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3. 사인
정보는 많았다.
청기사에 관한 것도, 그 밑에 있다던 네 마리의 중간 보스에 관한 것도.
난 보고 듣고 기억한 정보를 토대로 이미지를 그려 냈다.
가만히 있는 것보다 걷는 게 더 머리가 잘 돌아가기에 구축된 진지를 대강 걸어 다녔다.
자박자박 걸으며 이미지를 그려 낸다.
“감사했습니다.”
말쑥하게 생긴 불멸자가 말을 걸었다. 얼굴에 지렁이 모양이 남았다. 아물어 가는 상처다.
불멸특수대원으로 보였다.
정확히는 내가 구한 불멸자다. 휠 나이트와 리빙 아머의 파도 속에서 구함 받은 이.
“화림?”
“네.”
“후배네.”
“영광입니다.”
불멸자답게 큰 소리를 내거나 흥분한 모습을 보이진 않았지만, 눈빛이 반짝였다.
누군가에게 선망의 대상이 된다는 게 썩 나쁘진 않았다.
대화하면서도 이미지 구축은 계속했다.
일종은 훈련이었다.
멀티테스킹 훈련.
전장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 소수 정예로 유니크 인베이더를 처리하기로 했지만.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지.
그러니 주변에 신경을 분산하면서도 이미지를 구축하는 훈련을 한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도 아니고, 정형화된 훈련 방법도 아니다.
그저 이게 도움이 되리란 생각이 들었고, 난 그대로 행했다.
불멸자 하나가 그리 스쳐 갔다.
난 계속 걸었다.
쏜즈 나이트부터, 아이언, 스펠, 스텔스.
네 놈 다 까다롭다.
까다롭지 않다면 유니크란 이름이 붙지도 않았을 것이다.
절로 머릿속에서 네 놈을 다 상대할 전술이 흘러나온다.
전술이랄 것도 없었다.
싸우는 방법이다.
어머니와 마리를 날개로 두어 내가 전면에 서고, 그 뒤를 기남이가 받치고 사수가 저격.
이미지가 겹치며 싸움의 향방을 그린다.
진다. 질 수도 있다. 100% 이기는 싸움은 없다.
그럼 진 이유는?
마리가 흥분해서 튀어 나갔고 그걸 구하려다가 무리했다.
마리를 데려가는 게 실수인가?
아니, 그건 아니다.
이 정도 능력을 지닌 변신족은 흔치 않다.
생각을 정리하며 다시 머릿속으로 시뮬레이션을 돌렸다.
잔뜩 먹고 딱 30분 오침을 즐겼다.
폭격 소리가 멎어서 소음도 그리 없었다.
정부에서 수면 캡슐도 가져왔다.
엄밀히 따지면 죽기 일보 직전의 사람도 살린다는 생존 캡슐이지만, 난 수면 캡슐로 썼다.
물건은 쓰는 사람 마음인 법이다.
잘 자고 일어나 걸으니, 머리가 더 팽팽 돌아간다. 얼마나 좋나.
하물며 내가 그리 쓴다고 하니 뭐라고 하는 사람도 없었다.
물자 관리를 맡은 군인이 날 보더니 프리패스로 통과시켜 줬다.
몇 번의 시뮬레이션, 날 향한 눈빛을 보며 아는 얼굴을 보면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유광익.”
반가운 목소리가 내 발을 잡았다.
옆을 돌아보니 호남이 형이다. 물론 보기도 전에 기척만으로 알았다.
“형.”
“기남이 데려가냐?”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호남이 형 눈을 보니, 가벼운 떨림이 보였다.
복잡한 감정을 보인다.
“잘 부탁한다.”
그리 말하며 훌쩍 돌아섰다.
저 동생 바보.
차마 말리진 못하네.
나서면 기남이가 연을 끊겠다고 협박이라도 했을까?
또 걸었다.
어느새 걷다 보니, 지휘부라 써 있는 급조된 패널 건물 앞이다.
뻐끔.
그 앞, 웬 불멸자가 보였다.
겉으로 보기에는 동안이지만, 나이가 적지 않는다는 게 육감으로 느껴지는 상대다.
“세최특?”
그가 날 불렀다.
또 감사 인사인가.
아마도 휠 나이트와 리빙 아머의 파도 속에서 내 덕에 살아남은 사람이겠지.
막 머릿속에서 돌아가는 시뮬레이션을 끝내는 시점이다. 난 대강 답했다.
“네, 괜찮습니다. 사람 구하는 게 취미예요.”
“뭐?”
“많이 안 다치신 거 보니까 운이 좋으셨네. 다 늙어서 아직 일선에서 도는 겁니까? 제가 화림에 그런 사람 하나 아는데 점점 성격이 포악해지더라고요. 그러니까 마음 다잡으시죠. 내일도 해는 뜨니깐요.”
꿈뻑.
상대가 눈을 깜빡이기에 다가가 어깨를 다독여 줬다.
“힘내요.”
까득.
응원에 어금니를 꽉 깨문다. 이 양반 왜 이래.
너무 오지랖이었나.
“나 박영돈이다.”
어, 아.
깨달은 난 주변을 돌아보다가 발걸음을 옮기는 병사 하나를 발견했다.
유일부대가 들어왔다더니 군인 복장이 속속 보인다.
“군인 아저씨?”
“……네?”
“종이랑 펜 있어요?”
“네, 있습니다.”
“빌려주세요.”
종이 한 장하고 펜을 빌려 그 위에 사인하고 ‘박영돈 님께’라고 적었다.
“너, 지금?”
박영돈이란 남자가 감격해 몸을 부르르 떨었다.
“자, 여기요.”
사인을 손에 쥐여 주니, 기쁨에 볼 떨림을 시전한다. 이 아저씨 내 팬인가보다.
안 그래도 보자마자 감정적인 사람이란 게 보이긴 했다.
이 와중에도 시뮬레이션이 돌아가는 중이었다.
덕분에 감각을 그리 예민하게 세우지 않았음에도 상대가 날 향해 감정을 보이는 게 느껴질 정도니.
광팬인가보다.
“이 미친…….”
“쉿, 여기 사람 몰리면 사인하다가 날 샙니다.”
다시 어깨를 두드려 주고 들어섰다.
“뭐 하냐, 너?”
팬더 형이 날 반겼다.
“아, 걷다 보니까 여기네요. 뭐 해요?”
“일한다.”
“NS 소속이 왜 지휘부에서 일하냐고.”
“거기 미호 있잖아. 나 없어도 잘 돌아가잖아.”
맞는 말이다.
“그리고 무료 아니다. 다 출장비 받는 거고.”
돈을 번단다.
“잘하고 있습니다.”
칭찬을 건넸다.
지휘부 안쪽은 꽤 넓었다. 안쪽에 사람은 없었다.
“다 어디 갔어요?”
“휴식, 곧 전면전이 될 것 같으니까.”
다들 앞으로 일어날 전장을 준비 중이었다.
말하는 것과 동시에 머릿속 시뮬레이션을 끝냈다.
그와 동시에 내가 할 일 몇 개도 떠올렸다. 이제 돌아갈 참이었다.
“돈 열심히 버시고, 우리 애들 안 다치게 좀 잘하시고요.”
“밖에 있는 사람이 뭐라고 안 하디?”
팬더 형이 대뜸 물었다.
“누군데요?”
내 팬 아니었나.
“불멸특수대 박영돈 이사.”
이사였어? 그런데 일선에서 나온 건가? 괜찮은 사람이다. 솔선수범의 표본 아닌가.
“사인해 달라고 하던데요?”
“사인?”
팬더 형이 고개를 갸웃했다.
“세최특.”
안으로 박영돈이 들어왔다.
부르르.
때마침 폰이 울었다. 미호였다.
난 손바닥을 보이며 전화를 받았다.
“어. 미호야, 아, 알았다고. 간다. 잠깐 산책 좀 했다. 비가 그쳐서 하늘이 맑네, 아주.”
아직 먹구름이 좀 끼긴 했지만, 이 정도면 맑은 날씨지.
아직 동이 틀려면 멀었지만, 내일 아침은 아주 맑은 하늘을 볼 것 같았다.
“개소리? 대표한테 못 하는 말이 없구나. 방귀태랑 결혼해서 백년해로해라.”
내 축복에 미호가 전화를 끊었다.
바쁜데 어디 가서 뭐 하냐고 되게 따진다.
“저 가요. 형.”
팬더 형한테 말하고 몸을 돌리는데, 박영돈 씨가 내 팔을 잡아채려 했다. 반사적으로 비틀어 피했다.
“사인 해 드렸잖아요. 사진은 나중에요.”
말하며 몸을 팩 돌리고 발을 놀렸다.
유니크 인베이더가 나올 위치 관측이 끝났다고 했다.
자리 잡고 기다릴 시간이었다.
훌쩍 떠나는 내 뒤로 누군가의 읊조림이 들렸다.
“저 새끼가.”
* * *
박영돈은 인정해야 했다.
살면서 이렇게 화가 난 적은 없었다고.
당장 저 새끼 머리끄덩이를 잡아 바닥에 패대기치고 싶었다.
팔을 잡아 꺾어 바닥에 머리를 메다꽂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능력은 그렇다 치고.
“뭐? 능력 확인? 웃기려고 그러는 거지? 놔둬, 정예 팀으로 빠져서 유니크 타격할 거니까.”
과거 인연이 있던 지휘부 동료가 그리 말한다.
유일부대장의 측근이 하는 말이다.
이건 곧 총 지휘관이자, 사령관의 말과 같았다.
건드리면 안 된다는 거다.
지휘부 내에서 세최특이란 이름이 간간이 들리기도 했다.
아니, 진지 전체 내에서 그리 들렸다.
자기를 구해 줬다는 둥.
갑자기 나타나 휠 나이트 전면 갑옷을 산탄총으로 박살 냈다는 둥.
하나같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
괜히 상대를 끌어내리고 싶어진다.
박영돈은 꾹 참았다.
그러다 막사 앞에서 광익을 만났다.
어딘가 넋 빠진 모습이기에 창피나 줄 생각이었는데.
“사인받으셨네요.”
옆에서 팬더를 닮은 잡종이 말한다.
그 말에 박영돈은 손에 쥔 종이를 꼬깃꼬깃 구겼다.
아니, 아예 찢었다.
뭐지, 저 미친놈은. 대놓고 적의를 보이진 않았지만, 그걸 보고 팬이냐는 듯 사인을 해 주고 가다니.
세최또란 별명이 괜히 생긴 게 아니다.
옆에서 팬더 닮은 잡종이 들릴 듯 말 듯 낄낄댄다.
이 새끼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물론 그렇다고 손댈 수도 없었다.
이상하게도 이곳에 오니 NS가 끼치는 영향력이 무지막지하다.
특히 유일부대장이자, 사령관이 그를 매우 아꼈다.
‘협회 출신이잖아?’
1세대의 영웅이자, 협회 출신의 군단장.
그가 왜 세최특을 아끼는 건가.
박영돈은 몰랐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저 기회가 되면 끌어내릴 준비를 할 뿐이다.
잡종 팬더가 떠나고.
그 옆에 누군가 다가선다.
익숙한 기척이다. 순혈 정가까지는 아니지만, 그에 준하는 게 바로 자신의 집안 아닌가.
결혼할 때 서로 핏줄을 보며 그리 시켰다.
정략결혼의 산실로 낳은 아들이 옆에 선다.
말끔한 얼굴, 가진 바 능력도 남다르다.
화림에 입사시키진 않았다. 대신 행안부 핵심 인사로 키울 작정이다.
그 능력을 증명할 기회도 있었다.
“유니크 타격팀에 갔으면 좋았을 텐데요.”
아들이 말한다.
“그래. 나도 그게 아쉽구나.”
박영돈은 아들을 보며 불쾌함을 지웠다.
제 가문 최고의 인재가 이곳에 있다.
세최특을 능히 씹어먹을 터였다.
착각은 자유였다.
* * *
쩡.
균열이 깨진다.
약속된 시간이 다가온다.
난 그전에 할 일을 다 했다.
“마리야.”
“네, 오라버니, 마리는 이해했어요.”
그래, 우리 착한 동생.
여기서 네가 날뛰면 곤란하다는 거다.
마리에게 요구한 건 목숨이 위험하지 않는 이상 변신하지 말고 냉정해지라는 것.
정아 누나한테도 마리 위주로 지원해 달라고 했다.
가진 바 능력은 뛰어나지만, 대형을 이루며 싸우는 경험은 적다. 그게 마리의 약점이다.
쉽게 흥분한다는 것.
평소에 이리 다소곳한 애가 싸우면 양손에 도끼 꺼내 들고 함성을 내지른다. 지금 모습을 보자면 쉽게 연상도 안 된다.
“필요한 건 쏜즈 하나야.”
깨지는 균열을 보자니, 미호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이곳에 와서 떠나기 직전까지 몇 번이고 나한테 전술을 설명했다.
주변을 정리하고 인베이더의 형태, 놈들이 할 행동 패턴.
모든 걸 분석해서 말한다.
내가 예상한 부분도 있었고, 놓친 부분도 있었다.
그걸 머릿속에 담아 시뮬레이션을 수정하기도 했다.
미호는 그리 모든 걸 쏟아내듯 말했고 난 그걸 보며 머쓱해져 농담을 건넸다.
“귀태 형 말고 나한테 반하면 곤란해. 삼각관계다.”
“미친 새끼.”
미호는 무표정하고 감정 없이 팩트만 전달하고 떠났다.
“엄마는 쟤도 괜찮다. 애가 솔직하네.”
엄마가 옆에서 미호를 칭찬했다.
“어디가요?”
“너보고 미쳤다잖니?”
네? 어머니?
미호가 떠나기 전, 협회에서 작정하고 능력자를 보내기도 했다. 그들은 균열을 노려보고 또 노려봤다.
처음에는 눈으로 인베이더를 죽이려고 하는 줄 알았다.
그건 아니었다.
그들의 능력은 ‘측정’.
곧 그들이 관측한 내용을 토대로 부대가 움직였다.
화림, 단군, 정부에서도 전력의 반 이상을 쏟아부은 작전 시작이다.
네임드 게이트 클로징이다.
그렇게 이곳에서 대기하는 상황이 된 거다.
쩡.
균열이 터지듯 깨진다.
그 안에서 삐죽하고 얇은 철사 같은 게 튀어나왔다.
내 눈이 그걸 잡아챘다.
“정기남.”
“봤다.”
나만 본 건 아니었다.
깨진 균열 사이로 튀어나온 철사가 낭창낭창 휜다. 그걸 보며 기남의 총구가 불을 뿜었다.
근거리 저격이다. 대구경 탄환이 날아가 철사를 때린다.
까-앙!
묵직한 쇳소리가 울렸다. 철사는 깨지지 않았다. 휘어지며 탄을 튕겨 냈다.
좀 우그러지긴 했으나, 촤르륵 소리를 내더니 파충류의 비늘처럼 누웠다가 일어나 우그러진 걸 폈다.
“연사.”
내가 말했다.
동시에 나도 양손에 든 기관총의 방아쇠를 당겼다.
균열을 깨고 나와서 통성명까지 하며 기다린 뒤, 싸우는 건 얼마나 멍청한 짓인가.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나오는 쏜즈 나이트의 일부를 보자마자 총알 세례를 퍼부었다.
곧 균열의 틈으로 두툼한 철사가 도로 쏙 들어갔다.
뭐야, 총알 좀 맞았다고 튀나?
그리 생각하자마자.
뻥!
공기 터지는 소리가 났다. 귀가 짜릿할 정도의 굉음이다. 그와 함께 균열에 구멍이 생겼다.
빠르다. 이런 건 들어 본 적도 없었다.
균열 이후 블랙홀이 열리는 속도가 남달랐다.
그리고 그 안에서 묵직한 쇳덩이 기사가 튀어나왔다.
촤르륵.
전신에 달린 가시와 같은 비늘.
쏜즈 나이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