.
서걱.
섬뜩한 소리를 들은 빌은 주문이 실패했음을 깨달았다. 마력이 움직이지 않았다.
‘왜?’
당연했다. 목이 잘린 채로 뭘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그건 불멸자라도 할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 * *
상대가 하려는 일이 빤히 보이는 데 당하는 건 바보나 하는 짓이다.
흔히 말하는 텔레폰 펀치 같았다.
모션이 뻔히 보이는 주먹질.
이거에 맞으면 내 피가 운다.
불멸특수대 시절 받았던 훈련의 나날들이 무의미해진다.
변신족으로서 몸을 단련한 시간 또한 개똥이 되는 거다.
지금 상대의 마법이 텔레폰 펀치와 같으므로, 당연히 피했다.
보이는 걸 피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톡- 하고 바닥에 발을 디디며 섰다.
쓰러진 마법사 중 살아 있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끝났어?”
로즈의 목소리다. 여기에 개수작을 부렸던 주체가 사라졌다.
아무런 위협도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위협이 될 이들을 두 손으로 때려죽였다.
“넌 어째 걱정도 안 한 목소리냐?”
“청기사랑 그렇게 싸운 놈이 여기서 당한다고? 저기, 지들이 똑똑하다고 착각하는 머저리인 새끼들이나 그리 생각하겠지.”
로즈가 시신 중 하나를 눈으로 흘기며 말했다.
착각은 자유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는 바다.
애초에 위협이라고 생각했으면 이리 아무 생각 없이 덤비지도 않았다.
“다 죽이면 사람은 어떻게 찾게?”
로즈가 인상을 썼다.
난 곧바로 답했다.
“냄새로.”
난 개가 아니다. 하지만 몇 년을 붙어서 같이 다닌 사람의 냄새는 변신족의 후각에 각인되어 있다.
어지간한 탈취제로는 각인된 냄새의 흔적까지 지우진 못할 거다.
주문으로 숨겼다고 해도 그 주문 나부랭이를 걸었던 이들이 다 죽었으니.
“킁.”
내가 코를 씰룩였다. 그걸 본 로즈가 더 미간을 찌푸렸다.
상당히 불쾌한 표정이었다.
쟤는 또 왜 저러나.
난 코를 몇 번 킁킁거리고는 방향을 잡고 걸었다.
따라오는 기색이 없어 뒤를 흘낏 보며 걸으니, 로즈가 제 옷깃에 코를 갖다 대는 게 보였다.
“좀 씻고 살아라.”
그걸 보며 말하니, 로즈가 눈을 부라렸다.
“꺼져.”
하여간 입이 거칠어. 쟤는 전직 테러리스트니까 앞으로 이미지 관리를 더 열심히 해야 하지 않나?
애가 어쩌려고 저러는지.
나 믿고 너무 까불면 안 되는데 말이야.
냄새의 흔적을 쫓는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다.
도착한 곳은 낡은 폐창고였다.
문고리에 손을 대자, 둥 하고 뭔가 내 손을 밀어냈다.
이걸 뭐라고 하더라. 고정형 주문이라고 했던가?
주문의 한 종류다. 잠금 주문이나, 트랩 주문에 쓰는 형태로 마력 형태에 따라 고정형 주문이라고 부른다고 혜민이한테 들었다.
쉽게 말하면, 여기에 누가 봉쇄 계열 주문을 걸어 둔 거다.
더 쉽게 말하면 자물쇠를 주문 형태로 걸어 둔 거라고 할 수 있다.
“엿차.”
가벼운 기합과 함께 주먹을 뻗었다.
쾅!
꽤 힘을 써서 때렸다.
바위라도 쪼갤 정도로.
아다만티움이라도 흔적은 남을 정도로.
근데 이것 봐라.
문이 안 열린다. 주먹질에 흠집도 안 난다. 둥 하고 흔들리긴 하지만 문은 열릴 기미가 안 보였다.
물리력을 제한하는 봉쇄 주문 같은 것도 있는 거다.
그럼 어찌해야 하나?
뭘 어떻게 해, 주문이 안 걸린 쪽으로 들어가면 되지.
난 벽으로 가서 벽을 뚫었다.
주문 따윈 걸려 있지 않았기에 쉬웠다.
꽝! 꽝! 우두두둑, 부수수.
시멘트 먼지 따위를 헤치며 안으로 들어갔다.
그 안에 기둥에 얌전히 묶여 있는 혜민이가 보였다.
기척을 내자, 혜민이가 고개를 들었다.
“야, 오빠다.”
“안녕, 서방님.”
참, 산뜻하게 미친 아이야. 이대로 풀어 주지 말고 돌아가고 싶다. 간절히 그러고 싶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풀어 줄 필요도 없었다.
투두둑.
손에 묶은 무슨 금줄 같은 걸 뜯어낸 혜민이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발을 묶은 끈도 것도 손톱을 세워 몇 번 툭툭 치더니 풀어 낸다.
그럴 때마다 손톱 끝에서 파란빛이 점멸했다.
“풀었네?”
“얌전히 당할 생각은 없으니까. 서방이 안 올 수도 있고.”
“불러 놓고?”
“언제나 차선책은 마련해 놓으라며.”
혜민이에게 과외를 할 때 입에 달고 살던 말이다.
얘 모의고사 성적을 보자마자, 처음 튀어나온 말이었고.
수능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고 대학은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고 거듭 말하기도 했다.
전교에서 제 뒤로 열 명쯤 남겨 놓은 성적표를 자랑스럽게 내미는 아이였다.
“우리 엄마 어디 있는 줄 알아?”
“아줌마?”
다시 코를 씰룩였다.
근처였다. 멀지 않았다. 그런데 혜민아, 너 왜 눈이 활활 타오르니?
어둠 속에서 빛나는 맹수의 눈과 같다. 혜민의 눈이 그랬다.
애가 왜 화가 잔뜩 나 있는지 모르겠네.
마법사를 향한 악의인가 싶어, 이미 다 끝났다고 말했는데도 그대로다.
까드득.
어금니도 깨문다. 표정이 무겁다.
일단 무시, 난 주변 상황부터 파악했다.
사소한 위협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이글거리는 눈의 혜민이가 보였다.
놔뒀어도 큰 위기는 아니었을 거다.
도착해서 내심 그리 생각하긴 했다.
애가 그리 쉽게 당할 애가 아니라고.
그래서 이리 느긋하게 온 거고.
남들이 보면 질주하듯 달려 구한 것처럼 보일지도 모르겠지만, 그건 아니다.
난 꽤 느긋했다.
그런데 너 진짜 눈깔 왜 그렇게 뜨냐?
곧 옆 창고에서 혜민이 어머니를 찾았다.
모녀가 상봉한다.
위기에 빠졌다가 구해졌으니 기뻐해야 할 타이밍이었다.
어울리진 않지만, 서로 껴안고 눈물을 쏟아낼지도 몰랐다.
“딱 까놓고 사실만 말해. 허튼소리 하면 안 참아.”
혜민이 말했다. 진짜 안 참을 기세였다. 놔두면 진짜 엄마 얼굴에 주먹을 꽂을 것 같았다.
“얌마, 너 그거 패륜이야.”
옆에서 내가 속삭였다.
구하러 왔는데, 왜 엄마랑 한판 붙을 기세냐.
어머니 얼굴이 말이 아니었다.
눈도 붓고 입술도 터지고 광대뼈 부근은 안쪽으로 움푹 들어갔다.
이 새끼들이 귀한 인질을 데려가 놓고 두들겨 패?
어머니는 느긋했다. 무슨 수를 썼는지는 몰라도, 이쪽도 손목과 발목에 묶인 끈은 풀었다.
“끈 푸셨네요?”
“혹시 몰라서, 만일을 대비하는 건 마법사로서 기초니까.”
혜민이 어머니가 부은 눈으로 생긋 웃으며 말한다.
보기 안쓰러웠다.
그러더니 얼굴 앞에 손바닥을 펴더니, 쓱 내린다. 그러자 부은 눈과 터진 입술, 휘어진 코뼈가 본래대로 돌아왔다.
“신기하네요.”
솔직히 감탄했다.
“처음부터 다친 게 아니었어. 일회성으로 만든 주문이라 아쉬울 따름이지. 다시 쓰려면 필요한 게 많거든.”
비싼 주문이란 소리로 들렸다.
스펠 크리에이터.
과연 주문 사냥꾼이 욕심낼 만한 인재로다.
물론 나 또한 그래서 욕심이 난다.
괜히 발품 팔아 구하러 온 게 아니다.
이제 회사에 들어오라고, NS에서 창대한 마법의 꿈을 펼쳐 보라고 하려 했는데, 그랬는데.
“똑바로 말해. 다 진짜야?”
혜민이 목소리가 들렸다. 어째 궁지에 몰려 화를 내는 그런 고양이 울음소리 같이 들리긴 한다만.
얘가 왜 또 이러나.
“사춘기가 다시 왔냐?”
다시 내가 속삭였다. 혜민이는 들은 체도 안 했다. 제 엄마만 쳐다보며 말할 뿐이었다.
“맞아? 엄마 때문에 도망 다닌 게 아니라 나 때문에 도망 다녔어? 연맹에서 절대 우릴 포기하지 않을 거라는 것도?”
혜민이 말했다. 곧 아줌마가 몸을 일으키더니 무릎을 탁탁 털었다.
“애가 흥분은, 주문쟁이는 그렇게 쉽게 흥분하면 안 돼요.”
아줌마는 유유히 얘기했다. 그리 어려운 이야기는 아니었다. 쉬운 얘기, 뻔한 이야기.
하지만 그 이야기의 중심에 선 이에게는 칼날 같은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