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 세최또
“아니요.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없어?
“조금의 가능성도요?”
혹시나 하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아직 아더 사이드의 많은 걸 연구하지만, 그중에서도 블랙홀의 연구 성과는 미비해요.”
만추 아저씨의 동공, 호흡, 손짓까지 모든 게 눈에 들어와, 자연스레 말의 진실 여부를 파악하게 했다.
거짓말이 아니다. 만약 내 감각을 모두 속이고 이리 말한 거라면 어쩔 수 없는 거고.
“왜 그런 걸 묻는 거죠?”
“엿 된 거 아닌가 해서요.”
담담하게 한 말에 청장 아재가 눈을 깜빡였다.
누구도 쉬이 믿을 수 없다.
금발 머리 이야기는 아끼자.
반사적인 행동이었다.
전투였다면 본능적인 수비나 공격에 가까운 판단이었다.
아직은 나만 알아도 된다.
청장이 그리 청렴하고 대쪽 같은 사람이라고 해도, 내가 그걸 믿는다고 해도.
그 밑에 있는 모두가 그러리라는 건 알 수 없는 일이다.
경찰이 관계된 일일 수도 있다. 육감과 직감의 경고에 맞춘 태도였다.
표정 관리를 한 청장 아재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상한 질문입니다. 광익 씨.”
“제 별명 못 들으셨나 보네요.”
“세최특 말고요?”
웃으며 말하기에 나도 웃으며 답했다.
“세최또요.”
“음?”
청장 아재가 고개를 갸웃하자, 옆에서 지혜 팀장이 속삭였다.
“특수대 시절부터 그런 별명이 붙긴 했습니다. 그, 세계 최고 또라이라고.”
“음?”
또 당황하네, 이 아재.
“괜찮아요. 조금은 인정합니다. 질문은 궁금해서 물어본 거고요. 그게 된다면 아, 지구는 음경이 되겠구나 싶어서.”
당황한 청장 아재에게 말했다.
“음……?”
또 되묻네, 이 아재.
“저 친구가 저런 표현을 즐겨 씁니다. 청장님.”
지혜 누나가 고생이 많았다.
“술 마실 거 아니면 가 봐도 될까요? 아직 전투 이후 피로가 다 풀리지 않아서.”
물론 거짓말이었다.
피로는 없다. 다들 내가 피 튀기는 사투를 벌인 줄 아는데.
할 만했다.
박자를 속이고 타이밍을 뺏으면 인베이더 8 챔피언은 쉬운 상대였다.
압도적인 출력을 자랑하거나, 쉬이 뚫을 수 없는 방패를 지녔거나.
그런 놈들이 까다롭지.
아니면 자폭이나 머릿수로 밀어붙이는 게 더 까다롭다.
운이 좋다는 생각도 들었다.
눈먼 개 수십 마리가 웨이브로 튀어나왔으면, 그걸 다 잡을 수는 없었을 테고.
한 마리라도 놓치면 인명피해였을 테니까.
이번 홀은 소위 말하는 ‘퀄리티 게이트’였다.
상대적으로 적은 숫자의 상대하기 까다로운 인베이더가 나오는 형태.
그걸 홀로 막은 덕에 세최특 따위의 별명이 붙긴 했다만.
“네. 다음에 또 보시죠.”
청장 아재의 말에 몸을 일으켜 문고리에 손을 올렸을 때였다.
‘미시오’라고 쓰여 있는 걸 보고 반사적으로 당길 뻔하다가 미는 타이밍에.
“광익 씨.”
청장 아재의 목소리가 날 붙들었다.
문을 밀며 고개만 뒤로 돌렸다.
“광익 씨는 불멸입니까? 변신입니까?”
짧은 순간, 질문을 곱씹었다.
난 문을 붙든 채로 청장 아재가 겉으로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적당한 답을 줬다.
“호방한 줄 알았더니, 음흉하시네요.”
대답이 필요 없는 질문이었기에 그리 말하고 밖으로 나섰다.
나는 경호원 둘을 지나쳐 차로 향하면서 생각했다.
저 양반도 괜히 경찰 꼭대기에 앉은 건 아니라고.
은근히 물어볼 건 다 물어본단 말이지.
차에 올라 시동을 거는 사이 머리를 굴렸다.
블랙홀을 임의로 여는 게 가능할까?
그게 가능하다면? 또는 그게 아니라면?
일단 안 되는 쪽으로 생각을 갈래를 잡아 본다면, 경찰이 개입됐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다.
프린세스 메이커인지, 프로메테우스인지, 불인지 된장인지를 인류에게 가져오겠다는 미친 새끼들과 싸워 본 경험으로 깨달은 것.
쉽게 무언가를 믿으면 안 된다는 거다.
역으로 특수종의 세상을 살며 깨달은 것도 있다.
이 세상에는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는 것.
즉, 블랙홀을 임의로 여는 게 가능할 수도 있다.
그러니 무슨 일이든 함부로 재단할 수 없다.
부아앙.
액셀을 밟았다.
운전하며 삼촌한테 전화를 걸었다.
할아버지를 뵐 수 있냐고 물었더니.
“지금 올래?”
“지금요?”
“왜? 바빠?”
“그룹 총수가 그렇게 한가해요?”
방금 보자고 했는데 바로 봐?
“그 반대지.”
응?
삼촌이 말을 이었다.
“그만큼 널 보고 싶다는 거지.”
외할아버지께서 손주가 많이 보고 싶은 거구나.
뭐, 그게 아니면 지금 세상을 떠들썩하게 만든 특수종을 보고 싶은 거겠지.
후자에 무게가 실리는 건 어쩔 수 없다. 그룹 총수라는 이미지가 절로 그런 편견을 갖게 만든다.
“지금 가죠. 뭐.”
답하고 주소를 받아서 차를 몰았다.
경찰청장은 술집을 통째로 빌렸는데, 외할아버지 스케일은 얼마나 크려나.
하루에 두 명을 번갈아 만나게 되니 비교하게 되고 내심 기대가 되기도 했다.
어머니의 아버지라.
닮았을까?
부웅.
만나면 알 거다. 고민할 거리가 아니었다.
깜빡이는 노란불이 파란불로 바뀐다. 내가 모는 차가 도로 위를 질주했다.
머리 위로 구름이 끼어들어 해를 가렸다.
따가운 햇볕 대신 시원한 바람이 부는 오후였다.
* * *
박만추는 유광익이 싸우는 장면만 열 번을 넘게 돌려봤었다.
놀랐다.
놀란 정도가 아니었다.
육체 컨트롤 능력, 싸움에 임했을 때의 집중력, 상황 판단력.
그 어떤 것도 쉬이 얕볼 수 없는 특출난 전투 요원이었다.
발을 써서 타이밍을 빼앗고 한 마리도 제 범위밖에 두지 않은 채, 인베이더가 홀에서 나오는 시간을 계산해서 죽인다.
체력을 분배하고 자신의 전력을 활용한다.
감탄이 절로 나왔다.
특수종의 세상, 미친 자들의 세상에서 수십 년을 살면서도 쉬이 보지 못한 재능이었다.
‘전투 특화다.’
이 정도 재능, 정말 손에 꼽을 정도였다.
‘끔찍한 한 해’라는 별칭의 어스 블랙홀의 시초에 나타난 1세대의 영웅.
‘휴즈 게이트’라는 대형 블랙홀의 출현으로 태어난 2세대의 영웅.
두 개의 비극은 영웅을 낳았다.
‘그들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아.’
그래서 욕심이 났다.
이런 인재를 품을 수 있다면, 원하는 걸 얻기도 쉬울 테니까.
박만추는 경찰 개혁을 꿈꿨다.
그걸 위해 필요한 것.
인망, 덕망, 평판.
현 상황에서 평판을 얻기 가장 쉬운 방법은 영웅의 탄생일 거다.
그 영웅이 넝쿨째 밖에서 굴러다니는 중이었다.
‘유광익, 유광익.’
속으로 이름을 곱씹었다.
불멸특수대의 들어갔다고 들었고.
나온 이야기도 대강은 들었다.
비하인드 스토리도 대강은 파악했다.
남명진, 멍청한 1세대의 영웅, 제 밥그릇이 깨질까 두려운 늙은 불멸자.
박만추는 유광익을 방생한 게 남명진의 실수라고 봤다.
“어떠셨습니까?”
옆자리, 이지혜가 물었다.
“머리가 좋네.”
박만추가 스트레이트 잔을 입에 털어 넣었다. 갈색의 액체가 목구멍에 들어가 위장을 데웠다.
뜨끈한 기운이 몸에 돌았다.
“아둔하게 몸만 쓰는 타입은 아니죠.”
불멸자와 변신족의 혼혈인 것도 안다.
그걸 알기에 물었다.
마지막 질문은 난 너의 비밀을 안다는 표시다.
다 알지만, 그걸 따지고 묻는 게 아니고 너라는 존재 자체를 반긴다는 뜻을 내포한 거다.
그걸 알아챈 광익이 음흉하다고 말한 거고.
“재밌는 친구야.”
“경찰에 들어올까요?”
“모르지.”
답은 그리했지만, 박만추는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날개가 달린 짐승이든, 발톱으로 철판을 찢는 짐승이든, 둥지는 필요한 법이니까.
이 세상을 살아가려면 자신을 지켜 줄 둥지, 더불어 팀이 필요한 법이다.
하지만 광익은 혼자였다.
“티 내지 말고 요청하는 건 다 들어줘.”
나중을 위한 호의, 박만추는 광익에게 그럴 가치가 있다고 느꼈다.
* * *
운이 좋았다.
여전히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 게이트가 퀄리티 게이트가 아니었다면 분명 놓치는 놈들이 생겼을 거다.
새삼 내가 혼자라는 사실을 느꼈다.
경찰이나, 단군 그룹 치안 유지팀이라는 화랑이나, 불멸특수대가 안 와서 생긴 일이긴 하지만.
뭐, 필요하면 구하면 된다. 앞날을 위한 계획은 차곡차곡 쌓이는 중이었다.
잡생각을 하며 차를 세운 곳.
앞을 지키는 경호원 대신 말쑥한 차림의 노년의 신사가 보였다.
지팡이를 짚고 걷는데, 다리가 불편해서 쓰는 게 아니라는 데 왼 손목을 걸 수도 있었다.
허벅지가 나만큼 두껍다.
거기에 지팡이도 안에 칼을 숨기는 용도 같고.
괜히 불멸자의 피가 흐르는 게 아니다.
감각을 북돋는 것만으로 지팡이의 결합 상태 따위는 보인다. 잘 만든 무기였다.
“……여기 맞아요?”
고개를 들며 물었다.
“왜? 클래식하고 좋지 않나?”
초면에 반말이지만, 이 정도 나이 차이가 나 버리면 할 말도 없는 법이다.
“유광익입니다.”
“올라가자고.”
노인장의 안내로 들어선 곳, 2층에 자리한 ‘꽃님 다방’이다.
간판과 작명 센스에서 흑백 TV 세대의 냄새가 풀풀 풍겼다.
탑골 바이브가 느껴지는 장소다.
계단을 오르니, 안의 풍경도 비슷하다.
“저기.”
노인장이 지팡이로 바닥을 툭 치며 끝으로 테이블 하나를 가리켰다.
“오.”
절로 감탄이 나왔다.
의자와 테이블 옆에 서 있는 덩치가 보였다.
맹세코 살면서 처음 보는 형태의 인간이었다.
보통 사람의 두 배는 큰 어깨 남보다 머리 세 개는 큰 키.
인베이더 자이언트와 비견되는 몸집.
집채만 하다는 표현을 비유가 아니라 실제로 쓸 수 있을 듯했다.
인상도 험악했다.
흉터가 이리저리 난 얼굴에 저 몸에 맞는 옷은 어떻게 구했는지 싶다.
거기에 몸에는 전투 조끼도 착용했고, 지닌 나이프와 총은 가리지도 않았다.
이게 사람인가 싶어 바라보는데.
“내 경호원이다.”
지팡이 노인이 말하며 자리에 풀썩 앉았다.
“쌍화차 하나랑, 뭐 마실래?”
덩치 쪽이 아니었다.
지팡이를 든 쪽, 이쪽이 외할아버지구나. 그러니까 그룹 총수님.
경호원도 흰머리였다. 흰머리 집채 경호원이 날 보더니 슬쩍 훑었다.
“얘가?”
“남의 손자보고 얘가 뭐냐.”
“그럼 뭐라고 할까, 쟤가?”
“됐다. 광익이, 뭐 마신다고?”
허물없는 사이구나.
“……녹차 주세요.”
자리에 풀썩 앉았다.
곧 쟁반을 든 할머니 한 분이 다가왔다.
“손주예요? 잘생겼다.”
“그치? 잘생겼지? 제 어미를 닮은 건 아닌데, 생긴 건 마음에 드네.”
할아버지가 낄낄 웃으며 반겼다.
영 그룹 총수 느낌이 안 사는 분이다.
스케일이 남다르긴 했다.
경찰청장은 프랜차이즈 가게 하나를 빌렸는데.
여기는 겉만 다방이지, 뭐.
안에 있는 사람은 죄다 변신족에.
벽에서는 이물감이 느껴진다. 그러니까 주문이 걸린 벽이다.
이게 끝도 아니다.
소파나 다방 안쪽에서 느껴지는 건 초능력자의 기운인 오러다.
겉만 다방이고, 어지간한 요새 버금가는 곳이란 거다.
어쨌든 인사는 해야 했으니.
눈을 마주치며 말을 골랐다.
“안녕하십니까, 회장님.”
호칭은 이 정도면 충분하려나.
첫 만남이다.
외할아버지라고 해서 피가 이어졌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타인이었다. 할아버지라고 해서 곧바로 할아버지라 부르기에는 어렵…….
“네 엄마 흑역사 하나 말해 줄까?”
내 인사에 할아버지가 대뜸 말했다.
절로 귀가 쫑긋 섰다.
“흑역사요?”
“자, 다시. 내가 회장님이냐?”
쌍화차를 후룩 마신 지팡이 노인, 아니 외할아버지가 끌끌 웃었다.
“할아버지, 보고 싶었어요.”
애교를 담아 말했다.
입이 절로 열린다. 감정 하나 담기지 않았지만, 본래 예의란 가식과 한 끗 차이인 법이다.
칭찬과 침묵도 한 끗 차이고.
입을 닫느니, 어떻게든 장점을 찾아 칭찬하는 게 대화의 물꼬를 트기가 좋다.
“경호원 할아버지 덩치도 아주, 음, 너무 좋네요. 든든하시겠어요.”
“몸집만 컸지, 둔해.”
“둔하긴.”
뒤에서 툴툴대는 경호원 할아버지를 두고 할아버지가 눈을 반짝였다.
나이에 어울리지 않는 천진함이 엿보였다.
할아버지가 지팡이를 옆에 세우고 소파에 몸을 파묻었다.
안아 보고 느낀 건데, 이 소파 되게 비싼 것 같다. 궁둥이가 아주 편안하다.
소파에 등을 기댄 할아버지가 입을 열었다.
“네 엄마, 각성하고 나서 폭주 뛰었다.”
“네?”
뭘 뛰어?
“그때는 정말 내 딸이 맞나 싶었지. 뭘 해도 된다고 했지만, 폭주족이라니.”
낄낄대며, 할아버지가 제 딸의 뒷담화를 시작했다.
“거기에 성격은 얼마나 요란한지, 툭하면 주먹질에, 에휴, 진짜. 그때 생각만 하면…… 경찰서도 불태우고 미쳐 날뛰던 시절이다.”
폭주족? 아버지가 알면 꽤 놀라실 것 같다.
“그때 빗자루 대신 바이크 타는 미친년이라고 아주 유명했지. 폭탄 마녀라고, 건들기만 하면 패악질을 부리고 사람들 쥐어패고 다녀서, 지금도 그때 시절 기억하는 사람은 기겁할걸? 살도 무진장 쪄서, 비만 마녀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었지. 식욕 컨트롤 실패의 참상이었다.”
“풉.”
나도 모르게 웃음이 터졌다.
폭탄 마녀, 비만 마녀. 끕.
입술을 깨물었다. 여기서 웃을 순 없다.
예전 기억이 떠올랐다.
훈련받던 중 어머니께 물은 적이 있었다.
“엄마는 제 나이 때 뭐 했어요?”
“응? 음.”
잠깐 생각에 잠긴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십자수하고 책 좋아했지.”
꺼림칙한 답이었다.
불멸자의 감각이 그리 말했었다.
더 물으려고 할 때 삼촌이 옆에서 입을 벙긋하려 했고, 어머니는 손등으로 툭 삼촌의 명치를 때려서 입을 다물게 했다.
그때 맞은 삼촌의 안색이 파랗게 질린 걸 난 기억한다.
그게 이거 때문이었구나.
“크흐흐, 웃기지? 내 생애, 폭주 뛰는 변신족은 걔가 처음이었다. 집 가서 이 얘기 해 봐라. 네 엄마 아주 난리 날 거다.”
“풉.”
또 웃음이 터졌다.
상상이 가질 않았다.
그리고 외할아버지와의 대화도 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갔고.
“네 어미, 아직도 손버릇 안 좋냐?”
할아버지가 물었다.
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의미 없는 구타나 폭력은 아니지만, 뭐, 손버릇이 좋다고 할 수는 없으니까.
진심으로 욕하려는 건 아니다.
그저 그동안 어머니와 나눈 몸의 대화에서 느낀 약간의 설움을 토로할 뿐.
“네, 툭하면 링에서 얘기하자고 하거든요.”
“내 딸이지만, 네가 고생이 많다.”
할아버지가 어깨를 두드려 줬다.
따뜻했다.
할아버지는 내 편이었다.