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0. 재능은 때론 저주가 된다 (8)
왼발을 떼려는데 오른발이 움직인다.
손을 움직이려 했는데 멋대로 눈썹이 씰룩인다.
이건 뭐지?
감각이 제멋대로다. 몸의 제어권이 엉망이 된 것 같았다.
만약 내 몸에 컨트롤러가 있다면 버튼 방식이 한순간에 전부 바뀐 거다.
주문쟁이는 정말 용한 재주가 있다.
“흐, 진짜 더럽게 무서운데, 이게 또 신나기도 하단 말이지. 그 대단한 특수종이라고 해도 주문에는 반항 못 한다는 거잖아? 그치?”
머리 돌기 아재가 말했다.
눈은 잘 보이는데 말이야.
한쪽 무릎을 꿇은 채로 상대를 바라봤다. 말을 하려고 했는데 오른쪽 엄지가 꼼지락거렸다.
마력 준동이야 진즉 느꼈다.
들어올 때부터 이곳에 주문으로 인한 개수작이 있다는 것도 알았다.
다만, 이런 방식인 줄은 몰랐다.
잘해야 불덩이나 날아올 줄 알았더니.
이건 뭐라고 하려나, 감각 교란 주문이라고 하려나.
곤란하긴 하지만, 위기는 아니다.
위기는 청기사랑 눈 마주치고 딜 교환할 때였지.
감각을 세우지 않는다. 오감을 조금 무디게 만들고 눈을 감았다.
“포기하셨나?”
머리 돌기 아재가 말한다. 그 목소리에 은은한 두려움이 엿보였다.
난 여전히 살기를 뿌리는 중이었다.
야생의 살기는, 일반인이라면 보는 순간 오줌을 지리게 만들 무형의 압박이다.
그런데도 상대는 잘 버텼다.
“포기하라고. 그래야지. 그래야 해.”
아재의 말에서 두려움을 넘어선 집념이 느껴졌다.
입은 오른 엄지, 왼 허벅지는 오른팔 이두 쪽, 오른 검지는 왼손 약지, 왼쪽 안면 근육 몇 개는 오른 허벅지 근육 몇 개로 연결된다.
새로운 기술을 한 번 보고 따라 하는 것과 다를 바 없었다.
적응하면 되는 거다.
시시각각 변하는 것도 아니고 바뀐 채로 고정이라면, 적응 자체가 어렵지도 않다.
오른팔로 땅을 지르밟았다.
그리 움직이니, 자연스레 왼발이 땅을 박찬다.
오른 주먹을 쥐기 위해 왼손 약지와 종아리 근육에 힘을 줬다.
처음 한 번 땅을 찼을 때는 균형이 잘 잡히지 않아 몸이 휘청했다.
두 번째 걸음에는 휘청이지 않았다.
세 번째 걸음에는 속도를 붙일 수 있었고.
“어?”
머리 돌기 아재가 놀라서 입을 어물거렸다.
그걸 보며 다시 한 걸음.
주먹을 쥐고 적응을 끝내자, 어려울 건 없었다.
그리 감각을 엉망으로 만드는 저주 한복판 속에서 난 안면 근육과 종아리 근육 따위를 조종해 오른 주먹을 휘둘렀다.
머리 돌기 아재는 피하는 대신 이마를 앞으로 내밀었다. 하얀 각질이 흩날리며 아재의 머리 뒤로 밀린다. 그 위를 주먹으로 갈겼다.
뻑!
맞은 아재가 뒤로 붕 날아 허공에서 수직으로 한 바퀴 돌았고, 바닥에 무릎부터 떨어졌다.
떡.
무릎 아프겠네.
손을 몇 번 쥐었다가 폈다. 주먹을 흔들고, 몸에 힘을 줘 보고.
조금 전에는 완벽하게 적응하지 못했기에 힘이 덜 들어갔지만.
그 짧은 사이, 적응 완료다.
“어떻게 움직여, 너?”
놀란 아재가 묻는다. 코피가 터져 주룩주룩 피가 흐른 얼굴이다.
주먹 위로 묻은 하얀 각질이 손등을 간지럽혔다.
손을 털어 내자, 각질이 바닥에 떨어졌다.
“나 왜 속였어요? 우리 사이에 그러면 안 되죠.”
“우리가 무슨 사이인데?”
“잘 모르는 사이.”
말하며 다시 앞으로 나아가 무릎으로 안면을 찍었다.
우드득.
광대뼈를 비롯해 안와골절 등 함몰이란 이런 것이라는 걸 알려 줬다.
맞은 아재가 뒤로 나가떨어졌다.
사지를 꿈틀거리는 그를 보며 숨을 토해 냈다.
“언제까지 구경만 할래? 관음증 환자야?”
툭 말을 내뱉었다.
그 말에 주변에 안개가 끼기 시작했다.
“재주가 놀랍다.”
스피커에서 울리는 듯 웅웅거리는 소리였다.
어디서 울리는지 찾는 건 포기했다.
이건 뭐, 주문쟁이가 작정하고 짜 둔 함정이니.
“오감을 비튼 저주를 그리 파훼하는 건 처음 본다.”
다른 목소리다.
어디인지는 몰라도 목소리로 숫자는 구분할 수 있다.
이제까지 둘.
“아이야, 아이야, 그리 목숨이 아깝지 않니?”
이제 셋.
모습은 안 보이고 목소리만 들리니 공포 영화와 다를 바 없다.
로즈를 뒤에 두고 오길 잘했다.
이 안으로 들어왔으면, 걔는 좀 곤란했겠다.
안개 사이를 꿰뚫어 보려고 노력했다. 별 의미는 없었다.
안 보였으니까.
“뒤 조심해라.”
넷, 걱정 어린 어조다.
뒤를 향해 신경을 집중하려 했다가 의미가 없음을 알았다.
아까부터 감각이 개판이다.
몸을 움직이는 게 문제가 아니라, 오감도 묶였다.
안 느껴진다. 불멸자의 감각이 거세되자, 정말 짙은 안개 한복판에 선 기분이 들었다.
이런 기분 처음이다.
난 불멸자의 감각에 더없이 익숙해져 있었기에 당황스러울 정도로 주변이 깜깜하게 느껴졌다.
뒤를 향해 팔꿈치를 휘둘렀다.
아무것도 없었다.
“끅끅끅.”
상대가 웃는다.
기묘한 느낌이다. 팔꿈치를 휘두르면 응당 느껴져야 할 공기 파동조차 느껴지지 않으니.
꽤 독한 주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무저갱의 어둠에서 허우적대다 그리 죽어라.”
다섯 번째 목소리다.
이거 참 난감하긴 한데.
감각이 없다고 해서 실체가 없어지는 건 아니니까, 괜찮다.
실체는 있다.
주문은 눈속임이다.
그리 생각하자마자 머리 위에서 불덩이가 떨어졌다.
열기 없는 불덩이다. 소리 없는 불덩이다.
깜깜한 어둠 속이다.
그 속에서 불꽃이 머리를 때리며 터졌다.
펑.
왼팔이 그슬렸다.
별 건 아니었다. 불꽃이 총알도 아니고 적당한 속도였다. 머리에 닿는 순간, 몸을 틀어 왼팔로 불덩이를 때려 튕겨 냈다.
안개로 눈을 가리고 주문이 주변 공기를 차단한다. 그거로 소리를 잡았다.
남은 건?
냄새와 촉각이 남았다.
미각도 그대로다.
혀를 내밀어 팔뚝을 핥았다. 매캐한 맛이 났다.
다 타진 않았다. 불꽃의 위력은 적당한 수준이었다.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으니, 그쪽으로는 기대를 버렸다.
주문을 파훼하는 건 마법사가 아니면 어렵다고 한다.
파훼 방법은 보통 두 가지.
주문의 주체에 타격을 주거나.
역으로 마력 패턴을 풀어 버리거나.
후자의 방법은 불가능하니, 전자의 방법뿐이다.
즉, 주문 쓰는 새끼를 두들겨 패면 되는 거였다.
맞은 불꽃의 궤도를 머릿속에 그렸다.
대각선, 위에서 밑.
상대는 마법사.
바닥에 있으면 진동으로 알았을 텐데, 발바닥에 느껴지는 진동은 없다.
인식 장애를 썼다고 해도 모든 걸 감출 순 없다.
목소리가 들리고 불꽃을 쏠 정도로 가깝다면, 발걸음 진동을 느낄 수 있다.
그게 느껴지지 않는다면 공중이란 소리요. 다섯이니, 날 가운데에 두고 감싸고 있지 않을까?
옹기종기 모여 있진 않을 거다.
푹.
이번에는 차갑고 뾰족한 무언가가 등을 찔렀다.
맞는 순간 몸을 휘돌렸다. 등 끝에 생채기가 남았으나, 금세 나았다.
불멸자의 재생력이 사라진 건 아니니까.
고드름 송곳 같은 게 푹하고 바닥에 박힌다. 진동으로 그걸 파악한다.
촉각에 의지한 채, 난 방향을 정했다.
날 중심으로 원을 그린 사방.
안녕 주문쟁이 친구들, 이런 거 본 적 있니.
품에서 핸드 불릿을 꺼내 던졌다.
스무 개를 꽤 촘촘한 간격으로 던지니.
“악!”
비명이 들렸다.
그와 동시에 내 머리 위에서 벼락이 쳤다.
염병, 별걸 다 하네.
피하는 대신 주먹을 휘둘렀다.
힘과 속도, 거기에 생체 에너지라는 기력을 잔뜩 담았다.
자연스레 팔에 철완이 담기고.
뻥!
공기 터지는 소리가 울렸다. 물론 난 촉각의 진동으로만 그걸 느꼈다.
꽈르르르르.
벼락의 잔재와 같은 울림이 남는다.
“끄악!”
비명과 함께 청각이 돌아왔다.
안개도 옅어져, 시야가 트였다.
내가 한 일의 결과가 보였다.
벼락을 주먹으로 쳐 냈다. 그 벼락이 옆쪽 산길에 덩그러니 난 나무를 쪼갰다. 쪼갠 나무에 불이 붙어 타닥타닥 연기가 솟았다.
“벼락을 주먹으로 쳐 내?”
목소리가 아까보다 뚜렷하다. 시선을 돌리니, 패션 센스가 고약한 사람 하나가 바닥에 떨어진 게 보였다.
시대가 어느 시대인데, 마법사라고 저런 후드 로브를 뒤집어쓰고 있단 말인가.
“중세 덕후였어?”
그걸 보며 물었다.
“괴물이로군.”
앳된 목소리다. 마지막 무저갱 드립치던 놈.
“여, 판타지 덕후구나. 주문쟁이 여러분.”
내가 아는 사람 중에도 덕후 하나 있는데, 동훈이 형이 좋아할 만한 구도였다.
시야가 트였기에 보였다.
다 같이 회색의 후드 로브를 뒤집어쓴 다섯이.
그중 하나는 피를 질질 흘리며 바닥에서 일어나는 중이었다.
공중에 둥둥 뜬 넷과 하나다.
내 핸드 불릿이 효과를 본 건 둘이었다.
공중에 뜬 놈 하나도 로브 밑으로 피를 뚝뚝 흘렸다.
바닥에 떨어진 친구는 운이 나빴다.
배 쪽이다. 구멍이 나서 피가 철철 흐른다.
“방호 주문이 이리 쉽게 뚫려?”
바닥에 쓰러진 덕후 1이 중얼거렸다.
쉽다니, 내가 던진 핸드 불릿이면 어지간한 저격 라이플보다 아플걸?
하물며 거리가 가까웠다. 가까울수록 위력이 강해지는 건 불변의 진리다.
“그렇다고 변하는 건…….”
위에 있던 놈 하나가 중얼거리는 사이, 난 움직였다.
우리가 티 타임을 가지는 중도 아니고.
뭐 이렇게 허점이 많아.
내달린다. 공간을 좁힌다. 바닥에 쓰러진 주문쟁이가 손가락을 꿈지럭거리는 중이었다.
무슨 주문 따위를 준비하는 중인 것 같긴 한데.
알게 뭐람.
이미 코앞이다. 놀란 눈이 보인다. 후드 안쪽에 노인의 얼굴이 있었다.
주먹을 뻗었다.
뻥.
빈약한 주문쟁이의 몸은 변신족의 주먹을 견뎌 낼 수 없었다.
머리통이 터졌다.
피와 뇌수가 사방에 떨어지고, 로브로 감싼 몸이 뒤로 쓰러졌다.
“일단 하나.”
말하고 손을 털었다.
“으아아아아!”
그리고 너무 살살 때렸는지, 안면이 함몰된 머리 돌기 아재가 돌연 고함을 내지르며 일어났다.
거기에 잠깐 시선을 뺏긴 사이다.
주문쟁이 넷의 모습이 또 사라졌다.
“너, 너, 방해하지 마라! 방해하지 마!”
머리 돌기 아재가 외쳤다.
난 청기사 슬레이어란 이명을 얻었다.
그 이름이 어떤 값을 지녔는지 매일 새로이 갱신하며 느끼는 중인데.
저 양반은 어떻게 겁도 없이 덤빌까.
“너만 아니면 나도 머리칼을 가질 수 있어. 그럴 수 있다고! 머리 돌기 따위 버리고 주문의 힘으로 나도 미용실을 갈 것이다. 반드시.”
절절했다.
길게 들을 것도 없었다.
머리에 평생 비듬 비슷한 걸 흘리고 살아야 하는 초능을 발현한 남자.
탈모를 정복한 약도 그에게는 무용했을 거다.
마지막으로 잡은 지푸라기는 주문이었다. 음지의 마법사에게 자신을 판 거다.
“우아아아아!”
우드드득.
그리고 그건 잘못된 선택임이 분명했다.
무슨 짓을 했는지, 머리 돌기 아재의 머리가 자라기 시작하더니 몸이 커진다. 곧 괴물처럼 변해 버렸다.
무슨 저주의 일종이다.
이제는 머리칼이 문제가 아니다. 함몰된 얼굴이 회복되긴 했는데 벌름거리는 들창코에 눈깔은 도마뱀의 그것과 닮았다.
그냥 괴물이다.
불쌍하다. 그러하기에, 저런 꼴이 된 걸 거울이라도 보면 더없이 안쓰러울 것이기에 그리되지 않게 해 줬다.
땅을 차고 다가가 발목을 걷어찼다.
빡.
부러진 발목에 균형을 잃은 괴물의 목에 팔꿈치를 내리꽂고.
떨어지는 머리를 무릎으로 올려쳤다.
뻑.
콤비네이션 공격이 한 호흡에 이뤄지고, 괴물은 태어나자마자 죽었다.
호흡을 흩트릴 필요도 없는 상대다.
“선을 넘지 말라고 했음에도.”
스피커 목소리다.
“선은 너희가 먼저 넘었다.”
난 답하고 몸을 돌렸다.
혜민이는 내 사람이다.
인베이더도 아니고 어쭙잖은 주문쟁이가 건드렸다는 데 참을 수 없이 화가 났다. 짜증이 치솟았다.
하물며 지금은 그 모녀가 안전한지도 모른다.
그게 더 짜증이 치솟기에.
“누구부터?”
하나만 남겨 두고 다 조져 버리려 했다.
“넌 아직 우리 마법진 위에 있다.”
응. 그래. 그래서?
우드드드드.
음?
오른 주먹 위다. 그 위로 구더기 따위가 생기기 시작했다.
“썩어라. 썩고 또 썩어라.”
마법사가 말한다.
“그거 주문 아니지? 그냥 폼 잡는 거지? 코스프레에 너무 심취했는데. 그거 병이다. 너.”
상대가 입을 다물었고 난 그사이 왼손 수도로 오른 팔꿈치쯤을 잘랐다.
딱 거기까지 이상을 느꼈다.
자른 팔을 바닥에 던졌다.
팔은 금세 자라기 시작했다. 불멸자의 재생력은 체력이 기반이 된다.
더 명확히 말하면 생체 에너지, 기력이 기반이 된다.
팔이 회복되는 필요한 시간은 이제 1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오른팔 하나쯤 없어도 지금은 별 상관도 없고.
상대가 당황했다. 로브에 가려져 보이진 않지만, 느꼈다.
나 같아도 그럴 것 같기에.
작정하고 준비한 몸 컨트롤러를 비트는 마법은 재능으로 무시.
오감 차단은 힘으로 제압.
부패의 저주 따위는 부패한 부위만 잘랐다.
몸 중심부터 썩게 하면 그 부분만 도려내면 되고.
근데 한 번 당하지, 내가 두 번은 안 당한다?
부패의 저주라는 걸 발현할 때, 육감에 걸리는 게 있었다.
다시 그게 느껴지기에 움직였다.
“……저주를 피해?”
불쾌한 느낌의 무언가가 내가 있던 자리를 스쳤다.
무형이기에 야생의 살기와 비슷하다. 보이지 않아도 피할 수 있다.
주문이든 살기든 범위라는 게 있으니까.
“선은 누가 넘었을까?”
저주를 피한 내가 물었다.
주문쟁이의 주둥이는 쉬이 열리지 않았다.
침묵이 감돌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