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6. 몰래 온 손님
왕자가 처음 나에게 능력을 보여 준 건 호텔 안이었다.
화륵.
타오르는 불길이 글자를 이루는 걸 보니 신기하기 짝이 없었다.
“근데 왜 욕을 씁니까?”
“내가 맨 처음 배운 한국어야.”
거, 애한테 누가 육두문자부터 가르친 거냐, 다니엘 너냐?
괜히 다니엘을 한번 노려봤지만, 그럴 턱이 없었다.
그때의 왕자는 글로벌 왕따였을 테니.
혼자 유튜브 보고 배운 것일 터.
그러니, 유튜브가 문제다.
하여간 요즘 애들은 패드 보고 다 배운다니까.
불꽃을 사그라뜨린 후, 왕자는 창밖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그러곤 술 대신 콜라를 한 모금 마신 다음 말했다.
“난 왕과 왕족이란 이름 아래 이뤄지는 모든 부조리를 없애려 한다.”
“네?”
“에르자루드, 내 조국이 비리의 국가라고 불리는 건 아나?”
들어는 봤다.
“그래, 비리의 국가. 고위층은 국고를 빼돌리고, 그 돈으로 노예를 산다. 왕족은 자신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혈안이 됐지, 오롯이 권력과 자본으로만 이뤄진 나라다. 아더 사이드의 자원으로 그 모든 걸 해결하는 나라. 국민과 나라를 위한 사람이 손에 꼽는 곳, 이런 나라가 된 이유가 무엇인가.”
꽝.
왕자가 마시던 잔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그 눈에 열기가 타오른다.
마치 조금 전에 보여 줬던 불꽃 같은 열기다.
홀로그램 여자 친구가 있는 세상이다.
‘만질 수 없지만 존재하는 온라인 여친’이란 광고 문구가 떠오른다. 이런 세상에서 노예를 부린다니, 아이러니 아닌가.
“그놈의 전통.”
왕자의 말투는 낮고 잔잔했으나, 그 안에 담긴 감정은 정반대였다.
뜨겁게 타오르는 불꽃 같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난 바꿀 것이다. 모든 걸, 나라를, 국민을, 사람을, 전부 바꿀 것이다. 썩어빠진 나라가 되게 두지 않을 것이다. 그게 내가 왕이 되어 살아야 할 이유가 될 것이다.”
난 그런 왕자를 빤히 바라봤다. 우리 둘의 눈이 마주쳤다.
뜨거운 열기가 느껴지는 눈빛에 마음이 데일 듯했다.
호텔 안의 훈훈한 공기를 뜨겁게 달군 연설이다.
그 연설을 들은 내가 말했다.
“그건 그쪽 대장로한테 말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얘가 콜라를 마시고 취했나.
왜 나한테 이래.
“대장로, 그 새끼는 내 말 들을 생각이 없어.”
말하며 왕자가 푸 하고 숨을 뱉고 꺽 하고 트림도 한다.
콜라 좀 과하게 마시더라.
“제가 듣는다고 뭐가 달라집니까?”
난 네 나라 사람이 아니다. 왕자야.
“듣고 감동해라. 친구라면 응당 그래야지. 염병.”
끝에 욕은 왜 붙이냐.
하여간 얘한테 한국말 처음 가르친 유튜버 놈 만나면 내 반드시 너의 죄를 알려 줄 것이다.
“감동 그 자체, 눈물 쏙 뺐습니다.”
왕자는 내 말에 낄낄 웃었다.
이후, 왕자는 자신의 목표를 말했다. 앞으로 어찌할 거라고.
난 왜 또 나한테 말하냐고 핀잔을 줬고.
“좀 들어. 친구의 의무다.”
라고 왕자는 말했다.
난 의무 반, 재미 반 고개를 끄덕였다.
어린 왕자라고 얕볼 수 없는 게, 목표 중에 살벌한 게 몇 개 있었다.
말하다 말고, 대장로가 한 짓을 알려 주기도 했다.
다 들은 나도 왕자와 같은 생각을 했다.
대장로 그 새끼, 참 개자식이라고.
* * *
핏.
그림자에서 뻗은 칼날이 옷깃만 스친 건 아니었다.
방검방탄복 대신 공항 패션 그대로 왔더니, 칼날에 팔뚝이 베였다.
베이자마자 아린 느낌이 들었다.
‘독.’
한 글자가 머릿속에 맴도는 순간, 팔뚝을 옥죄려 하는데 그림자가 재차 덤볐다.
틈과 틈을 쪼갠 순간을 쫓아 달려든다.
상대는 프로였다.
적어도 암살에서는 나보다 한 수 위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기척과 냄새를 숨기고 내 그림자에 숨어드는 것부터 이미 프로 중의 프로 아닌가.
툭.
난 뒤로 뛰는 척했다.
간단한 속임수다. 그림자는 그 움직임에 뒤로 물러났다.
그 틈에 나이프를 뽑아 팔뚝에 꽂고 후볐다.
살점과 피가 튀었다. 팔을 후빈 나이프를 옆으로 던졌다.
후-앙.
공기 찢어지는 소리가 들림과 동시에.
텅!
왕궁 응접실 기둥에 나이프가 꽂혔다.
칼날이 보이지 않는 나이프 손잡이가 파르르 떨렸다.
“그거 휘두르면 죽인다.”
간단한 경고다.
내 나이프가 가른 허공은 로즈의 앞이었다. 뭐, 내가 막지 않았어도 괜찮았을 거다.
이미 엄마가 로즈의 목덜미를 잡고 뒤로 던진 참이다.
로즈도 놀랐지만, 쟤 전직도 어떻게 보면 대기업 출신 아닌가.
허접스러운 테러 집단이 아닌 무려 프로메테우스 간부 나부랭이 출신이다.
메이저 테러 조직 출신 로즈가 허공에서 균형을 잡아 테이블 위에 섰다.
훌륭한 아크로바트였다.
로즈가 허공을 빤히 노려봤다.
그러자, 특이 초능 카모플라쥬, 쉽게 설명하자면 주위에 동화되어 제 모습을 숨기는 초능 특수종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말없이 로즈만 바라봤다.
감정 따위가 느껴지지 않는 눈빛이었다.
주머니가 주렁주렁 달린 바지와 조끼 차림이 눈에 들어왔다.
딱 봐도 전투 복장이란 거다.
곳곳에 무기를 숨긴.
어머니가 일어났다. 얼굴에 은은한 미소를 머금으셨는데, 이상하게 그걸 보니 오한이 들 것 같았다.
잠깐의 소강상태다.
내 나이프의 떨림이 멎을 때쯤.
“대장로!”
왕자가 외쳤다.
“왕자, 당신은 아직 왕좌에 오르지 않으셨습니다. 장로원은 왕좌의 명령만을 받소! 그리고 저 둘은 나라의 근간을 해치는 이들이니,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습니다!”
오, 조금 감탄했다.
이걸 우기네.
“저 둘은 타국에서 보낸 첩자가 분명하다, 아닌가!”
대장로가 이마에 핏대가 세우며 외쳤다.
그러자 곁에 선 다른 장로 중 둘이 입을 맞춰 말했다.
“맞습니다!”
“간악한!”
손발 잘 맞네.
왕자가 그랬다.
저 장로원의 윗 대가리가 안 바뀐 게 이미 삼십 년이 넘었다고.
적폐다, 적폐.
저게 적폐가 아니면 뭐겠나.
저 자리에 앉아 왕궁에 사람을 심고 왕족과 권력 다툼을 하며, 제 밥그릇을 숨기고 지키는 걸 애국이라 부른다.
애국자 나셨네, 진짜.
무엇보다 저 대장로가 하는 짓이 참 역겹다.
왕자에게 들었는데, 늙은이가 아주 좋은 걸 많이 드셨는지 주책이 좀 심하시더라고.
“왕자님.”
핏대를 세우며 달려드는 이들, 살기가 우리 쪽을 향한다. 난 그걸 태연히 받아 내며 왕자를 불렀다.
왕자가 날 바라봤다.
“의뢰 접수합니다.”
“그래.”
우리의 짧은 대화를 알아들을 사람이 몇이나 있으려나.
로즈만이 동공을 떨더니 날 바라보고 읊조렸을 뿐이다.
“미친.”
야, 나 아니야.
이 작전 초안은 왕자가 짰다고.
애초에 왕자가 있는 힘껏 대장로를 도발하자고 했다고.
호텔에서 나눈 대화 일부가 떠올랐다.
왕자는 제 목표 중 하나를 그리 말했었다.
“대장로 죽이고 장로원 셔터 내릴 거야.”
표현 참 참신했지.
그러라고 했다.
본래 계획도 왕위에 올라 힘을 기르면 할 것이었다 하기에.
난 굳이 그럴 필요가 있냐고 되물었다.
그러자, 왕자는 장로원이 가진 무력이 만만치 않다고 했고.
“의뢰하시면 받겠습니다.”
난 심플하게 답했다.
봐, 초안은 왕자가 짠 거다.
“닫아.”
내가 말했다.
그러자 경호원 중 하나가 움직였다.
우득-
곁에 있던 다른 경호원의 목을 잡아 꺾었다.
그리고 그 화려하기 짝이 없는 문을 당겨 닫았다.
밖을 지키는 커다란 덩치의 여자도 얼핏 보였다.
경호원의 목을 꺾은 남자가 얼굴을 가린 투구를 벗었다.
“명령하지 마라.”
차가운 말투, 스쳐 지나도 여자들의 심금을 울리는 냉 미남의 얼굴이 그곳에 있었다.
특별히 불멸특수대에서 지원 온 정기남 되시겠다.
뭐라 내가 답하기도 전이다.
꺽, 끅.
짧은 신음과 함께 다른 목소리도 끼어들었다.
“명령할 위치는 아닌 게 맞잖아.”
왕자의 호위 중 하나였다. 투구를 벗으며 나선다.
길게 땋은 머리가 등허리에 툭 떨어진다.
그 여자 곁으로 쓰러진 둘이 보였다.
“이 둘은 저쪽 첩자입니다. 왕자님.”
태연하게 말하며 나서는 건 우미호다.
원군이다. 애초에 나보다 먼저 왕자의 호위로 모습을 숨기고 따라왔다.
“……뭐냐!”
대장로가 묻기에.
“알 것 없고.”
답하며 목을 좌우로 풀었다.
나이프로 파낸 팔뚝의 살이 거의 차올랐다.
방검방탄복도, 4번 타자나 정글도도 없지만, 뭐 꼭 그게 필요한가.
손목을 탈탈 털며 몸을 풀기 시작하자, 왕자가 한 걸음 나섰다.
“대장로, 예흐라.”
그 눈에 열긴 어린 불꽃이 타오른다. 호텔에서 본 것 같은 그 불꽃이다.
“왕자, 지금 이 행동은 뭘 뜻하는 것이요?”
왕자가 그를 말없이 노려봤다.
“왕자!”
그걸 본 대장로가 되레 화를 냈다.
“공주에게 살려 주겠다고 했었지?”
왕자의 낮은 톤으로 말했다.
그 안에 담긴 분노가 느껴졌다.
조용한 분노다.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요!”
대장로가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나 같아도 그러지.
주책도 그런 주책이 없지.
“뭐? 제 첩으로 살면 평생 숨겨 주겠다? 공주 못지않은 권력을 누리며 살게 해 주겠다? 어차피 그 능력으로 왕좌를 노릴 수는 없다?”
말하는 왕자의 등 뒤에서 불꽃이 타올랐다. 등에서 날개처럼 타오른 불꽃은 곧 왼손에 창을 들고 오른손에 방패를 든 전사의 모습을 취했다.
불꽃 조형사, 그 이름에 걸맞은 모습이다.
“내 반드시, 널 때려죽이겠다고 결심했다. 이 시발 새끼야!”
왕자가 버럭 화를 냈다.
“할 말 못 할 말을 못 가리는구나!”
대장로도 화를 냈다.
왕자와 내가 짠 작전은 단순했다.
문 닫고 쥐어패고 때려죽인다.
장로원의 핵심은 대장로와 장로 넷.
그 다섯이 죽으면 허물어질 성이란다.
뭐, 쟤네들이 숨긴 재산이나 비자금은 버린다고 치고 깔끔하게 죽이겠단다.
지금까지 이걸 못한 이유? 대장로의 전력이 왕가보다 강하니까.
특히나 이 싸움은 소수 정예로 해결해야 했다.
제대로 내전 일으킬 거 아니면 그게 맞다.
내전이 일어나면 둘 다 죽는다.
왕자도 그걸 바라진 않는다.
그래서 만든 판이다.
뭐, 나도 대강 이렇게 시나리오만 짰는데, 이렇게 잘 먹힐 줄은 몰랐다.
“넌 미친놈이야, 이렇게 될 줄 알았지?”
로즈가 곁에 다가와 물었다.
“아니.”
솔직히 답했다.
진짜 반만 먹힐 줄 알았다니까.
로즈의 도발과 공주의 시신 태우기.
그리고 몰래 온 손님까지.
대강 짠 건데, 저 대장로란 작자가 우물 안 개구리라서 그런 거다.
진짜다.
“저 밖에는 날 따르는 호위대가 수백이오. 그들이 들이닥치면 어쩌려고?”
화를 내던 대장로는 금세 열을 식혔다. 그가 이성 끝자락을 잡고 물었다.
왕자도 제 등에 나타난 불꽃 전사를 없앴다. 열기만 남았다. 왕자의 볼이 붉게 상기된 게 보였다.
“그건 네가 알 바 아니지, 늙은 망령 씹쌔야.”
욕 참 찰지게 잘해.
대놓고 저리 욕해도 타격이 있다.
진짜다. 왕자의 욕설은 능히 세계 제일을 논할 만하다.
그 발음과 악센트가 일류다.
까득.
대장로가 어금니를 갈았다.
저 어금니는 임플란트일까?
저 작자 나이가 일흔이 넘었다는데, 아직 밤일도 거뜬하신 것 같은데, 과학이 발전해 거기도 임플란트 하신 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기도 했다.
잡생각이다.
난 살포시 나섰다.
“못 들어올걸요.”
“뭐?”
“문밖을 지키는 사람도 있어요. 할배.”
불멸특수대를 달랑 둘만 데려온 거 아니라니까.
“그러니까 여긴 우리뿐이라고, 할배는 숨긴 걸 다 꺼내야 해, 아니면 명년 오늘이 제삿날이야. 아, 초능국도 제사는 지냅니까?”
마지막 말은 왕자에게 물었다.
“저 십새끼는 지내 줄 사람 없어.”
왕자가 상큼하게 답했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초능국도 제사 지내는구나.
뭔가 유교스럽다.
“이놈들이!”
대장로는 다시 화를 냈다.
그림자와 위장 능력자, 거기에 변신족 둘.
감각이 날카롭게 날을 세운다.
상대의 전력을 때려잡을 시간이었다.
과연 숨긴 칼이 있었다.
대장로의 호위 중 하나를 보는데 꽤 섬뜩함이 느껴지는 친구가 보였다.
투구를 눌러 써서 얼굴이 보이지 않은 친구다.
왕자는 말했다.
초능국에 숨은 강자가 있다고.
변신족 칼브 형제 따위가 아닌 진짜 강자.
한 놈이 눈에 틱틱 걸렸다. 섬뜩하고 날카로운 칼 같다. 투구 밑에 보인 입꼬리가 올라가 있다.
웃고 있는 것 같은데, 무슨 살인마 사이코패스의 미소 같았다.
변신족처럼 강렬한 기세를 보여주는 건 아니지만,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이쪽은 진짜배기라고.
* * *
광익은 이 일에 화림과 화랑을 끼워 넣었다.
대가는 독점 무역권의 분배.
거부할 이유가 없었다.
단군 그룹이나, 정부 둘 다 말이다.
그렇게 화림에서는 두 명의 엘리트 요원이 나섰고.
화랑에서는 한 명의 요원이 나섰다.
소진은 제 옆에 선 여자를 힐끗 바라봤다.
자기보다 덩치 큰 여자를 보는 건 흔치 않은 일이다.
얼굴은 예쁘장한데, 변신족은 아니라고 했다.
“초능 쪽이에요.”
그리 말한 여자는 얌전히 제 옆에 섰다.
둘의 임무는 문을 지키기로 한 거다.
호위하던 둘 때려눕히고 문을 닫고 지킨다.
어려울 일은 없었다.
정소진은 입이 근질거렸지만, 꾹 참았다.
그리 호위를 가장하는 중이다.
“거기 둘, 뭐냐?”
초능은 발화, 결빙, 강화 능력자가 상대적으로 다른 능력자보다 많다.
초능국이라고 다르진 않았다.
결빙 능력자 두 명이 앞으로 다가왔다.
교대 시간이었다.
두 놈이 눈을 마주친 순간, 정소진이 움직였다.
퉁. 부드럽게 땅을 박차 나가 단숨에 거리를 좁힌다.
변신족 답지 않은 부드러움이 가미된 손길이 상대의 목에 닿았다.
잡고 꺾고 조인다.
몇 초 만에 일어난 일이다.
소진은 움직이면 반대편으로 시선을 던졌다.
춤을 보는 것 같았다.
톡톡 바닥을 차더니, 좌우로 몸을 휘돌린다.
몸에 두른 스카프가 팽 하고 돌더니, 상대의 목을 잡아챈다. 당기니 그대로 목을 조른다.
“꺽!”
그렇게 두 여자는 쓰러진 둘을 기둥 뒤에 숨기고 다시 제자리에 섰다.
“누구시라고?”
소진이 슬쩍 물었다. 움직임을 보니 무술의 한 부류로 보였다.
그것도 처음 본.
“NS 신입 사원, 김근육이에요.”
“……아, 그러시구나.”
정소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광익은 어디서 자꾸 이런 인재를 데려오나 하는 생각이 들긴 했다.
그리고 이름이 참.
“김근육, 이름 좋죠?”
되묻기에 고개를 끄덕여 줬다.
괜히 대기업 직원이 아니다. 정소진은 사회성이 좋았다.
“네, 예쁘네요.”
그 말에 두 여자가 눈을 마주치며 마주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