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규격 외 혈통 천재-261화 (261/488)

261. 헤어진 커플

수비드 오겹살.

마리네이드가 잘 되긴 했는데 적당히 심심한 간이다.

그럼 간을 맞추면 된다.

작은 종지에 놓인 핑크빛 소금을 콕 찍어서 입에 넣었다.

우적.

기름기와 염분의 적절한 조화.

주문 따윈 들어가지 않았지만, 이건 마법이다.

다음은 머스타드를 얹어 먹고, 그다음은 칼라만시 와시비를 콕 찍어 명이나물로 싸 먹기도 했다.

우적우적, 꿀꺽.

치이이익.

바로 옆에서 손가락 두 마디 크기의 돼지 목살이 구워지고, 그 옆으로는 살치살 스테이크가 구워진다.

“아들, 맛있니?”

아버지가 물었다.

입에 음식이 가득 차 있기에 조용히 엄지를 들어 올렸다.

아버지, 존경합니다.

권력의 힘이 이렇게 대단하다.

정부, 단군, 협회 이렇게 세 개 단체가 모여 만든 식당을 프리 패스로 쓸 수도 있다.

아버지는 어머니와 나만 부른 것도 아니다.

NS 직원이 다 모였다. 아, 물론 중고 형과 스티븐 최처럼 비전투 인원은 데려오지도 않았다.

그 외 전투 가용 인원 중 팬더 형도 빠졌다.

지휘부와 할 얘기가 있다던가.

그 형 발 참 넓네. 알아서 지휘부 회의에도 끼고 말이야.

마리가 팬더 형 옆에 붙어 있다가 왔다.

그래서 모인 직원은 어머니, 실험체 출신 마리, 김근육 공주, 로즈 또라이, 너희 기남이, 홈즈 미호, 사랑꾼 귀태, 입 싼 요한, 표정 사기꾼 정직이와 원한 정아 누나까지, 날 포함해서 총 열 명이다.

정아 누나는 현장에 꽤 늦게 왔다.

볼일 보고 왔다고 하는데 무슨 일인지 물어볼 틈이 없었다.

대강 눈치를 보니까 화림에 들렀다 온 것 같긴 했다.

피지컬 소진은 화랑으로 돌아갔다.

“맛있어.”

옆에서 요한이 음식을 음미하며 읊조렸다. 불멸자의 미각은 예민하다. 그런데도 저런 소리가 나온다는 건, 요리가 상당히 괜찮다는 거다.

“쉐프 님이 솜씨를 좀 발휘하셨습니다.”

서빙하던 남자가 말했다.

요한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며 우적우적 씹고 삼킨다.

나만 에너지 소모량이 큰 게 아니었다.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작정하고 먹었다.

어머니부터 대식가이니, 말 다 했다.

마리는 말할 것도 없고.

특수종의 위장은 일반인의 상식을 뛰어넘는 법이니.

그릇이 쌓인다.

서빙하는 사람들 이마에 땀이 흘렀다. 고생하는 그들을 보며 정직이가 혀를 내둘렀다.

“더 먹습니까?”

“소모한 만큼 채워야죠.”

아버지가 옆에서 답했다. 곁눈질로 정직이를 보며, 날 향해 입 모양으로 물었다.

불멸자의 버릇이다. 작은 소리를 캐치할 수도 있기에 입 모양만으로 대화하는 건.

‘얘는 왜 데리고 다니니?’

‘쓸 만해요.’

‘이 친구가?’

‘열심히 하는 애예요.’

‘프로의 세계에서는 열심히 하는 것보다는 잘하는 게 중요하다.’

아버지는 조언을 좋아하신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짧은 대화가 지나갔다.

아버지가 입을 멈추고 뚝배기를 들었다.

설렁탕이네, 저것도 맛있겠다.

적당히 간 하고 소면 한 젓가락 후루룩 입안에 넣고 겉절이 김치를 하나 씹으면, 그곳이 곧 극락.

깍두기 국물 넣고 한 뚝배기 넣으면 속이 든든하다.

진짜 미친 듯이 먹고 또 먹었다.

전투 중에 소모한 체력이 실시간으로 채워지는 기분이다.

음식이 게임에서 나오는 체력 물약 같았다.

그리 먹는 와중이다.

아버지의 웃는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왜 그런지는 모른다.

그냥 눈에 들어왔다.

아버지의 분위기가 조금 전과 묘하게 달랐다.

같은 사람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자세히 보니 눈꼬리, 콧망울, 입꼬리도 평소 보던 아버지의 얼굴과 조금 달랐다.

이질감이 느껴졌다.

마치 다른 사람이 와 있는 것 같다.

내 시선을 느낀 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아들, 마음껏 먹어라. 아빠가 쏜다.”

“무료 제공이잖아요.”

먹으며 답했다. 눈이 아버지한테 떨어지질 않았다. 시선을 뗄 수 없었다.

보는 와중에도 기질이 변하는 게 느껴졌다.

내 감각이 예민해서 느끼는 건가?

아니다. 그런 종류의 변화가 아니었다.

난 새삼 왜 아버지의 별명이 사우전드 페이스인지 알 것 같았다.

보는 순간, 그 원리가 파악된다.

전투 중이 아님에도 알아서 내 몸의 모든 세포가 아버지의 변화에 집중했다.

기질이 변하기에 모든 게 달라 보인다.

얼굴 근육의 작은 변화마저 처음 보는 표정처럼 보이게 한다.

이런 게 가능한 이유는 순혈 불멸 중 아버지와 내 피에 흐르는 힘 덕분이었다.

기척 죽이기의 기반이 되는 건, 제 몸에서 나오는 모든 정보를 차단하는 것.

그건 곧 소리, 기색, 움직임, 공기의 파동 따위를 본능에 가까운 육감으로 컨트롤하는 것.

아버지는 그렇게 했다.

작은 행동, 의미 없는 동작을 반복해 새로운 사람이 됐다.

난 그걸 보며 감탄했다.

“잘생긴 얼굴 계속 보면 뚫어진다. 아들.”

눈웃음 지으며 아버지가 말했다.

“얼굴은 못 물려받았군.”

그 사이로 로즈의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작게 속삭이긴 했는데 바로 옆이라 귀에 쏙 들어왔다.

“조용히 해라. 너 죽이고 싶어서 환장한 사람이 저기 있으니까.”

말하며 슬쩍 정아 누나를 가리켰다.

얼음장을 빚어 놓은 듯한 표정으로 앉은 정아 누나의 옆에는 캐쉬 히포가 비스듬히 세워져 있었다.

수틀리면 당장 로즈 머리에 하마의 이빨을 박아 넣으려 할 사람이다.

“줄 서라고 해. 나랑 그렇게 놀고 싶은 사람이 한둘이겠어?”

테러범에서 이쪽으로 전향한 뒤로 기가 죽어서 찍 소리도 못 하더니, 다시 기가 살았네.

태연하게 지껄이는 데 틀린 말도 아니긴 했다.

전직 테러리스트, 특히나 프로메테우스에 원한이 있는 사람이 정아 누나 하나일까.

그런데도 로즈는 뻔뻔하게 고개를 들었다.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아니면 정신머리를 놓고 다닌다고 해야 하나.

뭐, 다행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당장 인베이더랑 피 튀기는 한 판을 해야 하는데, 기죽어서 빌빌대는 것보다야 백 배는 낫지.

정아 누나도 이해할 거다.

잠깐 정아 누나와 시선이 마주쳤다.

그 눈이 날 바라보진 않았다. 아주 잠깐 감정을 보이는 그 눈빛은 로즈를 스쳤다.

명백한 살기였다.

난 김정아란 사람을 알지만, 본래 사람 속은 다 알 수 없는 법이다.

저 차갑고 이지적인 인간 안에 이리 숨길 수 없는 살기가 있을 줄 누가 알았겠나.

깊은 원한은 쉬이 녹지 않는 빙하가 되는 법이라고 했던가.

정아 누나의 한이 그래 보였다.

꽁꽁 언 빙하 같다.

태양 빛 레이저로 후려쳐도 녹지 않을 그런 얼음덩이.

그나저나 스펠 나이트랑 기타 등등 몇 놈은 어쩌려고 그러나.

청기사가 거느리는 중간 보스가 스펠 나이트 하나만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야.

지휘부에서 알아서 하려나.

근데 최종 지휘는 누가 하는 걸까.

일은 예상할 수 없는 타이밍에 터졌고 그 모든 일의 중심부에서 싸우는 바람에 들은 얘기가 적다.

요한 형이 아는 것도 몇 개 있는 것 같긴 하지만, 딱히 도움 되는 정보도 아니다.

그 와중에도 아버지 기질은 또 변했고.

난 등 뒤로 익숙한 기척을 느꼈다.

정확히는 식당 문 쪽이다.

자신을 숨기지 않고 식당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이다.

문이 열리고 빛나는 머리가 들어온다.

음?

숟가락을 입에 물고 들어온 사람을 빤히 바라봤다.

발모제가 개발됐음에도 대머리를 고수하는 특수종 세상의 패셔니스타다.

딱 붙는 방검방탄복 위로 전투 조끼와 수류탄, 권총을 비롯한 장비, 허벅지 옆에 붙은 기관단총과 왼쪽 어깨 위로는 삐죽한 봉 따위가 솟아 있다.

불멸특수대 복장 위에 커스터 마이징 장비가 섞인 차림이다.

불멸특수대 화림의 직원이었다.

이장모 본부장이다.

화림의 인사본부장이자, 오티 때 전체를 관리하던 사람 좋던 양반이 여전한 수수한 미소와 함께 식당에 들어섰다.

“밥이라도 먹으면서 보자는 겁니까.”

아버지를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연다.

그 뒤로 불멸자 넷이 더 들어왔다.

전부 아는 얼굴이었다.

분석 2팀장의 김한, 여전히 머리를 빨갛게 염색한 마조히스트 촛불 남자이자 화림의 감사 1팀장.

그 뒤로는 작은 체구에 어울리지 않는 변신족 급 근력을 자랑하는 내부 감사 1팀장 박다람.

그 뒤로는 금테 안경의 남 사장 비서 형.

눈이 마주치기에 눈으로 인사했다. 그쪽은 날 외면했다.

마지막으로 호남이 형이 들어섰다.

보기만 해도 조명이 하나 더 늘어날 것 같은 미남미녀가 줄줄이 들어오니 주변이 밝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호남이 형과도 눈이 마주쳤다.

이번에는 저쪽에서 먼저 슬쩍 눈으로 인사하기에 나도 반가워서 미소를 보였다.

기남이는 아는 척도 안 했다.

이 새끼는 진짜 가정 교육을 어떻게 받았길래 제 친형이 왔는데 눈도 안 돌리는지.

순혈 정가 가주가 자식 농사는 망쳤다.

“배 안 고픕니까?”

아버지가 그 말을 받았다. 난 그 말투에서 기묘한 분위기를 읽었다.

뭘까.

뭔가 아버지가 명령하는 위치 같다.

말투는 정중했고 그저 제안일 뿐이지만, 주도권이 아버지에게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출출할 참이긴 하군요.”

이장모 본부장이 답했다.

불멸특수대 다섯이 들어오기 무섭게 그 뒤에서도 누군가 들어왔다.

또각또각.

구두 굽 소리가 그 존재를 먼저 알린다.

보라색으로 염색한 긴 머리, 진한 화장, 달라붙는 레깅스 위로 입은 방검방탄복, 다시 그 위로 밍크코트를 걸쳤다.

뭐냐, 이 시대를 초월한 패션 센스는.

근데 이게 또 이상하게 어울린다. 눈매가 너무 진해서 레이저가 나올 것 같은 여자였다.

거기에 진한 향수 냄새가 코를 찔렀다. 마리가 코를 쥐며 중얼거렸다.

“고약한 냄새가 나요.”

좀 독하긴 하네.

“같은 식탁에서 밥 먹자고요?”

여자가 들어서며 입을 열었다.

이건 또 누군가 보고 있자니, 이장모 교관이 어색하게 웃다가 표정을 바로 하고 말했다.

“부협회장이 직접 오신 겁니까?”

“제 자리가 본래 할 일이 없으니까요.”

여자가 눈웃음을 지으며 마치 이제 발견했다는 듯, 이장모 교관을 바라보며 말했다.

물론 여자의 뒤쪽에도 일행이 있었다.

그 뒤에 선 이들도 하나같이 만만찮아 보였다.

그들을 관찰하는 와중에 정직이가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불닭.”

불닭, 머릿속에 들어있는 이름이다.

사이오닉 협회가 자랑하는 사이킥 마스터 중 하나다.

한국에서 손꼽히는 초능 능력자로 알려진 작자다. 정직이의 눈빛이 여자의 뒤쪽을 향했다. 날렵해 보이는 턱선을 가진 남자가 보였다.

“알아?”

그걸 보며 물었다.

“멀리서 본 적 있습니다.”

정직이가 눈을 깜박이며 답했다.

딱히 인연이 있는 사이는 아닌 듯싶다.

정직이가 들어온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눈을 깜빡인다.

이게 무슨 상황인가 싶은 거지.

나도 그래.

난 호남이 형 포함, 불멸특수대의 면면을 살폈다.

그 가진 능력만으로 화림 내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이들이다.

사이오닉 협회도 마찬가지로 보였다.

그 얼굴에 보이는 오만함을 제하더라도 만만찮아 보이긴 하니까.

그나저나 이 사람들 사이가 그리 좋아 보이진 않네?

“여전히 위가 시원하네요. 요새 회사는 잘 돌아가고요?”

협회 부회장이라는 보라돌이가 말한다.

“나쁘진 않지요.”

이장모 교관이 답했다.

“나쁘진 않아요? 본래 궁핍한 거 좋아하시는구나. 몰랐어요.”

보라돌이 여자가 생긋 웃는다.

대놓고 갈군다. 약 올린다. 최근 화림 금전 사정이야 누구나 아는 이야기니까.

“세상에 돈보다 중요한 게 많으니까, 아, 이건 알 만한 사람한테 할 이야기인데, 못 알아들었어도 이해합니다.”

너 나랑 얘기할 수준 아니지 않냐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그런데 이장모 본부장이 말을 본래 이렇게 했었나?

오티 때 말고는 한없이 유순해서, 화림에선 같이 일하고 싶은 상사를 뽑을 때 항상 1위만 하던 사람 아닌가.

“기회주의자.”

보라돌이 여자가 말한다.

“아버지가 둘이 되니 좋습니까?”

대머리 본부장이 말을 받는다.

여자 얼굴에 칼을 댄 흔적이 조금 보이긴 했다.

낳아준 아버지와 얼굴을 새로 만든 아버지.

드립이 찰졌다.

여자의 이마에 핏대가 섰다.

파직.

둘 사이에 스파크가 튀었다.

인베이더랑 싸우기 전에 여기서 한 판 하게 생겼네.

그 순간이다.

드륵.

의자 다리가 바닥에 끌리는 소리가 났다.

옆을 보니 요한 형이 의자를 당겨 붙어 앉았다.

그 눈에 어린 욕망이 읽힌다. 말하고 싶어 환장한 눈빛이다.

나도 궁금한 참이라 슬쩍 눈으로 물으니 요한 형이 입을 열었다.

“둘이 결혼했던 사이.”

“했던?”

“지금은 이혼했고.”

그제야 둘이 서로를 향한 증오가 이해됐다. 헤어진 커플, 아니 부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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