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규격 외 혈통 천재-214화 (214/488)

214. 첫눈이었다.

꽝!

늙은 변신족이 테이블을 힘차게 내리쳤다.

얼굴에는 홍조가 피었고 두 눈은 부드럽게 휘어졌다.

그 상태 그대로, 노인은 껄껄 웃었다.

“하하하하! 난놈 새끼.”

더없이 기쁨에 찬 웃음소리에 사무실 내부가 쩌렁쩌렁 울렸다.

방음, 방진 설계가 된 방이 아니었다면 방금 울림만으로 벽이 짜르르 울었을 터였다.

흥에 넘쳐, 잔을 든 채로 테이블을 때린 거였다.

단군 그룹 회장, 사적으로는 광익의 외할아버지 되는 남자가 손에 쥔 잔을 들었다.

온더록스 잔에 독한 갈색 액체, 40도가 넘는 양주를 채우고 단숨에 위장에 때려 부었다.

후끈하고 열기가 식도를 타고 올라왔다.

“좋나?”

경호원이자 친구가 물었다.

“좋지.”

답한 회장은 흐뭇했다. 기꺼웠다.

깊게 생각할 것도 없었다.

피를 타고난 걸 넘어서 천재적인 발상을 선보인 손주였다.

1차 웨이브를 막은 것도.

그 이후의 일도.

그 이면에 깔린 게 알량한 영웅 심리인지, 아니면 계산이었든.

상관없었다.

“회사에는 절대 안 들어온다고 하는데도 그런가?”

회장은 웃었다.

사람의 신념은 변하기 마련이다.

이제껏 그런 사람을 수없이 봐 왔다.

자기가 믿던 세상이 변하는 일은 종종 있는 법이니.

회장은 광익을 제 밑에 둘 자신이 있었다.

다만.

‘지금은 놔줄 때지.’

소문은 널리 퍼졌다.

1차 웨이브를 홀로 막고.

홀로 특이종 수십 마리를 죽인 영웅.

성수동 휴즈 게이트를 닫은 클로저.

게이트 클로저란 호칭은 1세대 때나 들어 봄 직한 호칭이었다.

말 그대로 블랙홀을 닫는 과정에 큰 활약을 한 특수종이라는 의미였다.

“필요한 거 있으면 어지간한 건 다 내줘.”

회장은 말하고 다시 잔을 들었다. 흥분을 한 김 식힌 뒤, 그는 딸과 화해할 수단을 꺼낼 때라고 생각했다.

딸아이와 관계가 개선되면 손주와도 자연히 가까워지기 마련이었다.

회장이자, 그룹 총수로서 이레귤러를 잡고자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심장이 두근대기도 했다.

이 엄청난 일을 한 특수종을 직접 보고 싶었으니까.

팬심이었다.

그야말로 영웅적인 풍모를 보인 특수종을 보고 만나서 얘기를 나누고 싶은 그런 팬심.

* * *

순혈 정가의 가주는 성수동 휴즈 게이트 사건 마무리를 듣고 결심을 굳혔다.

“난 그렇게 생각해. 세상에 여자 싫어하는 남자 없다고. 이전 방법은 너무 싸구려였지? 이번에는 고급스럽게 가자고.”

가문 회의 자리였다.

순혈 정가를 지탱하는 한국 불멸자의 핵심 권력자들.

그들이 모두 모인 자리의 안건이 유광익이었다.

정확히 말하면 유광익의 씨였고.

이곳은 순혈 정가.

고작 혼혈에게 이래야 하냐는 마음도 있을 터였다.

하지만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광익이 한 일이 그렇게 만들었다.

그가 이룬 업적이 그와 상관도 없는 이들의 입을 봉했다.

“그 친구 피를 가져오자고.”

순혈은, 정확히 순혈 정가는 이제껏 그리 혈통을 지켰다.

폐쇄적이지만, 뒤로는 능력 있는 불멸자의 혈통을 가져왔다.

“혹여 냄새나는 짐승의 피가 섞이지는 않을지.”

극단적인 순혈주의파의 장로가 말했다.

“그건 그때 생각할 문제. 지금은 그 피가 탐난다. 혼혈도 혼혈이지만, 사우전드 페이스의 혈통이니까. 이전에 유연호 그 친구가 우리 쪽에 왔었다면 좋았겠지만.”

가주는 말끝을 흐렸다.

유연호는 건드리기 어렵다. 괜히 ‘사우전드 페이스’란 이름이 붙은 게 아니다.

잘못 건드리면 불똥이 튄다.

하지만 유광익은?

적대하겠다는 게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지.

그래서 해 볼 만했다. 그렇게 생각했다.

다른 장로가 입을 열었다. 입술이 새빨간 여자 장로였다.

“호남과 기남 형제는 그냥 둡니까?”

“그 둘이 지금 저 규격 외 특수종보다 중요한가?”

가주가 눈살을 찌푸렸다.

장로는 입을 다물었다.

* * *

광익의 얘기를 들은 경찰청장은 마냥 웃지만은 못했다.

괴물이라 생각은 했지만, 이건 나가도 너무 나갔으니까.

그는 그래서 입을 다물었다.

자신의 품에 끌어들이지 못할 거란 예감도 들었다.

비슷한 입장이지만, 다른 생각을 한 권력자도 있었다.

경찰이 아닌 군이 그랬다.

광익이 한 일은 한국 특수종 부대의 시작을 함께한 장성도 감탄하게 했다.

“유광익이 좀 보려고 했는데 그렇게 일 처리를 하면 어떻게 하나?”

최고 책임자가 말했고.

그 말은 밑으로 쭉쭉 타고 내려갔다.

“전투가 끝나자마자 보잔다고 오라고 하면 오겠냐? 너 생각 없지?”

일전에 한 일 때문에 갈굼이 내려와 광익에게 말을 건 간부에게까지 닿았다.

조인트를 까인 간부는 어금니를 꽉 깨물고 시정하겠다는 말을 읊었다.

군대의 특수종 부대는 전부 하나의 여단 소속이다.

그 이름은 ‘유일 여단’.

마크는 동트는 해.

가로 선 위로 반원을 그린 형태의 표식을 쓰는 곳이다.

역사가 가장 깊고, 현재 국내에서 가장 위험한 지역의 수비를 담당하는 집단이었다.

그만큼 국방비도 많이 잡아먹는 곳이기도 했다.

그중 최고 책임자가 광익의 모든 걸 원했다.

군대가 움직여 특수종 하나의 정보를 싹 끌어모았다.

“연호 아들이라고?”

유연호도 군 출신이었다.

최고 사령관과도 인연이 있었다.

사령관은 제 집무실에 앉은 채로 말했다.

“이제까지 우리가 한 러브콜이 좀 약했지? 원하면 소령에서 시작하자고 제안서 하나 뽑아 봐, 그리고 직접 얼굴 좀 보자.”

거물, 대한민국 중추 중 하나가 움직인 셈이다.

이후, 행정안전부 장관도 움직였다.

“연호 팀장한테 아들 데려오라고 해, 5급부터 시작하자. 특채로. 원하면 아파트고 뭐고 더 좋은 거로 내준다고.”

현재 사는 보안 아파트보다 훌륭한 거라면 금전적으로만 봐도 백억 따윈 우습게 넘을 터였다.

따뜻한 제안이었다.

물론 유연호는 무시했다.

아들이 더는 다른 곳에 소속될 마음이 없다고 딱 잘라 말했다.

‘재밌긴 할 텐데.’

아들과 같은 팀에 소속된다.

아버지의 로망을 자극하는 말이었다.

일전의 전투에서 연호는 아들의 활약을 제대로 보지도 못했다.

피닉스팀은 후방을 괴롭히는 놈들을 쫓았다.

그만한 예민함을 가진 불멸자 부대가 없었다. 그들이 아니었다면 후방부터 무너졌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어쨌든 유연호는 광익과 나란히 서는 걸 상상했다.

‘욕심은 나지만.’

그래도 강요는 없다. 냉정한 제안만 남을 뿐이다.

아들은 거절했고.

“아쉽네요.”

피닉스 팀원 무리가 아쉬워했다.

“잘하면 팀장님이 장인어른이 됐을 텐데요.”

가끔 무리수에 가까운 농담을 던지는 팀원의 말에 싸늘한 공기가 오가기도 했다.

순혈 정가, 한국에 남은 불멸교까지.

모든 이들이 유광익을 주목했다.

그리고 그 시간에 광익은 집에서 밀린 웹소설을 읽는 중이었다.

* * *

휴식도 훈련의 일환이라고 했다.

이건 불멸 과외 선생인 작대기 선생님, 변신 과외 선생인 통나무 선생님, 어머니와 아버지, 불멸특수대 교관 모두 동의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쉬었다.

먹고 싸고 자고.

밀린 게임을 하기도 했는데, 흥미가 막 돋진 않았다.

그래도 웹툰과 웹소설은 여전히 재밌었고.

개인적으로 팬인지라, 웹툰 단행본까지 전부 구매했던 작가가 신작을 시작해서 더 신나기도 했다.

이미 30화가 넘어서 신작이라고 하긴 어렵겠지만.

그동안 좀 바빴어야지.

‘큰불의 기사’라는 작품이었다.

판타지 세계관의 독특한 설정이 마음에 쏙 들었다.

배나 벅벅 긁으면서 이틀을 놀았다.

그렇게 놀고먹으며 난 생각했다.

앞으로 또 이런 일이 없을까?

있겠지.

이런 문제를 해결하고 싶었다.

거기에 더 나아가 가능하다면 현재 세계 문제로 대두되는 곳도 정리하고 싶었다.

그러니까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던 목표 중 하나가 있다.

이 세계에 몸담으며 세운 목표.

하다 보면 언젠가 누가 시작할 거고, 거기에 끼어들면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또 그렇게 되지만은 않은 듯하니까.

잡생각 사이다.

“아들, 밥?”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네, 어머니.”

끼니는 어머니가 살뜰히 챙겨 주셨다.

매 끼니 고기가 빠지지 않은 우리 집 밥상, 어머니 집밥이야말로 휴식의 최고봉이니.

“아버지는 오늘도 늦어요?”

마리와 나, 어머니만이 앉은 식탁이다.

“이번에 터진 일 후처리가 어디 보통 일이겠니? 생각만 해도 머리 빠지겠다.”

“그런 뒷정리는 거의 생각 안 하시잖아요.”

“응. 난 안 하지. 네 아빠 대머리 될까 봐 그러지.”

요즘 세상에는 대머리도 패션인데.

아버지가 그럴 일은 없다. 불멸자이기도 하고 뭐, 탈모약은 괜히 있냐고.

이 시대를 살아가면서 최고의 장점은 조루와 탈모를 해결한 게 아닐까.

어쨌든 게이트 후처리는 보통 일이 아닌 게 맞았다.

정리할 것도 많고.

죽은 이들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닌지라, 합동 장례식도 있다.

제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을 위한 대비책도 필요할 테고.

물론 내가 생각할 일은 아니었다.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일도 아니고.

“오늘이지? 갈 거니?”

식탁을 정리하며 어머니가 물었다.

합동 장례식을 말하는 거였다.

위치는 아슬아슬하게 블랙홀 범위에서 벗어난 서울숲이었다.

같은 전장에서 싸운 사람들을 위한 진혼제다.

“네. 가야죠.”

불멸자 중에서도 죽은 이가 나왔다. 그만큼 치열한 전장이었다는 말이다.

먹고 방에 들어와 전화를 켜니.

중고 형이 살려 달라는 문자를 보내 놨다.

귀찮은 연락은 무조건 내 개인 에이전트를 통해 연락하라고 했더니, 이런다.

고생하라고 적고 옷을 챙겨 입었다.

검정 정장에 흰 셔츠, 까만 타이까지.

창밖을 보니, 대낮인데도 하늘이 어둑어둑했다.

비라도 오려나.

밖으로 나섰다.

내 차 대신, 까만 리무진이 왔다.

외할아버지의 배려였다.

“괜히 주목받으면서 가면 불편하니까.”

어머니도 동의했다.

다들 적당히 차려입고 움직였다.

난 마리와 어머니와 동행.

팬더 형은 알아서 오기로 했고.

혜민이는 중간에 픽업했다.

막히는 서울 도심을 뚫고 도착하니, 이미 사람들이 잔뜩 모인 채였다.

허공에 홀로그램으로 죽은 이들을 기리는 사진이 떠올랐다.

먹구름 사이로 사람들의 얼굴과 생전 모습이 스치고 그걸 보며 울음을 토하는 이들이 모인 곳이다.

난 그걸 보며 걸음을 옮겼다.

입김이 하얗게 번져, 허공에 퍼졌다.

겨울이 성큼 다가온 날씨였는데, 모인 사람들 어깨 위로는 열기가 피어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우리는 모두 평화를 바랍니다. 그 평화를 위해 싸우고, 희생하고 삽니다. 이들의 죽음은 다른 사람들의 내일이 되었습니다.”

합동 장례식 주관은 정부에서 맡았다.

대통령이 직접 와서 읊는 연설이었다.

나도 그걸 보며 짧게 묵념했다.

세상에는 아직도 죽는 사람들이 많다.

특수종 세상이 된 이후로 사지 절단으로 괴로워하는 시대는 지났다.

팔다리 따위는 돈만 있으면 재생되는 시대니.

교통사고 따위로 죽는 이들도 확연히 줄었다. 질병으로 죽는 이들도 마찬가지다.

인류는 암도 대부분 정복했다.

조루와 탈모에 고통받지도 않는다.

신소재와 아더 사이드의 식물, 약초 따위는 인류의 새로운 약물이 되어 삶의 질을 높였다.

“우리는 이들에게 감사할 것입니다. 이들의 넋을 기림으로 그저 살아 있음을 기뻐하지만은 않을 것입니다.”

대통령의 연설, 그 목소리가 귀에서 멀어졌다.

울음소리, 허탈한 웃음소리, 탁탁 답답함에 가슴을 내리치는 소리.

슬픔을 형상화한 소리도 멀어졌다.

생각에 집중하니, 자연히 소음이 사라졌다.

특수종 세상에서 살다가 홀에 휘말려 죽는 걸 ‘언럭키’라고 한다.

‘홀 운이 없다’라고도 하고.

예전부터 커뮤니티에서 돌던 말이 이제는 모두에게 익숙해졌다.

홀 운이 없다.

운으로밖에 말할 수 없다는 거다.

누구도 블랙홀이 어떻게 열리고 발생하는지 그 법칙을 알 수 없으니까.

다만, 대비할 뿐.

이런 문제가 터졌을 때를 대비해 훈련하고 준비한다.

그래, 인류는 언제나 준비한다. 인베이더의 침략에 무너지지 않도록.

그럼 언제까지 그래야 할까.

눈이 감겼다.

난 홀로 유리(遊離)되었다.

다른 세상에 서서, 세상을 바라보았다.

감각을 닫고 세상과 단절되었다.

그 세상 속에서 난 특수종의 세상을 살아가는 법을, 나만의 길을 찾아 훑었다.

성수동 휴즈 게이트의 싸움이 끝난 시점에서 떠올린 구상.

세상의 관점에서 보자면 새로운 구상이라고는 할 수 없다.

다만, 내 안에서는 새롭다.

계획이란 건 변하기 마련인데, 막연한 계획의 틀이 틀어진 건 아니었다.

그저 깨달았을 뿐이다.

하나보다는 둘이 낫다고.

“오라버니?”

마리의 물음에 눈을 떴다. 다시 합동 장례식 한복판에 섰다.

뭔가 머리 위에 떨어졌다.

가볍고 차가운 무언가.

어깨 위에도, 손등에도 같은 게 떨어졌다.

예민함 오감이 그걸 잡아챈다.

고개를 들었다.

어둑어둑한 하늘 위에서 하얀 입자가 흘러 내려왔다.

바람이 없는 날이기에 눈송이가 흩날리지 않은 채, 가벼이 떠올라 땅에 내려앉았다.

첫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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