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7. 정립
지하 1층에 만든 훈련 시설 중에는 이런 것도 있었다.
정육면체의 대련장.
크기는 일반 링의 세 배, 사방의 벽은 헥사곤 필드에서 소스를 얻어 만든 헥사곤 강화 유리로 만들었다.
강화 유리의 원자 구조가 육각형과 비슷해서 그리 이름 붙였다고 들었다.
덕분에 그 강도가 헥사곤 필드에 육박하는 그런 물건.
충격 완화를 위해 손을 많이 쓴 구조였다.
특수종 대련장이니 당연했다.
대련장 왼쪽으로는 근력 단련 기구, 그러니까 쇠질에 특화된 것들도 보였다.
“아다만티움 합금이에요?”
까만빛이 도는 쇠봉을 보며 묻자.
“말이라고.”
팬더 형이 고개를 끄덕인다. 흡족했다.
대련장을 써 보고자 했다.
감상하라고 만든 건 아니니까.
“정직이 올라와.”
“네?”
“형이랑 한판 붙어 보자.”
정직이가 날 빤히 보더니 팬더 형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혼자 특이종 백 마리를 잡아서 최근에 헌드레드 슬레이어라는 별명까지 붙은 세최특이라는 사람이랑 제가 붙는 게 맞을까요? 일방적인 폭력 아닐까요?”
구구절절, 저 새끼 말이 좀 많다.
버릇인지 저 한마디를 건네면서도 진정성이 가득했다.
누가 들으면 정말 억울하다고 생각할 정도로.
“……얘 어디서 주워 왔냐?”
정직이를 보던 팬더 형이 물었다.
“성수동에서요.”
그때 봤을 때부터 능력이 독특하다고 생각했다.
지금 보니까 능력보다는 성격이 독특한 것 같지만.
“두들겨 팰 생각이었으면 굳이 여기로 데려오지도 않았을 것 같은데, 얌전히 올라가지?”
팬더 형이 팔짱을 끼며 말했다.
처형대로 올라가는 사형수의 표정으로 정직이가 올라왔다.
그리고 올라와서는 얼굴이 변했다.
이렇게 된 거 제대로 해 보자는 그런 의지를 담은 얼굴.
난 속지 않았다.
이 새끼는 표정과 행동이 영 반대란 말이지.
“딱 이 링 안에서만 하는 겁니까? 기본 조건은 알아야 저도 하죠.”
“링 밖에 나가면 손 안 댄다.”
내가 답했다.
내 직감은 정확했다.
어금니를 꽉 깨문 정직이 밖으로 튀려고 했다.
그러니까 또 그 변환질.
물론 시작도 하기 전에 내가 머리통에 꿀밤을 먹였다.
딱!
경쾌한 소리와 함께 정직이가 머리를 그러쥐었다.
“능력 발동 금지, 기본기 좀 보자.”
인성이야 고친다고 치고.
제 능력 키우는 마인드가 괜찮아 데려왔으니, 그 실력 좀 보고 싶었다.
과연 얼마나 쓸 만할지.
독특한 능력을 가졌다고 다가 아니다.
마인드를 봤으니, 이제 손에 쥔 게 뭔지 볼 차례였다. 그동안 몸에 익힌 것을 파악하고 싶었다.
이렇게 가벼운 마음에 시작한 일이었다.
정직이가 덤볐다.
따로 뭘 배운 몸짓은 아니다. 굳이 말하자면 스트리트 파이터다.
얼굴은 순한 말티즈 같이 생겨서는 눈을 찌르고 발을 걸고 낭심을 찬다.
눈을 찌르는 손은 손날을 세워 막고, 밑을 차는 정직이의 발을 도로 걷어찼다.
낭심을 노린 무릎은 손바닥으로 받아 내면서 눌렀다.
쳐 내고 누르고 민다. 간단한 동작으로 상대하되 적당히 풀어줬다.
제압하거나 때려눕히진 않고 적당히, 정말 적당히 상대할 생각이었다.
이 친구가 가진 걸 전부 볼 계획이었으니까.
막고 쳐 내는 사이, 나도 배운 걸 썼다.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그러니까 불멸자로서 배운 것, 변신족으로서 배운 것들.
상대 수준이 너무 낮아, 그리 집중할 필요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레 잡생각이 머릿속을 채웠다.
내가 맨 처음 배운 게 뭐였더라.
불멸 작대기 선생이 가르친 건, 불멸자의 몸을 컨트롤하는 법이었다.
그러니까 기본기 중의 기본기와 기척 죽이기.
비기라 이름 붙은 첫 번째 기예.
기척 죽이기, 제 몸의 흔적을 없애는 것.
불멸특수대로 입사한 이후, 기척 계열 기술을 더 배우기도 했다.
기척 속이기, 페인팅의 확장판이라고 보면 된다. 감각 교란이라 불리기도 했다.
다음은 감각 확장, 순혈의 비기 중 하나다.
감각 집중이 하나의 상대에 집중하는 거라면, 확장은 날 중심으로 사방의 모든 정보를 받아들인 후 앞날을 예측하는 것.
곧 전투 상황에서 단기 예지를 가능케 하는 기술이다.
이 감각 확장을 갈고 닦은 게 팀장의 비기다.
감각 융화, 공감각 강화라 이름 붙이기도 한 기술.
이후에 배운 건 감각 분화.
합친 걸 나눈다. 이건 감각 집중의 진화판 기술이라고 봐도 좋았다.
나눈 감각 중 하나를 극대화한다.
순혈 정가가 자랑하는 기술이었다.
난 이걸 쌍남 형제를 보며 배웠다.
인간벌목꾼 노필두를 죽일 때는 기척 돌리기를 썼다.
기척 속이기의 진화판이라 할 수 있는 기술.
기척을 죽이고 속이는 것을 합친다.
한쪽으로는 속이고 한쪽으로 숨기는 등 뒤의 비수와 같은 그런 기예.
이건 아버지한테 배웠다.
그동안의 전투, 장난스럽게 시작한 시발 팀장과의 대련, 눈먼 개와의 싸움부터 시작해서 모든 게 머릿속을 스쳤다.
기척을 죽이고 속이고 흩날리고 돌리는 건 결국 하나의 기예라는 결론이 났다.
불현듯 든 생각인데 이게 정답이라는 걸 알았다.
내 몸이 그리 말하고, 그동안의 경험이 그걸 뒷받침했다.
“으아!”
비명과도 같은 기합과 함께 정직이가 주먹을 내리친다.
순간 보인 허점이 오십 개가 넘었다.
그중 하나를 때렸다.
반사적이고 본능적인 움직임에 기반이 되어 나간 손이다.
왼발을 중심으로 몸을 반쯤 튼다. 정직이의 주먹이 내 어깨를 스치고, 내 손바닥은 상대의 옆구리에 닿았다.
밀었다. 여기서 힘을 주면 갈비뼈가 다 부러진다. 그러니까 가볍게.
툭.
밀자, 정직이의 발이 공중에 떴다.
“억.”
아무리 가볍게 올려쳤다 해도 내장을 뒤흔들 충격이 갔을 터였다.
정직이가 기침을 토하며 자세를 바로잡는다.
그걸 보며 난 왼손은 앞으로, 오른손은 당겨 둔 채 자세를 잡고 계속 생각을 이어 갔다.
불멸특수대 시절에는 갖가지 격투기를 익히기도 했다.
책과 영상, 그 외 그쪽에 통달한 요원을 따라다니며.
복싱, 킥복싱, 레슬링, 주짓수, 크라브마가, 칼리아르니스, 시스테마, 유도, 태권도, 무에타이, 가라데, 유술, 절권도, 팔극권, 태극권 등.
많은 걸 훑었다.
수박 겉핥기만으로 충분했다.
변신족의 피가 그것만으로도 내 몸에 그 기예를 붙였다.
붙인 기예를 갈고 닦았다. 시간을 쪼개 훈련했다.
목표를 높게 잡았기에 부족함만 느꼈다.
겉핥기로 배운 격투 기술이 몸에 붙으며 잘 써먹었다. 나쁘지 않은 시간이었다.
이후 배운 게, 변신족의 기술이다.
그건 내가 알던 어떤 세계를 부쉈다.
물론 그건 불멸자 때도 마찬가지였지만.
이쪽은 궤가 달랐다.
철완과 강각.
두 개의 비기만으로 육체 능력의 한계를 훌쩍 넘어서 버린다.
합치는 어떤가.
본능과 이성의 날을 세워 싸우게 두느니, 하나에 올인하라는 전략이다.
그야말로 변신족다운 전술과 기술.
본능이면 본능.
이성이면 이성.
하나에 몰두에 합치(合致).
배운 바대로 했고 그 또한 몸에 익혔다.
끓어오르는 괴력이 내가 이은 변신족 혈통이라 했다.
거기에 아버지의 피는 감각 컨트롤 능력을 극대화해 주는 혈통.
감각 컨트롤을 극대화해 준다는 건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건 순혈 정가와는 궤가 다른 예민함을 말한다.
내 몸에 흐르는 공기의 파동을 느끼고 상대의 움직임을 파악하고.
그 모든 정보가 실시간으로 알아서 차곡차곡 쌓인다.
내 생각은 더 멀리 나아갔다.
인간벌목꾼, 크로커다일, 특이종 인베이더.
어머니와 아버지, 기억 속 한쪽에 넣어둔 네임드에게까지.
시발 팀장과 팬더 대리도 범위에 넣는다.
가상의 적을 그리고 움직였다.
이 모든 기술을 다 써야 옳은 걸까?
배운 걸 다 몸에 붙여야 할까?
아니다. 적어도 나는 그게 답이 아님을 알았다.
그와 함께 내 몸에 붙은 기예가 형편없음을 깨달았다.
아니, 정확히는 번잡했다.
정립(定立).
난 내가 가진 걸 정리하고 확고히 했다. 나아갈 방향을 정하고 길을 그렸고 바로 세웠다.
어렵지 않았다. 아는 순간 곧바로 됐다.
정직이와 대련한 시간은 고작 삼십 분.
땀을 뚝뚝 흘리며 탈진 전까지 다다른 정직이의 얼굴이 보였다.
전신이 푹 젖었다.
볼 건 다 봤다.
보면서 할 것도 다 했고.
정립한 건 기술.
앞으로 적용하고 쓰는 데 차이를 보일 거다.
그게 맞다.
중요한 건 기본기라는 생각도 들었다.
“너 왜 따라왔냐?”
그리고 지쳐 쓰러지기 직전, 곧 극한까지 몰아붙였다가 반강제로 데려온 정직이에게 물었다.
“돈이요.”
말할 기운도 없어 보이는 한정직이 말했다.
이때만큼은 더없이 바르고 곧은 대답이었다.
“돈만 있으면 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살 수 있을 것 같아서요.”
솔직했다.
말하며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는다. 흐르는 땀이 뚝뚝 바닥에 떨어졌다.
정직이의 속눈썹이 부르르 떨렸다. 눈이 반쯤 감겼다.
내가 다가가 이마를 툭 쳤다.
“자라.”
완전히 지친 정직이가 눈을 감았다. 이마를 밀고 허리를 안아 대련장에서 나왔다.
그런 나를 팬더 형이 시선으로 붙잡았다.
불멸자가 아니더라도 느낄 만큼 걱정이 담긴 시선.
왜 저러나 싶어 바라보니.
이 형이 더없이 진지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너, 중봉이 형한테 안 좋은 거 배우고 그러면 안 돼.”
“네?”
“신입이라고 괴롭히면 안 된다고. 그게, 그래. 나도 일조했었지. 미안하다. 근데 너까지 그러게? 애를 왜 반 죽여 놨냐?”
생각해 보니, 내 생각에 집중한다고 손이 좀 과했나 보다.
그런데 오해다.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을 뿐이다.
“너, 광익아, 야, 그러지 말자. 중봉이 형이 잘못한 거야. 내가 사과할게.”
팬더 형이 혀를 찬다.
“애를 참.”
그제야 정직이의 전신이 땀으로 젖기만 한 건 아니라는 걸 알았다.
변신족 생각에 푹 빠졌을 때, 몸에 힘이 좀 들어갔나 보다.
팔다리가 붓고 파랗다. 멍이 들었다.
“차라리 패서 눕혀. 돈이 좋은 게 잘못이냐? 돈 좀 좋아하면 안 돼?”
팬더 형이 안쓰러운 얼굴로 정직이를 받아들었다.
이 형 이럴 때 보면 정이 참 많아.
그리고 돈에 관해서는 더없이 진지하고.
“돈이 무슨 죄라고.”
중얼거리기에 내가 답했다.
“네, 죄 없죠.”
말하고 나도 땀을 닦으려는데, 딱히 땀이 나지도 않았다.
기분은 상큼했다. 날아갈 것 같은 그런 기분도 들었다.
정리된 기예를 몸에 붙이는 과정은 따로 필요치도 않았다.
생각의 끝에 내가 입을 열었다.
“형, 뭐 하나 물어봐도 돼요?”
돈이 죄가 없다는 말에 동의하자 연신 고개를 끄덕이던 팬더 형이 날 보고 눈짓했다.
말하라기에 물었다.
“팬텀, 이중봉 팀장님과 싸우면 내가 이길까요?”
죽일 수는 있다. 확실하다.
거리를 좁히고 변신족의 거리를 확보한 뒤, 힘으로 누르면 된다.
기척 기예는 서로 맞물릴 테니.
한 타이밍만 잡으면 된다.
변신해서 덤비면 그 거리를 좁히는 게 어렵지도 않을 거다.
거리를 두고 총질 따위 하면 맞지 않을 테지만.
물론 손에 든 기어의 차이에 따라 달라질 수도 있을 거다.
팀장이 광학병기를 들었다면?
아무리 나라도 거기에 썰리면 싹둑이다.
재생하는 데 쓰는 시간이면, 팀장은 내 몸을 열두 조각으로 만들고도 남는다.
반대로 내가 광학병기 일격을 피하면 끝이다.
거리는 내 편이 된다. 이미지 트레이닝을 할 필요도 없는 한끝 승부다.
“음.”
팬더 형은 미간을 찌푸리더니 답했다.
“반반.”
“반반이요?”
이제껏 곁에서 날 봤으면서?
적어도 나한테 칠이나 팔의 승률은 줄 줄 알았는데?
“내가 중봉이 형 곁에서 본 게 몇 년인데, 직접 싸워 보기도 했지. 물론 네 신체 능력을 따라갈 수는 없는데, 그 양반이 왜 팬텀이라 불렸다고 생각하는 거냐.”
팬텀, 유령.
그리 불린 이유?
의문과 동시에 답이 나왔다.
기척 죽이기에 그 답이 있을 터였다.
눈앞에서 보는 데도 사라지는 기분이 들 정도의 기척 죽이기를 갈고 닦은 거다.
방금 정립하지 않았나.
기본기가 중요하다고.
기척 기술의 기본은 죽이기다.
속이기, 흩날리기, 돌리기는 전부 죽이기에서 파생됐다.
“처음부터 네가 변신하고 달려들기로 작정한 기습이라면 너한테 전 재산이라도 걸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반반.”
팬더 형이 말을 이었다.
“그럼 기습해서 뒤통수 때리고 튀면 절 잡진 못하겠군요.”
반쯤 농담 섞어 말했다.
그러자 팬더 형이 또 미간을 찌푸렸다.
아까보다 몇 배는 더 깊은 주름이 졌다.
그 상태로 형이 입을 열었다.
“진짜 그럴 건 아니지? 사람이 아무리 미워도 퍽치기는 하지 말자.”
……이 형은 날 뭐로 보는 걸까.
설마 그러겠냐고.
생각만 한 거지, 생각만.
“일합시다. 일.”
말하고 크게 호흡을 들이마셨다가 내쉬었다.
갖가지 환기 시설과 디퓨저 향이 코를 자극했다.
변신족이 직접 고른 향이다.
은은하면서도 상큼한 향.
불쾌함은 하나도 없는 그런 향기다.
여전히 기분이 좋았다.
기술을 정립하며 확신이 하나 들었으니까.
싸움과 경험을 토대로 얻은 오늘의 확신.
난 아직 더 성장할 수 있다는 것.
오늘의 난 한계에 다다르지 않았다는 것.
기술과 육체를 통틀어 내 한계는 아직 멀리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