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규격 외 혈통 천재-195화 (195/488)

195. 보물창고처럼 보였다.

시야가 엉망이 됐다.

좌우 대칭이 안 맞는다.

입을 열어 말하려는데 혀가 멋대로 움직였다.

“으르므래움.”

이게 무슨 개소리야.

“하하하하.”

금발이 웃으며 나이프를 들었고, 날 향해 달려왔다.

우리 사이 거리는 고작 열 걸음 안쪽.

놈의 뒤에 있는 가로등이 눈에 들어왔다.

가로등을 반으로 쪼개서 좌우 그림을 나눠 붙이면 이런 그림이 될까?

그럴 것 같다.

그걸 깨닫는 순간, 어떤 감각은 반대로 됐고, 또 어떤 감각은 제멋대로 틀어졌다는 걸 알았다.

왼쪽 검지를 움직였다.

오른쪽 새끼손가락이 움직였다.

왼쪽 엄지를 움직였다.

오른쪽 검지가 움직였다.

오른쪽 중지를 움직였다.

왼쪽 약지가 움직였다.

감각 교란, 초능.

금발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기묘한 형태였다.

얼굴 반을 쪼개서 나눠 붙인 듯한 그런 그림.

내달리는 놈과의 거리가 다섯 걸음 안쪽이 됐다.

칼이 내 목이나, 허벅지나 복부 따위에 닿을 때까지 길어야 3초 내외가 됐을 때.

난 전신을 전부 조금씩 움직여 볼 수 있었다.

처음 손가락 꿈틀하는 게 오래 걸렸지, 나머지는 금방이다.

이후 감각을 나눴다.

전부 기억하고 계산할 수는 없다.

그럼?

몸이 기억하게 하면 된다.

변신족의 훈련은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하는 거였다.

그대로 했다.

반복한 움직임으로, 새로운 감각을 몸 위로 덧입힌다.

금발의 칼날이 내 목에 닿았다.

피부가 따끔했다.

난 왼발을 앞으로 차며 뒤로 누워 버렸다.

픽- 하고 칼날이 목을 스쳤다.

“오우, 그걸 피했어요?”

이 새끼, 어설픈 한국말 듣기 되게 싫네.

“그럼 그냥 맞을 줄 알았냐?”

뒤로 누운 채로 말하니.

“……어떻게 말을 하죠?”

“말은 네 살 때 뗐거든.”

감각을 교란해? 그럼 다시 익숙해지면 된다. 별로 어렵지 않았다.

기술을 새로 익히는 거랑 뭐라 다르다고.

그대로 했을 뿐이다.

일어나서 손목을 잡아채, 꺾었다.

우드득.

몸을 단련한 타입이 아니었다.

“아악!”

제 초능 하나만 믿고 버티는 타입이지.

놈이 비명을 지르기에 정강이를 톡 찼다.

똑하고 다리가 부러졌다.

“끄, 끄으으으으으.”

비명이 아니라 신음에 가까운 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대로 머리통을 손날로 내리쳤다.

빡!

죽일 생각은 아니었다.

다만, 이런 상태로도 초능을 유지하기에 골을 흔들어 준 거지.

가끔 집중하지 않아도 반사적으로 능력을 유지하는 초능 특수종이 있다. 따로 단련하지 않아도 타고나는 거다.

그런 애들은 골을 흔들어 주면 된다.

난 그렇게 했다.

놈도 이번에는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고, 멀쩡한 손으로 제 정수리를 움켜쥐며 바닥을 굴렀다.

“와, 갑갑해 죽을 뻔했어요. 말 못 하는 게 이렇게 괴로운 거라는 거 알았어요? 그 자식, 뭔데요?”

소진이 본래대로 돌아왔고 내 감각도 멀쩡해졌다.

“이럴 수는 없어요. 불멸자라면 더 예민하게 반응합니다. 이건 아니에요.”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바닥에 널브러진 놈이 현실을 부인했다.

“감각이야 다시 익히면 그만이지.”

내가 말했다.

“네? 뭐라고 했습니까? 광익?”

이 새끼 친숙하게 이름 부르네, 내가 네 친구냐?

“말 그대로다.”

말하며 이마에 딱밤을 먹여 줬다.

딱.

“악.”

이마를 맞은 놈이 뒤로 넘어갔다.

“쉣!”

그제야 영어로 욕이 튀어나왔다.

“너, 어스 블랙홀 어떻게 열었냐?”

“흐.”

놈은 그대로 바닥을 굴렀다.

아프긴 아프겠지.

내 딱밤은 무려 변신족의 괴력 딱밤이니.

이마에서 피가 줄줄 흐르는 게 보였다.

“그럴 수 없어요. 어떤 인간이건, 변한 감각에 적응할 수 없어요. 특히 불멸자라면 더더욱.”

감각에 의존하는 불멸자라면 조금 전 초능에 꽤 뜨끔하긴 할 거다.

하지만 그건 더 쉬운 방법이 있다.

한 번 당한 다음에 원거리 저격으로 대가리를 따면 끝이다.

물론 다음 기회가 있다면 그렇다는 거다.

그래서 몸을 숨길 스펠 기어를 준 걸까나.

수틀리면 튀어서 다음 기회를 잡으라고? 나야 모른다. 이 새끼 초능은 나한테 통하지 않았다는 걸 알 뿐.

“내 질문에 답 안 할 거지?”

내가 물었다.

금발은 눈알을 데굴데굴 굴렸다.

“내 목숨 보장해 줍니까?”

“하는 거 봐서.”

금발이 고개를 끄덕였다.

“전 어스 블랙홀을 열 수 있습니다.”

놈이 말했다.

“그게 진짜라면 쉬이 넘어갈 얘기는 아니겠지.”

뒤쪽이었다.

운비와 안결이 다가왔다.

안결은 말하며 손을 털었다.

후두둑- 하고 피가 바닥에 떨어졌다.

근데 쟤 눈빛은 왜 저러냐.

어째 날 보고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 같은데.

무시했다.

고스트라 불리는 금발을 찾았으니, 일단 이거부터.

“어떻게?”

내가 물었다. 곧 금발이 입을 열었다.

* * *

한국은 땅덩이가 좁다.

덕분에 숨을 곳이 별로 없었고.

매드 사이언티스트 집단이 활동하기 좋은 곳은 결코 아니었다.

그래서 미친 과학자 대부분은 동남아 일대나 중국, 유럽 등지에서 활동했다.

물론 그중에는 국내에서 활동하는 놈도 있었다.

대부분 가진 연구 성과를 팔아먹거나, 이레귤러를 사냥하는 놈들이었다.

흔히 말하는 특수종 사냥꾼 무리다.

박혁은 그중에서도 월등한 능력을 갖춘 놈이었다.

연구소장이자, 특수종 사냥꾼 리더였으니까.

그 박혁은 지금 긴 테이블을 앞에 두고 넷을 동시에 상대하는 중이었다.

하나는 미국에서 왔고, 둘은 동남아에서, 하나는 중국에서 활동하는 놈들이었다.

전부 매드 사이언티스트, 그러니까 불법 연구소에서 나온 이들이다.

그중 특수종 사냥꾼이라 불릴 만한 사람은 자신뿐이었다.

‘챔피언을 상대하는 건 봤지만.’

박혁은 유광익이 싸우는 걸 봤다.

그걸 보고 놀라기도 했다.

세계 최강이란 말에는 비웃기도 했다.

특수종의 세상은 그리 얕지 않으니까.

특히나 어둠의 세계에 깊게 발을 들인 자신은 더 잘 아는 사실이었다.

“잡을 수 있는 겁니까? 불멸과 변신 혼혈, 그것도 이레귤러라고 들었습니다.”

미국 쪽에서 온 바이어다.

여기 앉은 넷은 전부 바이어였다.

전부 박혁 자신이 끌어들인 사람이었고.

“잡습니다.”

“챔피언을 상대하는 걸 봤습니다. 쉬운 상대가 아닙니다.”

“절 걱정해 주는 겁니까?”

박혁은 능수능란했다.

농담을 섞어 말하기도 하며 대화를 쉬이 이끌었다.

동남아 출신 둘과 한국에서 넘어간 과학자 둘의 눈이 박혁에게 향했다.

“농담은 그만두죠. 그 모친도 변신족인 걸 확인했죠? 몸이 회복되는 건 다 봤으니, 알 테고.”

박혁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

그는 여유가 있었다.

“잡아서 주면 돈은 얼마든지 줄 거요.”

한국인 출신 바이어다.

박혁은 속으로 그를 비웃었다.

저 작자에게 그만한 돈이 없다는 건 잘 안다.

그 뒷배가 대신 말하는 셈이겠지.

박혁은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말라니까, 어떤 특수종도 약점은 있는 법이니까.”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다. 박혁은 그걸 안다. 사냥은 약점을 후벼 파는 거였다.

이미 그걸 위해 손을 쓴 게 하나둘이 아니었다.

하나는 인질 작전이다.

부모와 박마리는 보안이 철저한 아파트에 있어서 공략 불가지만, 다른 여자 하나는 허술했다.

‘강혜민이라고 했던가?’

마법사는 육체 능력이 미흡하다. 잡는 건 일도 아니었다.

물론 두 번째 대안도 있었다.

그에겐 계획이 있었다.

똑똑.

바이어와의 만남을 방해하는 소음이 끼어들었다.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찾지도 않을 일이었다.

“잠시만.”

밖으로 나가니, 부하가 말했다.

“특파라치가 잡혔습니다.”

특파라치, 특수종을 관찰하는 재주가 있는 프리랜서다.

쉬이 잡힐 인간이 아니다.

의외의 일이지만, 그렇다고 이 일로 한국에 들여온 인프라가 다 박살 나는 일은 없다.

한국에 있는 거점만 열세 개다.

그중 하나를 포기하면 그뿐인 일이다.

불법 연구소를 운영한다는 건, 평생 술래잡기를 하는 것과 다름없었다.

거점 하나 뜬 포기하는 건 일상이었다.

“그래서?”

고작 이 일 하나라면 바이어와 회의 중인 자신을 부를 리 없었다.

“그게, 오늘 제이크가 거기에 있습니다.”

제이크는 초능 특수종, 그 능력은 특수종 사냥꾼으로서 더없이 적합한 인재였다.

그 특유의 능력 덕분에 이전 유광익 테스트에도 투입한 거였고.

이후, 그쪽에서 찾는다고 난리였지만, 그리 쉬이 잡힐 위인이 아니었다.

이건 그러니까, 순전히 운이 나빴다.

오늘 제이크가 그곳에 간 건 거처를 옮기며 상대의 눈을 피하기 위해서였는데, 거기서 마주쳐?

“연락 취해서 전부 빠지라고 해. 그리고 그 제이크다. 혼혈이건 뭐건 제 몸 하나 빼는 건 일도 아닐 거다.”

“이미 연락 취했습니다.”

“그런데?”

부하가 우물쭈물하다가 말했다.

“이미 털렸습니다.”

“뭐?”

특파라치 신주호가 잡힌 게 고작 몇 시간 전이었다.

정기 연락이 안 와서 확인해 봤더니, 잡힌 흔적이 남아 있었다는 거다.

어떤 부대도 움직이려면 최소한 그 몇 시간은 필요하고, 그 정도면 발 빼는 데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5분 대기조라도 있었어?”

“넷이서 습격했습니다.”

“넷?”

“유광익과 변신족 셋이었습니다. 화랑 쪽 인원으로 확인됩니다.”

“넷에 거점이 털려? 제이크는?”

“그게…….”

“말해.”

“잡혔답니다.”

박혁은 순간 아찔함을 느꼈다.

제이크가 잡혀?

걔가 누군데, 그렇게 쉽게 잡힐 애가 아닌데?

“팬텀이라도 왔어?”

유광익과 연결점이 있는 사람을 떠올렸다.

불멸특수대의 팬텀.

“아니면 사우전드 페이스?”

행안부 특임대 피닉스팀.

“화랑이 붙었다면 그쪽 병력이 투입된 건가?”

단군 그룹에서도 특출난 능력자는 몇 있다.

능력을 발동하기 전에 제압당한다면 제이크도 잡힐 수 있었다.

“정확히 아는 건 없습니다. 다만, 제이크의 연락이 끊겼고, 추적 신호가 잘렸습니다.”

“허.”

박혁이 허탈한 말을 토했다.

‘설마 유광익이?’

그래, 잘 싸우긴 한다. 특출난 인재인 것도 맞다.

불멸과 변신의 혼혈, 거기에 이레귤러.

다 안다. 하지만 이게 말이 되나?

거점에 있는 병력 중 불멸특수대 요원급의 특수종만 셋이다.

혼혈 변신족도 섞였다.

그런데 이걸 뚫고 제이크까지 연락 두절이다.

“기지를 점거하고 단방향 통신으로 글을 남겼습니다.”

바이어와 미팅을 방해한 이유는 여기에 있을 터였다.

박혁은 미간을 찌푸렸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말하라는 표시에 부하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너 만나면 뒈진다고.”

“유광익이, 이거 참, 재밌는 친구일세.”

박혁의 이마에 핏대가 솟았다.

자신의 무려 1.5세대 특수종이다.

그 1세대의 영웅이 날뛸 때, 같은 시대를 살았던 몸이라는 거다.

활동하는 무대가 다르고 자신이 범죄자 중에서도 악질인 건 맞지만.

새파란 후배한테 면전에 욕을 먹은 기분이었다.

“좋아. 좋다고.”

박혁이 돌아섰다.

바이어와 회의를 끝마칠 때였다.

새삼 그는 결심했다.

‘반드시 잡아서 산 채로 해부해 주마.’

불멸자라고 하니, 바이어에게 팔기 전에 그 몸을 하나하나 뜯어 볼 참이었다.

그럼 그건 곧 자신의 연구 자산이 되기도 할 테니.

이번 일을 위해 자신의 연구 성과 하나를 세상에 보이기도 했다.

블랙홀 오픈이 그거였고, 제이크가 넘어간 이상, 비밀 일부가 풀리는 셈이었다.

씁쓸했다. 하지만 이 모든 씁쓸함은 유광익을 잡으면 해결될 문제였다.

그는 유광익을 잡을 수 있다고 믿었다.

계획이 다 있었으니까.

모든 계획은 무너지기 전까지는 완벽해 보이는 법이기도 했고.

* * *

결론은 그랬다. 반쯤은 예상했다.

어스 블랙홀을 임의로 열 수 없다는 거다.

그게 됐다면 사회가 엉망이 됐을 거다.

“그러니까.”

“네, 맞아요. 당신이 생각하는 그겁니다. 우리는 미리 블랙홀을 열리는 곳을 판독할 수 있어요.”

답은 상당히 의외였다.

불법 연구소의 성과다.

어스 블랙홀을 막는 걸 몇 번이나 억지로 방해하고 그 에너지 파장을 관찰, 연구했다는 거다.

무려 십 년이 넘는 동안.

덕분에 사이오닉 협회에서 독점하는 판독기보다 더 양질의 판독기를 만든 거고.

결론만 말하면 챔피언을 상대한 그 날 내가 당한 건, 미리 판독한 블랙홀 근처에서 언택트 가드에 재밍을 걸고 적절한 연기가 섞은 연출이었다.

때마침 내가 있던 카페 앞에 열릴 블랙홀이 있었던 거고.

“후진국에서는 가능한 얘기지.”

이글이글 눈을 갖게 된 흉터 안결이 말했다.

날 볼 때마다 저 뜨거운 시선 뭐냐고.

무시했다.

“이 거점에 그 연구가 있어요.”

금발이 말했다.

난 생각했다.

화가 나서 들이받긴 했는데.

생각지도 못한 이득이 딸려 왔다고.

거점 안에 있는 컴퓨터가 보물창고처럼 보였다.

이곳은 판독기 시장을 뒤엎을 보물 일부가 묻힌 땅이었다.

그와 동시에 드는 생각도 있었다.

과연 그게 전부일까 하는 의심이었다.

모든 걸 우연으로 치부하면 쉽다.

그래서 드는 의심이었다.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