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7. 또라이가 왔다
딸깍.
테이블과 유리잔이 만나 작은 소음을 만들었다.
“도울 방법을 찾아볼까요?”
이지혜가 말했다. 잔을 내려놓았던 강만추 경찰청장은 말없이 다시 잔을 들어 목을 축였다.
용암이라도 삼킨 듯, 화끈한 액체가 식도를 타고 가슴팍을 화끈하게 데웠다.
식탐은 없지만, 술은 좀 가린다. 청장의 몇 안 되는 취미가 음주였다.
“반했나?”
반쯤은 농담으로 던진 말에 이지혜 팀장이 진지하게 되물었다.
“어떻습니까? 꿰차면 저 시집 잘 갔다는 소리 듣겠죠?”
노처녀까진 아니지만, 나이는 찼다.
연상의 매력을 어필하면 될까?
청장은 이지혜를 빤히 보다가 유광익이 반은 불멸자라는 걸 떠올렸다.
불멸자의 심미안은 일반인의 기준과는 좀 다르다. 거기에 그 유광익을 노리는 여자가 어디 한둘일까.
남자인 자기가 봐도 매력이 흘러넘치는 친구다.
“경쟁 상대가 좀 세지 않을까?”
“아무래도 그렇겠죠?”
“좀 그렇지.”
“저 왜 기분이 나쁘죠?”
“글쎄다.”
“이상하게 불쾌하네요.”
둘은 그리 말하고 픽 하고 웃었다.
애초에 진지하게 한 얘기도 아니다.
“지금이 딱 좋아.”
“네?”
“그 비정상 회사는 지금이 딱 좋다고. 더 크면 골치 아파.”
“왜요?”
“몰라서 묻는 거 아니지?”
아니었다. 그저 돕고 싶었다.
여러모로 빚을 만들어 두면 좋은 사람이지 않나.
“무슨 생각으로 그러는지는 아는데.”
말하며 이지혜의 잔에도 술을 따랐다.
쪼르륵.
스트레이트 잔을 가득 채운 뒤, 병을 바로 세운 청장이 말을 이었다.
“괜히 순혈 정가의 개수작을 그냥 놔뒀을까, NS는 지금 규모가 딱 좋다. 지금보다 커지면 이쪽 시장의 판이 변하게 될 거고 안 그래도 지금 그 회사가 하는 짓 중에 정상은 없잖나, 무엇보다 기득권층에서 그걸 바라는 인간은 누구도 없을 거다. 정부도 그렇고, 외가인 단군도 마찬가지고. 단군이 순혈 정가의 수작을 몰랐을까, 알고도 놔둔 거다.”
이지혜는 잔을 비웠다. 훅하고 숨을 내뱉자, 알코올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경찰도 같은 입장이겠네요.”
“말해 뭐 하나.”
NS는 지금이 딱 좋다. 더 커져서 일을 크게 벌이면 상대하기 어렵다.
공권력과 특수종 세상의 질서를 가뿐히 무시하는 행보.
그 무엇도 환영받을 만한 짓은 아니다.
무엇보다 쉬이 손을 내밀기 어려운 상황이기도 했다.
청장은 안다.
정부도, 단군도 NS가 더 커지길 바라지 않는다는 걸.
회사의 규모를 규제하는 것 중 사람이 모이지 않게 하는 건, 가장 단순한 방법이지만, 효과적이긴 했다.
그러므로.
‘어렵겠지.’
당분간 NS가 더 몸집을 키우긴 어렵다.
팩트와 루머 사이.
NS에 입사하면 반나절 만에 객사한다는 말도 도는 판이다.
거기에 누가 들어가겠나.
“그렇게 놔뒀는데 알아서 크면요? 광익이가 수습해서 키우면요?”
“그럼 인정해야지. 새로운 시대를 여는 키가 그쪽에 있다는 걸.”
시대는 변한다.
이제껏 그래 왔다.
블랙홀이 열렸을 때, 특수종이 나왔을 때, 아더 사이드의 문이 열렸을 때, 네임드가 나왔을 때.
‘새로운 시대라.’
딸깍.
얼음에 녹아 옅어진 주향이 코끝을 스친다. 청장은 술을 한 모금 머금어 넘겼다.
이지혜는 그걸 보며 지금쯤 광익은 뭐 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순혈 정가를 뒤집어놓고 유유히 빠져나갔다는 소식은 진즉에 들었다.
‘뭐하니, 너.’
정가를 공격하면 안 된다고 부탁하기도 했다.
제 부탁을 들어준 게 아닌 건 알지만, 무작정 고맙다는 말로 대신했다.
이리 인연을 이어 놓아야 또 볼 핑계가 있지.
‘혹시 모르니까.’
청장도 자신도 광익의 옆자리를 차지하는 건 어렵다고 생각한다.
그래도 기회가 왔을 때 잡으려면 그 곁에 있어야 하지 않겠나.
‘연상의 매력에 빠지면 못 나온다고, 광익 씨.’
잡스러운 상상을 하며 웃자, 옆에서 청장이 물었다.
“너 야한 생각 했지?”
“그거 성희롱입니다. 청장님.”
“신고해라. 제복 벗고 마누라랑 여행이나 다니게.”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시네요.”
“그래서 뭔 생각했는데.”
“그냥 뭐, 광익 씨 생각 조금.”
말하며 조금 부끄럽긴 했다. 정확히는 그 광익의 벗은 몸을 떠올렸으니까.
“포기를 모르는구나.”
“그게 제 특기죠.”
“좋지. 특기.”
말하며 청장이 잔을 들었다. 둘은 잔을 부딪쳤다.
골치 아픈 이야기는 뒤로한 채, 좋은 술친구가 될 건배사를 하며.
“연상의 매력이 먹히길 기원하며.”
* * *
또라이가 왔다.
“너 서울 집값이 얼마인 줄은 아냐?”
대뜸 와서 이리 묻는 또라이를 보고, 기남은 무시하려 했다.
어지간하면 그러려고 했는데.
툭 하고 발을 건다. 그걸 피하니 슬쩍 손을 뻗어 눈앞에서 휙휙 저었다.
기남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뒤로 젖히며 가드를 올렸다.
룸메이트 시절에 흔히 있던 일이었다.
이 또라이는 살의나, 투기를 조금도 내비치지 않고 때리는 걸 잘했다.
그러니 기남의 행동은 본능이었으나.
정작 또라이의 손이 자신을 가격하는 일은 없었다.
눈앞에서 휙휙 휘저을 뿐이었다.
“……기남아, 어디서 맞고 다니니?”
그걸 보고 또라이가 말했다.
“뭐 하는 짓이냐?”
기남은 가드를 내리며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나 안 보이나 해서.”
“보인다.”
“그럼 왜 대답을 안 하고 그러냐? 오랜만에 봤는데 서운하게.”
우리가 서운할 사이냐?
눈으로 놈을 노려보고 입을 열려다가 말았다.
미친놈은 피하는 게 상책이니.
그리 말하며 저벅저벅 회사 복도를 걷는데 놈이 옆에서 바짝 붙어서 따라왔다.
맞은 편에 오던 보안 2팀 여자 대리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물었다.
“광익 씨? 오랜만이네요?”
“아, 잘 지냈죠?”
“어쩐 일이에요?”
화림 내를 활보하고 다니니, 저리 물을 만도 했다.
외부인이 사내를 제집처럼 편안히 돌아다니는 꼴이라니.
광익이 그 말에 가슴팍에 매단 출입증을 흔들어 보였다.
“헤드헌팅 중입니다.”
그 말에 2팀 대리가 풉 하고 웃었다.
“농담도 잘해.”
그리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어떤 미친 헤드헌터가 사내로 직접 들어와서 개수작을 부린단 말인가.
좋게 봐줘도 상도덕이 없는 거고.
나쁘게 보면 이건 아주 개자식이다.
“언제 밥 한번 먹어요.”
대리가 말하며 지나쳤다.
“네, 좋죠.”
싱글 생글 웃으며 놈이 옆으로 비켜서자, 여자 대리가 지나쳤다.
“미친놈.”
헤드헌팅이라니.
“피곤하다. 진짜, 나 왜 인기 있냐?”
“상또라이.”
“응? 뭐라고? 인기 없는 순혈 불멸자가 하는 말이라 안 들리는데에?”
총을 쏘고 싶었다. 기남은 꾹 참았다.
사내에서 그리 큰 소동을 피울 수는 없지 않나.
무엇보다.
“일주일에 두 번 이상.”
“뭐?”
“내 책상에 놓이는 선물이나 편지다. 회사 다닐 때 그런 적 없었을 텐데?”
“오, 정기남이 아직 안 죽었구나.”
괜한 말을 했다. 또라이의 표정을 보니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들었다.
“월급 깎였다며.”
그리고는 불쑥 화제를 바꿔서 치고 들어온다.
“오, 광익이?”
또라이는 간간이 지나는 사람에게 인사하는 여유도 보였다.
“잘 지냈지?”
“아주 죽을 맛이다. 요한이 보러 왔어?”
“아니, 기남이 보러.”
지나가던 동기가 자신과 또라이를 번갈아 보다 읊조렸다.
“둘이 친했구나.”
“룸메이트였다고.”
또라이가 웃으며 답하기에 기남은 제 입을 컨트롤할 수 없었다.
그는 반사적으로 쏘아붙였다.
“안 친해. 안 친하다. 이상한 소문 퍼트리지 마라. 이 새끼가 일방적으로 달라붙는 거다. 안 친해, 전혀. 조금도.”
“야, 서운하게 왜 그러냐. 너희 집에 말없이 갔다 와서 그러냐? 야, 그건 어쩔 수 없었다니까, 새끼가 그런 거로 삐져 가지고.”
……뭐?
순혈 정가를 가든 말든, 자신은 신경도 쓰지 않았다.
그런데 이 타이밍에 이리 말하니, 자신이 밴댕이 속을 가진 사람처럼 보이게 하는 효과가 있었다.
동기는 그 연기에 깜빡 속았다.
“아, 그, 음.”
할 말이 없는지 그리 말하고 자신을 힐끔 보더니 휙 지나친다.
“나중에 보자.”
“응.”
그리 또 동기가 지나쳤고 기남은 무기고로 걸음을 옮기기로 했다.
산탄총을 꺼내 또라이의 머리통을 날려 버리고 싶었다.
“기남아, 서울 집값 얼마인 줄 아냐고?”
열이 뻗친다. 조금 전까지 신나게 놀려먹더니, 이리 말한다.
제멋대로 말을 이어나간다.
“몰라.”
기남은 답했다.
답하지 않으면 밤새도록 물을 놈이다. 룸메이트 시절에도 느끼지 않았나.
이 새끼는 정신병이 있다.
“적당히 30평대 아파트값이 10억이 넘는단다. 10억만 하면 괜찮게? 보통 ‘어? 여기 괜찮네’ 하는 대단지 아파트 있지? 15억으로 시작하더라고. 근데 요새 화림은 어떠냐? 연봉 삭감했지?”
회사가 어렵다고 해서 전 직원 연봉 삭감이 이뤄졌다.
그게 아니면 구조조정이었다.
선택지가 없었다.
딱 1년만 고생하면 된다고 사장이 직접 연설했지만, 다들 좋아하는 눈치는 아니었다.
복지 수준도 나날이 떨어져 가고 있고.
“1억으로 시작하자. 형이 인센티브도 좀 챙겨 줄게.”
“미친 새끼.”
누가 뭐라고 해도 이 새끼 밑으로 갈 생각은 없다. 동업자라면 모를까.
무시했다.
“야, 생각 잘해. 늦으면 자리 없다.”
광익은 그대로 뒤로 멀어져 갔다.
휘파람을 불며 다른 곳으로 가는 걸 보니, 또 다른 사람에게 개수작을 부리러 갈 게 분명했다.
기남은 그대로 걸었다. 사무실로 돌아가자, 보안 3팀은 텅 비어 있었다.
김정아는 요새 뭐가 그리 바쁜지 자리에 붙어 있질 않고.
이중봉 팀장은 툭하면 윗선이 호출했다.
그리 앉아 있자니, 곧 사내 메신저가 울렸다.
[정호남 과장] 옥상.
형이었다. 기남은 옥상으로 향했다. 먼저 와 있던 형이 난간에 팔을 기대고 있었고, 그 옆으로 김이 나는 커피 두 잔이 놓여 있었다.
믹스 커피였다.
한 잔을 들고 그 옆에 서자, 형이 입을 열었다.
“기남아.”
“여기 회사입니다.”
“그래, 정기남 대리, 광익이가 왔다지?”
이놈의 소문은 얼마나 빠른 건가.
이미 형의 귀에도 이야기가 다 전해졌다.
자신을 스카우트하러 왔다는 것과 자신이 광익에게 가지 않을 거라는 것도 사람들이 안다고.
“네, 안 갈 겁니다.”
“왜?”
“……왜냐고 묻는 겁니까?”
“그래.”
그 새끼 밑에 가고 싶지 않은 이유 따위야 말하자면 백 개도 넘을 거다.
다만 입 밖으로 내자니 추잡스럽다.
제 수건과 샴푸를 쓰는 놈이라서?
룸메이트 당시, 자신을 괴롭히는 거에 희열을 느끼는 변태라서?
아니면 같은 선에서, 아니 자신보다 뒤에서 시작해서 지금은 저 앞까지 나아가 버린 놈의 뒷모습을 보기 싫어서?
그 무엇하나 입 밖에 내기 어렵지 않나.
“내 목표는 알지?”
안다. 정호남 과장, 형의 목표는 가주가 되는 거다.
순혈 정가의 폐단을 뿌리 뽑고 없애고자 한다.
그리하여, 새로운 정가를 만드는 것.
형의 인생 목표다.
“그럼 넌 뭐가 하고 싶은 거냐?”
없다.
처음에는 정가가 인정하는 불멸자가 되고 싶었다.
그 작고 소박한 꿈은 금세 사그라졌다.
나이를 먹고 세상을 보는 눈이 생긴 뒤, 정가가 얼마나 더러운 곳인지 알았으므로.
“유광익 잡아라.”
형이 말한다.
그 말에는 많은 의미가 내포되어 있었다.
목표를 잃었기에 기남은 의욕을 잃었다. 아니, 잃었었다.
그 의욕을 찾은 건.
‘또라이 새끼.’
유광익 때문이었다. 놈과 경쟁하기 위해, 놈에게 맞지 않기 위해, 놈과 동등해지기 위해.
그리 제 실력을 갈고닦았다.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놈이 회사를 나간 뒤로 기남은 훈련에 더 열을 올렸다.
옆에서 보는 사람이 혀를 내두를 정도로.
고통 감내 훈련을 감당하는 김한이 그런 기남을 보고 ‘내 뒤를 이어라.’라고 말하기도 했다.
혹독함, 고작 말로는 형용할 수 없는 시간은 무엇을 위한 것이었나.
“따라잡고 싶다면 옆에서 뛰는 거다. 뒤에서 뛰는 게 아니라.”
기남은 형의 눈을 똑바로 바라봤다.
자신이 떠나면 그럼 형은 어떻게?
이제까지는 자신이 그나마 힘이 되어주려 했다.
후일 정가를 집어삼키려는 형의 야망에 기남의 도움도 분명 필요할 것이다.
“그럼 형은?”
불현듯 말하니.
호남이 기남의 시선을 회피한다.
음?
눈을 왜 피해?
그러더니, 중얼거렸다.
“너 받고 광익이가 도와주면 그게 더 도움이 될 것 같아서.”
“……내가 뭘 잘못 들은 것 같은데.”
“광익이가 부탁하더라고. 나중에 도와준다고.”
부르르.
그 타이밍에 전화가 울렸다.
광익한테 온 메시지였다.
[또라이] 인기쟁이 너희 기남아, 와라, 형이 놀아 준다. 일주일에 한 번씩.
빠직.
머릿속에 있던 무언가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죽인다. 반드시 죽인다.
반드시 저 또라이보다 실력을 쌓아 그 얼굴을 뭉갠다.
반드시 그리할 것이다.
그 이지적이고 차가웠던 형이 저런 표정을 짓다니.
자기가 말을 뱉고서 무안했는지, 괜히 커피를 후루룩 마시는 모습이다.
“……이직할게.”
“그래.”
형제의 얘기가 끝났다. 기남은 어금니를 너무 꽉 깨물며 말한 바람에 입안에서 피비린내가 났다.
잇몸이 조금 상한 듯했다.
그 상태 그대로 메시지 답변도 썼다.
반드시, 죽여 버리겠다고.
입사한 이유는 그것뿐이라고 그리 전했다.
답장이 왔다.
[또라이] 건투를.
“으아아아!”
참지 못한 순혈 불멸자가 계단에서 괴성을 내질렀다.
기합조차 지르지 않는 불멸자의 세상에 퍼진 분노의 외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