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규격 외 혈통 천재-189화 (189/488)

189. 듣기 전에 먼저 거절하기로 했다.

낄낄, 하하, 흐흐.

주로 할아버지가 떠들고 난 맞장구만 쳤다.

우리는 웃었다. 많이 웃고 많이 떠들었다.

지금은 할아버지가 막 어머니와 삼촌의 성이 다른 이유를 말하는 중이었다.

그러니까 재벌 총수답게, 부인도 많고 첩도 많단다.

전부 제 성을 물려주자니, 헷갈리니까 어머니의 성을 따르게 했다는 거다.

할아버지는 엄청 독특한 가치관의 주인이었다.

이러니까 자식끼리 싸우고 그러는 거 아니냐고 물으니.

“애들은 싸우면서 크는 거다.”

라며 껄껄 웃는다.

외할아버지 성함은 강노석.

어머니는 정부인의 딸이었다.

재벌식 콩가루 막장 집안 얘기를 유쾌하게 하니 이건 뭐, 진짜 남의 집 얘기 같기도 했다.

“어머니랑은 왜 그렇게 사이가 안 좋으세요?”

“사춘기지.”

장성한 아들을 둔 어머니가 사춘기라니.

“요즘 말로는 오춘기인가.”

말하며 또 껄껄.

할아버지는 웃음 많은 분이었다.

어머니와 할아버지의 일이다.

더 깊게 후벼팔 수도 없어서 넘어가려고 했는데.

“그룹을 물려받으라고 했다.”

또 대수롭지 않게 말하네, 이 할아버지.

“……네?”

조금 당황했다.

그룹을 물려받으라고 했더니 집을 나가?

막장 드라마에서나 보던 스토리다.

손에 땀을 쥐고 다음 편을 기대하면서 할아버지 입을 바라보니.

“싫다고 나가더라. 덕분에 다른 애들만 머리 터졌지 뭐.”

허무하게 얘기가 끝난다. 김이 픽 샜다.

말하며 할아버지가 미소를 보인다.

지나간 일은 지나간 일이라는 걸까나.

담담한 모습이다.

할아버지는 여유가 넘치는 사람이었다.

이게 웃으면서 할 얘기는 아닌 것 같지만 뭐.

숨겨진 얘기가 더 있을 것 같긴 한데.

나중에 어머니께 또 물어보면 되지.

안 그래도 돌아가면 말해 줄 것 같으니까.

그게 아니라면, 지금 할아버지를 만나라고 하지도 않았을 거다.

그런 생각과 함께다.

난 눈앞에 있는 그룹 총수이자 할아버지란 사람을 나름대로 정리했다.

독특한 가치관의 주인이자, 웃음이 많고 여유가 넘치는 사람.

거기에 하나 더, 음흉한 사람.

화림에 첫 입사할 당시 남명진 사장을 볼 때 이런 기분이었다.

지금이야 뭐.

그냥 아는 회사 사장님이지만.

다시 할아버지를 바라봤다.

눈과 눈이 마주쳤다.

딸각.

녹차 잔을 다 비우고 테이블 위에 내려놨다. 창가에 툭툭 빗방울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했다.

햇볕이 내리쬐는데 비가 내린다. 여우비였다.

창문을 때리는 빗방울 소리가 배경음악처럼 들릴 때쯤, 할아버지에게 물었다.

“뭐 하시게요?”

“손주야. 이 할아비는 손주의 재롱이 보고 싶어요.”

“재롱이요?”

“이건 그러니까, 그래, 설날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설날이요?”

마주친 눈은 그대로.

양손을 맞잡은 할아버지가 입을 연다.

그와 동시에 사방에서 살기가 날 찔렀다.

“세배하고 세뱃돈 받는 거랑 같은 거로 생각하면 딱 맞는구나. 다만 세배 대신 다른 게 보고 싶은 거지, 이 할아비는.”

말투가 어울리지 않았다.

눈이 차갑다. 감각이 경고성을 발했다.

“벽에 걸어 둔 주문이 혹시 방호 주문인가요?”

슬며시 손을 내리며 물었다.

“손주 눈치가 빠르구나. 그건 네 아비의 피일까?”

“아마도요.”

말하는 것과 동시에, 테이블의 오른쪽 끝을 발로 걸어 밀듯이 옆으로 날렸다.

살기의 주인이다. 여기저기 숨어 있던 그림자 중 하나가 달려들었다.

텅 하고 테이블이 그 그림자 중 하나를 향해 그림자가 테이블을 공중에 잡아채서 옆으로 던졌다.

반응 좋고.

난 짧은 틈을 벌고 두 발을 들었다가 바닥을 찼다.

소파가 뒤로 기울였다. 그대로 뒤로 구르자, 퍽퍽- 하고 내가 있던 자리에 두 자루 나이프가 꽂혔다.

“아끼는 친구다.”

할아버지의 목소리가 귓가를 스쳤다.

날 향한 말인가, 날 공격한 그림자를 향한 말인가.

손바닥으로 바닥을 치며 몸을 일으켰다.

그와 함께 좌우로 시선을 던지고, 귀로 듣고 촉각으로 느꼈다.

복면을 쓴 그림자다.

숫자는 총 셋.

할아버지의 말을 미루어 짐작하면, 이건 테스트와 같은 거였다.

취향 참 고약하시네.

뭐, 어머니도 삼촌도 자주 말하긴 했다.

“피가 이어진 아버지 맞거든? 근데, 인간성이 좀 희미하시지.”

“사람의 가치를 능력으로 평가하는 사람이니까.”

삼촌이 꺼낸 말을 어머니가 받았었다.

날 불렀을 때, 얌전히 어머니 흑역사나 씹자고 부른 건 아니리라 생각하긴 했다.

“한번 보자꾸나, 손주의 세배 실력.”

할아버지가 웃으며 말했고.

난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전 힘 조절 같은 거 할 줄 모르는데.”

사실 아주 잘한다.

이건 도발이다. 배운 대로 하는 거다.

상대방의 심기를 건드릴 수 있으면, 할 수 있는 한 최대한 찌르고 헤집어라.

통나무 선생의 가르침이다.

“얘네 맞고 우는 건 아니죠?”

한마디 더 보탰다.

꿈틀- 복면을 쓴 놈 중 덩치가 가장 작은 친구다.

아는 친구 같기도 하고.

이거 참.

좀 그렇네, 아는 사이끼리 마구잡이로 팰 수도 없고.

복면 셋의 기세가 변한다. 날 향해 살기가 짙어질 때쯤.

“잠깐.”

나는 셋을 향해 손바닥을 들어 보였다.

셋의 동작이 태엽 인형 멈춘 것처럼 끊겼다.

타이밍을 끊는 잡기다.

뭐, 내가 타이밍을 가져갈 의도도 있고.

지금 안 물으면 물을 타이밍이 없기에 그렇기도 했다.

“손주가 세뱃돈을 먼저 받아도 되겠지요?”

본래 내가 듣고 싶었던 건 정보다.

고로, 질문 하나면 충분했다.

“음?”

“어스 블랙홀을 강제로 열 수 있을까요?”

아까는 경찰청장에게 물었지만, 이번에는 단군 그룹 총수이자 엑스큐라시 한국지부장이다.

모르긴 몰라도 대통령을 제외하면 아니, 대통령을 포함해도 현 국내 최고 권력자 중 하나다.

그러니까 우리 할아버지가 모른다면 현 상황에서 아는 사람은 없다.

“으음.”

할아버지가 고개를 갸웃하고 말했다.

“내가 아는 한도 내에서는 없다.”

단호한 말투다.

특수종의 세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건, 나 혼자만의 생각이 아니다.

내가 이 얘기를 꺼낸 순간, 할아버지도 알아서 이 일을 파겠지, 뭐.

단서를 줬으면 됐다.

그럼 세배나 마저 해 보자고.

우직.

말하며 오른발에 힘을 주고 땅을 찼다.

강각 돌진.

꽝.

그저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이지만, 풍압에 전신을 짓누르는 압력이 느껴졌다.

단숨에 가속화, 아까 움찔한 덩치 작은 복면의 가슴을 향해서 주먹을 뻗었다.

상대가 몸을 틀며 반응했다. 몸을 비틀며 동시에 품에서 손을 뻗는다.

손목 위로 날카로운 발톱 세 개가 뻗어 나왔다.

클로였다.

그와 동시다.

좌우에서 날 노리는 칼날의 예기와 묵직한 타격 무기가 느껴진다.

오감이 모든 걸 감각 안에 가둔다.

난 셋이 나타난 순간, 이런 생각을 했다.

고작 셋?

주먹을 쥐고 철완을 담는다.

날아오는 클로 칼날을 주먹으로 때렸다.

우지직.

손등이 찢어지며 뼈가 드러났다.

클로 칼날도 무사하진 않았다. 좌우로 휘고 꺾였다.

딱 보니까 아다만티움은 아니다.

클로를 튕겨내며 앞으로 몸을 더 붙였다. 내 뒤로 망치와 나이프가 지나갔다.

나이프 끝이 등판을 스쳤다. 따끔했다.

난 거리를 좁혀, 클로를 쥔 복면 턱을 머리로 받았다.

막을 틈도 없었다. 단거리 대쉬다.

쩍.

“끅.”

신음이 들렸다. 머리로 턱을 받으며 발로는 상대의 발을 밟았다.

우직.

발등뼈가 부러지는 소리가 났다.

동시에 팔로 상대의 허리를 감고 뒤로 던졌다.

나이프를 쥔 놈이 날아간 동료를 손으로 받아서 옆으로 튕겨 냈다.

흘리기다.

시발 팀장만큼 깔끔하진 않지만, 나쁘지 않다.

기술이 가미된 변신족이란 소리다.

남은 둘의 사나운 숨소리가 들렸다.

다시금 달려들기 직전, 틈의 틈을 잡고 내가 먼저 뛰었다.

상대를 향해 달려들 것처럼 몸을 숙이고 살기를 뿌린 뒤, 옆으로 뛰었다.

방호주문이 걸린 벽을 향해서다.

내딛으면서 몸을 비튼다.

강각의 묘로 땅을 짓밟고, 팔에는 철완을 담는다.

변신족 육신을 다루는 두 개의 비기를 한 몸에 담아 빚는다. 힘이 응축되는 타이밍을 잡아챈다.

왼발로 벽을 한 번 찍고 오른손으로 후렸다.

펑, 꽝!

왼발 한 번, 오른손 한 번.

혜민이한테 물리력으로 주문을 깰 수 있냐고 물은 적이 있었다.

“가능해, 무식할 정도로 힘이 세면.”

해 보니까 됐다.

안 뚫리면 남은 변신족 둘도 반병신을 만들어야 하는데.

영 할아버지 손에서 놀아나는 꼴이 된 기분인지라.

“다음에 봬요.”

말을 남기고 부순 벽으로 뛰쳐나갔다.

콘크리트 먼지를 뚫고 2층에서 뛰어내려, 바닥에 톡- 하고 내려섰다.

“……영화 찍어요?”

근처에 있던 커플 중 남자가 물었다.

“네, 삼류 막장 가족극이요.”

생각나는 대로 말한 난 주차장으로 향했다.

세배는 무슨 세배야.

보고 싶다고 하면 내가 그 앞에서 재롱을 피워 줘야 하냐고.

안 그래도 생각할 것도 많은데. 여기서 괜히 그룹에 들어오라거나, 무슨 기업에 말단사원부터 시작하라거나 하면 또 곤란하지 않나.

어차피 거절할 거, 듣기 전에 먼저 거절하기로 했다.

내 차가 어디 있더라.

날 쫓는 움직임은 없었다. 있었으면 괜히 도심에서 추격전을 벌일 뻔했다.

몸에 묻은 먼지를 털다가 차 시트가 더러워지는 게 신경 쓰여 주차장에서 잽싸게 옷을 벗었다.

훌러덩 벗고 트렁크에 옷을 던진 뒤 잽싸게 차에 올라, 시동을 걸고 그대로 내뺐다.

아무도 보는 사람은 없었다. 완벽했다. 차에 들어가면 누가 볼 수도 없을 정도로 썬팅이 진한 차다.

좋아, 완벽했어.

여우비는 잠깐이었다.

땅에는 젖은 흔적도 거의 없었다.

차가 어설프게 젖은 땅을 밟고 달렸다.

* * *

“어디로 튈지 모르는 손주 놈이로다.”

회장이 웃으며 혀를 찼다.

싸우라고 했더니 벽을 뚫고 나가 버렸다.

“쫓을까?”

회장의 친구이자, 경호원이 물었다.

“자네, 달리기 잘했던가?”

알면서 물었다.

“발 빠른 애들 몇 보내면 되지.”

“놔둬.”

이미 간 놈이다. 잡아서 뭐 하나.

아니, 잡을 필요가 없다.

어차피 제 어미 품에 간다면 그 또한 그룹의 품이 될 테니.

“스캐닝은?”

회장이 물었다.

“끝났어요.”

회장의 이번 질문에 답한 건 곱게 늙은 할머니, 다방 주인이었다.

“꽃님이가 고생이 많아.”

“제 일이죠. 회장님.”

한때는 정부였던 여자, 불임으로 이제는 회장의 측근으로 남은 여자다.

그리고 그녀는 변신족이자, 과학자였다.

정확하게는 변신족의 육체를 연구하는 과학자.

제 능력으로 쓸모를 증명해 부와 명예를 거머쥔 사람이기도 했다.

그녀는 회장과 광익이 얘기를 하는 사이, 광익을 관찰했다.

눈으로만 관찰한 건 아니었다.

단군 그룹이 개발한 갖가지 기어가 광익의 전신을 훑었다.

“결과를 정리해서 올게요.”

“기다리지.”

회장이 지팡이 끝에 손을 겹쳐 얹고, 그 위로 턱을 괴었다.

그사이 경호원이자 회장의 친구가 구멍 난 벽에 제 주먹을 들이미는 게 보였다.

투쟁욕이자 경쟁욕이 발동한 듯했다.

변신족의 특징이니, 나무랄 것도 아니었다.

‘그래, 저걸 두 방에 뚫었다라…….’

훌륭하다. 아니, 훌륭한 걸 넘어 흡족했다.

기절한 복면을 제외한 둘이 회장 곁에 섰다.

“직접 싸워 본 사람의 감상을 듣고 싶구나.”

둘이 복면을 벗었다. 한쪽은 눈가에 흉터가 난 남자였고, 다른 한쪽은 눈매가 날카로운 여자였다.

회장은 슬쩍 눈길을 돌렸다. 쓰러진 복면 쪽을 향해서다.

기절한 친구는 중상이었다.

턱이 깨졌고, 발등이 부러지고 허리는 꺾였다.

척추가 부러진 건 아니지만, 몸이 망가지긴 했다.

‘가장 날쌘 친구였지.’

셋 중에 가장 빠른 변신족 요원이었다.

“흠.”

묻고 홀로 생각에 잠긴다. 회장의 그런 모습을 본 둘이 눈치를 보며 입을 다물었다.

회장은 광익의 움직임을 떠올렸다.

눈으로만 봐도 특출나긴 했다.

처음 제압한 동작도 그렇고.

‘강각에 철완, 슬혜가 잘 가르쳤구나.’

두 가지 비기가 몸에 뱄다.

혼혈이라 피가 옅어지진 않았을까 했는데.

제 어미의 피를 그대로 물려받았다.

‘불멸의 피도 진하다고 하더니.’

이레귤러다.

불멸특수대 내부 평가는 구할 수 없었지만, 소문과 활약만으로도 어느 정도 판단은 가능했다.

아무리 숨겨도 주머니 속의 송곳을 튀어나오는 법이고.

튀어나온 송곳이 찌른 곳은 티가 나는 법이다.

회장은 광익이 이제껏 한 일을 다 알았다.

물론 최근에 세계 최강 특수종이란 별명이 붙은 일까지도.

그래서 보고 싶었다.

이제까지 한 일도.

앞으로 할 일도.

그룹이 도울 수 있었다.

자신이 도울 수 있었다.

딸을 잃을 때처럼 멍청한 짓은 두 번 다시 할 생각이 없었다.

‘순혈의 피만 가졌다면.’

단군 그룹 내에서도 피를 가지고 등급을 나눈다.

다만, 그게 전부가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래도.

그룹의 힘을 받기 위해서는 그만한 자격을 갖춰야 하는 법이다.

그룹 내 등급, 최소 육체 단련 점수 총점 백에 구십 이상은 되어야 하지 않겠나.

그게 A등급의 기준이었다.

오버 스코어가 되면 S등급이고.

회장이 고개를 들고 복면을 벗은 둘을 향해 시선을 던졌다.

눈가의 흉터를 가진 남자가 회장의 눈짓에 입을 열었다.

“셋으로는 못 잡습니다.”

차가운 칼, 그룹이 키운 화랑의 신예다.

그 별명처럼 변신족답지 않은 냉정함이 무기인 친구고.

“그래?”

“최소 기어로 무장한 일개 소대가 필요합니다.”

차가운 칼의 가장 큰 강점은 판단력이다.

상대와 아군의 전력을 즉각 머릿속에 넣고 싸우는 게 장기였다.

“과하다.”

그래, 특출나긴 하다만, 회장이 눈여겨본 건 육체 능력이 아닌 상황 판단력과 행동력이었다.

벽을 뚫고 나간 건 판단력은 물론, 생각과 동시에 주저 없이 움직인 행동력의 결과였다.

그것도 전력을 다했겠지.

“회장님.”

그사이에 꽃님이 다가왔다.

“등급은?”

회장이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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