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0. 그건 안도감이었다.
박혁은 자신의 연구를 홀에 대입했다.
정립해야 할 수많은 이론이 무지성(無知性)으로 실현된다.
그 일에 또 희열을 느끼고 열락(悅樂)에 빠져들고.
이론 따위는 이미 먼 나라 얘기였다.
생각하는 것이 그대로 이뤄진다.
박혁은 홀 내에서 수없이 많은 특이종을 양산했다.
양산? 양산이 맞나? 하여간 박혁은 자신도 이해할 수 없는 원리로 특이종을 내보낼 수 있었다.
이대로라면 네임드라도 만들 수 있을 것 같았고.
이때쯤, 박혁에게 사냥꾼으로서의 자아는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오롯이 연구자로서의 박혁만이 존재했기에.
홀 안에서, 자궁이 생명을 잉태하듯, 무수히 많은 특이종을 만들 수 있었다.
만들고 죽였다.
실패작이 너무 많았다.
연구자로서의 자아가 그걸 용납지 않았다.
실패작을 버리고 재차 성공한 놈들만 놔뒀다.
그 와중에 쓸만한 것들은 다시 대기.
어디선가 끊임없이 에너지와 인베이더가 몰려왔다.
박혁은 그걸 십분 활용했다.
곧 그의 머릿속에 떠돌던 망상의 결과물이 특이종이란 이름을 얻어 홀 밖으로 나섰다.
* * *
머리 셋 달린 오거, 굳이 이름 붙이자면 트리플 헤드 오거.
특이종의 힘은 대단했다.
쿵!
발을 한 번 구를 때마다 인류가 만든 인프라, 아스팔트와 보도블록 따위가 깨져 허공에 튀었다.
흙더미도 덩달아 솟았다.
후아앙! 꽈-앙!
휘두른 봉에 꼬마 빌딩 중간쯤이 걸렸다.
그 한 방에 빌딩이 중간부터 무너졌다.
안 그래도 블랙홀 때문에 지반이 약해진 상태였는지라, 물리법칙 따윈 무시하고 폭삭 무너지는 것처럼 보였다.
당연한 일이었다.
지하에서 열린 홀과 거길 뚫고 나간 사일런스 웜 덕분에 땅 밑이 개판이었으니.
파지직.
땅에 심어 둔 전기 시설 일부가 망가지며 허공에 파지직- 하고 파란 불빛이 튀었다.
와르르 무너진 건물 덕에 회색 먼지구름이 시야를 가렸다.
특이종, 위험한 인베이더이긴 하지만.
죽이지 못할 정도는 아니다.
그렇게 판단했다.
그러니 저 대가리 셋 달린, 밥 먹을 때마다 취향 때문에 격하게 싸울 것 같은 괴물을 향해 갈 필요는 없을 것이다.
내가 아니어도 누군가는 막는다. 그럴 수 있을 것이다.
무전기를 통해, 아버지가 전장에 합류해서 인베이더를 잡는다는 것도 들었고.
난 어지간한 건물 크기에 육박하는 대가리 세 개인 괴물을 보며 걷는 속도를 조절했다. 빨리 합류하는 대신 시야를 넓게 뿌렸다.
다들 잘 싸우고 있었다.
다른 홀을 통해서도 인베이더가 툭툭 튀어나오는데, 대응이 훌륭했다.
“잡아! 잡아! 놓치지 마쇼!”
사이오닉 협회와 PWAT가 하나가 되어 염동력을 발휘, 휠 나이트를 붙든다. 무형의 압력이 인베이더의 움직임을 제한했다.
그 상태 그대로 변신족 하나가 긴 칼을 들고 내달리더니, 휠 나이트 뒤로 훌쩍 넘어가 칼을 휘둘렀다.
쩍!
휠 나이트는 후방이 약점이다.
그렇게 휠 나이트를 해치운 변신족이 땅을 구르고 일어나며 뒤쪽을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염병, 코피 터지겠네.”
염동력자 하나가 엄지로 한쪽 코를 막고 뭉친 코피를 팽하고 풀며 답했다.
둘 다 웃었다.
무난한 상황이었다.
딱히 위험이 없는 곳, 그런데 왜 난 여기에 오고 싶은 건지.
날아오는 바운스를 얼리는 작자도 보였다.
그 하나뿐만이 아니었다.
얼리고 태우고 붙든다.
땅도 흔들렸다.
특수종 하나가 땅에 손바닥을 붙이고 이마에 핏대를 세우고 있는 게 보였다.
능력자를 중심으로 일정 반경만 흔들린다.
드드드.
지진 능력자라니, 특이했다.
땅이 흔들리자, 달려들던 챔피언 세 마리가 기우뚱 휘청였고.
그 틈을 타 불멸자로 보이는 특수대원 하나가 양손에 우지(UZI)를 들고 갈겼다.
짧은 총신을 가진 기관단총이 9mm 파라블럼탄을 쏟아냈다.
챔피언의 약점인 가슴 중앙에 탄이 모였다. 놀라운 집탄율이다.
하긴 불멸특수대라면 그 정도는 해야지.
땅이 흔들려 중심을 잃은 놈들은 탄을 막지 못했고, 세 놈 다 심장을 잃었다.
챔피언 셋이 쓰러졌다.
그런 싸움이 곳곳에서 벌어지는 중이었다.
초능, 변신, 불멸이 하나가 돼서 싸웠다.
홀에서 나오는 인베이더 숫자는 어마어마했다.
엘프의 습격 때문에 포대가 멈춘 틈에 붙어 버려서, 이제 포대 지원은 기대할 수 없는 그런 상황.
그리 많은 인베이더가 나오고 포대의 지원은 꿈도 못 꿀 상황이지만.
위기감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에이팀, 방사.”
앞에서 몰려나오는 슬라임 무리를 본 변신족 팀이 화염 방사를 내뿜었다.
화르르륵.
화끈한 열기가 전장 일부에서 뿜어져 나왔다.
화염 줄기에 타오르는 슬라임 뒤로 도플갱어 무리가 나왔다.
그것도 덩달아 탔다.
잘 탔다.
매캐한 연기가 피어오른다.
시시각각 인베이더가 줄어들었다.
이대로라면 저 대가리 세 개 오거와 엘프만 잡으면 끝날 것 같은 그런 싸움이었다.
근데 왜 난 안 그럴 것 같지?
오감이 날을 세우고 육감이 한 치 앞의 미래를 본다.
아까보다 싸움이 수월해졌다.
휘파람을 불며 하트 리스의 머리통을 깨부수는 변신족이 보였다.
리빙 아머가 달려들자, 얼린 뒤 수류탄을 던지는 PWAT 대원도 보였다.
왜 쉬워질까.
이유는 금방 찾았다.
홀에서 나오는 인베이더의 숫자가 줄어들었다.
휴즈 게이트가 제일 무서운 점은 그 막대한 인베이더의 숫자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은 처음 문이 열렸을 때보다 개체 수가 적다. 나오는 속도도 느리다.
그래서 싸움이 쉬워졌다.
불멸자를 제하고는 흔한 상처 입은 이도 찾기 어려울 정도로 무난한 싸움이다.
휴즈 게이트도 그 규모에 따라 수준을 나눴다.
하급은 일반 인베이더만 나오고.
중급은 특이종이 섞여 나온다.
상급은 네임드가 출현하며 다른 말로는 헬 게이트라고도 부른다.
지옥문, 네임드의 출현은 현실에 지옥을 불러내는 것과 마찬가지니.
특이종의 개입, 이건 중급 휴즈 게이트다.
그게 이리 쉬울 수는 없다. 그건 이상한 거다.
싸움의 시작부터 지금까지.
바운스의 출현, 사일런스의 웜, 엘프, 대가리 셋 오거.
이상 현상이란 네 글자가 머리에 떠올랐다.
꾸르릉.
그때, 작은 소음과 함께 홀 우측에서 특이종이 튀어나왔다.
“갈겨!”
“안 통한다!”
“핀 포인트로 쏜다.”
미묘하게 전장의 흐름이 변했다.
난 소음에 귀를 기울이며 시선을 돌렸다.
전신이 회색빛인 하트 리스가 홀에서 튀어나온 게 보였다.
양손에 칼날 또한 전신과 같은 회색이었다.
따다 다다다당!
하트 리스는 기술형 인베이더다. 육체형만큼 막강하지 않다.
화기에 약하다는 말과 같았다.
그런데 놈의 몸에 맞은 탄이 불티를 튕기며 튀었다.
총탄이 안 먹혔다. 전부 튕겨 냈다.
전신을 두른 회색빛 몸체가 이상한 빛깔을 냈다.
빛을 흡수해 더 칙칙해지는 것처럼 보였다.
“……와, 시발.”
변신족 하나가 중얼거렸다.
그게 그의 유언이 될 뻔했다.
눈깔 네 개, 유리처럼 뽀얗게 변한 하트 리스의 눈이 변신족을 포착하자마자, 놈이 땅을 박찼다.
펑, 흙이 치솟는다. 휠 나이트만큼 빠르진 않아도 충분히 위협적인 속도였다.
놈이 땅을 박차고 달려와 칼날을 수직으로 그었다.
초능 특수종 하나가 그 머리 위를 향해 가까스로 불덩이를 던졌다.
펑!
폭음과 함께 하트 리스가 뒤로 휙 날아갔다. 공중에서 몸을 틀어 균형을 잡아 똑바로 선다. 동작이 깔끔했다.
인베이더만 아니었다면 박수가 절로 나올 정도로.
저 한 곳에서만 일어나는 일이 아니었다.
홀에서 나오는 인베이더 숫자가 줄어드는 대신이다.
“특이종.”
내가 중얼거렸다.
홀 안에서 진짜 특이종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마치 누가 만들어서 내보내는 것처럼 전투에 특화된 그런 특이종이.
전신 강체 하트 리스에 뒤이어 나오는 건 오크 투사 무리였다.
투구 대신 단단한 갑각을 머리와 몸에 두른, 체고만 최소 2m의 오크 무리가 서른이 넘었다.
그 선두에 선 놈의 머리에 자란 갑각이 마치 뿔 투구처럼 보였다.
양쪽으로 길게 솟은 뿔이 30cm가 훌쩍 넘어 보였다.
“우 어어어 어어어!”
오크가 나오자마자 함성을 내질렀고 그건 그 주변 일대를 순간 숨죽이게 하는 피어를 뿜어 냈다.
“으르르르르.”
그 피어에 반응한 변신족 무리가 되려 살기를 뿜어 냈다.
양 대신 질.
그런 말이 떠올랐다. 질이 높아짐으로 생기는 변수가 한둘이 아니다.
고로 그냥 두면 안 된다는 거고.
고작 십 분 내외로 일어난 일이었다.
난 뒤편에 다가오는 인기척을 느꼈다.
“아들.”
“오라버니.”
어머니와 마리였다.
전장에서 물러나 있다고 날 보고 다가온 듯했다.
마리의 손이 무거웠다.
4번 타자를 비롯한 무기 다발이 들렸다.
제 몸의 반만 한 묵직한 백도 들었다.
그 와중에 왼쪽 허리춤에는 그레네이드 건까지 알뜰살뜰 챙겼다.
외할아버지가 선물해 준 무기 차를 제대로 탈탈 털어서 가져온 거다.
“어머니, 좀 도와주실래요?”
난 말하며 트럭 하나를 찾아 그 앞에 섰다. 바로 옆에 고급 세단, 벤츠가 주차되어 있었다.
그 앞에 쭈그려 앉아 밑을 손으로 받쳤다. 어머니가 반대편에서 나와 호흡을 맞춰 주셨다.
“뭐하게?”
“저격의 최소 조건 확보를 위해서입니다.”
시야 확보다. 고지대를 확보하면 좋지만, 이 일대에 있는 건물 중 멀쩡한 게 없다.
1차 때 홀에서 일어난 인력(引力) 때문에 반파된 게 대부분이었다.
그나마 멀쩡한 것도 포대 화력에 전부 망가졌고.
“둘, 셋, 흐찻.”
차체를 번쩍 들어 트럭 위에 얹었다.
“저것도요.”
똑같은 차를 하나 더 들어 위에 얹었다.
비슷한 차가 주변에 다섯 대나 있었다.
성수동에는 외제 차가 참 많다.
다섯 대 전부를 들어서 얹자, 우직우직 밑의 차가 비명을 질렀고.
사방에서 특수종의 비명도 같이 터졌다.
살아남은 저격 포인트에서 지원을 기대할 수 없었다.
있다 해도 대물 저격총 수준에 특수탄을 쓰지 않고서야 의미가 없다.
전투 양상은 한순간 변했다.
위기가 찾아왔다.
오크 서른 마리는 쐐기진을 만들더니, 단숨에 내달려 난전을 유도했고.
그사이 회색 몸뚱이의 하트 리스 두 마리가 더 나와 그 사이로 파고들었다.
화기가 통하지 않는 하트 리스라니.
전신에 플레이트 메일을 입은 검술의 대가와 다를 바가 없다.
난 벤츠 햄버거를 만든 뒤, 그 위에 엎드렸다.
적당한 높이였다.
“주변 경계해 주마.”
어머니가 말하며 다가오는 고블린 머리통을 잡아 던졌다.
훙 하고 날아간 놈이 볼링핀처럼 눈먼 개를 쓰러뜨렸다.
“마리가 지킬게요, 오라버니.”
마리도 말했다.
든든했다.
이 둘이면 네임드가 아니고서야 다가올 엄두도 못 내겠지.
“후우우우.”
호흡을 한번 가다듬은 뒤, 난 왼손 검지와 중지를 붙여 총구 모양을 만들었다.
완갑 형태로 내 왼손에 붙은 웨어러블 기어, 기생 라이플이 제 모습을 현신한다.
완갑이 뒤틀리고 변하며 제 모습을 찾아갔다.
길게 늘어난 완갑의 일부가 총구가 되어 손등 위를 지나, 손가락 앞을 지나 20cm쯤 튀어나왔고, 팔꿈치 위에는 조준경이 보였다.
불멸자는 타고난 저격수다.
거기에 훈련까지 부지런히 하면 타고난 걸 넘어서 괴물 같은 저격수가 될 수 있다.
난 그걸 사수를 보고 배웠다.
불멸자가 아니지만, 노력과 비약으로 그 위치를 잡은 사람이다.
포지션은 전장은 중앙.
난전이 되어가는 전장 한복판이다.
어머니와 마리가 근접 전투를 책임져 주면, 이런 것도 가능했다.
패러사이티움, 기생석을 기반으로 만든 웨어러블 기어가 첫 번째 불꽃을 뿜었다.
꽝!
피 한 방울에 탄 한 방.
어깨가 뒤로 밀렸다. 반동을 전신으로 받아 낸다. 한쪽 다리는 안쪽을 바닥에 붙이고 다른 다리는 반동을 받아 내도록 발끝을 차 위에 박아놨다.
한 발을 쏘고.
다시 다음 타깃을 잡는다.
그걸 반복했다.
꽈과과과과과광!
여섯 발의 불꽃이 쉴 틈 없이 터졌다.
그 불꽃은 제 역할을 톡톡히 했다.
첫발은 막 변신족의 팔을 썰고 목을 노리던 하트 리스의 머리통에 주먹만 한 구멍을 만들었고.
다음 탄은 오크 투사 리더의 머리통을 터트렸다.
쏘는 족족 헤드샷, 노리는 대로 탄이 적을 학살했다.
* * *
강슬혜는 난전으로 변한 전장 덕분에 어느새 자신이 전장 한가운데에 있음을 알았다.
그녀는 주변에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그건 마리도 마찬가지였다.
어느새 차를 햄버거처럼 쌓은 뒤, 올라선 아들이 총질을 하는 중이었다.
‘위험하면 변신해서 들고 냅다 달리지 뭐.’
빠져나가는 건 자신 있었다.
그리 생각하며 아들이 하는 일을 용인한 강슬혜는 잠시 뒤, 놀랐다.
놀람을 쉬이 티를 내진 않았다.
다가오는 인베이더를 때리고 후려치고 물러서게 하기 바빴으니까.
하지만 속으로는 더없이 놀랐다.
‘기어.’
그것도 퓨어 기어에 가까운 것 같은데.
아들의 왼손 위에서 총구가 튀어나오더니, 쏘는 족족 위험에 빠진 아군을 구하고 인베이더의 머리를 터트렸다.
적아가 섞이는 바람에 개판이 된 전장 한복판에서 이뤄지는 저격이다.
그중에서 적의 머리만 콕콕 집어서 때린다. 그것도 1초의 틈도 없이 연속 사격이다.
볼트 액션 타입도 아닌 연사 가능한 저격총으로 이런 짓이라니.
불멸자라고해도 묘기였다.
그리고 전장에 이보다 훌륭한 지원 사격은 없었다.
“오라버니는 대단해요.”
옆에서 마리가 말했다.
마리는 무기 차에서 가져온 긴 언월도를 옆으로 돌려 면으로 막 달려드는 눈먼 개를 후려친 참이었다.
“그래, 누구 오라비인데.”
강슬혜는 가슴이 뿌듯했다.
그리 싸우고 있으니, 주변에 사람이 모였다.
사이오닉 협회 소속, 불멸특수대, 화랑, PWAT, 군대까지.
“유광익이죠?”
불멸특수대 중 누군가 아들을 알아보고 물었다.
누구냐고 눈으로 묻자.
“동기였어요.”
전 직장 동료였다.
그가 말하며 머리에 묻은 피를 털어 냈다.
“덕분에 살았다고 전해 주세요.”
“나중에 직접 말해요.”
어머니는 아들의 친구로 보이는 사람에게 눈웃음을 보였다.
상황과는 어울리지 않았지만, 그걸 본 불멸특수대원은 기묘한 느낌을 받았다.
여기에 있으면 괜찮을 것 같은 그런 느낌.
그리고 그건 그 혼자 느낀 건 아니었다.
주변에 모인 이들 모두가 같은 걸 느꼈다.
그건 안도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