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규격 외 혈통 천재-237화 (237/488)

237. 한 판 더 하자.

특수종 세상이 열리고 탄압과 압박의 시간을 지날 때쯤, 예언자는 처음으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앞날을 내다볼 수 있는 초능력자다.

예언자는 한둘이 아니었다.

불특정 다수로 각성하는 초능력자의 숫자는 많았고, 그중 당장 앞날을 예지할 수 있는 능력자가 다섯이었다.

밝혀진 이들만 다섯이니, 물 밑에 숨은 이들은 더 많을 거로 추측할 수 있었다.

올드포스, 엑스큐라시, 사이오닉 협회.

각 단체는 그들을 차지하기 위해 싸웠다.

피를 볼 각오도 했다.

서로 피 터지게 싸우기 직전, 올드포스에서 제안했다.

“싸우지 말고 나눠 갖자. 예지자 애들 뭐, 능력 차이 있나? 누구는 한 달 뒤까지 보고 누구는 일 년을 내다보고?”

세 단체의 책임자는 예언자의 능력 차이 따위는 몰랐다.

몰랐기에 타당한 말이었다.

엑스큐라시가 먼저 그 말에 수긍했다.

“뽑기? 좋지. 내가 또 뽑기라면 자신 있거든.”

예언, 예지 따위의 능력을 갖춘 자는 다섯이었다.

“그들이 진짜라는 보장은?”

세 단체는 싸우는 대신, 일단 사실 확인부터 들어갔다.

이게 테러 단체에서 하는 장난질이면 이만큼 멍청한 짓도 없었으니까.

싸움은 소강상태로 접어들었다.

덕분에 틈을 노리던 테러 단체와 비합법적 범죄 조직은 손가락 물고 상황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예언자는 몇 가지 방식으로 자신을 증명했다.

가령 내일 아침 날씨를 맞힌다거나.

또는 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하나가 다음 날 먹을 음식을 맞힌다거나.

테스트를 통해 그들은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걸 증명했다.

여기에서 파생된 게 오라클 프로젝트다.

불멸특수대 시절 배운 적이 있다.

미래는 가변성이고, 결국 예언과 예지라는 건 개똥만큼도 쓸모가 없다는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몇 연구자와 초능 특수종은 예지 능력을 파고들었다.

앞날을 볼 수 있다는 건 엄청 매력적이므로.

그들의 연구는 몇 가지 성과를 만들어 냈다.

가장 큰 변화라면 기상청의 위세가 높아졌다는 거다.

인간의 자유 의지는 때론 예언과 예지를 벗어나지만, 날씨는 감정이 없다.

기상의 변화는 큰 이변이 없다면 예지에서 벗어나지 않았다.

과거 한국의 기상청은 툭하면 날씨 예보에 실패했지만, 지금은 다르다.

내년에 오를 집값은 예측하긴 어려워도 날씨 예측은 가능해졌다.

몇 명 예언가는 기상청에 이력서를 냈다.

자기가 날씨 하나는 기가 막히게 맞출 수 있다고.

사람의 앞날을 읽는 건 뇌가 빠개질 것 같지만, 내일 서울에 벼락이 칠지 햇살이 비추어 화창할지 알아내는 건 쉬웠다.

여름 때마다 오는 태풍의 진로 예측도 마찬가지.

예언가는 제 일자리를 찾았다.

이게 끝은 아니었다.

오라클 프로젝트는 예언을 입 밖으로 내는 순간 미래가 변하기에 실패였다.

머릿속을 들여다본다고 해도 한 인간의 뇌가 말하는 정보 중 미래 예지만 따로 꺼내 볼 수 없는 노릇.

그렇게 사장된 프로젝트가 사실 열댓 개는 됐다.

그래도 그중에 하나는 살아남았다.

먼 미래를 알아낼 수 없다면 단기 예지는 어떨까.

예언, 예지의 능력자 중 일부가 그게 가능하다는 걸 증명했다.

한 치 앞을 내다보는 것.

불멸자가 가진 초감각으로 근육의 움직임, 기세, 기척 따위를 읽는 게 아닌, 말 그대로 일어날 일을 보는 거다.

가능했다.

짧은 순간, 그야말로 몇십 초 사이에서 일어난 일이 변할 가능성은 꽤 적었으므로.

미래는 가변성이라고 말한 뒤, 대부분 예언가는 거짓부렁쟁이 취급을 당했다.

하지만 기상청에서의 활약과 단기 예지자 덕분에 예언과 예지는 거짓이 아니라는 게 밝혀졌다.

초능국 에르자루드는 왕가를 호위하는 로열 가드를 둔다.

그들은 오롯이 왕에게만 충성한다.

왕위를 계승한 이들만이 그들은 움직일 수 있다.

왕위를 잇기 전까지는 쓸 수 없다는 말과도 같았다.

그리고 현재 초능국의 왕좌는 공석이고.

덕분에 대장로는 왕자가 자신에 덤빌 거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깔끔하게 여기서 끝내자고.”

왕자가 말한다.

황당했다. 황당함이 분노로 치환되는 건 아까도 했다.

대장로는 다시 화를 냈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반색했다. 머리를 조금만 굴릴 줄 안다면 누가 유리한 쪽인지는 뻔했다.

대장로뿐만 아니라 다른 장로 몇도 김빠진 웃음소리를 냈다.

“허, 이거 참.”

“오히려…….”

그리 중얼거리다 입을 닫는 머저리도 있었다.

대장로는 그를 향해 눈을 부라리고는 다시 왕자를 돌아봤다.

‘이 멍청이.’

아무리 천재 소리를 들어도 애는 애였다.

왕자의 작전은 뻔했다.

자신을 이곳에 가두고 죽인 뒤, 수습하겠다는 거다.

이곳에 모인 장로 다섯이 장로원의 핵심이니까.

하지만 그게 쉬웠다면 그동안 왜 아무도 그렇게 하지 못했을까.

긴 세월, 왕위 계승에 걸림돌이 되는 장로원을 없애는 걸 목표로 삼은 왕족도 있었다.

그들은 하지 못했다. 할 수 없었다.

왕위를 잇기 전까지는 장로원의 무력이 우월하니까.

그걸 가능케 하는 게 이 남자의 존재였다.

“죽여라.”

대장로가 말했다. 그 손가락 끝이 광익을 가리켰다.

말하며 대장로는 계산했다.

왕자는 죽이진 않을 것이다. 대신 평생 약에 절여 살게 만들어 줄 셈이었다.

“무헤르.”

무헤르는 상대가 누구라고 해도 이길 수 있었다.

가령 그 상대가 1세대의 영웅이라고 해도.

지금 세상을 들썩이게 만드는 특수종이라고 해도 상관없었다.

한정된 장소와 한정된 시간 안에 무헤르는 무적이었다.

그의 초능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단거리 순간이동.

그리고 다른 하나는 단기 예지였다.

즉, 순식간에 상대에게 다가가며 미래를 엿볼 수 있다는 소리였다.

무헤르가 사라졌다.

그가 다시 나타난 곳은 광익의 곁이었다.

핑핑.

쇠줄이 튕기는 소리가 났다.

대장로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무헤르의 기습이 실패했다.

“운이 좋구나.”

대장로가 말했다.

광익은 그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

예지가 실패할 때도 있다.

미래는 가변성이라는 말은, 현대를 살아가는 이에게 중력의 법칙만큼이나 당연한 소리였다.

예언자가 실재함으로 그 말을 증명했기에.

그건 단기 예지에도 적용됐다.

짧은 순간의 미래를 엿보는 것도 미래는 가변하기에 틀릴 때도 있다.

무헤르가 직접 한 말이며, 대장로도 그걸 알았다.

그렇다고 변할 건 없었다.

무헤르는 단순히 단기 예지만 가능한 능력자가 아니므로.

그에게는 텔레포트 능력도 있었다.

쇠줄이 허공을 튕기자마자 무헤르가 사라졌고 다시 광익의 등 뒤에서 나타났다.

* * *

불길함을 느끼자마자 앞뒤로 다리를 찢었다.

그 덕분에 조금 전 내 목덜미가 있던 자리를 조이는 와이어를 피할 수 있었다.

앞뒤로 찢었던 다리를 바로 하며, 그 탄력으로 날 노린 놈의 콧잔등을 후려치려 했다.

정확히는 몸을 세우며 몇 가지 속임수를 섞은 뒤, 손등으로 후려치려고 한 거다.

난 가랑이를 오므리기도 전에 모든 동작을 멈춰야 했다.

뭐냐 이건.

놈이 사라졌다.

감쪽같이.

고속 이동이 아니다. 그럼 기척은 남아야 한다.

그냥 사라졌다.

있었는데, 없다.

분명 조금 전까지 내 앞에서 얼쩡거렸는데 다시 기척이 느껴지건 저 앞쪽이다.

“너, 뭐…….”

너 뭐냐고 물으려고 했는데, 다시 섬뜩함이 뒷골을 울렸다.

상대가 기척 없이 다가온다면 그에 맞춰 움직이면 된다.

직감을 따랐다. 왼발로 땅을 박차고 몸을 튕겼다.

그런 내 동체 시력이 내가 피해야 할 곳을 찌르는 칼날이 보였다.

이대로라면 내가 칼날에 몸을 갖다 박아 대는 꼴이었다.

꽝!

손가락으로 바닥을 찍었다.

대리석 조각이 깨지며 손가락이 땅에 박혔다.

옆으로 날아가는 순간 바닥을 찍자, 몸이 덜컥 멈췄다.

역동작에 걸려 근육이 뒤틀렸다.

훙.

칼날이 허공을 찍었다.

칼의 주인을 바라봤다.

할짝.

투구를 눌러 쓴 놈이 혀로 입술을 핥았다.

뭐지 이 새낀.

어떻게 이게 되는 걸까?

순식간에 몇 가지 가설이 머리를 스쳤다.

고민할 것도 없었다.

텔레포트, 단거리 순간이동이다.

고속이동은 아니다.

그게 가능해지려면, 나랑 비슷한 수준의 기척 죽이기와 나랑 비슷한 수준의 각력이 있어야 했다.

그러므로 순간이동.

놈이 다시 사라진다. 반사적으로 몸을 비틀었다.

섬뜩함과 불길함의 콜라보레이션이 전신을 움찔거리게 만든다.

또다.

또 내가 있는 곳에 와이어 그물이 생겼다.

내가 생각한 대로 움직였다면 정확하게 왼팔이 있을 자리였다.

판단은 빨랐다.

생각하며 움직이고 보이는 대로 또 움직였다.

그럼 상대가 다시 칼날을 들이밀거나 와이어를 날렸다.

역동작에 역동작으로 움직이니, 순식간에 근육의 뒤 틀리며 파열된다.

상관없었다.

불멸자의 재생력이 있으니.

파열된 근육이 다시 순식간에 재생한다.

자잘한 근섬유 파괴는 괜찮다.

다시 움직이고 피한다.

반복이다.

처음에는 이 자식과 그림자 놈을 동시에 때려잡으려고 했는데, 그림자 놈은 머릿속에서 싹 사라졌다.

피하기 바빴다는 소리다.

“헛.”

“핫.”

“얍.”

기합이 절로 나왔다.

그리 계속해서 피하니.

“……아들 재밌니?”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전투 감각이 달아오를 대로 올라, 머릿속에서 지금 내 모습을 객관적으로 그릴 수 있었다.

한 놈은 찌르고 한 놈은 피한다.

그걸 반복하는 움직임이었다.

그러니까 무슨 합을 맞춘 것처럼 상대는 칼날로 허공을 찌르거나 와이어를 감고, 난 그게 닿기도 전에 몸을 뒤트는 꼴이다.

상대의 공격이 닿지도 않았는데 홀로 근육을 찢으며 자해하는 거로 보일 수도 있는 거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그렇다는 거고.

아는 사람이 보면 꽤 놀랄 일이었나 보다.

“저거……, 어떻게 계속 피해?”

대장로의 허탈한 물음이 들렸다.

어떡하긴.

잘 피하면 된다.

하다 보니, 이것도 할 만하다.

상대의 마지막 동작만 보고 피하는 거다.

그럼 놈은 또 피하는 날 보고 다시 두 걸음 앞서서 칼날을 쭉 찌른다.

그걸 피하니, 와이어가 올가미처럼 목을 감으려 하고.

그걸 보며, 난 또 목 근육에 힘을 잔뜩 주고 뒤틀고.

우드득- 하고 목 뼈 뒤틀리는 소리가 났다.

근육이 시큰했지만, 금세 시큰함이 사라졌다.

묘기에 가까운 움직임의 연속이었다.

상대나 나나 둘 다 서커스에 가까운 동작을 연속으로 보였다.

처음 당했을 때는 놀랐지만, 하다 보니 여유가 생겼다.

팟팟팟, 이딴 소리는 안 들리지만, 여전히 기척도 없이 상대가 사라진다.

보통이라면 상대할 수단은 없지만, 방법이야 없으면 만들면 된다.

두 가지만 집중했다.

기척과 상대 포착.

사라지는 상대의 기척을 구분하고 찾는다.

그 뒤에 내달린다.

펑!

강각, 굳센 다리가 땅을 찼다.

분수처럼 대리석 조각이 솟구친다. 그 조각이 채 떠오르기도 전에 내 몸은 속도의 한계를 주파했다.

말 그대로 있는 힘껏 땅을 박찼다.

소리가 없는 둔중한 공기가 몸을 감싼다.

순간이동을 끝내고 나타난 놈의 모습이 크게 확대된다.

그대로 가볍게 손바닥을 위로 치켜 올렸다.

툭- 치려고 했다.

다만, 속도가 붙었기에 힘이 조금 더 실렸고.

그 와중에도 놈은 고개를 뒤로 꺾었다.

덕분에 투구 끝이 손바닥 끝과 스쳤다.

뻐-엉.

기압(氣壓), 내 몸이 공기를 가르며 생긴 압력 덕분에 폭발음이 터졌다.

상대의 모습이 훅하고 다시 사라졌다.

맞음과 동시에 순식간에 텔레포트다.

이건 난놈이다.

보통 초능 특수종은 충격받으면 제 능력을 제대로 발휘하기 어려운데, 투구 끝이 스치며 골이 흔들렸을 텐데도 능력을 발동했다.

협회에서 말하는 싱글 마스터급 초능력자다.

훙.

내가 달린 자리로 후끈한 공기가 일어났다.

난 손을 탁탁 털며 대략 스무 걸음 이상 멀어진, 정확히는 문 가까이 선 친구의 얼굴을 바라봤다.

새끼, 꽤 잘생겼다.

불멸자만큼은 아니지만 말이다.

“거기도 내 범위 안이다.”

내가 말했다.

초능력자의 입꼬리가 반듯해졌다.

방금 일격이 머리통을 스쳤으면 지금쯤 뇌수가 흘렀을 거다.

조금 더 무리했으면 그것도 가능했을 것 같다.

하지만 난 안 그랬다.

“재밌는데, 한 번 더 하자.”

쉬이 느끼기 힘든 희열이다. 이런 방식의 전투라니.

그냥 넘기기 아깝지 않나.

“너 뭐냐.”

텔레포트 능력자가 중얼거렸다.

“넌 단기 예지지?”

톡톡 바닥에서 제자리 점프를 하며 말했다. 몸이 달궈졌다. 워밍업이 됐다.

전투 감각이 발달하면 이상하게 상대의 능력을 쉬이 파악하게 된다.

어떤 원리로 그게 되는지는 모른다.

다만, 보고 듣고 경험한 모든 게 머릿속에 착착 정리되면서 상대를 보고 파악하게 만들어 버린다.

내 과외 선생 둘의 말을 빌리자면 어떤 특수종의 혈통에도 이런 능력은 없다고 한다.

알 게 뭔가.

그냥 된다. 이유 따윈 알 바 아니었다.

“한 판 더 하자.”

내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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