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9. 김근육이요.
누나가 죽었다.
어릴 때부터 유일하게 자신을 아껴 주었던 누나가.
알은 전신에 사슬이 칭칭 감긴 채, 깊은 물 속으로 빠져드는 기분을 느꼈다.
전신이 묶인 듯한 구속감.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지금 순간, 알은 몸의 자유를 잃었다.
성장의 비약을 먹은 이후로 간간이 생기는 부작용이었다.
눈을 뜨고, 깨어 있는데도 마치 잠이 든 것처럼 느껴지는 시간이다.
정신은 깨어 있으나, 몸은 잔다.
소위 말하는 가위눌림, 수면 마비 상태에 가깝다.
주변 사물이 자신과 멀어진다.
가만히 있음에도 모든 것이 자신과 떨어지고 흩어진다.
홀로 유리된 기분이다.
사람을 떠나 사물까지, 모든 것에서부터 따돌림을 당하는 기분이 들었다.
모든 것으로부터 외면받았기에 알은 내면세계에 침잠했다.
‘누나가 죽었다.’
수면 마비 상태에 빠지기 직전에 한 생각이 이어진다.
에르자루드의 왕위 계승은 피를 부른다.
누군가는 왕위를 계승하는 길을 피의 왕도라 부르기도 했다.
왕위를 계승하고자 하는 왕은 왕족 그 누구도 살려 두지 않는다.
이 전통은 언제부터 이어져 온 것인가.
과거, 왕의 사촌이 살아남아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부터다.
쿠데타가 세 번이나 일어나서 왕족의 피가 섞이자, 살아남은 왕은 특단의 조치를 취했다.
왕위를 계승하고자 하는 자, 피를 보아라.
경쟁자를 죽이고 홀로 서라.
그런 미친 전통 안에서, 누나는 자신의 편이었다.
수많은 형제, 자매 중 유일한 자신의 편.
“볼리, 왕이 되렴.”
누이가 말한다.
그리 말하는 누이의 모습이 흐려졌다.
왕은 울지 않는다.
비약을 먹고 자란 아이도 울지 않았다.
‘난 뭘 기대하고 여기에 온 걸까.’
생각이 엉켰다.
수면 마비의 부작용 중 하나다.
가끔은 환상이 보이기도 했다.
광익의 모습이 떠올랐다.
친구라 부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다.
처음 봤을 때부터 특이한 친구였다.
초능국의 왕자를 대하는 게 아니라 불쌍한 아이를 대하듯 자신을 대했다.
그러다 자신을 납치했다.
‘보통 미친놈이 아니지.’
살고 싶다고 하니까 납치했다.
자신을 노리는 암살자가 많긴 했다.
다니엘을 제하고는 전부 자신을 노리는 칼이었으니.
이후, 광익은 싸웠다.
암살자를 죽였고 버텼다.
자신을 지켰다.
이후 그가 입을 열어 한 말이 잊히지 않는다. 지금도 뇌리에 남았다.
친구가 되어 주겠다고 했다.
‘그 무슨.’
얼토당토않은 말인가.
자신은 일국의 왕자다.
작은 나라의 시민은 동급이라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친구라니.
그것도 불쌍해서 해 주겠다는 투였다.
‘상또라이.’
알은 한국에서 배운 욕을 마음껏 뱉었다.
답답했던 속이 조금 풀리는 듯했다.
그 미친 또라이라면 무슨 짓을 하지 않을까 하는 작은 기대감 때문에 이곳에 왔으나.
‘알 드리어 레노이.’
누이의 이름을 잊어야 할 때다.
그리 생각을 접을 때다. 환상이 눈앞에 아른거리기 시작했다.
자신과 측근 하나만 아는 공주의 또 다른 모습이 환상이 되어 나타났다.
‘그 모습 싫어했잖아.’
환상 너머의 공주에게 물었다.
공주가 웃었다.
“왕자님. 유가 왔습니다.”
다니엘의 목소리가 들렸다.
감았던 눈을 떴다.
아니, 이미 눈은 뜬 채였다. 마비에서 풀렸을 뿐이다.
왕자는 눈을 몇 번 깜빡였다.
“……시발, 뭐야?”
절로 욕이 나왔다.
눈앞에서 환상이 사라지지 않았다.
이건 꿈일까?
“왕자님, 초면에 사람을 보고 그리 반응하시면…….”
다니엘은 그의 조언가이기도 했다.
그의 조언에도 불구하고 왕자는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
“시발 뭐냐고.”
왕자의 목소리에 절로 기쁨이 어렸다.
* * *
반응 한번 격하네.
왕자를 보며 난 턱을 긁었다.
“너, 이 씨.”
날 보고 삿대질을 한다.
동방예의지국에서는 어린 친구가 연장자에게 손가락질하면 안 된다는 걸 알려 줘야 할까?
그리 생각하면서 난 고개를 가로저었다.
티 좀 그만 내라, 이 생키야.
보는 새끼 다 알아채겠다.
안 그래도 호위 몇이 내 뒤로 붙기 시작했다.
그중 목소리만 듣고 형태변환자임을 판별한다는 능력자가 날 보고 눈짓했다.
“아닙니다.”
목소리를 들려 주자, 그 능력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 인증이 끝난 거다.
그 뒤, 내 곁에 선 사람에게 시선을 던진다.
“말 못 합니다.”
그래서 내가 대신 나섰다.
“제가 보증하고요.”
그 말에 왕자가 손짓했다.
그제야 목소리 판별 전문가가 물러섰다.
왕자가 그제야 가쁜 숨을 깊은숨으로 바꿨다.
“후우, 하아.”
“네, 이쪽은 처음 뵙죠?”
내가 곁에 선 여자를 소개했다.
왕자가 고개를 끄덕이며 여자와 눈을 마주쳤다.
공주를 죽이고 난 뒤, 왕자의 안색은 변했다.
불멸자, 그것도 순혈급. 그러니까 나 정도의 불멸자가 곁에서 보지 않고서야 모를 수준이지만, 변하긴 했다.
심경의 변화가 있다는 거겠지.
그걸 보고 또 확신하기도 했다.
얘가 제 누나 죽이기 싫어하는구나 하고.
그래서 살렸다.
공주는 내 계획에 찬성했다.
특히 내가 책임진다는 말에는 볼을 붉히기도 했다.
그 뒤, 호위 열 명은 어쩌냐고 묻기에.
“공주님과 같이 순장하는 거로 하죠.”
“진짜 죽이겠다는 건 아니죠?”
“네, 이쪽도 잘 숨어 지내면 될 것 같은데요.”
“말이 쉽지.”
나와 공주의 대화에 팬더 형이 잠깐 끼어들었다.
정작 일을 해야 할 팬더 형은 고생 좀 하겠지만.
이게 다 월급쟁이의 삶이 아니겠나.
스타트업 업무라는 게 다 그렇게 힘든 거지.
혼자서 용도 쓰고 그러는 거고.
대신 잘 되면 보너스 두둑하게 주는 게 내 할 일이다.
“할 수 있죠?”
모든 걸 함축한 질문과 함께 난 검지와 엄지를 말아 동그라미를 표시했다.
돈 많이 주겠다는 말이다.
팬더 형이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은 접어 두시죠. 한국에서 사람 숨기는 건 제가 전문입니다.”
팬더 형은 다시 폼을 잡았다.
공주는 그 말에 풉 하고 웃으며 이어 말했다.
“후세에 악명이 길이길이 남겠군요.”
열 명의 호위와 순장을 택한 공주라.
뭐, 후세에 남을 악명 따위 알게 뭐냐고.
그 뒤다.
“외양은 제가 알아서 할게요.”
그리 말하더니, 공주가 변신했다.
“어? 음?”
우드둑, 두두둑.
전신 근육이 비틀리고 뼈 맞물리는 소리가 나더니, 덩치가 커진다.
근육이 부푼다. 곧 내 눈앞에 아까의 가냘픈 공주는 사라졌다.
대신 근육질 공주가 나타났다.
머슬 프린센스다.
“어, 음.”
난 순간 말을 잃었다.
“볼리와 호위 몇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저의 이런 모습 몰라요.”
말하며 몸을 뒤틀고 입가를 가린다.
염병, 더럽게 안 어울리네.
변신족 수다쟁이 정소진 저리 가라 할 덩치였다.
그쪽 별명이 피지컬 깡패인데, 이쪽은 피지컬 괴물 수준이다.
적어도 겉모습은 그렇다.
“자꾸 그렇게 보시면.”
그러니까 수줍어하면서 말하지 마시죠.
닭살 돋는다.
더구나 말투는 그대로다.
목소리는 바꿀 필요가 있었다.
“당분간은 입은 열지 마시죠.”
알의 곁에 있는 특수종 중에 목소리만으로 상대가 모습을 바꿨는지, 알아볼 특이 능력자가 있다.
그거로 내가 형태변환자가 아닌지 판독했다고도 들었고.
목소리 듣는 순간 알아챈다는 거다.
공주가 살았다는 건 아는 사람이 적을수록 좋을 테니.
공주가 변신족은 아니었다.
듀얼 능력자였을 뿐.
하나는 상대와 눈을 마주치면 기분을 알아채는 능력이었고.
다른 하나는 꼭꼭 숨겨 뒀던 이거다.
형태변환, 싱글 프레임.
한 가지 형태로만 변하는 전투 능력이란다.
근육이 부풀고 몸이 커지는 그런 능력.
실제로 변신족에 버금가는 근력을 갖는 건 아니지만.
“맷집이 아주 좋아져요. 어지간히 맞아도 안 죽죠.”
그, 자꾸 수줍어하면서 말하지 말라니까?
“유!”
왕자가 날 불렀다. 상념에서 빠져나와 왕자와 눈을 마주쳤다.
“네.”
“유!”
“네.”
“난 네가 좋다.”
“고백하지 마시죠. 오해합니다. 부인도 셋인가 있다는 분이.”
“그건 농담이다. 바빠 죽겠는데 성혼은 무슨, 결혼은 아직 남 일이지.”
“농담?”
“나보다 몇 년이나 더 살아 놓고, 총각이라니, 놀릴 기회잖아.”
이걸 진지하게 말하는 알을 보자니, 꿀밤을 때리고 싶었다.
물론 때리는 순간, 뒤에서 날 향해 눈을 빛내는 호위대가 달려들겠지.
전부 때려눕힐 수도 있겠지만.
꿀밤 하나 먹이자고 그럴 수 없는 노릇 아닌가.
남들이 또라이라고 부른다고 해서 내가 진짜 또라이가 되는 건 아니다.
왕자는 잠시 그리 기쁨에 취하더니, 곧 날 향해 속삭였다.
“후환을 어떻게 감당하려고?”
“일이 터지기 전부터 걱정하는 건 스트레스의 주범입니다.”
아무도 모르면 그만이다. 누가 알아낸다고 해도 그때 가서 생각해 보면 될 일이었다.
“안 걸려요.”
왕자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다니엘이 옆에서 고개를 모로 꺾었다.
무슨 말을 하는가 싶은 눈빛인데 끼어들지는 못했다.
“그래, 그쪽은?”
“아, 말을 못 해요. 어릴 때부터.”
변신한 공주를 소개했다.
왕은 눈을 한 번 감고 뜨더니 손을 내밀었다.
공주가 그 손을 맞잡았다.
둘이 손을 맞잡더니, 한동안 서로를 향해 그윽한 눈빛을 보냈다.
다니엘은 그걸 보더니 못 참고 나섰다.
“왕자님, 취향이 변하셨습니까?”
왕자의 귓가에 대고 속삭였지만, 어디 불멸자의 청각을 벗어날 수 있을까.
나도 같이 들었다.
그 말에 웃을 뻔한 걸 참았다.
다니엘 저거 더럽게 심각하잖나.
그 말에 왕자가 있는 힘껏 인상을 쓰고 다니엘을 바라봤다.
더러운 벌레 보듯 한 번 쏘아봐 준 왕자가 말했다.
“낄 데 껴라.”
“네.”
다니엘이 물러났다.
어쨌든 공주를 살렸고, 이렇게 잘 살아 있다는 걸 보여 주기도 했다.
왕자가 싫어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조금 들기도 했지만.
그럴 일은 없었다.
둘은 화기애애했다.
그사이 다른 호위가 다니엘을 불렀고 곧 다니엘이 그 호위와 속닥거리더니 돌아와 말했다.
“왕자님, 밑에서 알현을 청하는 무리가 있습니다.”
“약속을 했던가?”
알이 물었다.
“아니요.”
다니엘이 답했다.
“그럼 내가 만나 줄 이유는?”
“한국의 주요 인사들입니다.”
외교란 무엇인가.
다른 나라와 나누는 정치와 문화적 교류다.
그리고 이 교류는 대화에서 시작하는 법이다.
서로에게 필요한 것을 나누고 정리하는 일이다.
왕자가 나가서 뭐, 적당히 외교다운 말과 태도를 보이려나 싶어 보는데, 왕자는 그쪽에 관심이 없어 보였다.
“그쪽 이름은?”
대신 공주를 향해 물었다.
아, 이름.
딱히 정해 두지 않았다.
공주는 날 바라봤다. 말할 수 없는 컨셉이다. 내가 답해야 했다.
머리를 굴렸다. 당황하면 안 된다.
주춤해서도 안 된다. 이미 아는 사람의 이름을 소개할 뿐이다.
“김근육이요.”
“……그게 사람 이름이라고?”
왕자가 물었다.
공주도 눈으로 물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네, 김근육, 여자치고는 이름이 좀 신선하죠?”
“너는 그걸 신선하다고 표현해?”
왕자가 눈으로 화를 냈다.
온순하던 공주도 같이 눈으로 날 비난했다.
……미안합니다.
나도 모르게, 딱히 이름이 생각이 안 떠올랐다.
그냥 여자 이름으로 생각할걸.
하지만 갑자기 변한 몸뚱이가 인상적이었는 걸.
나도 어쩔 수 없는 사람이다. 인상에 깊게 남은 게 절로 입에 튀어 나와 버렸다.
까득.
“나중에 개명하면 되겠네.”
왕자가 어금니를 깨물며 말했다.
그걸 보며 다니엘의 동공이 흔들렸다.
왕자님이 정말 저 근육질의 멧돼지를 좋아하는 걸까?
라는 의문이 담긴 눈이었다.
변한 공주의 외모는 아무리 좋게 봐 줘도 미녀 축에 속하긴 어려웠으니까.
그래도 그렇지, 사람이 말이야. 외모로 사람을 평가하고 그러면 안 되지.
“둘은 그럼 결혼을 약속한 사이?”
왕자가 물었다.
“무슨 헛소리를 그렇게 진지하게 하십니까?”
숨도 안 쉬고 답했다.
공주가 괜히 서운해하는 기색이 보였다.
그 큰 다리를 꼬더니 발끝으로 땅을 톡톡 찬 거다.
“아니야?”
“아닙니다. 제 이상형 알면서.”
“흥.”
왕자가 콧방귀를 꼈다.
왜 다들 내 이상형 얘기만 나오면 날 고자 보듯 하는 건지.
“왕자님, 한 번은 만나셔야…….”
다니엘이 옆에서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밑에서 진을 친 무리를 향한 말이었다.
왕자는 날 노려보며 김근육을 몇 번 읊조리더니, 염병하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그리고는 곧 또 고개를 끄덕이다 날 보고 물었다.
“민간 군사 기업을 토대로 세웠다고 해서 그쪽 일만 할 건 아니지?”
음?
“네?”
“본래 돈 되는 일은 다 해야 모름지기 기업 이념에 맞지.”
“NS의 기업 이념이 뭔데요.”
“몰라, 돈 잘 벌면 좋은 거 아니야?”
“정답.”
틀린 말은 아니다.
사실 나도 기업 이념 따위 모르고.
그리 깊게 생각하고 한 일이 아니다.
어느 정도 큰 그림만 그렸지.
“그럼 됐어.”
그리 말하고 왕자가 몸을 일으켰다.
“전부 1층 컨퍼런스룸으로 모이라고 해.”
“네.”
다니엘이 움직이고 왕자가 날 붙들었다.
“같이 가자.”
나도?
뭐, 어쨌든 이번 일정 호위 전반 책임자가 나니까.
난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