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규격 외 혈통 천재-226화 (226/488)

226. 공주와 나

즐거웠다.

“와, 진짜 그 초능국 왕자님이에요?”

내 인맥을 통해 불러온 글레이브 걸스 중 하나가 물었다.

다섯 명의 아이돌.

전부 밝았다.

“그렇지.”

그리고 성장의 비약을 처먹고 몸만 커 버린 알 새끼가 겸손 따위를 떨었다.

“아직 왕은 아니고 왕위를 계승 받는 중이긴 하다.”

이게 겸손인데, 상대 입장에서는 반쯤 장난스럽게 느껴졌나 보다.

거기에 이리 말하며 왕자가 말하며 생긋 웃는데, 나도 모르게 호위의 본분을 잊고 주먹을 내밀 뻔했다.

이 새끼, 왜 잘생긴 척을 해?

그런데 또 이 웃음에 아이돌 중 하나의 볼이 조금 빨개졌다.

에? 이게 먹힌다고?

물론 겉으로 보기에 잘 큰 알의 얼굴은 불멸자라고 해도 좋을 만큼 잘생기긴 했다.

까무잡잡한 피부에 금발과 푸른 눈.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부조화가 기가 막히게 어울리며 분위기 괜찮은 미남을 만들었다.

“재밌다.”

“맞아, ‘왕자님’ 하면 되게 딱딱할 줄 알았는데.”

꺄르르 꺄르르 웃는다.

그걸 보며 왕자도 어울렸다.

“왕위 계승이 끝나고 놀러 오면 구경시켜 주지.”

“진짜요? 약속하는 거죠?”

새끼손가락을 건다.

잘 논다. 아니, 잘 놀았다.

“다음은?”

글레이브 걸스와 헤어진 뒤, 왕자는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진정 이게 즐거운 듯했다.

“불고기?”

아직도 외국에서는 한국 하면 불고기일까?

“좋지.”

왕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경호원 스물과 왕자와 공주를 끌고 움직였다.

왕자가 입국했다는 소식은 이미 파다하게 퍼졌다.

아예 뉴스에서 대놓고 방송한 판이다.

주변에서 보는 눈이 많은 건 당연했다.

다들 우리를 주목했다.

그런 상황에서 찾아 둔 맛집으로 이동했다.

예약해 둔 룸에 들어가 고기를 구웠다.

몇 가지 메뉴를 다 시켜서 먹고 즐겼다.

“이건 처음 먹어 본다. 상큼해.”

그중에서 명이나물이 꽤 인상 깊었나 보다.

“몇 개 사 가야겠다. 아니지, 수입해야겠다.”

먹고 마시고 왕자와 어울렸다.

그렇게 서울 시내를 탐방했다.

경복궁이라도 데려갈까 했더니.

“그게 무슨 재미라고.”

참 어울리진 않지만, 왕자는 소소함에 즐거움을 더 느끼는 것 같았다.

아침에 나서서 저녁 해가 떨어질 때쯤, 우리는 홍대 거리를 거닐고 있었다.

딱히 다가오는 사람은 없다.

있다고 해도 경호원이 다 쳐 내는 판이고.

멀리서 사진을 찍는 게 한국 언론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

드론 따위를 띄우는 건 허락되지 않았다.

그건 곧 테러 위협이 될 수도 있으니까. 드론에 고용량 폭탄을 싣고 던지는 건 테러 단체가 자주 쓰는 수법이다.

그래서 주변에 드론이 뜨면 곧바로 경호원이 나서서 떨어뜨리는 거고.

“이번 호위대에는 불멸이나 변신이 안 보이네요?”

나는 뒤쪽을 따르는 경호원 무리를 슬쩍 보고 물었다.

왕자는 고개를 꺾어 하늘을 바라보고 있었다.

도심의 소음과 별개로 서 있는 걸 보니, 화보 속 한 장면 같았다.

노을빛이 왕자의 얼굴을 비췄다.

나도 하늘로 시선을 돌렸다.

태양이 반 틈쯤 하늘에 걸렸다.

노을이 부챗살처럼 퍼져, 하늘 한쪽을 채웠다.

따뜻한 자줏빛이었다.

“예쁘다.”

“네, 저도 이런 하늘은 정말 오랜만이네요.”

뜬금없는 말을 한두 마디 넘긴 뒤, 왕자가 말을 이었다.

“왕가 호위대는 전부 초능 특수종이니까.”

“왜요?”

“전통.”

가끔 왕국은 의미 없는 전통을 숭상한다고 한다.

왕자가 그리 말했다.

우리는 계속 걸었다.

경호원이 딱 스물만 있는 건 아니었다.

안 보이게 따르는 인원이 더 있었다.

대강 서른쯤?

그들이 거리를 좁히는 게 느껴졌다.

무전기에서 팬더 형의 목소리가 들렸다.

“분위기 묘한데.”

나도 느낀다.

각자 자리 잡은 팀원도 느꼈다.

어머니도.

“얘들 뭐하니?”

작대기 선생도.

“시야에서 벗어나지 마라.”

통나무 선생도.

“으흠?”

귀 뒤에 붙인 골전도 무전기로 들린 내용이다.

다들 작전 경험이 풍부한 사람들이다.

분위기가 이상해지는 걸 느끼는 건 당연했다.

그들의 반응과 마찬가지로 나도 이상함을 느꼈다.

위화감의 정체야, 금세 알 수 있었다.

상대도 속일 생각은 없는 듯했으니까.

왕자가 여기에 왔을 때부터 지금까지.

쭉 그랬다.

다니엘이 왕자 곁으로 바짝 붙으며, 공주를 옆으로 밀어냈다.

말없이 따라오던 공주가 옆으로 세 걸음 물러났다.

마리가 내 뒤로 바짝 붙었다.

“오라버니.”

그 읊조림에 고개를 끄덕이다 말고, 왕자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나와 눈이 마주친 왕자가 입을 열었다.

“개 같은 전통이지만, 지키지 않으면 안 될 때가 있다.”

“그렇군요.”

“왕위 계승식 중 하나야.”

왕자의 눈이 몹시 우울해 보였다.

툭 건드리면 지금 당장 울진 않아도 울분에 찬 욕설을 내뱉을 것 같았다.

그게 어울린다.

눈물 콧물을 짜는 알의 모습은 쉬이 연상되지 않는다.

“우린 친구지.”

알의 입에서 감상적인 말이 흘러나왔다.

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친구로 되어 주기로 했다.

돈을 준다고 해서 나선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백억을 준다고 해도 싫은 일은 안 할 거다.

그러려고 차린 회사가 아닌가.

뭐, 물론 그 백억을 몰래 꿀꺽할 방법이 있으면 꿀꺽하겠지만, 세상에 돈 싫어하는 놈이 어디 있냐고.

우리 팬더 형도 저리 슬기롭고 지혜롭지만, 돈에는 환장을 하는 걸.

그 오만한 우미호도 돈만 주면 당장 내게 팔짱을 끼고 볼에 뽀뽀라도 해 줄 것 같고.

“친구죠.”

내 대답에 왕자는 무표정을 가장한 채, 말했다.

“왕가의 전통 중에는 유력 계승권자를 처형하는 게 있어.”

“……거, 무척 살벌하네요.”

“시이발.”

왕자는 욕설을 뱉고 침을 탁 뱉었다.

조금 전에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먹은 덕에 침이 갈색이었다.

더럽네.

“내 손으로는 못 하겠어. 그래서 부탁하러 왔어. 내 누이를 죽여 줘.”

이게 맞구나.

팬더 형이 조사한 것도 이와 같았고.

내가 느꼈던 첫 번째 위화감의 이유도 이거였다.

공주가 틈만 나면 왕자의 목숨을 노리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

벌써 몇 번 독을 타려고 했고, 또 몇 번은 소매에 숨긴 칼을 꺼내려고 했다.

그럴 때마다 제지했다.

독을 타려고 하는 거는 빤히 보고, 테이블을 나눠서 막고.

칼을 꺼내려 할 때는 공주의 옷 소매를 칭찬했다.

“이거 명품이죠?”

덕분에 공주는 뜻대로 하지 못했다.

물론 이게 전부는 아니었다.

나한테는 두 번째 위화감이 더 불쾌했다.

그 두 번째 위화감의 정체를 왕자에게 물으려 했는데, 왕자의 얼굴이 꽤 우울해 보였다.

무표정 안에 감춰진 감정의 편린이 엿보인다. 불멸자의 감각이 그걸 알아챘다.

우울한 왕자의 기분을 조금이나마 나아지게 해 주고 싶어 입을 열었다.

“관용적인 표현은 아니죠? 결혼한 다음 침대에서 죽여 주라는.”

“질 떨어지는 농담이군.”

말하며 왕자가 있는 힘껏 미간을 찌푸린다. 바퀴벌레라도 발견한 표정이다.

너 기분 풀어 주려고 한 거다 이, 십 세야. 지금은 십 세는 아니지만, 한때는 십 세였지만 이제는 이십 세로 보이는 왕자 새끼야.

“왕의 이름은 알, 그 이름은 하나만 남게 돼야 한다. 그리고 이거 내가 누이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지. 왕위를 계승할 마지막 기회.”

왕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공주의 호위가 손을 뻗었다.

다니엘도 그와 동시에 반응했다.

둘의 손이 엇갈렸다.

딱.

뼈 맞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공주의 호위가 다니엘의 목을 휘감았다.

다니엘은 턱을 바짝 당긴 채로 머리로 공주의 가슴 부근을 들이받았다.

뻑.

곧 둘이 엉켜서 굴렀다.

홍대 한복판에서 일어난 일이다.

“워, 어, 뭡니까?”

경호원 무리 때문에 가까이 오지는 못했지만, 한 걸음 떨어져서 보던 이들이 놀라는 게 보였다.

그리고 그 시민들 사이로 모습을 숨겼던 호위대가 나섰다.

왕자의 곁에 다니엘을 제외한 호위대가 바짝 붙었다.

“볼리.”

공주가 왕자를 불렀다.

그녀의 눈이 초승달처럼 휘는 게 보였다.

“마지막 기회라고 했지? 내가 쉬이 왕위를 포기할 것 같았니?”

“마음대로 해.”

왕자가 답했다. 그 얼굴에 드러나는 감정은 사라졌다.

대신, 한 나라를 이끌 자의 위엄이 담겼다.

“알 드리어 레노이, 어미 다른 누이야. 왕의 이름은 알, 그건 하나만 남게 될 것이다.”

이건 자기들 나라의 말로 해서 난 못 알아들었다.

그래도 대강 무슨 뜻인지는 이해할 수 있었다.

선전 포고의 의미겠지 뭐.

공주만 제압하면 끝이라면.

한 걸음 나섰다.

왕자의 부탁을 들어줄 것이다. 친구의 부탁이니.

그리고 왕가의 사정을 대강 들은 나는 이곳에서 왕자나 공주 둘 중 하나는 죽어야 함을 알았다.

시민 사이에 숨어 있던 호위 중 둘이 나한테 달려들었다.

호흡을 참고, 철완의 기예를 팔에 담는다.

양쪽으로 짓쳐드는 두 명의 움직임을 예측한다.

예전에 홀로 수련하며 깨달은 건, 무술의 움직임이나 격투기의 동작에 연연할 필요가 없다는 것.

왼쪽 발을 바깥쪽 사선으로 틀며 미들킥을 찼다.

왼쪽에서 달려드는 친구가 반 박자 더 빨랐다.

고관절에서 시작해 허벅지 근육과 상반신을 틀어내는 힘까지 모인 발등이 상대의 복부를 때렸다.

뻥!

가죽공 터지는 소리가 났다.

때린 것과 동시다.

원심력을 그대로 이어 나가면서 왼쪽 팔꿈치를 뒤로 그었다.

스피닝 엘보다.

찍.

이쪽은 때린 게 아니라 그었다.

달려들던 친구는 팔을 들어 막았고, 팔을 감싼 보호구가 터지듯 찢겼다.

그 안에 있던 근육이 찢어져 피를 후두둑 흘렸다.

철완의 기술을 담아 팔꿈치를 그으면 그건 곧 날카로운 명검의 칼날이다.

괜히 단련된 변신족의 육신은 전신이 무기라는 말이 나오는 게 아니었다.

왕자가 내 옆에 섰다.

“준비한 걸 다 보여, 후회하지 말고.”

공주는 왕자의 말에 충실히 따를 참으로 보였다.

“걱정하지 마, 그리 할 거니까.”

공주가 말했다.

준비한 게 있나 보다.

일단 다니엘이랑 저 보이시한 여자 호위가 달라붙어 레슬링 중이니, 저건 놔두고.

공주를 잡으려 하니, 그 앞을 막은 이들이 보인다.

셋이었다.

차분한 눈빛의 세 명의 호위.

“몇 명 데려왔어? 내가 예상한 건 다섯이었는데.”

“열.”

“다섯이 더 있었네.”

그 와중에 왕자와 공주가 말을 나눴다.

뭐, 대충 왕자는 이 기회에 반란분자가 될 이들도 솎을 예정으로 보였다.

그래서 예상한 숫자가 다섯인데, 다섯이 더 붙었다는 거고.

“광익 씨.”

그 와중에 공주가 날 불렀다.

“네?”

“십지대 만난 적 있죠?”

십지대? 그게 뭐더라?

머리를 굴렸다. 내가 떠올리기도 전에 팬더 형이 무전기를 통해 말했다.

“넌 가끔 보면 똑똑한 건지, 멍청한 건지 모르겠다. 그걸 기억 못 해?”

중요하지 않은 건 듣는 순간 잊어버리는 게 내 장기라서.

팬더 형이 이어 말했다.

“박혁 새끼가 데리고 있던 호위대 이름.”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특수종 세계에 사는 애들은 단체명을 지을 때, 약간 열다섯 살의 감성이 깃든다고.

피닉스팀, 사우전드 페이스, 팬텀 같은 것도 뭐, 사실 만화책에서나 쓸 것 같은 이름이라.

이해는 한다.

직관적이고 이해가 쉬운 이름은 상대에게 쉬이 인식되게 할 수 있다.

그 인식은 이름값이 되고 그것만으로 전술에 유효한 영향을 끼치기도 한다.

상대가 강한 걸 알면 먼저 주눅 들기도 하는 게 사람이니까.

“저 조사했어요?”

“세최특이란 이름은 지금 핫 이슈라고요.”

공주가 말하며 입을 가리고 웃는다. 웃으며 그녀가 이어 말했다.

“그 십지대가 사실 우리나라에서 따온 이름인 걸 아나요? 열 명의 특출난 초능 특수종, 그건 초능국이 원조입니다.”

친절한 소개문을 듣는 기분이었다.

난 감탄하며 말했다.

“그렇군요.”

“쉬이 당하진 않을 거란 거예요. 혹시 같이 온 사람이 걱정되면 물러가라고 해 주세요. 광익 씨를 이길 순 없어도 다른 사람을 죽일 수는 있답니다.”

알은 왕궁이 서로 죽고 죽이는 복마전이라고 했다.

그런 곳에서 마지막까지 살아남았으니, 이 공주도 보통내기는 아니긴 하겠지.

이해한다.

그런데, 지금 내 팀원을 걱정하는 건가.

“볼리와 제 싸움에 끼어들지 마세요.”

“십지대를 데려왔구나. 유, 팀원을 잃기 싫으면 물러나라고 해도 좋아. 나머지는 내가…….”

“됐어요. 부탁한다면서, 부탁 들어주기로 했으니까.”

누가 누굴 걱정하는 건지.

아니, 내 팀원이 누구인 줄 알고.

“나, 엄마도 같이 왔어요.”

왕자가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되물었다.

“유의 마더?”

영어가 섞였다.

조금 당황한 듯했다.

이 대화에 공주가 황당한지 물었다.

“나 한국말이 조금 어색한가? 지금 엄마 맞지? 마더? 엄마를 데려왔다고 한 거지? 유? 마마보이?”

마마보이란 단어는 어디서 배웠을까.

이 남매는 한국 문화에 관심이 참 많다니까.

“아닙니다.”

부인했다.

내가 대표고 어머니가 직원인데 무슨 헛소리를.

하여간 걱정할 거리는 아니었다.

알과 잡담을 많이 나누곤 했는데, 그때 내가 어머니에게 당한 이야기도 많았다.

알은 우리 어머니 얘기를 참 좋아했다.

자신한테도 그런 어머니가 있으면 좋았을 거라고.

건강하고 강건하고 자식한테 이겨 먹는 그런 어머니.

왕자님아, 그게 말이 쉽지. 실제로 그런 어머니를 둔 자식 입장이 되어 보라고.

절대 쉽진 않다.

강한 어머니라니.

“하여간 걱정은 접어 두고 오시라고.”

공주의 전략이 눈에 보였다.

하나, 다니엘을 붙든다.

둘, 나를 붙든다.

셋, 나머지 내 팀원을 처리한다.

아마도 왕자가 나만 부른 걸 안 뒤, 허술한 경호라고 생각한 듯했다.

공주의 전략과 생각에는 허점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구멍이 숭숭 뚫린 전략이란 거다.

“어머, 얘들 덤비는데?”

무전기로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싸움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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