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 싫은데, 난 얘가 좋은데.
호텔 컨퍼런스룸, 지금은 회의실이다.
널찍했다.
그 안에 꾸역꾸역 사람들이 모였다.
긴 테이블 뒤로 의자에 사람들이 궁둥이를 붙이는 게 보였다.
왕자의 호위를 위해, 혹시 위험분자가 들어오지는 않았는지, 또 다른 돌발 상황이 생기지는 않을지 확인하고자 미리 회의실 안으로 들어왔다.
정계, 재계의 유명 인사라는 사람들이다.
아는 얼굴은 없었다.
얘기 들어보니까, 초능국이라 불리는 에르자루드는 농업이 발달한 곳은 아니었다.
어쩔 수 없는 게 화이트홀이 더럽게 많고 그 주변을 통제해야 하니.
멀쩡한 땅에서도 농사를 지을 수는 없다는 거다.
근처에 홀이 있으면 그곳에 군사 기지를 지어야 하니까.
비효율적으로 보이지만, 실상은 아니었다.
외교.
타국과의 거래를 통해 초능국은 언제나 풍족했다.
살기 좋은 나라를 꼽으면 언제나 순위권에 들어갈 정도로.
자국민에게 베푸는 걸 아끼지 않는 왕가.
아더 사이드로 통하는 화이트홀을 많이 가졌음에 생기는 풍족함.
두 개의 조화가 그리 만들었다.
그래서 초능국의 왕위 계승은 국가 문제이기도 했다.
왕권이 바뀌면 거래하는 국가가 바뀌기도 하니까.
이전 왕가는 중국과 미국과의 거래가 주였다고 했던가.
어쨌든 알도 이제 외교를 신경 써야 했다.
겉모습은 아니지만, 실상은 열두 살 꼬맹이인데 외교 문제라는 걸 짊어져야 한다.
하긴, 얘는 소위 말하는 천재니까.
생각하는 것도 배우는 것도 어떤 개념을 벗어나는 천재다.
무슨 언어를 한 번만 보고 배우는지.
“실력이 더 늘었더군.”
그리 회의실 안을 둘러보는데 다니엘이 말했다.
내가 싸우는 걸 보고 하는 말인 듯했다. 난 어깨를 으쓱해 보이며 답했다.
“시간이 지났으니까.”
“…….”
다니엘이 날 지긋이 바라봤다.
눈빛이 일렁였다. 질투와 열망 따위가 엿보였다.
난 얼굴에 의문부호를 띄울 수밖에 없었다.
“타고났다는 거냐.”
다니엘은 그리 말하며 지나쳤다.
당최 앞뒤가 안 맞는 말이지만, 내 눈치가 어디 보통 눈치인가.
다니엘의 말은 싸우는 거 보고 실력 차이를 실감했다는 거다.
예전에 얻어맞은 턱의 복수를 원했으나, 어설프게 덤볐다간 턱의 원통함이 두 배로 늘 수도 있을 것 같은, 그런 억울함이 엿보이는 눈빛이라 하겠다.
난 그런 다니엘의 뒤통수에 대고 말했다.
“너 한국말 많이 늘었다.”
처음 만났을 때보다 발음이 좋아졌다.
물론 아직도 재미교포 같은 발음이긴 하다.
‘부르고기 맛있쒀요.’ 따위의 발음 말이다.
왕가의 호위 중 목소리 탐지 능력을 지닌 친구가 장내를 휘저으며 돌았다.
“어디서 왔는지?”
그렇게 툭툭 묻는다.
자기들끼리 떠드는 사람의 곁을 지나, 말이 없는 사람을 골라 그리 물었다.
그렇게 모인 전원의 목소리를 들었다.
시끌벅적했다.
도떼기시장도 아니고.
“그 유광익?”
“세최특?”
“왕자가 요청한 한국 호위지.”
“그 미친 출범식?”
“미꾸라지군.”
“골치 아픈…….”
몇몇 목소리가 귀에 꽂혔다.
좋은 말은 아니었다.
이 양반들, 나 불멸자인거 모르나. 다 들리는데.
들으라고 하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말하며 날 관찰하는 눈빛도 보였다
내가 주인공인 자리가 아니다.
얌전히 입을 다물고 왕자를 기다렸다.
곧 왕자가 들어왔다.
시끄럽던 장내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일국의 정치와 외교를 엿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나름 두근대기도 했다.
과연 열두 살 천재 왕자의 외교는 어떨까 궁금하기도 했고.
“더럽게 많이도 왔군. 꿀통에 모인 벌 같아. 꿀만 탐하는 벌레 같으니라고.”
왕자는 오자마자 앉으며 말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목소리였지만, 다 들을 만큼의 성량이다.
“……지금 뭐라고?”
정면에 앉은 중년의 남자가 되물었다.
“들렸나?”
“그럼 코앞에서 말하는데 안 들리겠습니까?”
남자가 이마에 핏대를 세웠다.
그 말에 왕자가 입꼬리를 올렸다.
부드러운 미소였다. 어지간한 여자라면 살포시 반할 정도의 그런 미소.
까무잡잡한 피부 위에 박힌 파란 보석 같은 눈도 부드럽게 휜다.
그리 웃은 왕자가 말했다.
“그래서 불쾌했나?”
“일국을 대표한다면 그에 걸맞은 품위를 보이시죠.”
왕자는 웃는 그대로 말했다.
“그럼 내 한국 호위 전반을 담당하는 사람을 앞에 두고 떠드는 건, 그대들이 속한 곳의 품위를 보이는 일인가?”
……다 듣고 있었니?
곳곳에 자리 잡은 호위 덕일 터였다.
이곳에 있는 이들이 바로 왕자의 손이자 발이며, 눈과 귀였다.
공주는 말했다.
십지대는 매번 왕위 계승을 하면 바뀐다고.
그걸 그대로 이어받는 사람도 있지만, 새로이 하기도 한다고.
그리고 왕자는 모든 걸 갈아치웠다고 했다.
그러니까 이들은 새로운 초능국의 십지대이리라.
왕가의 열 손가락이라 불리는 이들.
“재밌어, 아주.”
왕자는 그리 말하고 손을 휘저었다.
더 말할 필요가 없다는 거다.
입에 밀랍이라도 붙였는지 다들 꿀 먹은 벙어리가 됐다.
짧은 침묵 끝에 다시 용기 있는 자가 입을 열었다.
“왕가의 피를 본 자를 이곳에 둘 작정인지요?”
방금 왕자가 날 감싸는 걸 보고도 또 이런다.
왕자는 웃는 대신 답했다.
“미친 새낀가.”
작지만 또렷한 말이었다.
이제까지 영어로 말하다가 이건 또 한국말이다.
왕자는 그리 중얼거리더니, 누가 반응하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한국말이다.
투박한 말투에 다들 눈만 깜빡였다.
“아, 미안, 새끼들아. 내가 한국말을 게임으로 배웠어.”
……웃으면 안 돼. 여기서 웃으면 다 음경 된다.
난 인내의 불멸자다.
고통 감내 훈련 최고 숙련자다.
참았다.
웃음을 참는 건 때론 고문과도 같은 법이었다.
왕자는 그 이후로 자신의 한국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저 말투를 고수했다.
그리고 난 다니엘의 입꼬리가 살짝 떨리는 걸 봤다.
나만 웃음을 참는 건 아니리라.
이후, 내가 생각하는 외교와는 다른 양상의 얘기가 시작됐다.
“외교 하자며, 하자.”
왕자가 말하면.
“네, 좋지요. 거래할 의지가 있습니까?”
“응!”
밝고 명쾌하게 답하지 마.
알, 너 원래 지금보다 한국말 열 배는 더 잘하는 거 아니까.
하지만 저들은 모르지.
“네, 그럼 그 주체가 되는 곳이 있어야 하는 건 아시겠죠?”
정부 관계자, 말끔한 정장을 입은 비서 따위로 보이는 자가 물었다.
말투 덕분에 상대가 너무 애로 보였나 보다.
가르치는 듯한 말투였다.
“씹, 너 내가 바보로 보이냐? 그럼 뭐 내가 자원을 짊어져서 여기에 팔까?”
알이 꾸짖었다.
비서가 깨갱했다. 제 주인의 눈치를 본다. 난 그 주인이 미간을 찌푸리는 걸 봤다.
그 뒤로 비서는 입을 다물었다.
“협회가 주체가 되는 건 어떻습니까?”
사이오닉 협회 관계자가 그 틈을 파고들었다.
“별로.”
왕자가 귀를 팠다.
“정부와 하시죠. 서로 윈윈이…….”
“싫어.”
“그룹을 대표해서 왔습니다. 엑스큐라시와 거래하는 건 어떨까요?”
단군 그룹은 엑스큐라시 이름을 팔았다.
“싫은데.”
그 뒤의 대화는 공격과 수비였다.
짧게 요약하자면.
“외교 한다며?”
정·재계와 민간 협회, 그러니까 정부와 단군 그룹, 협회 담당자가 입을 모아 물으면.
“응. 할 건데.”
왕자가 답하고.
“나랑 하자니까?”
정부가 딜 치고.
“음, 싫어.”
“그럼 나랑?”
단군 그룹이 묻고.
“아니.”
“나밖에 안 남았네, 그럼 나랑 하자.”
협회가 나선다.
“왜 너밖에 안 남아? 싫은데.”
여기서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외교 한다며?”
“응.”
왕자는 그럼 또 해맑게 웃으며 답한다.
난 거듭 어금니를 깨물고 웃음을 참았다.
왕자는 작정하고 저 세 무리를 놀리는 중이었다.
그런데 어쨌든 외교 정책은 수립해야 하지 않나?
아, 한국이랑은 거래 안 하나.
“아니, 그럼 한국이랑은 안 해?”
마침 누군가 그리 물었고.
“난 에르자루드의 차기 왕, 알 칼리드 볼리아나다. 이후의 자원 거래에서 난 한국과는 자유무역협정을 맺을 거다.”
이때는 알이 영어로 멋들어지게 답했다.
다들 눈만 깜빡였다.
이게 어쩌자는 말인가 싶어서.
나도 마찬가지로 알을 바라봤다.
그냥 땡깡 부리는 건가.
내가 아는 알이라면 그럴 수도 있지.
“왜. 꼭 너희랑 하란 법은 없잖아.”
알이 말하며 일어났다.
일어나서 나한테 다가왔다.
음? 지금 뭐 하는 거?
알이 내 팔을 잡아끌었다. 난 자연스레 알과 나란히 섰다.
그러니까 사람들 앞에 섰다.
모두의 시선이 우리 둘을 향해 꽂혔고 알이 입을 열었다.
“이쪽은 유, 앞으로 한국과 무역 협정에 나와 거래할 유일한 회사의 주인이다.”
통보였다.
침묵이 흐른다. 나조차도 황당했다.
응? 뭐라고? 알의 말을 곱씹어본 뒤, 물었다.
“진짜요?”
“왜. 못 해?”
내 물음에 알이 되물었다. 깊게 생각하지 않고 답했다.
“하긴 하겠죠.”
내가 할 일은 아니다. 팬더 형과 중고 아저씨 등이 나설 일이지.
화림도 이런 종류의 일을 겸했다.
팬더 형이 처리하는 서류의 반은 화림이 벌인 사업에 관련된 일이었다.
그중에 수출입 사업도 있었고.
주면 알아서 할 거다.
손이 필요하면 알아서 구할 거고.
“그럼 됐지.”
알과 나의 짧은 대화가 남은 이들의 정신을 일깨워 줬나 보다.
“……뭐?”
“허.”
“음?”
세 단체의 대표로 보이는 자들이 반응했다. 신선한 리액션이었다.
첫 번째는 정부, 두 번째는 협회, 세 번째는 단군 그룹.
그중 단군 그룹의 포기가 가장 빨랐다.
“공식적인 발표로 봐도 됩니까?”
“그럼 내가 빈말이나 하는 머저리로 보여?”
저리 묻고 왕자의 답을 듣더니, 곧바로 빠져나갔다.
이곳은 지금 통신 불가 지역이다.
알의 호위 중 하나가 이곳을 통신 불가 지역으로 만들어 놨다.
전파 차단 초능이다.
그들이 빠져나간 뒤, 협회가 눈을 부라렸다.
“협회랑 초능국의 관계를 이렇게 무시할 거야?”
라며 물었고.
왕자는 그들을 향해 중지를 들었다.
실제로 이렇게 했다는 건 아니다.
이런 반응과 진배없었다는 거지.
“협회와 초능국의 관계를 생각하면 이러시면 안 됩니다. 미래를 위해서라도…….”
“내 미래는 내가 걱정할 거니까, 그쪽은 그쪽 걱정해.”
라고 딱 잘라 말했지.
중지를 들어 작별 인사를 하는 거랑 다를 바 없지 뭐.
다 보내고 나니, 정부 인사만 남았다.
“난 차기 대통령 후보인 이재호라고 합니다. 우리는 좋은 관계가 될 줄 알았는데요. 왕족 시해자보다.”
태연함을 가장해 말하지만 난 상대가 어금니를 꽉 깨물고 말하는 것처럼 보였다.
알은 내 어깨에 손을 올렸다.
어깨동무하기에는 내가 키가 더 컸다.
그리 어설피 팔을 두른 알이 말했다.
“싫은데. 난 얘가 좋은데.”
이재호라 자신을 밝힌 양반은 눈에 보일 만큼 어금니를 꽉 깨물고 돌아섰다.
등 뒤로 ‘원한’이란 두 글자가 선연히 보였다.
나 싫어하겠다. 저 양반.
“곤란하게 한 건가? 내가?”
알이 물었다.
난 그 말에 피식 웃었다.
곤란은 무슨.
일거리 주겠다는데.
원한 따위야 일도 아니다.
저렇게 나 싫어하는 사람이 한둘이겠어?
난 순진무구한 바보가 아니다.
앞에 나서서 일을 벌인 만큼 날 싫어하는 사람이 차고 넘치리라.
당장 테러 집단 프로메테우스나 우리나라의 조폭 집단만 해도 나만 보면 어금니를 박박 갈걸?
그래서 어쩌라고.
덤벼도 그때그때 부수면 그만이다.
안 덤벼도, 수틀리면 내가 덤빌 거고.
“아니요.”
“……고맙다.”
아니라는 말에 고맙다는 말이 튀어나온다.
음?
왕자를 바라봤다. 더는 자세히 얘기할 수 없었다.
공주를 구해 준 것에 대한 보답인 건가.
사실 그리 깊게 생각하고 한 일이 아닌데.
“이 협정은 원래 하려고 했던 거야.”
“왜요?”
“재밌잖아. 다들 내 나라의 자원을 보고 침을 흘리는데 한 나라의 작은 기업이랑만 일을 하겠다면 어떻게 될까.”
말하며 낄낄 웃는다.
이런 왕자를 보며 난 어쩔 수 없이 이 자식은 악동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십 세가 떠오른다는 거다.
자, 그럼 초능국과 자유 무역 협정이라, 이게 이득이 얼마나 되지?
난 가늠할 수 없었다.
대신 팬더 형이 가늠했다.
* * *
“뭘 해?”
“초능국이랑 자유무역협정이요.”
“……나, 이건 뭐 말이 안 나오네.”
팬더 형은 이 일을 단순하게 설명해 줬다.
지금부터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평생 먹고살 일이 생겼다고.
호위나 잡스러운 일을 포함 위에서 어떤 일을 안 받아도 무방하다고.
마수걸이하겠다고 알의 호위를 맡아서 생긴 일이었다.
뭐, 생각하고 한 일은 아니지만.
엄청난 보상을 받아 버린 셈이었다.
* * *
꽈광. 째앵.
이재호는 재떨이를 집어 던졌다.
날아간 재떨이가 벽을 부수고 튕기며 옆에 있던 유리 조형물을 부쉈다.
깨진 유리 조각이 비산하며 바닥에 흩어졌다.
씩씩거리며 거칠게 넥타이를 푼 이재호가 숨을 고르며 입을 열었다.
“그 조그만 회사가 그 일을 다 맡아서 할 수 있겠냐?”
“어려울 겁니다.”
비서가 답했다.
“김 사장 좀 보자고 해.”
“네.”
이재호는 한국에 뿌리 깊은 범죄 조직과 커넥션이 있었다.
“이 새끼 좀 바짝 말리자.”
회사를 망하게 하는 법? 많다.
그런 수작으로 이제까지 작업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상대는 하룻강아지 특수종이다.
그 육체적 능력은 높게 쳐 주지만, 수완도 그만큼 좋을까?
이재호는 그리 생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