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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격 외 혈통 천재-239화 (239/488)

239. 고마워, 형

“나 알 칼리드 볼리아나가 말한다.”

그 한마디에 살아남은 호위와 장로, 아군 모두의 시선이 모였다.

짧은 침묵, 알이 의도한 침묵이 좌중을 흘렀다.

주변 시선을 사로잡을 줄 아는 왕자다.

이후 알은 조용히 숨을 고른 뒤 말을 이었다.

“이 일은 모두가 함께해 준 덕이지만, 특히 한 사람의 덕이 크다. 내 대관식이 끝나는 대로 모두에게 알릴 것이다. 나 하나가 아니라 이 나라가 그에게 빚을 졌노라고.”

……음?

“장로원이 가진 비리가 이 나라를 좀먹고 있음을 모르는 이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누구도 꺾을 생각을 못 했다. 그 이유는 다들 알 것이다. 하지만 드디어 오늘, 비로소 이루어 냈다. 그 고마움을 영원히 잊지 않을 것이다. 지금 당장 파티를 열어 줄 수는 없다. 영원히 남을 선물을 주기도 어렵다. 하지만 이 마음이 식을 일은 없을 것이다. 나 알 칼리드 볼리아나는 그대의 영원한 친우가 되리라. 내가 왕좌에 있는 동안, 에르자루드는 그대에게 무엇이든 양보할 것이다.”

왕자는 말을 멈추고 좌중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이 말은 곧 약속이요, 맹세가 되리니, 내 불꽃이 심장에 이 말을 새겨 신뢰의 상징이 될 것이다.”

나 이거 어디서 들어 봤는데.

알이 해 준 말이었다.

초능국에서 불꽃으로 심장에 새긴다는 말은, 맹세 오브 맹세 같은 거라고.

쉽게 말하면 내가 땡전 한 푼 없는 거지새끼라고 해도 보증도 서줄 수 있는 거라고 했었다.

간과 쓸개를 빼 주는 사이가 되겠다는 선언이다.

지금 알이 말한 건, 그런 맹세였다.

왕자의 말이 끝나자, 다니엘이 눈을 부릅떴고 나머지 왕자의 호위단도 말을 잇지 못했다.

침묵이 이어졌다.

싸늘했다. 비수가 날아와 심장에 꽂히는 것 같았다.

분위기가 묘해지는 가운데, 장로 중 하나가 침묵을 깼다.

“왜 그런 맹세를…….”

“네 알 바 아니다.”

말하며 왕자가 나에게 눈을 부라렸다.

그러자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모였다.

“그 은인을 소개하지, 내 친우다. 한국의 유광익.”

여전히 싸늘하다.

왕자가 눈짓했다. 당장 자기 옆으로 튀어오라고.

못 본 척하자니, 이거 분위기가 등을 떠민다. 한 걸음 나섰다.

“네, 제가 유광익입니다.”

아는 사람도 있었고 모르는 사람도 있었다.

세최특이란 이름만 아는 이들도 있었고.

왕자의 호위와 핵심 인사도 몇몇 자리에 있었는데, 그들이 이게 뭐냐고 좌우로 고개를 돌리는 게 보였다.

이 상황의 설명을 바라는 눈치로 보였다.

그리고 다니엘이 눈을 질끈 감더니, 말했다.

“네, 전하.”

계승식은 이뤄지지 않았지만, 이 자리에 있는 이들은 알을 왕으로 섬길 이들이다.

다니엘이 한쪽 무릎을 꿇고 왕에게 머리를 숙인다.

꽤 중세스러운 분위기였다.

“네, 전하.”

눈치를 보던 이가 다니엘을 따라 하자, 몇몇이 그대로 또 따라 하고.

결국, 모두가 똑같이 답하고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였다.

난 서 있었다.

알이 날 보며 고개를 숙일 필요가 없다고 고개를 저었다.

내 일행도 슬그머니 눈치를 보다가 뒤로 물러났다.

문틈으로 정소진이 무슨 일인가 눈알을 굴리는 게 보였다.

그런 내 앞으로 알이 다가왔다.

얘가 나중에 진짜 보증 서 달라고 하면 어쩌려고 이러나.

하여간 다가온 알이 무슨 말을 하나 싶어서 귀를 기울였다.

몇 번 말을 입안으로 굴리는지, 쉽게 말을 뱉지 못한다.

왕자가 바짝 다가왔다.

그리고 눈을 피하며 진짜 작게, 불멸자가 아니라면 들리지도 않을 소리로 속삭였다.

“고마워, 형.”

“응? 뭐라고?”

진짜 너무 작아서 못 들었다.

“다 들은 거 안다.”

알이 어금니를 깨물며 말했다.

“아니, 진짜 못 들어서. 뭐라고?”

“씹.”

알은 알이었다. 육두문자의 알이 입술을 오물거리다 다시 중얼거렸다.

“고맙다고, 형.”

그 말에 나도 모르게 풉 하고 웃음이 터져 버렸다.

사실 무역권이고 뭐고, 이 한마디 덕분에 이 일을 한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닝기럴.”

알은 다시 알답게 말하고 다니엘의 팔을 발로 툭 찼다.

“가자.”

일이 끝났다. 더는 내가 해 줄 일이 없었다.

남아서 뭐, 피의 숙청을 하는 알의 칼이 될 일도 없고.

그렇다고 한가하게 파티를 할 시간도 없으니.

이대로 우리도 돌아가야 했다.

“고객님, NS를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알의 등을 보며 내가 말했고.

“애용하지.”

왕이 될 어린 왕자가 답했다.

그렇게 우리는 일을 끝내고 돌아오는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첩보 수준을 방불케 하며 왔지만, 돌아갈 때는 편했다.

이미 퇴로를 마련한 왕자 덕분이었다.

자식이, 답지 않게 세심해.

“고마워요.”

돌아오는 길에 김근육 씨가 날 향해 말했다.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괜찮다고 답하는데.

“둘이 사귀니?”

어머니가 대책 없이 끼어들었다.

“아닙니다.”

정색하고 답했다.

“음, 제가 그렇게 매력이 없나요?”

덕분에 신입 사원에게서 이상한 말을 들어 버렸다.

묘한 뉘앙스의 말이기에, 오랜만에 내 이상형을 읊어 줬다.

그러자, 신입 사원 김근육 씨가 날 몹시 이상한 눈빛으로 바라봤다.

그 눈빛이 마치, ‘고자예요?’라고 묻는 것 같아서 이상하게 불쾌했다.

하여간 일은 잘 끝났다.

10억짜리 호위 일에서 스케일이 커지긴 했지만, 좋은 게 좋은 거라는 거다.

“아들.”

앞에 앉은 어머니가 날 불렀다.

“네, 어머니.”

“본래 일할 때 이렇게 했니? 화림에서도?”

이렇게 항상 일을 키우진 않았다고 하려다가 입술을 멈췄다.

가만 생각해 보니.

사수랑 처음 나갔을 때, 본부 말 안 듣고 눈먼 개 수십 마리를 때려잡았고.

보안 3팀으로 아더 사이드에 갔을 때는 테러 단체랑 싸우다가 일이 커졌고.

그 뒤에는 호랑이 가면 쓰고 머니 & 세이브를 습격했다.

그 뒤에도 만만치 않은 일의 연속이었지.

마리 구하고, 왕자 납치하고.

그 어디에서도 조용히 지나간 일이 없었던 것 같은데.

“그랬구나.”

나 대신 어머니가 답했다.

생각해 보니까 시작은 미약했으나, 그 끝은 항상 살벌했던 것 같았다.

“제가, 꼭 그러려고 한 건 아니었던 것 같은데.”

“뭐 어떻니, 좋은 게 좋은 거지.”

괜히 우리 어머니가 아니었다.

나와 같은 마인드다.

알이 파티랑 선물은 안 줬지만, 전용기는 내줬다.

편히 타고 왔다.

김근육이 공주의 시신을 어디서 구해 왔냐고 물었다.

“아는 사장님 연구실에서 연구원 괴롭히니까 나오던데요.”

“아, 연구원을 괴롭히면 뭐가 나오는 거군요.”

이상한 오해를 한 것 같긴 한데.

“네, 뭐.”

틀린 말은 아닌 것 같으니.

소진은 내 곁에 다가와 재잘재잘 떠들었다.

“진짜예요? 왕자랑 친구 먹은 거?”

친구는 이전에 먹었고, 본래는 내가 친구가 되어 준다고 했으니까.

그때는 걔가 글로벌 왕따였다.

“진짜 생각 없어요?”

한참 떠드는 말에 대강 대꾸해 주니, 소진이 이리 묻는다.

무슨 생각이냐고 되물으려다가 그 눈빛에 담긴 정염의 불꽃을 보고 말했다.

“이 비행기에 제 모친이 함께 타고 계시는 건 알죠?”

“저 소리 안 낼 수 있어요. 몰래 가능.”

닥쳐라, 좀.

음란마귀인가.

기남과 미호는 조용했다.

정기남은 가끔 날 보고 눈을 흘겼지만, 뭐, 그러려니 했다.

요새 화림이 어렵다더니, 애가 좀 망가졌구나 싶었다.

로즈는 말없이 있다가 툭 한마디를 뱉었다.

“넌 확실히 미쳤어.”

“내가 할 말을 네가 하냐.”

프로메테우스에 있다가 전향해서 역으로 그 집단을 불태우는 걸 목적으로 삼은 애가 할 말이냐?

하물며 얘가 여기서 좋은 대우를 받는 것도 아니다.

NS 안에 있을 때야, 우리 어머니도 그렇고 과외 선생 둘도 그렇고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마리야 별생각이 없고 정직이야 훈련받고 토하기 바쁘니까 놔두고.

그런데 나와 보니까 이게 또 그렇다.

기남이랑 미호, 정소진은 확실히 로즈를 무시했다.

내가 있으니 뭐라고 말은 못 하는 것 같고 아예 없는 사람으로 취급해 버렸다.

미워하는 것보다 심한 게 무시하는 거라고 했던가.

저 셋은 그렇게 했다.

로즈를 투명인간처럼 취급했다.

“난 널 이해할 수 없다.”

정기남은 눈으로 로즈를 슬쩍 보며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날 이해하고 싶어?”

라고 대답해, 기남이 기겁하게 만들긴 했지만, 로즈의 대한 대부분 사람의 태도를 엿볼 수는 있었다.

앞으로 누굴 만나도 좋은 대우 받기는 글렀다는 거다.

어쩌겠나, 자기가 판 무덤인데.

하물며 내가 로즈를 데려온 걸 안 사수는 이후 나한테 연락 한 번이 없다.

단단히 삐진 게 분명하다.

프로메테우스라면 치를 떠는 사람이니까.

무리해서 데려오긴 했다.

능력도 아깝고, 뒷조사해 보니까 동정심도 조금 들고.

무엇보다 이후에 프로메테우스가 꾸미는 작전을 안다니까, 그것도 더럽게 궁금하고.

그거만 듣고 다시 내칠 생각도 하고 있다.

피도 눈물도 없는 짓이긴 한데, 염두에만 두고 있다. 염두에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 보니, 공항이었다.

도착해서 내렸는데 반겨 주는 사람이 보였다.

“초능국에서의 입국, 맞으십니까?”

공항 공무원이었다.

이어서 질문과 대답, 몇 가지 조사를 수반하는 작업이 우리를 기다렸다.

전용기 타고 타국에서 일을 벌이고 왔으니, 조사는 필수다.

꽤 귀찮은 작업이었는데, 선두에서 나한테 몇 마디 묻던 공무원이 무전기에 대고 ‘네? 네, 알겠습니다’ 이러더니.

“통과.”

라고 하더라.

초고속 통과였다.

뭐냐, 이건.

어머니가 뭔가 눈치챘는지, 생긋 웃었고.

다른 이들은 그저 빠른 게 좋은지 흡족한 얼굴로 나섰다.

공항을 빠져나와서 제일 처음 보인 건, 팔불출이었다.

아버지가 달려오신다. 날 보더니, 휙 피하고 어머니를 향해 가슴을 펼쳤다.

그 품에 어머니가 폭하고 안겼다.

초능국에서 시베리안 호랑이로 변신해서 어흥 하던 모습이 눈에 선한데, 지금 보니 한 마리 사슴이 따로 없다.

“바쁠 텐데요.”

어머니가 말하고.

“없는 동안 죽는 줄 알았어. 나 출장 갈 때마다 이런 기분이었구나. 미안하다.”

아버지가 받는다.

일주일도 아니고 고작 닷새다.

그게 지금 여기서 로미오와 줄리엣을 찍을 이유가 됩니까?

누가 보면 한 반년 동안 세계 일주라도 하고 온 줄 알겠다.

“밥은요? 잘 챙겨 먹었어요?”

그럼, 아버지가 굶었겠습니까?

“팀원이 반찬 가져다주고 그랬어.”

“……팀원 누구?”

“남자. 전부 남자, 장가간 남자애들.”

“아, 그래요? 믿어요.”

“믿어, 이제 우리 사이에 거짓은 없어.”

아버지 말실수할 뻔했네.

하여간 행안부에 아버지라는 좋은 빽을 둔 덕에 후다닥 나올 수 있었다.

“와, 회사에서 아무리 바쁘다고 클레임 걸어도 이렇게 빨리 통과 안 시켜 주는 거 알아요?”

피지컬 깡패, 이제는 김근육 사원보다 덩치는 한 수 뒤지는 피지컬의 소진이 다가와 말했다.

그거야 단군 그룹이니까.

공항은 정부 소속이고.

“부럽다. 진짜. 결혼하면 내조 잘할 자신 있는데.”

얘는 끝까지 이 드립 칠 생각인가.

“그거 아세요, 대표님? 어떤 나라에서는 어릴 때부터 내조를 위해서 교육을 한답니다.”

김근육 씨가 뒤에서 말했다. 눈앞에 그림자가 생겼다.

바로 뒤에 서니까 조명을 다 가리네.

“아, 그러십니까?”

대강 답했다. 김근육과 정소진은 그리 말하더니, 웃어 버렸다.

그래, 웃자고 하는 소리지.

어머니와 해후를 나누신 아버지가 다가왔다.

“또 동생은 아니지?”

처음 보는 얼굴, 그러니까 김근육 사원을 보고 물었고.

“신입 사원이에요.”

“사원을 덩치 보고 뽑니?”

“애 들어요. 여자한테 덩치가 뭡니까?”

“아빠한테 여자는 엄마뿐이고, 나머지는 그냥 다 사람이야.”

엄마가 또 그 말을 듣고 웃었다.

들으라고 한 말이다. 분명했다.

이게 바로 유부남의 삶인가.

“너희 회사, 누가 습격했더라?”

아버지가 툭 지나가며 말했다.

난 1초간 뇌가 정지했다.

습격? 누가? 어딜?

“네?”

“NS 본사, 1층 로비에서 한판 붙었다던데?”

내가 없는 사이에 일이 터졌다.

“그래서요?”

반사적으로 되물었고 아버지가 천천히 얘기를 시작하려 했다.

공항에서 서울까지 넉넉잡아 1시간, 이야기 들을 시간은 충분했다.

“잠깐만요. 김근육 씨는 살 집 못 구했으면 사옥에서 지내시고, 나머지는 고생했으니까 다음에 또 보자고요.”

아버지에게 양해를 구하고 급하게 모두와 작별 인사를 했다.

“이제 헤어지면 우리 또 언제 만나요?”

소진의 드립을 받아 줄 정신도 없었다.

지금 누가 본사에 빈집털이를 시도했다고 하는데 이게 정신이 있겠냐고.

“나중에 한번 찾아갈게요.”

그래서 툭 말하니.

“약속 지켜요.”

그리 말하고 소진이 돌아섰다.

기남이랑 미호랑은 인사도 못 했다.

둘은 훌쩍 떠났다.

“마리는 괜찮아요?”

그 사이, 어머니가 먼저 아버지께 물었다.

“어, 괜찮지. 괜찮으니까 내가 여기 있지.”

당연한 말이다.

그게 아니었으면 아버지는 이미 마리 해코지한 새끼 죽이러 갔겠지.

요즘 아버지의 최애가 어머니라면 차애는 마리가 됐다.

난 최애도 차애도 아닌 그냥 아들 포지션을 마크 중이고.

“다른 사람들은요?”

“차에서 얘기할까?”

아버지의 제안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로 차에 몸을 싣자, 아버지가 얘기를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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