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7. 누구나 숨겨 둔 칼날은 있다. (3)
싸우면서도 주변 상황은 계속 체크했다.
그래서 알았다.
변신한 뒤에도 냉정함을 유지하는 변신체 무리의 활약.
비약을 먹고 날뛰는 불멸특수대의 활약.
마지막으로 착용형 기어의 진화판을 들고 온 협회의 힘까지.
“동훈 선배가 보면 환장하겠다.”
정아 누나의 말이 통신기를 통해 들렸다.
목소리 감이 조금 멀어졌다. 게이트 앞의 무선 통신기는 여러 가지 방해 전파에 노출된다. 이럴 수도 있었다.
“균열 깨진다.”
이리 주변을 신경 쓴 덕분에, 게이트의 변화를 꽤 빨리 알아챌 수 있었다.
정아 누나가 말하고.
전신 감각이 쭈뼛 선다. 시선 너머, 깨진 균열 사이로 튀어나오는 놈들이 보인다.
보랏빛을 뿜으며 둥둥 떠다니는 리빙 아머.
바퀴가 하나 늘어난 휠 나이트.
외양이 달라졌다. 그보다 놀라운 건 놈들이 진형을 이루며 나온다는 거였다.
마치 발맞춰 걷듯 속도를 조절한다.
행군이다. 제식(制式)은 곧 그 부대의 훈련 정도를 보여 주는 얼굴이다.
튀어나오는 인베이더 새끼들이 몇 년간 훈련받은 군인 같았다.
짜릿했다. 뇌가 울린다.
위험을 인지한 육감이 미친 듯이 신호를 보낸다.
그와 동시에 전투 감각이 벼려진다.
“마리, 기남이 업어.”
뒤통수를 맞았다.
내가 청기사라면, 전술을 짤 능력이 있는 인베이더라면.
유니크 인베이더를 움직인 것도 전략의 일부였을 거다.
덕분에 사이오닉 팀을 제외한 세 개 팀은 전장 깊숙한 곳까지 들어왔다.
그러니까 아군보다 인베이더가 더 가깝다.
그리고 휠 나이트는 어지간한 특수종보다 빠른 바퀴를 가진 인베이더고.
뒤돌아 뛰다 보면 머리끄덩이 잡혀 인베이더와 함께 바닥을 구를 터였다.
고로 후퇴 불가다.
그럼 어쩌겠나.
후퇴하지 않으면 되지.
“네, 오라버니.”
“뭐냐, 이건.”
기남도 육감이 발달했다. 눈은 잃었지만, 감각만으로 사태의 심각함을 인지한다.
이럴 때 보면 나보다 더 훌륭한 육감을 갖춘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과연 순혈 정가라고나 할까.
감각만으로 한 치 앞의 미래를 내다보는 재능, 그게 순혈 불멸이다.
“여자한테 업히니까 좋냐?”
기남한테 말하니.
“이 미친 새끼가, 상황이나 말해.”
알아서 뭐 하게.
“엄마, 마리랑 본대로 복귀하세요.”
“아들?”
“기남이 저렇게 놔두면 죽어요.”
마리 혼자 엎고 가면 둘 다 죽든지, 둘 중 하나는 죽는다.
“난 네 엄마다. 기남이 엄마 아니고.”
아, 우리 어머니, 이런 상황에도 위트를 잃지 않는 원더 우먼.
“쟤 형이 동생 바보라서, 쟤 죽으면 제가 곤란하거든요.”
“뭔 개소리냐. 형이랑 상관없이, 난 나다. 내려줘, 싸우겠다.”
우리 미친 기남이.
장래 희망이 다진 고깃덩이가 되는 거였니?
“엄마?”
어머니가 날 지긋이 바라봤다. 그 눈빛에 어린 걱정을 어찌 모를까.
그 걱정을 덜길 바라며 내가 입을 열었다.
“어머니께 물려받은 천사 소녀 네티의 혈통, 이번에 활용해 보도록 하겠나이다.”
“……조심하렴.”
어머니는 그렇게 말하며 조용히 기남의 목을 잡았다.
“끅, 뭐, 뭡니까.”
그 와중에도 존댓말이다. 저 새끼 이상하게 우리 엄마한테 잘한다.
처음부터 조심하긴 했다.
왜? 친구 엄마라?
그렇게 생각하니 되게 미안하네.
난 기남이 아빠한테 협박도 날리고 그러는데.
이렇게 말하니까 동방예의지국에서 태어나 유교 사상으로 길러진 내 도덕심이 개판 난 것 같은 기분이다.
그건 아닌데.
나 유교 그 자체인데.
어릴 때 별명이 ‘예의 유광익’이었는데.
고등학교 학창시절, 사십 대쯤 된 양아치 아재를 몰래 골목으로 데려가 두드려 팬 기억이 떠올랐다.
아니다. 이 기억은 예의와 상관없는 일이다.
중고딩 애들 삥이나 뜯는 양아치였다. 개자식에게 예의가 왜 필요하다고.
예의는 사람과 사람 사이에 필요한 것.
고로 인베이더와 내 사이에도 예의와 대화 따윈 필요 없을 터였다.
우득.
어머니가 목을 꺾듯이 기남의 숨골을 움켜쥐니, 친구가 곧 꺽꺽대다 기절했다.
“마리야, 엄마가 변신해서 길 뚫는다. 넌 뛰기만 해.”
어머니의 목소리를 들으며 장갑을 벗어서 던졌다. 그걸 공중에서 낚아챈 어머니가 곧바로 제 손에 꼈다.
“사양하지 않으마. 유품일지도 모르니.”
위트가 과하십니다. 그런 농담할 때입니까?
“나중에 돌려줘요. 엄마 준 거 알면 알이 나 죽일지도 몰라.”
“초능국의 왕이 그리 쪼잔해서 쓰겠니?”
“네, 그 친구, 개인적으로 알면 성격 참 유별나다고 하실 겁니다.”
애가 좀 그래요.
왕궁에서 암투를 어버이로 삼고 자라서 그런 것 같긴 한데.
십 세 때부터 참 십 세 같았다니까요.
통신은 먹통이다. 인이어를 빼서 바닥에 던졌다.
“가세요.”
말하고 돌아섰다. 갖가지 생각이 들긴 했다.
혜민이 이 자식은 전 과외 선생이자, 옆집 오빠이자, 현 회사 대표가 이리 고생하는데 어디서 뭘 하는지.
정아 사수는 알아서 뒤로 빠졌겠지? 괜히 나 구하겠다고 달려들진 않겠지?
4번 타자의 탄이 열두 개 남았다.
정글도는 하도 험하게 썼더니 날이 좀 나가긴 했지만, 아직 괜찮고.
와이어 나이프는 멀쩡하고.
권총은 챙겨오지도 않았다. 상대가 피부 두껍기로 유명한 인베이더 두 종류다.
저격도 캐쉬 히포급이 아니면 의미가 없다.
아니나 다를까, 그 의미 없는 일이 눈앞에서 일어난다.
감각 너머, 전선 가까이에 있던 총잡이의 발악이다.
아군이 쏘아 낸 납탄, 폭발물 따위가 날아간다.
리빙 아머가 부대 일부가 앞으로 나온다.
그러자 보랏빛이 웅- 하는 소리와 함께 허공에 무형의 막을 만든다.
육각형은 아니다 삼각형이 연이어진 방패.
방어 주문 중 하나다. 헥사곤보다는 못해도 꽤 단단한, 마법은 못 막아도 물리력을 막는 건 헥사곤보다 유용한 방어막.
트라이앵글 필드.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폭격기라도 출격하지 않는 이상, 저걸 어떻게 할 수는 없을 테니.
무엇보다 폭격기 출격이 되려나.
균열 너머, 청기사의 어깨가 보인다. 유려한 곡선과 반듯한 직선이 조화된 어깨 갑주.
청기사는 그 존재만으로 주변 모든 통신을 먹통으로 만든다.
재밍이 패시브다.
폭격기가 출현하는 순간, 고속 비행이 가능한 청기사는 날아오를 것이다.
그러면 그 결과가 어떻게 될까.
현존하는 어떤 비행체도 청기사만큼 유려할 순 없다.
폭격기가 폭죽이 되기까지 필요한 시간은 10초 내외가 된다.
청기사를 잡으려면 지상에서 해결해야 했다.
뭐, 그거야 나중 일이다.
지금 당장은 눈앞에서 몰려오는 저 세 바퀴 휠 나이트와 보라색 타투 리빙 아머 무리가 문제지.
놈들은 잘 훈련된 군인처럼 움직였다.
일부가 찢어져 흩어진다. 기동성이 인간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빠르다.
서로 소통하는 게 초능 일란성 쌍둥이 저리 가라다.
그중 일부가 내 쪽으로 향했다.
나라도 저럴 것이다.
유니크 인베이더를 미끼로 삼았다면 그 미끼를 문 특수 전력을 없애는 게 인지상정 아닌가.
청기사는 그렇게 했다.
놈들이 달려든다.
까마득한 숫자는 아니다. 고작해야 오십 내외.
휠나이트 스물에 리빙 아머 서른.
하지만 일반 휠 나이트와 리빙 아머 서른이라고 해도 특수종 혼자 어찌할 수 없다.
물론 나는 조금 다르다.
마리와 어머니가 나가려면 시선 좀 끌어야겠지?
마주 달리는 대신이다.
4번 타자를 들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가슴이 부푼다. 흉곽이 늘어난다. 부푼 가슴 안에 가득 숨을 담았다.
그리 가득 모은 숨을 입을 벌리며 소리로 토해낸다. 야생의 살기를 담아, 전장 전체 울리게 그리 외쳤다.
“청-기-사아아! 개-새-끼-야아!”
야생의 살기를 담은 외침이 울린다. 대기를 달군다. 달려 나간 소리가 전장을 때린다. 폭격 소리를 집어삼킨다.
이게 바로 야수의 성대다.
그와 동시에 인베이더 무리가 바짝 거리를 좁힌다.
몇 초면 서로의 무기가 닿을 거리까지 다가왔다.
눈앞에 삼각형 방패가 보랏빛 에너지를 뿌린다.
청각 따윈 없는지, 내 외침을 무시한다. 그래도 그 안에 담긴 살기는 감지했는지, 전부 날 노리고 제 무기를 곧추세웠다.
변신족의 동체 시력이 놈들의 움직임을 잡아챈다. 끊어진 필름처럼 무서운 속도로 내달린다. 어지간한 특수종이라면 오줌 지릴 장면이 눈앞에 펼쳐졌다.
두근.
그리고 난 심장이 뛰었다.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았다.
난 왜 특수종 세계에 오고 싶어 했는가.
그건 이런 개자식들을 죽이고 싶어서다.
난 인베이더를 죽이는 사람이다.
그 말을 실현할 순간이기에 주저는 없었다.
* * *
몸을 숨긴 채, 전장을 살피던 중봉은 웃음을 참아야 했다.
기척 죽이기 상태인데 웃어서 기척을 드러낼 수는 없지 않나.
청기사 개새끼라니.
네임드 인베이더는 듣지 못한다. 이해도 못 할 것이다.
그래도 중봉은 속은 시원했다.
평생의 원한, 그 끝이 코앞이다. 중봉은 웃음을 참고 어둠 속으로 침잠했다.
* * *
유연호는 아들의 외침에 혀를 찼다.
“저 녀석이.”
제 아들이다. 뭘 하려는지는 금세 알 수 있었다.
“구출하러 가시죠.”
부하가 말한다. 연호는 답하지 않았다.
그래, 본래라면 당장 뛰어나갔을 것이다.
하지만 안 된다. 그럴 수 없었다.
작전 시작 전, 아내가 찾아와 말했다.
“여보, 광익이를 믿어요. 그게 아니라면 저라도 믿어요. 프로답게 굴어요.”
말하며 가슴을 툭 치는데 애정이 아니라 전우애 따위가 느껴져 당황했다.
그건 사랑하는 아내이자, 자신만큼이나 역사를 쌓아온 특수종의 조언이기도 했다.
“나 사우전드 페이스야.”
그래서 이리 답했다.
그거로 끝이다.
자신은 프로, 사우전드 페이스, 피닉스 팀장.
“우리는 현재 자리 고수. 이중봉이 활동을 시작하면 청기사를 제어한다.”
피닉스 팀의 작전 목적은 애초에 유니크 인베이더가 아니다.
그의 목표는 네임드 척결이었다.
그걸 위해 마음을 다잡는다. 유연호는 아들의 외침에 화답하고 싶은 뜨거운 가슴을 억눌렀다.
* * *
김정아는 그 외침을 들었다.
그리고 웃었다.
얼마 만에 터진 웃음인지.
가족을 잃고 웃음 짓는 일이 줄었다.
감정을 보이는 일도 서서히 줄었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실소 따위를 짓게 됐다.
그게 누구 때문이더라?
캐쉬 히포의 확대경 너머로 외침의 주체가 보인다.
유광익이다.
한때는 후배, 지금은 회사의 대표.
저 아이를 죽게 둘 일은 없다.
그리 생각하며 조준한다.
김정아는 방아쇠를 당겼다.
퉁!
캐쉬 히포가 불을 뿜는다. 날아간 탄환이 전면에 달려들던 리빙 아머의 머리 부근을 때렸다.
트라이앵글 필드가 일어나 막는다. 그래도 효과는 있을 것이다. 보이지 않지만, 감으로 안다.
금 정도는 갔을 것이다. 그러니 다시 쏘자.
재장전.
철컥.
비약의 힘이 조준을 돕는다. 단시간이지만, 불멸자의 재능을 몸에 담기에 비약이다.
쏜다.
퉁.
탄이 날아간다. 어느새 광익의 모습은 찾기 어렵다.
그래도 계속 쏜다. 쏘고 또 쏜다.
인베이더 무리 사이로 광익이 삼켜지는 게 보였다.
‘안 돼.’
광익을 이대로 죽일 순 없다.
어느새 탄을 다 썼다.
활을 꺼내 앉았다. 한쪽 무릎을 꿇고 레이저 보우를 당긴다.
김정아는 너무 집중했다. 그래서 주변을 경계하지 않았고 다가온 기척을 놓쳤다.
답지 않은 실수였다.
훙.
리빙 아머의 칼날이 머리 위로 떨어진다. 발견했을 당시에는 이미 늦은 참이었다.
몸을 돌려 화살을 쏘아내도 되겠지만, 치명상을 피할 순 없다.
그럴 바에, 이 화살 한 발도 광익을 위해 쏘는 건 어떨까?
‘죽나?’
주마등 따윈 없다. 제 복수는 광익이 대신해 줄 것이다.
덜컥.
리빙 아머의 칼날이 코앞에서 멈춘다.
덜덜 떨리는 놈의 뒤, 갑자기 빛이 어린다.
소리 없이 일어난 빛은 곧 사람의 형태가 된다.
초능 광변환이다.
다가온 이가 기합과 함께 리빙 아머의 등 뒤에서 힘껏 칼을 찔렀다.
카각, 우드득.
이두에 힘을 줘 옆으로 당긴다.
리빙 아머의 몸이 쪼개진다. 그걸 보고 다가온 이들이 쓰러진 인베이더 몸 위로 산탄총 따위를 쐈다.
“이게 약점 맞지?”
“역시 우리 미호.”
불멸특수대에서 온 2인조, 요한과 귀태다.
뒤쪽, 인기척이 느껴져 돌아보니
눈에서 형형한 빛을 뿜어내는 로즈가 보였다.
초능 메두사의 눈.
그 눈은 마주한 객체의 움직임을 제한한다.
리빙 아머도 눈이 있던가? 그에 준하는 감각 기관은 있을 것이다.
메두사의 눈이 통한 걸 보면.
“자살하기 딱 좋은 날이긴 한데.”
제 목숨을 구한 전직 테러리스트가 말한다.
정아는 말을 잇지 않았다. 그저 노려볼 뿐.
요한이 보다못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로즈 넌 말투가 왜 그러냐? 말투 사나우면 좋은 남자 못 만난다.”
“……신박하게 미친 새끼네.”
요한은 말을 걸었다가 본전도 못 건졌다.
어느새 동이 튼다.
김정아는 한쪽을 보며 말했다.
“광익이 위험하다.”
평소와 같은 딱딱할 말투였다.
“퇴로만 확보하면 돼요.”
우미호가 나섰다. 광익이 있던 곳, 지금은 보이지 않기에 그가 있던 곳에 시선을 던지며 다시 입을 열었다.
“누구한테나 숨겨 둔 칼날은 있고, 대표는 그 칼을 뽑은 적이 없으니까요.”
변신족은 변신체일 때 가장 완벽하다.
본능에 너무 충실해 변신 후 실수가 다분한 변신족임에도 그렇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역사가 증명한다. 뛰어난 재능의 변신족의 변신체는 다 그래 왔다.
동이 트며 햇볕이 꽂힌다. 그 햇빛이 밝히는 곳.
그 안에서 불쑥 손이 솟는다.
날카로운 손톱이 리빙 아머의 머리를 할퀸다.
서걱.
트라이앵글 필드? 우습다.
손톱이 무른 두부를 썰 듯 필드를 가르고 인베이더의 머리를 쪼갰다.
두어 번 더 손톱을 긋는다.
머리가 쪼개진 리빙 아머의 몸이 여섯 조각으로 나뉜다.
퉁.
인베이더 무리에 쌓인 안쪽.
짐승이 포효했다.
“크허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