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규격 외 혈통 천재-234화 (234/488)

234. 대장로는 당황했다.

깊은 밤, 달빛이 얇은 창문을 투과해 들어왔다.

침대에서 눈을 뜬 로즈는 몸을 일으켰다.

신발을 신고 재킷을 걸치고, 방문을 잡아 소리 없이 밀었다.

발소리를 죽이고 나가 걸었다.

처음 와 보는 궁전인데도 거침이 없었다.

당연했다.

인도자가 있었으니까.

전날 쪽지를 남기고 난 뒤, 텔레파시를 통해 누군가가 말을 전했다.

자정이 지나면 따로 보자고.

로즈는 고개를 끄덕였다.

텔레파시와 작은 고개 끄덕임, 눈치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여기 훈련 시설은 없어요?”

강슬혜는 로즈에게 관심이 없었다. 찌뿌둥하다며 몸 풀 곳을 찾을 뿐이었다.

불멸자도 아니고, 변신족의 눈을 피하는 거야 쉬웠다.

로즈는 그렇게 했다.

그녀는 전직 테러리스트다. 둔하디둔한 변신족 하나만 속이는 건 일도 아니었다.

신경 쓰이는 쪽이라면 오히려 왕자 쪽이었다.

초능국의 패권을 잡은 어린 왕자.

만만할 턱이 없었다.

다행히도 왕자는 장로원의 태도에 분통을 터트리고 대응하기 바빴다.

“빌어먹을 늙은이들, 뒈져 버릴 것이지.”

“듣는 귀가 많습니다.”

곁에 붙은 금발의 호위자, 다니엘이 말했다.

그 말에도 왕자는 화를 낼 뿐이었다.

“뭘? 여긴 다 내 편이야, 꽝의 친구라고.”

“맞아요.”

강슬혜가 맞장구치는 걸 보며 로즈는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로즈는 그런 둘을 보며 생각했다.

세상 참 단순하게 산다고.

왕이나 변신족이나.

의심이 없다.

정작 의심은 다른 쪽이 했다.

그러니까 새벽 나절에 자신을 부른 이쪽이.

“난 예흐라다.”

그리 자신을 밝힌 늙은 남자, 대장로라 불린 사람이다. 긴 흰 수염의 늙은 남자.

나름 인상적이었다.

부하도 아니고 다른 장로도 아니고, 자신이 직접 나선 것이.

이 일의 중요성을 떠나서 어지간한 일을 직접 처리하려는 습관이 있을 터였다.

로즈는 그리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로즈.”

“그 쪽지.”

“사실입니다.”

짧은 대화가 오간 뒤, 예흐라의 눈이 자신의 전신을 훑었다.

그 눈에 담긴 의심을 보며 로즈는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 말을 어찌 믿겠나.”

“안 믿으면 이 자리가 왜 필요할까요?”

대장로가 제 수염을 쓰다듬었다. 여전히 시선이 따갑다. 로즈는 신뢰 따위 얻을 생각은 없었다.

이건 좋은 거래가 될 뿐이니까.

“원하는 게 뭔가?”

대뜸 묻는 말이다.

“해주(解呪)와 복수.”

로즈는 상대를 얕보지 않았다.

자신의 뒷조사 정도는 이미 다 끝났으리라고 판단했다.

그러니 저 답은 지금 상황에 더없이 어울리는 말이다.

“저주를 풀고, 복수를 원한다. 프로메테우스랑 대신 싸워 달라?”

예상이 맞았다.

대장로는 이미 뒷조사를 끝냈다.

답이 곧바로 나왔다.

“초능국의 힘을 그리 빌리겠다?”

대장로가 말을 이었다.

과한 요구였다.

요구가 과하면 좋은 거래가 될 수 없었다.

“아니요. 딱 둘, 둘만 죽이면 됩니다.”

말하는 로즈의 눈에 원한이 어렸다.

그걸 빤히 보던 대장로가 허- 하고 혀를 차며 눈을 감았다.

그가 눈을 감은 사이, 대장로의 뒤쪽에서 따가운 시선이 꽂혔다.

뒤로 시선을 던지니, 일전에 본 호위 둘이 보였다.

강인한 변신족 둘.

그 둘이 어쩐지 몹시 불쾌한 표정으로 자신을 노려봤다.

로즈는 그 시선을 피하고 대장로를 주시했다.

아직 눈을 뜨지 않은 대장로의 얼굴이 보였다.

표정을 읽기도 감정을 읽기도 어려운 사람이다. 그럴 만도 하다.

초능국의 배후, 장로원의 꼭대기에 앉은 작자다.

이런 사람의 신뢰를 얻긴 어렵다.

보통 그렇다.

처음 보는 사람에게 믿음을 사는 게 어떻게 쉬울까.

하지만 상대가 원하는 걸 쥔 척하는 건 무척 쉽다.

이건 믿음과 신뢰의 문제가 아니고 거래라는 걸 의도했다.

섬세하게 다가갔다.

수틀리면 떨어지는, 낭떠러지에 매달린 외줄을 타는 기분으로.

이쪽이 익숙한 일이긴 했다.

프로메테우스에서 수없이 해 왔던 일이었으니.

그리 살아온 삶, 이건 초능보다 더 깊게 익힌 학문과도 같은 전술이었다.

“증인으로 나서라. 필요한 순간에 신호를 줄 것이니.”

말과 함께 대장로가 일어섰다.

“구두 계약인가요?”

앉은 채로 말하는 로즈를 향해 대장로가 말했다.

“골드 오러 카드 하나가 그 맹랑한 특수족 꼬맹이에게 있다.”

한때 이것 때문에 왕자의 지위를 박탈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골드 오러 카드.

알이 광익에게 선물한 카드다.

딱 한 번, 초능국 전체의 힘을 빌릴 수 있는 보물이다.

그걸 일개 특수종에게 선물하다니.

예흐라는 그것만 생각하면 어금니가 갈렸다.

왕국의 앞날을 걱정할 줄 모르는 애송이가 왕좌에 앉아 유구히 내려온 전통을 무시하고 제멋대로 굴 것이다.

대장로 예흐라는 그리 왕국이 무너지는 걸 볼 순 없었다.

“그 꼬맹이 놈이 이곳에 오고 있다는 것도 안다.”

로즈는 뜨끔하지 않았다.

거듭 생각했듯, 이들의 정보력을 얕보지 않았으니.

뒤따라서 오는 광익의 움직임 정도는 읽어야 맞았다.

“그 카드를 내 눈앞에서 쓰게 해 주마. 그럼 해주도 복수도 이뤄지리라.”

대장로는 그 말을 끝으로 먼저 방을 나섰다.

이후, 여기에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다시 안내인이 나섰다.

제 몸을 그림자처럼 숨길 수 있는 특수종이었다.

전신을 검게 칠한 놈이 그림자에서 일어나는 모습은 호러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로즈는 일어나 다시 방으로 돌아왔다.

재킷과 신발을 벗고 다시 가벼운 차림으로 침대에 누웠다.

그리 누워 생각했다.

그녀의 목적은 복수.

그것만 이뤄진다면 누구와도 손을 잡을 수 있었고, 그 누구에게도 고개를 숙일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유광익의 모친에게 한 대 쥐어박힌다고 해도, 목적을 위해서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을 참이었다.

침대에 누워 각오를 다지니, 잠이 오지 않았다.

달빛이 구름에 가려졌는지, 사위가 어두컴컴했다.

로즈는 뜬눈으로 밤을 지샜다. 긴 밤이었다.

* * *

“오자마자 비가 오냐.”

공항 창밖으로 투둑투둑 하고 빗줄기가 떨어졌다.

말하며 컨베이어 벨트에서 나오는 짐을 챙기자, 주변 사람의 시선이 꽂혔다.

초능국은 관광 사업도 꽤 발달한 국가다.

머리 노란 친구들을 비롯해 이국적인 관광객들이 꽤 있었다.

“자자, 지나갑시다.”

말하며 지나쳤다.

상당히 주목받기 쉬운 차림이긴 했다.

옷이나 외모를 떠나서 가져온 짐이 좀 커서.

내 키보다 큰 네모난 상자를 들고 왔으니 당연했다.

끈을 풀어 등허리에 맸다. 밀봉이 잘 되어 있어서 빗물에 젖진 않을 거다.

그나마 그게 다행이려나.

공항 밖으로 나온 순간, 육감이 발동했다.

신기해서 보고, 황당해서 보는 시선 사이다.

내 얼굴과 차림, 기색을 읽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날 향해 다가오는 기척도.

환영 인사가 격했다.

훅- 하는 작은 소리.

그러니까 바람총을 쏘는 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한참 멀리서 쏜 작은 바늘이 곧바로 내 목덜미를 향해 날아왔다.

“어이쿠.”

바닥에 지갑을 흘리고 허리를 숙였다.

그사이 바늘이 허공을 갈랐다.

마침 눈앞에 건널목에 파란불이 켜졌다.

공간 감각, 상자까지 내 몸의 일부로 치고 내달렸다.

여행용 가방을 끌고 다니는 사람을 훌쩍 뛰어넘었다.

대여섯 사람의 머리를 뛰어넘자, 화들짝 놀라 엉덩방아를 찐 남자가 손뼉을 쳤다.

“……와우.”

감탄사를 들으며 미안하다는 표시로 손짓하고 움직였다.

뒤에서 날 쫓는 기척이 느껴졌다.

초능국은 초행이다. 길 따위는 몰랐다.

그러니 숨을 자신은 없었다.

그럼 어찌해야 하나.

다행인 건, 오기 전에 인터넷으로 대강의 지리는 읽고 왔다는 거다.

본래 불멸특수대 시절에도 지리 파악은 작전 준비 중 최우선순위로 꼽혔다.

난 그리 했다.

전략도 세웠다.

혼자 왔기에 그에 어울리는 전술을.

툭, 툭, 툭.

비 오는 땅을 밟고 속도를 높이다가 공항을 벗어날 때쯤, 도로 위, 다리 위를 내달렸다.

그냥 달린 건 아니다. 변신족답게 달렸다.

빠르게 그리고 과격하게.

펑, 펑!

발을 디딘 시멘트 바닥이 패일 정도로 땅을 박찼다.

둘을 빼고 날 쫓던 기척이 멀어졌다.

둘은 악착같이 날 쫓았다.

그럴 만도 했다.

둘 다 비행 능력자였다.

손에서 핸드 불릿 구슬 두 개를 꺼내 적당히 조절해서 던졌다.

던지는 건 변신족의 힘으로, 맞추는 건 불멸자의 감각으로.

날아간 구슬이 허공을 날던 초능 특수종 둘의 이마를 때렸다.

따닥!

핸드 불릿에 얻어맞은 둘이 이마가 깨져 핏줄기를 흘리며 새처럼 떨어졌다.

잘못 떨어지면 크게 다치겠지만, 알아서 잘 받겠지, 뭐.

알이 적대하는 그러니까 장로원인가 뭔가 하는 놈들이 보낸 놈들인 것 같은데, 걱정까지 해 줄 수는 없잖나.

그리고 난 다시 달렸다.

완벽히 따돌릴 필요도 없었다. 저들이 날 쫓는다고 나라 전체에 현상 수배를 걸 일도 없다.

저들도 나도 안다. 목적지는 하나니까.

왕궁이었다.

그런데 나 온다는 걸 알았다고 쳐도 뭘 이렇게 대놓고 막으려 드는 건지 모르겠다.

아니, 덤비는 강도를 보니까 반쯤은 납치할 생각으로 보였다.

이 상황을 보니.

아무리 세최특이니 뭐니 해도, 초능국 장로원은 날 어느 정도 얕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건 꽤 희소식이었다.

* * *

“왕자님, 유가 도착했습니다.”

“광이?”

다니엘은 ‘유’라 부르고, 왕자는 ‘광’이라 부른다.

호칭이야 중요하지 않았다. 왔다는 게 중요하지.

“장로원 쪽에서 손을 썼습니다. 공항에서 작은 소란이 있었나 봅니다.”

“우린 우리 일이나 하자.”

알이 말하며 일어났다.

대장로가 다시 회의를 소집했다.

왕궁에 모든 귀족을 모은 회의다.

그가 꺼낸 안건은 알 칼리드 볼리아나 왕자의 자격 의심이다.

“아무래도 정보가 샌 것 같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리 당당하게 부를 리가 없습니다.”

알은 답하지 않았다.

“불길합니다.”

다니엘이 연이어 말했다.

“걸어야 한다면 그것이 낭떠러지 위에 매달린 외길이라도 가야 하는 법이라고 했다.”

알은 초능국에서 내려오는 속담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해야만 하는 일은 반드시 해야 한다는 말이다.

대장로와의 회의를 피하면 그것만으로 자격을 의심받는다.

대대로 초능국의 왕위 계승은 항상 같았다.

계승 전쟁이 끝나면 장로원과의 알력 싸움.

이게 끝나야 진정 왕이 되는 것이다.

알은 한순간을 떠올렸다.

광익을 처음 만났을 때, 그러니까 그 산중에서 자신을 들고 냅다 튀며 광익이 자신을 구했을 때다.

‘잊을 수 없지.’

친구가 되어 주겠다는 말에 알은 심장이 폭발할 것처럼 뛰는 걸 느꼈다.

그 뒤, 본국에 돌아가 열흘을 앓아누웠다.

각성앓이라 부르는 시간이었다.

초능력을 개화할 때, 열병을 앓기도 하니까.

그때 알은 자신의 능력을 개화했다.

회의실에 가니, 이미 강슬혜와 로즈도 와 있었다.

“나보다 손님을 먼저 불렀나?”

“왕자께서 늦으셔서 그리했습니다.”

대장로는 의기양양했다. 승리를 확신한 듯했다.

‘왜?’

알은 의문에 싸인 채 나섰고.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해라.”

사납게 물었다.

그 물음에 대장로는 모인 이들과 일일이 눈을 마주쳤다.

“즉위가 끝난 뒤라면 모를까, 아직 왕자의 신분이라면 계승법을 무시할 수는 없지 않겠소?”

대장로가 말했다.

몇몇, 사람이 맞다고 맞장구를 쳤다.

“그럼 알 칼리드 볼리아나 왕자께서 공주를 살렸고, 우리를 기만했다는 증인이라도 나오면?”

대장로의 말에 힘이 실렸다. 목소리가 커졌다.

그걸 보며 로즈는 진짜 유광익은 대단한 놈이라고 생각했다.

겉보기에는 정말 단순무식한 미친놈인데.

‘똑똑한 미친놈.’

무식한 데 신념이 있으면 무섭다고 했던가.

이건 더 하다.

똑똑한데 미쳤다. 이게 최고로 무서운 거였다.

이 일, 그러니까 공주를 살리는 일 때문에 생기는 파장이 어마어마하다.

그런데 한다.

유광익은 그런 놈이다.

“하고 싶으니까.”

라고 말하고 할 놈이다.

그런데 그리 곱게 멍청하게 미쳤어야 할 놈의 일 처리가 무섭다.

자신의 전직은 테러리스트.

“우리 로즈, 오빠 위해서 일 하나만 하자.”

“오빠라는 말을 취소하고 우리 로즈를 취소하지 않으면 복수고 뭐고 저주고 뭐고 하지 않겠다.”

강력하게 대응했다.

“그래, 그냥 로즈, 일 하나 하자.”

유광익은 곧바로 그리 말했다.

로즈는 시나리오를 들었고, 그대로 움직이며 거듭 생각했다.

‘여기까지 생각했다고?’

사람의 심리를 읽고 행동 패턴을 정형화하고 움직인다.

그 와중에 쓸 수 있는 건 다 쓴다.

그게 전향한 전직 테러리스트의 악명이라고 해도 말이다.

“그런 증인이 어디 있다고.”

왕자가 대장로의 말을 받았고.

대장로의 시선이 로즈에게 향했다.

왕자의 일행이 공주가 살았다고 말하면 그 파장은 클 것이다.

그게 아니라고 해도 대장로는 아쉬울 게 없었다.

그러니 대장로 입장에서는 이건 도박이 아니다.

그래도 당황은 할 것이다.

로즈는 시선을 피했다.

“……나서라.”

딴청을 부리기 시작했다.

“어머니, 여기 천이 무척 곱네요. 신소재인가요?”

“아마 그런가 보다. 식탁보도 되게 좋더라. 어지간하면 안 찢어지겠어.”

강슬혜와 잡담을 나눴다.

변신족의 강단은 역시 대단하다.

자신이야 마음먹고 하는 거지만, 이쪽은 진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는 거다.

대장로의 시선이 여전히 따갑고 그러자, 다른 사람도 모두 로즈를 바라봤다.

로즈는 계속 딴청을 피웠다.

대장로가 부르는 사람이 자기 일 리 없으니, 전혀 모른다는 태도로.

“네?”

그리 되물으며 모르쇠로 일관하자.

“……뭐 하시는 거요?”

되려 왕자가 대장로에게 물었고.

대장로는 당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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