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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격 외 혈통 천재-233화 (233/488)

233. 돌파구로 보였다.

순백의 궁전, 그 위로 황금색의 장식이 즐비했다.

전 세계를 밥 먹듯 떠돌아다녔지만, 궁이라 이름 붙인 구조물에 들어온 건 처음이었다.

아니, 예전에 들어가려 노력한 적은 있었다.

폭탄을 설치하려고.

야밤 중에 몰래 담을 넘으려고 하다가 주문이 발동해서 실패했던 작전이었다.

그랬기에 이리 밝은 대낮에, 그것도 호위와 감시를 동시에 받으며 뻔뻔하게 궁을 보는 건 처음이었다.

“진짜 황금은 아니겠죠?”

초능국은 부자다.

세계에서 손꼽는 부자를 논할 때 항상 초능국 왕가가 들어갈 정도의 부자.

그들이라면 그럴지도 모른다. 눈앞의 금색을 진짜 순금으로 떡칠해 놨을지도.

“아니겠지.”

강슬혜가 답했다.

로즈와 달리 그녀는 덤덤했다.

그럴 만도 한 게, 갱생 마녀 시절 아버지에게 반항한답시고 외국 용병 생활만 몇 년을 했었고.

그때 이 궁전에도 와 봤다.

옛 기억이 떠오르긴 했지만, 감탄할 정도는 아니었다.

애초에 그녀 또한 빌딩으로 지은 궁전에 살던 재벌의 몸이니, 감탄할 만한 이유가 적었다.

그저 고가의 미술품 따위를 보고, 초능국은 역시 돈이 썩어나는구나 같은 생각만 했을 뿐.

“이쪽으로.”

특별히 한국말을 할 줄 아는 호위이자 안내자가 붙었다.

젊은 남자였다. 강슬혜는 반사적으로 코를 씰룩이며 냄새를 맡았다.

변신족은 아니었다.

냄새를 맡아도 변신족 특유의 냄새가 없다.

냄새는 지문과도 같다.

변신족에게는 그렇다.

긴 세월을 살아온 변신족은 자신만의 기준으로 냄새를 맡고 상대를 파악하는 법이었다.

‘돌아가면 아들놈한테 이것도 알려 줘야지.’

후각으로 상대를 파악하는 기법, 변신족의 기예 중 하나다.

냄새를 맡으며 걸었다.

불멸자가 육감과 직감의 영역에서 파악하고 감지한다면, 변신족은 냄새를 통해 본능의 날을 세워야 했다.

불멸자만큼 명확하고 확실한 정보를 감각적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지만, 불길한 냄새를 놓치진 않는다. 그게 변신족의 본능이었다.

물론 어느 정도 훈련과 경험이 필요한 기술이다. 그래서 이제까지 아들에게 따로 가르치지 않았다.

냄새를 구분하고 구별한 뒤, 강슬혜는 반쯤 확신했다.

위험도 없고, 거짓도 없다고.

함정 따윈 아니라고.

높은 천장 위로 원형 안으로 오각형의 형태의 문양이 박힌 게 보였다.

큰 원 안에 작은 오각형 구조물, 그 안에 다시 오각형 구조물. 이런 형태로 높게 솟은 천장 맨 위에는 긴 줄이 내려와 샹들리에를 지탱했다.

파란 꽃잎과 붉은 열매, 그 가운에 하얀 유리를 멋들어지게 조각한 게 머리 위에 매달려 있다.

썩 나쁘지 않은 광경이었다.

‘예쁘네.’

로즈는 여기저기 시선을 돌리느라 바빴다.

자백제와 비슷한 약 따위를 혈관에 피 대신 돌만큼 많이 투여했기에 반쯤 시체가 된 아이였다.

불멸자는 약 쓰는 솜씨가 세계 제일이다.

그들이 즐겨 먹는 게 마약이니 당연할지도 몰랐다.

고통 감내 훈련이랍시고 독을 처먹기도 한다.

그런 프로 중의 프로가 작정해서 쓴 약물이다.

로즈는 그걸 이겨냈다. 어금니를 꽉 깨물고 혀를 씹으며 금단 증상을 버텼다.

덕분에 얼굴이 전보다 배는 핼쑥해져, 꽤 연약해 보였다.

“여기서 쉬시면 됩니다.”

시중을 들던 여자가 안내한 곳이다. 어지간한 호텔 뺨을 후려갈기고 남을 정도로 호화로운 방이었다.

넓은 방에 널찍한 소파, 테이블, 과일 바구니 따위가 보였다.

“필요한 일이 있으면 바깥에 대고 말씀하시면 됩니다.”

극진한 대우였다.

차기 왕위 계승자의 손님이니 당연했다.

“6시간 동안은 아무도 찾지 않을 겁니다. 여독을 푸시면 됩니다.”

반나절 동안 여독을 풀었다.

꽃잎 따위를 뿌린 욕조에 몸을 담그며 쉬었고, 푹 찐 생선 요리와 잘 구운 스테이크가 식사로 나왔다.

강슬혜는 양껏 먹었다.

“여기 오신 적 있으신가요?”

식사 자리에서 로즈가 물었다. 강슬혜는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옛날에.”

“무슨 일로 오셨는데요?”

강슬혜는 고기를 우물우물 씹으며 로즈를 한 번 보곤, 입안에 든 걸 꿀꺽 삼키고 답했다.

“일하러.”

짧은 대화다. 그렇게 먹고 마신 뒤에.

“왕자님께서 부르십니다. 장로원과 면담 자리입니다.”

안내를 받아 도착하니, 왕자가 보였다.

그 앞에 자리 잡은 장로라는 작자들도.

검은 피부의 흰 수염을 길게 기른 노인과 눈이 마주쳤다.

노인이 고개를 갸웃했다. 강슬혜는 얌전히 안내한 자리로 앉았다.

그사이에 다른 노인이 왕자를 다그쳤다.

“왕위 계승의 조건이 유일함임을 잊으셨소?”

“그건 선대로부터 내려온 일입니다.”

“그래서 내 손으로 친히 공주를 죽이고 왔잖아.”

왕자가 답했다.

“맹세할 수 있습니까?”

다른 장로가 물었다.

알이 고개를 끄덕였다. 일말의 주저도 없었다.

사회적 사망도 사망이다.

이제 다시 공주로 살 수 없으니까 물리적 죽음은 아니나, 사회적으로는 죽었다.

그리 생각하니,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참 수월했다.

광익의 주장이었는데, 딱 마음에 드는 말이었다.

“공주와 부쩍 관계가 좋지 않았소?”

흰 수염의 장로가 물었다.

“그랬지.”

왕자는 태연했다.

“유일 왕족의 전통은 선대의 선대부터 내려온 걸 잊지는 않으셨겠지요?”

“안 잊었다.”

왕자는 당당했다.

“그쪽 외인 두 분을 모신 건 이걸 묻기 위함이오. 공주가 죽은 걸 봤소?”

못 봤다.

강슬혜는 태연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둘이 온 이유는 단순하다. 왕가에서 이뤄질 심문의 증인이다.

공주가 죽었다는 걸 봤다고 말하려고 온 거다.

적어도 대외적으로는 그렇다.

내부적으로야.

“양쪽의 증거가 부족하다고 생각되는데.”

처음 입을 열었던 장로가 중얼거렸다.

강슬혜는 그제야 그들 뒤에 선 이들 중 하나에게서 익숙한 냄새를 맡았다.

상대가 굳이 냄새를 감출 수작을 안 부렸기에 알 수 있었다.

강슬혜는 웃었다.

* * *

대장로의 시종 하나가 슬쩍 뒤쪽을 향해 텔레파시를 보냈다.

장로원이 자랑하는 칼, 변신족 형제를 향해서다.

‘나서 주시죠.’

변신은 초능으로 잡는다는 건 오래된 이야기다.

그러니까 과거, 특수종 세계가 시작됐을 때 퍼진 이야기다.

지금은 그 말이 완벽하게 맞아떨어질 수 없었다.

상성이란 건 완벽할 수 없는 노릇이니까.

그중에서 이 변신족 형제는 특별한 축에 속했다.

수없이 많은 전장을 경험한 베테랑 전사다.

경력이 증명하는 전사 둘, 그 둘이 앞에 나섰다.

그리고 동시에 당황했다.

“음.”

형이 먼저 신음을 흘렸다.

이 둘은 패배한 기억이 거의 없었다.

수없이 많은 전장에서 이기고 살아남았기에 이곳에 있는 거다.

덕분에 지금은 초능국 장로원의 호위로 호의호식하는 거고.

“형님, 맞죠?”

동생이 물었다. 형 된 작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둘에게 몇 없는 패배의 기억이다.

그것도 꽤 쓰라린.

장로원의 돈을 받고 살기로 하고, 이 나라에 이주한 지 2년쯤 지났을 때였나.

동네 술집에서 꽤 괜찮은 변신족 여자가 있기에 수작을 부렸다.

몇 마디 성적인 농담과 개수작에 가까운 손짓.

가끔 어떤 변신족은 제 본능을 참는 것보다 해소하는 것으로 컨트롤했다.

이 둘도 그랬다.

이 나라는 그런 면에서 좋았다.

일만 해 주면 돈과 여자를 다 줬으니.

그리 순순히 옷을 벗는 여자보다 술집에서 만난 반항하는 여자가 더 흥미를 돋웠다.

“너희 그러다 피똥 싼다.”

여자는 데킬라를 마시며 말했고.

둘은 피식거리며 웃었다.

“아이고, 이거 무서워서 어쩌나.”

동생이 치근덕거리며 다가갔었다.

“피똥 싸고 싶다. 싸게 해 주라.”

그 말에 여자는 깔끔하게 비운 빈 잔을 동생의 주둥이에 처박았다.

싸웠다.

그리고 깨졌다.

아니, 개처럼 맞았다.

둘의 변신체는 하이에나다.

그런데 그날은 개가 된 것 같았다.

에루자루드의 수도 외곽에서 깨갱거리는 소리가 쉬지 않고 울렸다.

상대가 되지 않았다.

이 두 형제가 특출난 능력자임에도 불구하고.

이 둘은 변신족임에도 일부 초능을 타고났다.

쌍둥이인 둘은 서로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그러니까, 싸울 때 손발이 완벽하게 맞는 걸 말함이다.

하지만 그것도 소용없었다. 여자는 그들보다 더 빠르고 강하고 억세고 거칠었다.

비가 내리는 날이었다.

그 빗속에서 진짜 먼지가 휘날리게 맞았다.

이대로 맞아 죽나 싶을 때쯤, 여자가 말했다.

“하, 오랜만에 땀 좀 흘렸네. 재밌었다. 그리고 아랫도리 간수 잘해라. 다음에 또 이러다 걸리면 자른다.”

그리 말하고 훌쩍 떠난 여자다.

그 얼굴을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있을까.

가까스로 진 것도 아니고 진짜 개맞듯 맞았는데.

그 뒤로 몇 년은 훈련에만 몰두했다.

그 치욕을 잊기 위해서.

그게 전화위복이 되어 실력이 꽤 늘기도 했었다.

수도사라도 된 양, 절제하며 훈련에 임했었으니까.

그 여자가 입모양으로 말했다.

불멸자가 아니더라도 쉬이 읽을 수 있게 크고 분명한 모양으로.

‘오랜만이네.’

발이 멈춘 건 본능이었다.

텔레파시가 다시 날아들었다.

‘칼브 님?’

형제의 성이 불렸다.

초능국은 왕권이 강하지만, 그만큼 장로원의 힘도 강했다.

왕가의 피 없이 권력을 누리는 자리가 장로원이다.

무력 또한 중요한 건 당연했다.

물론 이 둘이 장로원 무력의 전부는 아니었다.

당연했다.

하지만 그중 일부, 장로원의 대표 격이라는 건 맞았다.

그 둘의 발이 멈췄다.

‘지금입니다.’

‘뭐하십니까?’

텔레파시 여러 개가 날아든다.

장로원은 왕가와 의견 대립이 났을 때, 쉬이 무력을 보였다.

왕가의 정통성을 이었다면 장로원은 타국 용병을 끌어안음으로 무력의 힘을 키웠다.

그 핵심이 나서야 할 타이밍이었다.

대장로가 참지 못하고 뒤를 향해 눈을 돌렸다.

너희 뭐 하니? 돈 받았으면 일해야지?

이런 눈빛을 쏘아냈다.

칼브 형제가 그제야 무거운 발을 뗐다.

“힘으로 해 보자는 건가?”

알이 물으며 팔짱을 끼고, 사나운 눈빛을 쏘아내며 칼브 형제를 바라봤다.

“우린 왕가의 혈통이 그저 무리 없이 이어지길 바랄 뿐이오.”

왕가의 힘이 강할 때 장로원은 왕가의 좋은 충신이나.

그 반대, 왕이 미흡함을 보이면 괴뢰 정권이 되기도 한다.

역사가 증명하는 일이다.

왕위를 계승할 때 가장 힘든 일이 홀로 유일하게 살아남는 거라면.

이후 가장 골치 아픈 일은 장로원의 알력을 이겨내는 거였다.

그중 알은 제 무력을 유지하지 못한 축에 속했다.

가장 세력이 약했기에.

“공주를 죽인 게 아니라면, 왕자에겐 기만의 죄가 있고 왕가 모욕죄가 성립됨을 아시겠지?”

대장로가 물었다.

흰 수염을 쓰다듬으며 묻는 말에 힘이 실렸다.

“반대로 대장로가 하는 짓도 모욕죄가 될 것이다. 지금 내가 하는 말에 신뢰가 없다 말하는 것이니.”

대립이다.

대장로는 기대했다.

칼브 형제가 나서서 은근히 압력을 넣어 주기를.

그래서 말을 아꼈다.

아무 일도 없었다.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칼브 형제는 우두커니 섰다.

나서긴 했는데, 딱 거기까지다. 장로 호위를 위해 자리 잡은 거로 보였다.

“할 말이 이게 전부면 난 가지. 시간 낭비야.”

알이 말하며 자리를 박찼다.

“증거가 있다면 가져오라. 난 왕가의 의무를 다했으니.”

문을 나서며 알이 말했고.

강슬혜가 그 뒤를 따랐다.

로즈가 가장 마지막에 일어났다. 그녀는 주춤거리며 일어나며 가까이 있던 시종을 향해 눈짓했다.

“칼브, 뭐 하는 건가?”

대장로가 꾸짖었다. 나설 때 나서 줘야 할 거 아닌가.

“그게…….”

형이 입을 열었다. 둘은 이제 상대가 누군지 알았다.

당하고 나서 복수의 칼날을 갈며 알아봤다.

“갱생 마녀가 있었습니다.”

대장로가 그 말에 고개를 갸웃했다.

정면에 선 여자의 얼굴이 눈에 익었다 싶더라니.

“그 갱생 마녀?”

초능국과 인연이 있는 상대다.

“조력자를 데려온 거였나.”

다른 장로 하나가 말했다.

“왕자의 행사가 앞뒤를 안 따지는 군요. 어떻게 할까요?”

대장로는 공주가 살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 왕자라면 그럴지도 모른다는 의심은 언제나 있었으니까.

특히 한국에까지 가서 그리한다기에 반쯤 확신했다.

그는 이게 기회라 생각했다.

왕가를 뒤에서 조종해 괴뢰 정부를 만들 기회.

그런데 상황이 묘했다.

돌파구가 필요했다.

“대장로님.”

그 타이밍에 시종이 작은 쪽지를 들고 왔다.

“뭐냐?”

“그, 왕자의 손님 중 하나가 남겼습니다.”

작은 쪽지였다. 영어로 짤막한 한마디가 쓰여 있다.

그 쪽지를 본 대장로가 고개를 들었다.

“누구지?”

이 쪽지를 남긴 여자를 말함이다.

본래 정보란 출처가 중요한 법이니.

“프로메테우스의 전향자입니다.”

다른 장로 하나가 말했다.

테러 단체에서 광익이 거둔 여자라 했다.

대장로는 초능국의 오래된 격언이 떠올랐다.

한 번 찢어진 천은 이어붙여도 전과 같아질 수 없다는 그런 속담.

대장로가 쪽지를 들었다.

쓰인 글자가 보였다.

[공주는 살아 있다.]

그게 돌파구로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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