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5. 왕자와 나
소문은 빨랐다.
“그놈 참.”
단군 그룹 수장, 강노석은 또 혀를 찼다.
어째 손주 얘기만 나오기만 하면 절로 혀를 차는 것 같았다.
회사를 차리고 친 사고들을 보니, 어떻게 뒷구멍으로 자금이라도 지원해 줘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회삿돈을 쓰자니 보는 눈이 많아서 쌈짓돈이라도 풀까 했다.
근데 아니다.
손주 놈은 알아서 했다.
초능국, 에르자루드의 왕자에게서 직접 일을 받았다.
대견하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이걸 전부 계산했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모르겠다. 이제껏 수많은 인간 군상을 만났다.
때로는 적으로, 때로는 친구로, 때로는 적도 친구도 아닌 사이로.
그런데 이런 타입은 처음이었다.
멋대로 행동한 덕분에 이런 결과가 나왔을지도 모른다.
그러니까, 운이 억세게 좋은 걸까?
“신기한 놈일세.”
경호원이자 친구가 말했다.
“시험해 보고 싶나?”
“여러모로.”
친구의 말에 회장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룹에 들어오라 말하니, 제 회사를 차리고 제 갈 길을 가는 손주다.
앞으로 뭘 더 할 수 있을지 지켜보고 싶었다.
유연호도 광익의 소식을 듣고 놀랐다.
“아드님 인맥 쩌는데요?”
팀원의 말에 유연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계셨어요?”
“대강.”
몰랐다.
‘아들 새끼.’
귀띔이라도 해 줄 것이지.
엄마만 챙기고 아버지는 나 몰라라 하는 아들이다.
‘아빠는 같은 회사 아니라 이거냐?’
유연호는 세월의 무상함을 느꼈다.
자식새끼 키워 봤자 소용없다더니.
그래도 대견하긴 했다.
장관이 뒤로 몰래 찔러 준 일을 줄 필요가 없었다.
‘알아서 잘하니까.’
유연호는 미련을 접었다.
아들이 제 할 일을 잘하고 있으니, 자신도 제 할 일을 잘하면 그만이다.
그게 결국 아들을 돕는 일이 될 것이다.
“브리핑해.”
“네.”
팀장의 말에 팀원이 홀로그램 그래픽을 조작했다.
곧 아들 생각을 접은 유연호는 일에 집중했다.
* * *
누군가는 대견해했다면, 누군가는 배가 아팠다.
‘일에 초를 치더니.’
얄미워서 밀어내려 했다.
제 아비의 인맥과 권력을 믿고 그런 거라면 콧대를 부러뜨려 줄 생각이었다.
세상이 힘만으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는 걸 어린 특수종에게 알려 주려 했다.
모든 게 물거품이 됐다.
일을 끊고 손발을 자르려 했는데.
‘이건 무슨…….’
사이오닉 협회를 등에 업고 대선 출마를 앞둔 이재호는 어이가 없었다.
“누구?”
이재호가 물었다.
“알 칼리드 볼리아나입니다. 현재 세계 정부 연합에서 뽑은 영향력 있는 인물 백 명 안에 꼽히는, 초능국의 차기 왕권 계승자 1순위입니다.”
에르자루드의 왕위 계승 싸움은 전 세계가 주목하는 일이었다.
여기저기 선을 대고 왕자를 지원하는 세력까지 있는 판이다.
비서의 말에 이재호가 손짓했다.
비서가 창문을 열었다.
재떨이를 가져다준 비서가 라이터에 불을 붙였다.
이재호는 담배를 입에 문 채로 생각했다.
아니, 무슨 정부 연합이 선정한 백인 중 하나가 특수종 하나를 돕는단 말인가.
물론 그 특수종이 조금 유명해지긴 했다.
‘세최특’이란 별명도 붙었고.
휴즈 게이트 사건 때 혼자 때려잡은 특이종만 백이 넘는다는 말도 있다.
그걸 지켜본 이들이 수백인데, 그중에는 팬클럽까지 생기는 판이라고.
실제로 세최특이란 웹페이지가 생겼다.
그렇다고 해도 왕자랑?
둘이 무슨 인연이라고?
보고서가 올라오긴 했다.
초능국의 왕자가 일전에 한국에 왔을 당시 암살 위협이 있었으며, 그 상황을 유광익이 구했다.
왕자 납치든 뭐든 일이 많았지만, 결론적으론 구했다.
초능국으로 떠났던 왕자가 다시 돌아와서 유광익에게 생긴 오해를 풀어주기도 했다 했고.
귀한 인연일지도 모르지만.
이런 시기에 한국을?
에르자루드의 왕위 계승 싸움이 막바지였다.
자리를 비울 때가 아니란 소리다.
이재호는 위기를 기회로 삼을 줄 알았다.
“무슨 목적이 있지 않을까?”
“네?”
비서가 되묻는다.
소파에 등을 기대고 타르와 니코틴 따위가 섞인 연기를 깊게 빨아들인 이재호가 입을 열었다.
말과 함께 불쾌한 향을 품은 회색 연기가 같이 흘러나왔다.
“왕자가 이런 시기에 한국에 온 거.”
그럴지도 모른다. 처음 이야기를 들었을 때, 비서도 그런 생각이 들었으니까.
비서는 아는 한도 내에서 입을 열었다.
“공주와 같이 왔습니다.”
“공주?”
“왕위 계승권에서 밀린 공주입니다.”
이재호의 머리가 팽팽 돌아갔다.
곧 그럴듯한 소설이 한 편 쓰여졌다.
‘처형식.’
그 일에 필요한 건 피를 묻힐 손.
세최특, 능력은 출중하지만 아직 여물지 못한 열매.
이재호가 보는 유광익은 그렇다.
세상은 홀로 사는 게 아니니까.
회사를 차려?
귀여운 재롱 수준이라고 생각했다.
그 회사가 잘되리란 생각은 이재호뿐 아니라 누구도 하지 않을 터였다.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었다.
광익의 외할아버지이자 단군 그룹의 회장인 사람도 그리 생각했으니까.
경찰청장도, 행안부 장관도 생각은 비슷했다.
하물며 그 대통령도.
유연호만은 좀 달랐지만, 그는 아들의 미래를 속단하지 않았다.
이재호가 입술을 달싹이며 담배를 재떨이에 비볐다.
“이거 괜찮은데.”
왕자는 생각보다 아주 영리하고 권력 지향적인 인간일지도 몰랐다.
고작 열두 살이라고 하지 않았나?
아니, 열셋이었나?
사진이 흐릿했다.
그 모습이 잘 보이지 않았다.
잘생긴 금발 꼬맹이라고 들었는데, 사진에서 보이는 왕자는 키가 꽤 커 보였다.
대략 170cm?
‘연합이 꼽은 영향력 있는 백 명 중 하나라.’
인맥으로 이만한 사람을 구하기도 어려울 터.
“위기 속에 기회가.”
이재호가 중얼거리다가 비서를 바라봤다.
눈이 마주친 비서가 물었다.
“복안이라도 있으십니까?”
“있지.”
장편 소설이 필요한 일이 아니다.
그 왕자도 어쨌든 새로이 왕위를 계승하면 힘이 필요하지 않을까.
특수종 세상에서 한국은 꽤 상위에 랭크된 선진국이다.
세계 정부 연합에서도 순위가 높다.
그만한 나라의 수장이라면 좋은 딜이 되지 않을까?
욕심이 고개를 들이민다.
초능국이 위대한 이유가 무엇인가.
압도적 자원 확보량이다.
에르자루드에 있는 자원은 과거 석유 매장국에 버금간다.
아더사이드의 통로인 화이트홀도 많고, 가치가 높은 게이트도 많다.
값진 자원이 많다는 거다.
아다만티움 광산도 하나 있다고 들었다.
한국과 초능국의 외교.
이재호의 머릿속에 그려진 그림이다.
그 주역은 자신일 터였다.
그렇다고 손에 피를 묻힐 필요는 없다.
그는 단순하게 생각했다.
왕자가 머리가 있다면 정치적 수완을 지닌 사람이 필요할 거라고.
괜히 한국에 왔을까?
정말 유광익이란 세최특을 보겠다고?
그건 핑계다.
그는 왕위 계승 이후, 자신의 뒷배를 찾으러 온 거다.
여기서 만족하지 못하면 일본이나 중국으로 넘어갈 것이다.
이재호는 생각을 끝냈다.
“루트 좀 따 봐.”
“네?”
“왕자를 만나 보자고. 서로에게 좋은 윈윈이 될 것 같으니까.”
한국에 온 에르자루드의 차기 왕위 계승자와 한국의 차기 대권 주자.
그림이 괜찮지 않나.
애송이 세최특은 좋은 배우가 되어 줄 것이다.
머리가 잘 돌아가는 타입은 아닌 것 같으니.
* * *
“에취!”
“너도 재채기하냐?”
왕자와 공주, 경호원을 포함한 일행이 호텔에 들어선 뒤였다.
예전에 왔던 호텔이다.
“추억이지.”
왕자는 호텔로 들어서며 그리 말했다.
이전에 왔을 때는 여기에서 거나하게 사고가 났다.
경호원으로 위장한 암살자 무리가 덤볐고, 그 와중에 광익이 왕자를 들고 튀었다.
이 일 덕분에 프리랜서 중에 사람 구출하거나 유괴를 전문으로 하는 키드내퍼들이 감탄을 했다던가?
어지간한 전문가도 그 상황에서 왕자를 데려오지 못했을 거라고.
그랬던 곳이다.
광익이 불러 급히 온 참인데 자신을 보자마자 재채기를 하기에 물은 거고.
“전 뭐 사람 아닌가요. 아우, 어디서 누가 내 욕을 하나. 귀는 왜 이렇게 간지러운지.”
말하며 귀를 후빈다.
가끔 보면 사람 아닌 것 같긴 하지.
사실 자주 그런 생각을 한다.
저런 특수종이 있을 수 있나.
회귀자나 빙의자도 아닌데?
재능이 놀랍다. 볼수록 놀랍다.
동훈은 광익을 볼 때마다 놀랐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게 천재라고 하던가.
그럼 이런 친구는 뭐라고 불러야 하나.
자신이 갱생 마녀에게 죽어라 구르며 배운 걸 옆에서 구경하다가 따라 하는 괴물을 보면, 그 괴물을 뭐라 칭해야 할까.
혈통이 그를 돋보이게 하기도 하지만.
정작 놀라운 건 그 몸에 숨은 재능이다.
“그래서 왜 불렀는데?”
“낌새가 구려서요.”
그리고 재능보다 놀라운 건, 보기와 다르게 시야가 넓고 머리가 좋다는 거다.
직감을 믿고 일을 벌이는 추진력이 돋보이지만, 정작 그 추진력에 기반이 되는 건, 어떤 일을 할 때 생기는 파장을 전부 염두에 둔다는 거다.
자신도 그렇게 한다.
다만, 자신이 하는 건 정보를 기반으로 하는 교차 검증의 방법이라면, 광익은 본능에 가까운 판단력에 기반한다는 정도다.
“우리 십 세가 그냥 놀러 온 건 아니라는 거지?”
팔짱을 끼며 동훈이 말했다.
“글레이브 걸스 사인만 받으러 온 건 아닌 것 같네요.”
광익과 눈을 마주쳤다.
“그래서?”
“대충 그림은 그려지는데 별로 마음에는 안 들어서요.”
“으음?”
어째 일이 복잡하게 돌아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새로 그리려고요.”
사실 가장 놀라운 건 이거다.
동훈은 광익의 이런 점을 가장 높이 사면서도 가장 골치 아픈 점이라고 생각했다.
어떤 일을 벌이면 여파를 알면서도 그래도 하지 않는다는 거다.
끝끝내 제가 꼴리는 대로 한다.
“상황이 마음에 안 들어요. 좀 바꾸죠.”
광익이 말한다.
어쩌겠나.
불멸특수대, 화림이 자신을 버렸을 때.
그때 만난 광익에게는 후광이 보였다.
그릇이 달라 보였다.
한 회사의 대표라.
다들 이 회사가 그리 길게 가지 않으리라 생각할지도 모른다.
‘아, 중봉 팀장님은 빼고.’
얼마 전에 통화하면서 재밌는 얘기를 나눴다.
그게 떠오르니 자기도 모르게 웃음이 나올 뻔했다.
다들 꽝을 너무 얕본다고, 엿 먹고 나서 후회하면 늦을 거라고 낄낄대던 이중봉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동훈도 같은 생각이었다.
왕자는 어떤 기대를 하고 왔을까?
이동훈은 오면서 왕자의 상황을 다 알아채고 왔다.
그걸 공유한 건 당연했고.
이후 상황을 예측하기도 했다.
그것까지 전부 들은 후 광익의 판단은, 판을 엎기로 한 거다.
“전부 죽일 겁니다. 알을 적대시하는 쪽을.”
광익이 스케치를 그렸다.
그 안에 색을 채우고 디테일한 부분을 채우는 건 자신의 몫일 거다.
전력을 떠올리고 작전을 짠다.
그게 자신이 이곳에 있는 이유니까.
동훈은 생각을 정리한 뒤 말했다.
“보너스는?”
“……형 또 시계 샀어요?”
샀다. 엊그제.
“애초에 그냥 요인 경호도 아니고. 민간 기업은 본래 상여금으로 인재를 잡는 게 기본이다.”
알아야 할 문제다. 그래서 말했다.
물론 돈도 필요했고.
“아, 네.”
광익이 콧방귀를 끼며 답했다.
태도는 저래도 잘 챙겨 줄 것이다. 돈을 아끼는 타입은 아니니까.
그게 또 마음에 들기도 했다.
돈이야 많을수록 좋으니까.
* * *
알이 많이 커서 왔다.
처음 봤을 때 살짝 놀랐다.
예전에 봤던 그 꼬맹이가 아니었다.
얼굴이야, 예전 흔적이 그대로지만, 몸이 많이 컸다.
“잘 먹는다고 다 이렇게 크는 건 아니지 않습니까?”
호텔 주방 의자에 앉은 알에게 물었다.
옆에 공주도 함께다. 그 옆에는 다니엘과 공주의 호위도 하나 붙었고.
애꾸처럼 안대를 찬 초능 특수종 여자였다.
각진 턱에 머리를 짧게 잘라 놔서 자세히 보지 않으면 남자라 생각될 보이시한 스타일의 호위였다.
딱 봐도 겉모습이 성인으로 착각할 만큼 컸다.
얼굴은 앳되지만, 몸이 그리 컸다는 거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알이 변한 건 아니었다.
“비약을 먹었지. 천민이 먹기에는 지나아아아치게 비이이이싼 비약을.”
봐, 말투가 그대로다.
“성장 비약이란 거예요. 먹으면 단기간에 몸을 빨리 자라게 해 주죠.”
옆에서 공주가 덧붙였다. 말투가 사근사근했다. 듣기 좋았다.
그렇구나.
그럼 부작용은 없나?
궁금함에 빤히 왕자를 쳐다봤다.
또 위화감이다.
분위기가 왜 이러냐, 진짜.
묘한 분위기가 만들어졌다.
왜 그러나 싶어서 보니.
다니엘도, 보이시한 여자 호위도 전부 공주의 눈치를 봤다.
왕자도 공주를 슬쩍 봤고 공주만이 날 빤히 봤다.
그 눈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았다.
강렬했다.
“반하면 안 됩니다.”
내가 정중히 말했다.
공주까지 나한테 데이트하자고 쫓아오는 건 사절이다.
무엇보다 팬더 형이 조사한 바에 의하면 이 공주 사정이 아주 복잡하지 않은가.
“……넌 진짜 신기해.”
왕자가 그런 날 보고 말했다.
“어디서 그런 자신감이 나오는 거지?”
제 누이를 소개해 주겠다고 한 놈이 할 말은 아니지 않냐?
그리 생각하며 보다가 툭 하고 왕자에게 말했다.
“내일 오전에 미팅 잡았어.”
“무슨 미팅?”
왕자가 되묻기에 흐뭇한 마음을 담아 말했다.
“글레이브 걸스 미팅.”
내가 인맥이 응? 예전의 그 유광익이 아니라고.
불멸특수대 따까리 직원에서 지금은 어엿한 한 회사의 사장이다.
연예인과 미팅 정도야 인맥으로 어찌어찌 할 수 있다 이거야.
왕자가 위화감을 잔뜩 안겨 줬다고 해도.
알이, 알이 아닌 건 아니니까.
난 알에게 준비한 첫 번째 선물을 꺼냈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를 위한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